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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나눔]6월 10일(수) 주님의 값으로 산 몸

작성자밀알(이선명)|작성시간26.06.10|조회수39 목록 댓글 0

【성경 말씀: 고린도전서 6:12–20】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말씀 나눔】

어제 우리는 고린도전서 6장 11절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씻김을 받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그림을 하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밭에서 막 수확한 딸기를 집에 가져왔습니다. 그 딸기를 먹으려면 어떻게 합니까?

물에 깨끗이 씻어 깨끗한 접시에 담습니다. 씻은 딸기를 다시 진흙 바닥에 놓지는 않습니다.

딸기를 구별해서 놓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구별하여 놓으셨습니다.

그 씻음과 구별이 어제 본문이 우리에게 선포한 복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거기서 바로 이어집니다.

씻음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구별된 존재가 어떤 몸으로 오늘을 살아야 하는가?

 

고린도 교회에 이런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침례받았고, 예배에도 잘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이런 구호가 하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

무엇이든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자유롭다.

그 자유의 구호 아래서 그들은 음행을 정당화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자유를 외치는 목소리는 넘칩니다.

그런데 술을 끊지 못하는 사람 가운데 "나는 언제든 끊을 수 있어"라고 말해 본 적 없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도박을 반복하는 사람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면서도 '내가 원할 때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다'라고 합니다. 자유롭다고 말하는 그 입으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유를 주장하면 할수록 도리어 그것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역설을 꿰뚫습니다. 12절을 보면,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진정한 자유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이 아닙니다.

아무것에도 지배당하지 않음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또 하나의 논리가 있었습니다.

13절 앞부분입니다.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그들의 생각은 배가 고프면 먹고, 성욕이 생기면 해소하면 된다. 먹는 것이 영혼에 영향을 주지 않듯이, 몸으로 하는 일도 영혼과는 무관하다. 영과 몸은 서로 별개다. 이것이 영육 이원론입니다.

영은 중요하고 육은 하찮다는 생각, 몸으로 하는 일은 결국 썩어 없어질 것이니, 영혼에는 아무 영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의 헬레니즘 문화가 깊이 품고 있던 세계관이 바로 이원론이었습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맞섭니다. 13절 뒷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배와 음식의 관계는 끝이 납니다.

하나님이 이것저것을 다 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몸과 주님의 관계는 끝이 없습니다. 이 차이가 결정적입니다.

 

 왜 몸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왜 몸으로 행한 일이 그냥 지나가는 일이 아닙니까?

바울은 14절에서 그 근거를 댑니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그 근거는 바로 부활입니다. 이것이 전부를 바꿉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혼만의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몸의 부활이 함께 있었습니다.

빈 무덤이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몸을 썩음에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동일한 권능으로 우리의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몸은 버려질 껍데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대상입니다. 부활을 향해 가고 있는 몸입니다.

 

 이 부활이 영육 이원론을 무너뜨립니다.

몸으로 행한 일이 영혼과 무관하다는 논리가 무너집니다.

우리가 편의상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구분해 말하지만, 실상 영과 육과 혼 이 세 가지는 따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몸으로 행한 일은 고스란히 우리의 전 존재에 새겨집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 21절은 이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바울은 이것들을 '육체의 일'이라고 부릅니다. 몸으로 행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영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일들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몸과 영혼은 하나입니다.

 

 그러면 이제 15절의 질문이 얼마나 무게 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이것은 도덕적 훈계가 아닙니다. 존재론적 불가능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이미 연합된 몸이, 그 연합을 끊고 다른 연합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16절에서 창세기 2장 24절 '둘이 한 육체가 된다.'라는 결혼을 말하는 구절을 인용하여 설명합니다. 바울은 이 거룩한 결혼의 언어를 음행에 그대로 가져다 씁니다. 충격적인 적용입니다. 거룩한 연합이든불경한 연합이든 성은 항상 연합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성은 중립적인 생리 현상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전 존재가 연루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17절에서 바울은 가장 깊은 곳을 말합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와 한 영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미래의 약속이 아닙니다.

지금, 이 새벽, 여기 나온 성도들이 이미 그리스도와 한 영으로 연합된 존재들입니다.

 

 그 연합 안에 서 있는 사람이 다른 연합으로 자신을 팔아넘기는 것은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결코 그럴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18절의 명령이 나옵니다. '음행을 피하라.' 단 세 글자의 명령입니다. 헬라어 원문은 현재 명령형입니다. 지금 당장, 계속해서, 달아나라.

유혹과 싸우지 말고, 논리로 이기려 하지 말고, 그냥 피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말합니까? 18절 뒷부분이 설명합니다.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바울은 음행이 다른 죄와는 달리 자기 몸을 직접 죄의 도구로 만든다고 말합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바로 그 자리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여기서 성전은 헬라어로 나오스(ναός)입니다.

이 단어는 성전 건물 전체를 가리키는 히에론(ἱερόν)과 다릅니다.

나오스는 성전 안에서도 하나님이 실제로 거하시는 내부 공간, 즉 지성소를 가리킵니다.

성도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입니다. 그래서 몸은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자리입니다. 성막 시대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셨듯, 이제 하나님은 성도의 몸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고 20절에서 바울은 마지막 선언을 합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이것은 노예 시장의 언어입니다.

누군가가 값을 치르고 노예를 사서 자유하게 했습니다. 그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새 주인에게 속하는 자유입니다.

사도바울은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라고 선언합니다.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그 값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그 보혈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도의 정체성은 세 겹으로 선포됩니다.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그분께 속했습니다.

우리 몸은 성령의 전, 지성소입니다. 그분이 지금 이 순간도 거하십니다.

우리 몸은 값으로 산 것입니다. 그 값이 십자가였습니다.

 

 성막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걸을 때, 하나님은 그 진영 한가운데 성막을 세우셨습니다.

지성소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렀습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대제사장도 일 년에 단 한 번, 피를 가지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거룩한 공간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은 너희 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제는 성막이 아니라 성도의 몸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지성소입니다.

 

 그 지성소를 더럽힌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제 느껴지십니까?

그것은 단순한 도덕적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 공간을 스스로 짓밟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정체성이 분명히 서 있을 때 죄의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니다'라는 고백이 상실이 아닙니다.

나를 값 주고 사신 분이 누구인지를 알 때, 그것은 가장 안전한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사도바울의 명령은, 또 하나의 윤리 의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요, 성령의 지성소요, 값으로 산 자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삶의 방향입니다.

 

 오늘 이 새벽, 각자의 자리에서 이 정체성을 다시 붙드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이 거하시는 지성소이며, 십자가의 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오늘도 이 정체성을 잊지 않고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저와 여러분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묵상 - 하시깨묵】

① 어제 결단한 것을 오늘 어떻게 실천했습니까? 솔직하게 평가해 보십시오

 

②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나타납니까?

(성도의 몸을 값으로 사신 분, 성령을 보내어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으로 묵상해 보십시오.)

 

③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서,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내놓아 보십시오.

 

④ 내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지성소라는 사실이 오늘 하루 내 선택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습니까?

 

⑤ 오늘 내가 해야 할 한 가지 실천은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적어 보십시오.

 

【추천 찬송가】 268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은혜의 찬양】

전심으로: https://youtu.be/ymizIggp0vc?si=tt2W6sEWsoEqim2k

 

【새벽예배 영상】

https://youtube.com/live/LH2r8Ip3w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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