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바로 그때
/ 법정 스님
우리들이 태어나서 살아온 20세기가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새천년에 대해서
신문과 방송마다 요란스럽게 떠들고 있습니다.
시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묻게 됩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에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은 끊어짐도 없고 끝도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 시간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금을 긋고 토막을 내고 있을 뿐입니다.
시간 자체는 마치 허공처럼 우리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존재합니다.
시간은 순간순간의 삶과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있습니다.
시간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늘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있습니다.
얼마 전 방송사의 한 기자가 저를 만나서 물었습니다.
“스님은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까?”
저는 평소대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오늘을 살고 있을 뿐이지 미래에 대해선 관심이 없소.”
저는 솔직히 내일과 미래에 대해서 전혀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어떤 계획도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그렇게 살아갈 뿐입니다.
바로 지금이지, 그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임제 선사의 법문만이 아니고,
부처님과 조사들이 한결같이 말해 온 진리입니다.
21세기가 되었든 또 무슨 세기가 되었든,
그 시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이렇게 살고 있을 뿐입니다.
과거를 따라가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번 지나간 것은 이미 버려진 것.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다만 현재의 일을 자세히 살펴 잘 알고 익히라.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 수 있으랴.
<아함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지나가 버린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서
미리 불안해하거나 가불해 쓰지 말라 는 것입니다.
다만 현재의 일을 자세히 살피고, 잘 알고 익히라는 것입니다.
새해맞이를 하겠다고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지금 동해안 일대의 호텔과 숙소들이
이미 예약이 다 끝났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해가 알면 인간들을 보고 웃을 것입니다.
어제 뜬 해와 오늘 뜬 해가 다른 해입니까?
똑같은 해입니다.
이것은 분별과 분석을 좋아하는
서양 사람들의 호들갑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늘 그런 것을 좋아합니다.
세상에서 맨 처음 해가 뜨는 곳이 남태평양 무슨 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곳으로 기를 쓰고 간다고 합니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그런 것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소위 서양문명이 온 지구를 휩쓸다 보니
우리도 거기에 오염되어서 같이 놀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십육관법十六觀法’에 해 뜨는 것을 보는 관법,
즉, ‘일상관해를 생각하는 관日想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수고스럽게 뉴질랜드나 동해안에 갈 것 없이 방안에 앉아서,
자기 마음속에 떠오르는 해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구름이 끼나,
아무 상관없는 해입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해를 보는 것, 그것이 진짜 해돋이입니다.
그렇지만 허공에 떠오르는 해,
그것은 구름이 끼 거나 비가 오면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데,
굳이 밖을 향해서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떠오르는 해도 보고 달도 봐야겠지만,
덩달아서 그렇게 휩쓸리는 것은 현대인들의 허약한 면입니다.
순간순간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세월을
지금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이것이 소중한 일입니다.
해 뜨는 일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떠드는 일을
내가 관여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관여해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동참해서 거들고,
그러지 않아도 될 일이라면
자기 삶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광 불법사에서 출가해 호남 일대에서 살던
학명鶴鳴 선사의 어록 가운데
세월에 대해서 이렇게 읊은 구절이 있습니다.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개인의 삶과 전 인류의 삶을 되돌아보십시오.
인류란 무엇입니까?
개개인의 집합체입니다.
너와 나, 그들의 집합체입니다.
일찍이 옛 성인들은 이런 개체와
전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말해 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불교의 <화엄경>입니다.
<화엄경>은 개체와 전체의 상관관계를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화엄 사상을 압축해 놓은 신라 의상 스님의
<법성게>에 실린 몇 구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법성원융 무이상 제법부동 본래적
法性圓融 無二相 諸法不動 本來寂
법의 성품은 모든 현상의 근원이며,
모든 현상의 근원은
본래부터 원만하고 막힘이 없어서
원래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흔들림이 없이 본래 부터
고요하고 질서 정연하다는 것입니다.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논리적인 비약이 심한 말처럼 들리지만
깊이 참구해 보면 그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 조화와 균형의 소식이 있습니다.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一微塵中含十方一切塵中亦如是
한 티끌 속에 우주가 다 들어 있고,
일체의 티끌마다 온 우주가 다 들어 있습니다.
누가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고 할 때,
그 개체만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어떤 일부분이 사라진 것입니다.
내가 곧 전 인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곧 전 우주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곧 하나를 이룬다고 했지 않습니까?
얼마 전 한 불자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서울의 지하철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오후쯤 되면 출퇴근 시간이 아니어서
지하철이 덜 붐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시각장애인 여인이 한 손에는 돈 바구니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더듬거리며
차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여인은 구걸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출입문 쪽 기둥을 꼭 붙잡은 채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녀에게 돈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불자인 자기 자신도 그렇고,
그 열차 칸에 있던 두 분 수녀님도 그렇고,
모두가 못 본 척 시선을 외면했습니다.
흔히 있는 일입니다.
아마 저 자신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이때 휠체어를 탄 하반신 장애인이 그 칸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출입문 쪽 기둥을 붙잡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그 시각장애인 곁을 지나면서,
자기 무릎 위에 있던 돈통에서 동전을 집어서
그 여인의 바구니에 넣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모른 체하는데,
하반신 불구의 장애인이
자기가 구걸 한 돈통에서 동전을 집어서
그 시각장애인 여인의 바구니에 넣어주고 지나가더랍니다.
‘내 앞에 오면 주어야지.’ 하고 생각했던
불자는 이 광경을 보고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나 자신이 진짜 장애인이로구나.’하고
스스로 한탄했다고 합니다.
서로 불행한 처지이지만,
동전 한 닢이라도 나누어 가지려는 그의 마음이,
신체장애와는 상관없이 건강한 사람으로 보이더랍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늘 겪는 일입니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개체가 전체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조화와 균형의 비밀이 이런 곳에 있습니다.
베풀 때가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아야 합니다.
찾아가서 베풀어야 합니다.
베푼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 본마음이 내켜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직접 찾아 나서야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베푸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바로 지금이지 그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생애의 과정에서 후회되는 일을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 속에서 삶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각오로써 새해를 맞는다면
우리 삶에 맑은 바람과 빛이 비추일 것입니다.
-1999년 12월 12일 길상사 창건 2주년 법문
출처: 월간 맑고 향기롭게 산방한담(山房閑談) 2019년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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