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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나눔]6월 5일(금) 그날에 남는 것

작성자밀알(이선명)|작성시간26.06.05|조회수32 목록 댓글 0

성경 말씀: 고린도전서 3:1-15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말씀 나눔

 아이를 키워보신 분들이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장 자주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내 거야."입니다. 장난감을 붙잡고도 "내 거야"하고 고집을 피우고, 과자를 들고도 "내 거야", 심지어 엄마 품에 안겨서도 "우리 엄마야"라고 말합니다어린아이의 세계는 자기중심적입니다. 그것이 잘못이 아니라 아직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몸은 어른이 되었는데 마음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입니다.

'내 것', '내 편', '내 방식'을 놓지 못할 때. 그것이 가정에서는 다툼이 되고, 직장에서는 갈등이 되고, 교회에서는 분열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너희는 아직 어린아이들이다."라고 진단을 내립니다. 은사도 있고, 성경 지식도 있고, 열심히 예배드리는 성도들에게 이 말은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스스로를 신령한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령의 은사도 받고, 영적 지식도 풍부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십자가의 지혜를 감당하기에 너희는 아직 어린아이라고, 그 자부심을 그대로 뒤집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3절)

 

4절은 더 구체적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특정 지도자를 중심으로 파당을 만들고, 그 파당을 등에 업고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려 했습니다헬라어 원문에서 바울이 3절에 육신에 속한 자라고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 '사르키코스'(σαρκικός)단순히 영적으로 미성숙하다는 뜻이나,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성령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고 자기 이익, 자기 명예, 자기 영광을 향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이 교회 안의 파당 짓기에 그대로 드러났다고 진단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아직도"라는 말을 씁니다(3).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그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책망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서 누군가와 편을 가르고, 비교하고, 시기하는 것은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진단대로라면, 이것은 십자가의 방식과 정반대로 가는 자리이며, 아직도 어린아이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파당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바울은 아주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5절입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여기서 사도바울은 '누구냐'가 아니라 '무엇이냐'라고 말합니다.

즉 사람이 아니라 기능을 묻는 말입니다. 위대한 인물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 안에서 어떤 역할을 맡은 도구냐를 묻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답을 이렇게 내립니다.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러면서 7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사역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라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자라남의 공로와 영광이 하나님께 있다는 선언입니다.

심는 사람이 아무리 수고해도, 물 주는 사람이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그것이 자신의 영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라는 소유격이 결정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한 일꾼들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도 하나님의 밭이고 하나님의 집입니다. 사역자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를 추종하는 파당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인간에게 돌리는 행위입니다. 그 사역자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오히려 가리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지혜로운 건축자.' 원어로 '소포스 아르키텍톤'(σοφς ρχιτέκτων)입니다.

이 말은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곧 십자가의 방식을 따라 사역한다는 뜻입니다.

 

 그 지혜로운 건축자가 놓은 터가 무엇인지를 11절에서 밝힙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터는 이미 놓여 있습니다. 그 터는 바울이 놓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놓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위에 세울 뿐입니다.

 

문제는 그 위에 무엇으로 세우느냐입니다. 12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이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두 종류의 재료를 나열합니다. , , 보석 그리고 나무, , 짚입니다. 재료가 여섯 가지가 나열되지만 사실 두 가지 범주입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불 앞에서는 차이가 드러납니다

 

 올해 초, 서울 종로 귀금속 거리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텅스텐으로 안에 채우고 겉에만 금을 입힌 가짜 금괴가 유통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텅스텐은 금과 밀도와 성질이 비슷해서, 레이저나 엑스레이 같은 검사로는 잡아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겉에서 보면 진짜 금과 구별할 수 없습니다. 광택도 있고, 무게도 비슷하고, 색깔도 같습니다.

 

 어떻게 진품인지 알 수 있을까요?

잘라봐야 압니다. 녹여봐야 압니다. 불을 거쳐야 압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날의 불'이 바로 이것입니다.

13절을 보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겉으로는 화려한 사역이 있습니다.

그 사역이 많은 숫자, 사람들의 박수, 그럴듯한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더라도 속이 텅스텐이라면 그날 불 앞에 서면 다 드러납니다.

반대로 눈에 띄지 않고 초라해 보이는 사역도 있습니다.

초라해 보이는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십자가의 방식으로 세운 것이라면 그 불을 통과합니다.

 

그리고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사도 바울은 그사람 자신은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평생 쌓아 올렸다고 생각했던 것이 불 앞에서 모두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새벽, 오늘 본문이 저와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무엇을 하라고 하십니까?

 

두 가지를 마음에 품고 오늘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첫째, 내 안의 '아직도'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시기하는 마음, 비교하는 습관, 내 편을 만들고 싶은 충동 이 모든 것들은 어린아이의 방식입니다. 오늘 하루 누군가를 보며 '저 사람이 잘 되었으면'이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육신의 방식을 내려놓는 첫걸음입니다.

 

둘째, 내가 지금 세워가고 있는 것의 터를 확인하십시오.

내 신앙, 내 섬김, 내 관계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인정 위에 서 있습니까?

이 질문이 내 안에 아직도가 하나님 앞에 내려져 있는지를 확인하는 기준이 됩니다.

 

 내 섬김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서 있다면, 인정받지 못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칭찬이 없어도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섬기면서 자꾸 인정받고 싶고, 알아줬으면 하고, 비교가 된다면, 터를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내려놓지 못한 것이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새벽에 이 자리에 나오신 것이 이미 그 고백입니다.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겠다는 고백입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자라게 하십니다. 우리가 심고 물을 주어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수고가 초라해 보여도, 받는 인정이 없어도, 하나님이 자라게 하고 계십니다. 그날에 남는 것을 지금 하나님이 세워가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것은 그날에도 남습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복된 하루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묵상 - 하시깨묵

어제 결단한 것을 오늘 어떻게 실천했습니까? 솔직하게 평가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나타납니까?

(자라게 하시는 분, 터를 놓으신 분, 심판하시는 분, 오늘 내게 가장 필요한 하나님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오늘 내 안에 '아직도' 남아있는 육신의 방식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시기, 비교, 파당, 인정받으려는 욕구 중에서)

 

내가 지금 세워가고 있는 신앙·섬김·관계의 터가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 위에 세워져 있습니까?

 

오늘 하루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붙들고, 내가 내려놓을 수 있는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오늘의 결단을 기도문으로 적고, 실천 사항 한 가지를 적어 보십시오.

 

추천 찬송가

488장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은혜의 찬양

나는 주의 친구: https://youtu.be/1f4BIgEoWWM?si=40bBil5f6wDpDlPj 

 

새벽예배 영상

https://youtube.com/live/-MnPKhXw4K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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