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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나눔]6월 9일(화) 어떤 존재인지 아십니까?

작성자밀알(이선명)|작성시간26.06.09|조회수36 목록 댓글 0

【성경 말씀: 고린도전서 6:1–11】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도 입】

 한때 매년 교단 총회 시즌이 되면 뉴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의 싸움이 세상 법정으로 나가는 장면입니다. 재정 비리, 목회자 비리, 권력 다툼. 고소하고 고발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그걸 보면서 우리는 혀를 찹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쓰는 편지가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당시 로마 법정은 부유하고 권력 있는 자들에게 철저히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재판관들은 뇌물을 받았고, 지위가 높은 자들 편을 들었습니다. 그 법정에 고린도 교회의 부유한 교인들이 힘없는 형제들을 끌고 갔습니다. 법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실상은 약자를 짓밟는 행위였습니다.

 

 바울의 반응은 충격에 가깝습니다. 1절을 보면,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말 성경으로 번역될 때 누락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감히’(τολμᾷ, 톨마)라는 뜻을 가진 동사입니다.

‘감히 그런 짓을 하느냐!’라는 바울의 경악이 단어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바울이 경악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교회 망신"이 아닙니다. 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2–3절에서 묻습니다. 먼저 2절을 보면,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라고 책망합니다. 그리고 3절을 보면,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알지 못하느냐"라는 질문이 본문에서 세 번 반복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꼬집는 꾸짖음입니다.

"너희가 지식을 자랑하면서, 정작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느냐?"라며 그들이 세상의 지식과 수사학에는 능통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어떤 권세를 가진 존재인지는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판단한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성도는 세상과 천사를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또한 성도는 장차 하나님의 최종 심판에 참여할 존재입니다. 바울은 그 미래의 영광을 상기시키며 지금의 사소한 분쟁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모습을 책망합니다. 장차 세상과 천사를 심판할 성도들이 지금 형제를 이기기 위해 세상 법정의 힘을 빌리고 있습니다. 바울의 눈에는 이것이 어처구니없는 역전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9:28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마지막 날 세상을 심판할 보좌에 앉을 존재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 법정의 판결을 받으러 나가고 있습니다.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모건 프리먼이 연기한 레드는 40년 만에 감옥에서 가석방됩니다. 마침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식료품점에서 일하게 된 그가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마다 점장에게 허락을 구합니다. 감옥에서 40년 동안 그렇게 해왔으니까요. 허락 없이는 오줌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자신을 보면서 그는 씁쓸하게 고백합니다. "나는 감옥에 길들여진 사람이야."

레드는 자유인이 되었는데 몸이 죄수의 방식을 기억하고 있었던 겁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미 새로운 나라의 시민이 되었지만, 여전히 옛 세상의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신분은 바뀌었는데 살아가는 방식이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이어서 7절에 보면,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라고 말합니다. '허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ἥττημα(헤테마)입니다. 이 단어는 패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패배는 법정에서의 패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법정 앞에 선 순간, 이미 졌다는 것입니다. 법정에서 이기든 지든 상관없습니다.

 

 바울은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십자가의 언어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 앞에서 침묵하셨습니다. 억울하게 당하셨습니다. 그것이 패배입니까? 아닙니다. 그 침묵이 온 세상의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세상 방식으로 싸워서 이기거나, 십자가 방식으로 손해를 입고 이기거나."

세상 방식으로는 이겨도 지는 것이고, 십자가 방식으로는 져도 이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나옵니다.

그럼 억울하게 당하고만 살아야 합니까? 불의를 모른 척해야 합니까?

바울은 무조건 참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5절에서 ‘교회 안에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지혜 있는 자가 없느냐?’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갈등을 다루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교회 안에서 먼저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장 안에서 먼저 꺼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새벽, 우리 각자에게 물어봅시다.

지금 내 마음속에, 형제에 대해 쌓인 것이 있습니까?

억울한 것이 있습니까?

그것을 세상 방식으로, 세상 언어로,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기 전에, 오늘 목장 식구에게 먼저 꺼낼 수 있습니까?

형제에게 먼저 말을 건넬 수 있습니까?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관계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가족 사이에서도, 목장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기기 위해 말하지만, 십자가는 이기기보다 사랑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첫 번째 실천입니다.

 

 그리고 9-10절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불의한 자들의 목록을 길게 나열합니다. 음행, 우상 숭배, 간음, 도적, 탐욕, 모욕....

 

 여기서 사도바울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 위해 변화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씻김을 받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예전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하나같이 육체의 일을 행하던 자들이었습니다. 11절을 보면,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라고 밝히며, 그들이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상기시킵니다. 사도바울은 성도들에게 일어난 일을 세 가지 동사로 설명합니다.

 

첫째 씻음(아펠루사스테:ἀπελούσασθε)은 '씻어냈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씻은 것이 아니라 씻어 제거했다는 의미입니다.

회개와 믿음을 통해 죄의 더러움이 씻겨 나간 정결함을 의미합니다. 과거의 오염이 제거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더러움, 가장 깊이 박힌 죄의 흔적까지 씻겨 나갔습니다.

 

씻음이 무엇인지 가장 쉽게 아는 방법은 씻기 전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씻기 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몰랐던 시간, 세상 방식대로만 살았던 시간. 그 시간의 흔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히 씻겨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둘째, 거룩함(헤기아스테테:ἡγιάσθητε)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전 제사에서 제물로 드려질 동물은 성별(聖別)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분리되었습니다. 그 동물은 더 이상 시장에서 팔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성도도 그렇습니다. 더 이상 세상 논리의 시장에서 팔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 직장에서, 삶의 자리에서 세상 방식으로 살라는 압력이 올 때, 관계 속에서 복수하고 싶은 충동이 올 때, 그때 나는 세상의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의롭다 하심(에디카이오테테: ἐδικαιώθητε)은 법정 용어입니다.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한 무죄 선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무죄를 선언받고 올바른 관계를 회복했음을 의미합니다.

 

 로마 법정은 부패합니다. 뇌물이 오가고 권력 있는 자가 이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은 다릅니다. 완전하게 공의롭습니다.

그 법정에서 우리는 이미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받았습니까? 예수님이 우리 자리에 서셨습니다.

우리가 져야 할 죄의 형벌을 그분이 다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무죄'가 선언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바울은 세상 법정으로 나가지 말라고 합니까?

단순히 교회 체면 때문이 아닙니다.

씻김 받고, 거룩하게 구별되고,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세상 법정의 판결을 받으러 나가는 것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법정에서 이미 의롭다는 선고를 받은 사람이, 세상 재판관 앞에서 자기 권리를 쟁취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장면입니까?

 

 혹시 형제와 갈등이 있는 분이 계십니까?

상대방을 이기려는 마음이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려는 마음으로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그 용기를 오늘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억울한 것이 쌓인 분이 있습니까?

그것을 혼자 품거나 세상 방식으로 터뜨리기 전에, 목장 식구나 신뢰할 수 있는 형제에게 먼저 꺼내십시오.

 

 지금 마음속에 누군가를 향한 날을 세우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오늘 이 기도 시간에, 그 사람을 위해 짧게라도 기도해 보십시오. 기도는 원수를 이기려는 마음을 녹입니다.

 

 이것이 씻김 받고, 거룩하게 구별되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것을 알기 때문에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5:9을 보면,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음을 받은 자들은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 세상의 법정으로 힘없는 형제들을 끌고 가겠습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이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즉, 가난하고 힘없는 형제를 세상 법정에 세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법정에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법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을 아는 사람. 세상 방식이 아니라 십자가의 방식으로 사는 사람. 씻김 받고, 구별되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 그것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 정체성 위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묵상 - 하시깨묵】

① 어제 나의 삶에서 세상 방식과 하나님 나라의 방식 사이에서 갈등한 순간이 있었습니까?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②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고 세 번 묻습니다. 내가 잊고 살았던 나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③ 씻음, 거룩함, 의롭다 하심 — 이 세 가지 중 오늘 내게 가장 필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④ 지금 내 마음에 갈등이 있거나 억울한 감정이 쌓인 관계가 있습니까? 교회 공동체 안에서 먼저 꺼낼 수 있습니까?

 

⑤ 오늘 하루 "십자가의 방식"으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겠습니까? 실천 한 가지를 적어보십시오.

 

⑥ 기도문 적기 & 실천 사항 적기

오늘 말씀을 붙들고 나만의 기도문을 짧게 적고, 오늘 실천할 한 가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두십시오.

 

【추천 찬송가】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은혜의 찬양】

보혈을 지나: https://youtu.be/pG0xkdxgM3o?si=3VQFcfsUnhujvbRD 

 

【새벽예배영상
https://youtube.com/live/Qao4HOlxN9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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