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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묵상

나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는 방법!!

작성자주바라기|작성시간26.06.22|조회수20 목록 댓글 0

 

저주의 문제는 예수를 믿고 나서도 쉽지 않다. 요르단 현지 교회에 가보면, 구약으로 설교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신약만 가지고 설교를 한다. 구약을 펼칠 수가 없는 것이다. 펼치기만 하면 “너희 민족은 망할 것이고, 저주받을 것이며, 황폐할 것이다”라고 나오니 어떻게 구약을 펼치겠는가? 그래서 신약만 본다.

 

 

 

재미있는 것은 이스라엘에 있는 메시아닉 유대인 교회는 반대로 구약만 읽는다. 신약보다 구약을 월등히 좋아한다. 펼치는 족족 자기 민족에 대한 축복이다. 그런데 신약은 어떤가?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고 정죄한다. 유대인들은 서구 기독교 세계로부터 수천 년 동안 이 정죄와 비난을 받아왔다. 예수 죽인 민족! 지금도 유대인들이 경기를 일으키는 것이 ‘예수 죽인 민족’이라는 비난이다. 그러니 신약성경을 보기가 쉽겠는가? 자기 민족이 메시아를 죽이고 하나님께 버림받아 복이 이방인에게 넘어간다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이것이 아랍과 이스라엘에 있는 견고한 진이다. 구약을 볼 수 없는 아랍인들과 신약을 펼치기 불편한 유대인! 이 진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을까? 에서가 구약을 읽게 하고, 야곱이 신약을 읽게 하는 이것이 중동 문제를 푸는 열쇠다.

 

 

 

놀라고 감사한 것은 ‘반대의 원리’다. 사탄도 우리의 데스티니를 알고 데스티니의 우물을 막아버린다. 그래서 축복이 마치 저주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주처럼 보이는 곳, 그곳에 가야 우리의 데스티니가 있다. 그 저주가 십자가를 통과할 때 놀라운 축복으로 바뀐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며 반대의 원리다. 성경에 등장하는 에서의 데스티니는 분명 저주다. 그러나 예수님의 데스티니인 십자가도 구약에서는 저주였다.

 

 

 

그런데 이 저주가 복음을 통과하여 신약에 오면 축복으로 바뀐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다! 할렐루야! 십자가의 역전은, 저주가 사라지고, 없던 축복이 새롭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저주였던 그 내용이 모두 그대로 있다. 나무에 달리는 사건은 그대로 일어났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사건의 의미와 결과가 바뀌는 것이다.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며 십자가의 반전이다.

 

 

 

이 관점으로 에서의 데스티니를 보면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는 에서의 데스티니는 구약에서는 저주다. 동생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어떤가? 섬기는 자가 큰 자 아닌가!

 

 

 

예수께서는 섬기러 오셨고, 종이 되려고 오셨다. 섬기는 것은 예수님의 속성이다. ‘구약의 에서’는 저주로 인해 억지로 섬기는 자가 되었지만, ‘신약의 에서’는 자원해서 기쁨으로 섬기는 자가 된다. 야곱, 이스라엘을 복음 안에서 사랑으로 섬기는 자! 이것이 신약의 에서인 요르단의 데스티니다. 신약의 에서는 예수를 닮은 자이다!

 

 

 

요르단 사람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이름도 부르지 않는다. 택시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소리를 냈다가는 중간에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들은 이스라엘 땅을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르지 절대 이스라엘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증오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이스라엘을 미워한다. 왠지 아는가? 반대의 원리로 생각하면 원수 마귀가 우물을 막아버린 것이다. 이스라엘을 사랑으로 섬겨야 할 요르단의 데스티니를 알고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반대쪽 극단으로 몰고 간 것이다. 저주하고 증오하도록 말이다.

 

 

 

이것은 예루살렘도 마찬가지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기초’라는 뜻이다. 평화의 기초가 되는 것이 그 땅의 데스티니다. 원수 마귀도 그것을 알기에 데스티니의 우물을 막아버렸다. 예루살렘은 지난 수 세기 동안 한 번도 평화가 있었던 적이 없다. 항상 전쟁과 갈등의 중심이었다. 평화라는 예루살렘의 데스티니와는 정반대 극단으로 몰고 갔다.

 

 

 

우리는 이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저주가 있는 곳? 그곳이 사실은 축복이 부어져야 할 곳이라는 뜻이다. 언제? 십자가를 통과할 때! 개인이든 민족이든 마찬가지다. 이것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으면 저주는 그냥 저주로 남는다. 그러나 저주의 땅에 복음이 들어가면, 그곳은 축복의 땅으로 바뀐다. 이것이 복음이다!

 

 

 

요르단에 방문했을 때, 그곳에 계신 선교사님들에게 도전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 땅에 대한 저주들을 다 찾으십시오. 그리고 이 저주가 어떻게 마지막 때 축복이 될 수 있는지 묵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반대의 원리를 통해 한 가지 비밀을 더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여성에 대한 것이다. 요르단뿐 아니라 이슬람 지역 전체에서 가장 억압받는 존재는 여성이다.

 

그 더운 날씨에도 시꺼먼 히잡을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다닌다. 인권도 없다. 그저 물건처럼 남자의 소유물로 취급받는다. 왜 그럴까? 반대의 원리! 하나님께서 여성들을 통해서 하실 일이 있으신 것이다. 이를 두려워한 사탄이 이슬람 여성들을 꽁꽁 묶어버렸다. 이슬람 여성들이 복음 안에서 일어날 때 사탄이 감당 못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이것이 이슬람 여성들의 데스티니다! 이들의 해방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십자가의 역전이 일어날 것이다.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복음의 능력이 중동 땅에 역사하도록 기도하자. 에서가 구약을 펼치고, 야곱이 신약을 펼칠 수 있도록 기도하자. 그럴 때 우리는 야곱을 섬기는 에서의 놀라운 데스티니가 회복되는 것을 볼 것이다. 증오로 점철된 천년의 역사를 끝내고, 쌍둥이 형제가 예수 안에서 ‘한 새사람’이 되는 기적, 우리가 이 일의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

 

 

 

복음의 비밀은 막힌 담을 헐고 둘로 하나 되게 하는 십자가의 능력이다. 야곱과 에서의 중재자가 되려면, 우리 앞에 있는 ‘하나됨’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한중일(韓中日)의 하나됨 말이다. 우리도 하나가 안 되었는데,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들이 하나가 되겠는가? 에서가 야곱을 용서하라고? 그러면 ‘너희나 먼저 잘해’ 이러지 않겠는가? 사실 한국, 중국, 일본도 하나 되기 참 어려운 나라들이다.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인접 국가들치고 사이 좋은 나라는 없다. 긴 역사를 통해 얼마나 많이 싸웠겠는가? 한중일의 역사 역시 전쟁의 역사다.

 

 

 

그런데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는 한중일이 복음 안에서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 되게 하는 복음, 원수와 연합하게 하는 능력의 복음이 한중일 가운데 먼저 이루어질 때, 야곱과 에서를 향한 복음 또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 “우리를 보라! 원수였던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너희도 하나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이 아닐까?

 

그 복음은 미움과 증오에 멀었던 민족들의 눈을 뜨게 하는 각성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복음은 용서이고 사랑이다. 막힌 담을 허물고 하나 되게 하는 것, 원수를 용서하고 힘없는 자를 섬기는 것이 복음이며, 나누고 보듬는 것이 복음이다.

 

 

 

- 하나님의 마스터플랜, 고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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