사람들은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의례적으로 행복하다고 해요.
물론 일시적인 행복은 있지만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상황이 좋으면 행복하고 안좋으면 아니고, 그러면 진정한 행복이 아니고
어떤 상황에도 평정심이 유지되어야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환자하고 비슷해요. 중생은 환자, 부처님은 의사, 법은 약, 성인들은 간호사..
고통이 무엇일까요? 범어로 두까(dukkha)라고 하는데 '불만족'을 의미합니다.
자신에 대한 불만족, 남이나, 삶이나, 직장에 대한 불만족 등..
▶ 괴로움의 종류 (삼고 三苦)
<1> 고고 (苦苦)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고통 (부처님께서 깨우친 고통은 아님)
배가 아프거나, 우울하거나. 무슨 질병에 걸리거나.. 세속에서도 고통이라고 하는 것
(추위나 더위, 통증, 갈증 등과 같이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괴로움)
<2> 괴고 (壞苦)
우리가 잘 알기 어려운 고통 (세속에서 말하는 즐거움)
맛있는 거 먹거나, 명성이 높아지든가, 돈을 많이 벌거나..
부처님은 이런 것조차도 고통이라고 하심 (변하는 고통)
예를 들어 맛있는 것 먹는 것 자체는 고통이 아니지만
그런 즐거움을 경험하면 집착이 생기고, 그러면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려고 합니다.
짜장면을 먹고 맛있으면, 감각적 즐거움을 경험하면 도파민이 분비돼서 행복해요.
그러면 '아, 짜장면이 행복이구나' 또 먹어야 하는데 문제는
다음에도 똑같은 걸 먹으면 같은 양의 도파민 분비가 안 된대요.
자극이 더 강해야 같은 양의 도파민이 나오고, 그래야 같은 정도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고
다음에는 더 많은, 더 깊이가 있는, 더 자극적인.. 이게 끝이 없어요.
그래서 감각적 즐거움을 행복으로 착각하고 계속 추구하는 것, 이것이 고통입니다.
"수행자가 만일 그것들을 즐기고 좋아하여 움켜쥐면 그에게 기쁨이 일어난다.
뿐나여, 기쁨이 일어나므로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뿐나에 대한 가르침 경>
더 가지려고 하고, 영원히 가지려고 하고, 그런 욕심이 생겨서
집착이 생기고, 의지하게 되고, 매달리고, 중독되고.. 그래서 생기는 고통
감각적인 즐거움에 대한 집착이 강할수록 만족이 없습니다.
(애착하는 대상이 파괴되어 없어짐으로써 받는 괴로움)
행복이 고통으로 변하는 것 (괴고 중 하나)
결혼도.. 결혼이 주는 행복도 크지만 결혼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도 큽니다.
돈도.. 돈을 버는 과정에서 업도 많이 쌓고.. 돈 없을 땐 많아지면 베풀면서 살 거 같지만
그렇지 않고, 돈이 많아지면 오히려 돈에 더 집착하게 되고, 인색하고, 오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또 보호를 해야 하고, 더 많아지면 믿을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고..
이렇게 장애가 많이 생기기 때문에 그런 것은 행복의 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알콜이나 마약에 중독된 사람은 그것으로 행복을 느끼지만 없으면 불안하고 괴롭고..
우리는 알콜이나 마약중독자는 아니지만 다른 무언가에 중독된 것은 맞습니다.
쇼핑이나 음식.. 우리 시대에 음식중독자 너무 많아요. 저도 그렇습니다 ㅎㅎ
이러한 집착이 고통의 원인입니다.
밖에서는 결코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고 내면에서만,
오직 마음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오래 가는 행복, 의지할 수 있는 행복, 진정한 행복
그렇다고 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하고, 사랑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냥 그 순간을 즐기고, 집착은 하지 않으면 됩니다.
짜장면이 맛있어요. 즐거워요. 내일 또 먹고 싶어요. 그런데 없어요. 그러면 괴롭죠?
그러나 그럴 때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괜찮아' 이러면 집착이 없는 겁니다.
부처님도 망고를 아주 좋아하셨대요. 하지만 없다고 막 괴로워 하거나 그러지는 않으셨어요 ㅎㅎ
연인도 같이 있으면 좋지만 없이도 살 수 있고, 헤어질 수도 있고.. 이런 것을 다 아는 마음으로
그래서 이 순간을 소중하게, 아끼고.. 이렇게 살 수 있으면 고통에 지배받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3> 행고 (行苦)
영어로 하면 'a full base suffering' 모든 것에 편재된, 정말 잘 안 보이는 가장 미세한 고통
우리는 무의식에 영향을 받아서 행동을 하고, 잘못도 하고, 집착도 하는데
행고는 먼지처럼, 어디에나 있는 고통 (있기는 있지만 잘 보이지는 않아)
티벳트의 어느 큰스님은 이것을 '무시 이래로 있었던 가시'라고 표현하셨어요.
빼기 전까지는 계속 마음이 쓰이고, 다른 것을 할 때는 잠시 인식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결국 또 인식하게 되고.. 그것을 뺄 때까지는 근본적으로 불편한 가시처럼..
자신도 잘 모르지만 하여간 무언가 잘못된 거 같아요.. 항상 모든 것에 불만족이 있다는 거예요.
저의 스승께서는 이것을 연못 아래에 있는 진흙 같다고 하셨습니다.
위에서는 잘 안 보이지만 밑에 깔려있는 것처럼, 우리의 참본성을 가리고 있는 장막 같은 것..
그래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진정한 행복은 참본성을 알게 되는 것인데)
우리는 본성적으로 이미 행복하고 자유롭고 지혜로운, 이미 부처라서 부족함이 없어요. 그것을 모를 뿐이지..
그런데 그 행복을 못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장막 때문입니다. (업, 업식, 행고, 무의식, 마음의 습관)
이 행고를 닦으면 자연스레 행복하게 돼요. 그냥 행복해요. (행고를 닦는 방법 = 팔정도)
소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한 절망의 삶을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무의식 깊은 곳에 있어 안 보이는.. 좋지 않은 여러 가지 신념들..
예를 들면 '어차피 망할 것이다, 할 수 없다, 안 될 것이다, 모자르다, 사고날 것이다'
워낙 미세하기 때문에 잘 못 알아차리지만 이런 게 있는데
이런 게 작동하고 있는 한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 중생의 일체 모든 행이 다 고통이란 의미.
* 중생은 번뇌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 (모든 것의 뿌리에 무명이 있어서 일체개고)
▶그것을 정화하는 방법 - 알아차림, 중도, 팔정도
이런 방법으로 그것을 드러나게 하는데 드러나면 정화가 됩니다.
수행을 통해서 자기 업식을 보면 '아, 나에게 '안 될 거야' 이런 마음이 있구나'
사성제를 배우면 자기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그러나 좋은 소식은.. 행복하지 못한 게 정상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만 행복하지 못한 게 아니라 다 그런 것..
사람들은 행복하게 보일 뿐, 정말 행복한 사람은 별로 없어요. 도인 빼고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요? '나만 불행라구나' 이러잖아요?
그러나 '아, 나만 행복하지 못한 줄 알았는데 다들 그렇구나~' 다행스럽지 않아요? ㅎㅎ
불행과 슬픔은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마음이 아주 편안해집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랑을 해도.. 무엇을 해도 일시적인 행복은 있지만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행복은 찾기 어렵습니다.
오직 마음공부를 통해서, 오직 내면에서.. 불행의 작동을 드러나게 해서..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심리를 발견해서, 정화를 해서 본성의 평화와 행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 해탈 열반 행복으로 가는 길.. 팔정도를 계정혜로 나누어 말하기도 하는데
계(정어,정업,정명/가르침을 삶에 적용), 정(정정진,정념,정정/실천,수행), 혜(정견,정사유/사성제,무아 등 가르침)
무엇을 해도 이 세 가지가 적용됩니다. 골프를 해도 <1>골프에 대한 이론이나 지식을 알아야 하고
<2>배우고 익숙해지는, 실천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3>삶도 그것을 받쳐 주어야 합니다.
티벳트 불교에서는 이것을 '지견, 명상, 행'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1>지견(知見,智見) - 실상을 아는 것 (정견,정사유)
고통은 무명 때문이고, 무명에서 벗어나는 길은 실상을 아는 것 (실상: 무상,고,무아,공성,불성)
<2>명상 - 지견에 익숙해지는 것 (정정진,정념,정정)
알아차림을 통해서 실상에 점차 익숙해지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도(道)의 본체는 알아차림인데.. 붓다라는 말도 '깨어난 자, 알아차리는 자'라는 뜻이고
부처님도 알아차림(명상)을 통해서 성불.
<3>행(行) -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 삶에 어울리게 하는 것 (정어,정업,정명)
우리가 배운 가르침을 삶에서도 수행을 한다, 알아차림에 익숙해지고 삶에서도 깨어있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울리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 (보리심을 이해하고 삶에서 실천)
이 세 가지가 갖춰지면 도(道)로 제대로 나아갈 수 있고,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고 해탈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