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말년에 하나님께 갑절의 축복을 받았다. 이것이 성경에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 욥 42:12,13
역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시련을 이겨낸 자에게 놀라운 승리와 축복, 갑절의 보상과 은혜를 허락하신다.
그러면 다 해결된 것인가? 사실 나는 이런 적용이 이해되지 않는다.
욥이 다시 큰 번영을 누렸다는 점에서 경제적 손실과 실추된 명예는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식 열이 죽었는데 다시 열 명을 주셨다고 해서 그동안의 모든 아픔과 상실감이 상쇄될 수 있는가? 잃어버린 자녀에 대한 슬픔이 모두 해결되는가?
많은 사람이 말년에 욥이 받은 복을 통해, 그가 경험했던 하나님에 대한 실망감과 의심과 회의가 모두 해결된 것처럼 이야기 한다.
아니다. 그것은 욥기에 대한 잘못된 오해다. 나는 그가 말년에 누린 이 번영과 보상이 하나님을 향한 그의 의심과 회의감과 실망감을 일소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이 모든 일을 통해 깨달았던 것이 아닐까. 이 세상에서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게 있다는 것을, 이 땅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이 땅에서 하늘을 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깊은 시련과 슬픔에 빠진 성도에게 말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 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 벧전 1:6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고난과 시련으로 인해 근심하게 됐으나 기뻐하라고 말이다. 이때 “근심”이란 단어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겪으신 감정을 설명할 때 쓰인 것과 동일한 단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근심하다’와 ‘기뻐하다’라는 동사가 모두 현재형으로 쓰였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말은 “근심하지 말고 기뻐하라” 혹은 “고난과 함께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라”가 아니다. “슬픔 가운데 통곡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라”도 아니고, “지금 잠깐은 슬프지만 이제 기뻐하게 될 것이다”도 아니다.
베드로는 이 두 감정을 경합시키고 있지 않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이 둘은 같은 선상에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믿는 우리는 “슬픔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다”라는 역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둘이 같이 가는 것이다. 둘이 함께 있어야 고난 가운데를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다.
인생의 비극 안에는 피해 갈 수 없는 슬픔과 근심이 있지만, 우리의 비극을 끌어안으신 예수님 안에 있을 때, 동시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 존재다. 우리의 고통과 눈물 속에,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써 누리는 설명하기 힘든 기쁨,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평안이 함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기도하자마자 어둠이 걷히고 고통이 끝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타는 풀무불 가운데 함께 계신 분으로 인해 버티는 것이다.
고통과 기쁨이, 소망과 슬픔이, 두려움과 평안이 함께 있다. 이 모든 것 가운데 우리가 기쁨과 소망과 평안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분으로 인함이다.
인생의 풀리지 않은 모든 난제의 답은 언제나 우리 주님이시다. 그 눈물 골짜기에서, 고통의 파도를 딛고 우리에게 찾아와 손 내밀어 주시는 그분 안에서 알게 될 것이다. 인생은 이 모든 것을 안고 그분과 함께 가는 여정이라는 것을.
고난의 이유를 집요하게 찾고 인생의 난제를 치밀한 논리로 설명하기보다 삶의 유일한 해답이신 그분을 발견하고 그저 그분과 함께 걷길 바란다. 그분과의 이 동행을 통해 삶을 지날 때 언제나 이 슬픔과 기쁨의 역설을 누리길 축원한다. 주님만이 이유를 찾는 사람들의 유일한 이유가 되신다.
- 믿음이 넘어진 자리, 원유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