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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나눔]6월 11일(목) 지금, 이 자리에서

작성자밀알(이선명)|작성시간26.06.11|조회수30 목록 댓글 0

【성경 말씀: 고린도전서 7:1 ~ 24】

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8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10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11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12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6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말씀 나눔】

 목회상담을 하다보면, 이런 말을 하시는 분을 간혹 만나게 됩니다.

"지금 제 상황이 좀 더 나아지면 신앙생활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말은 각자 상황이 다르지만, 배우자가 같이 믿으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지금 겪는 어려운 형편만 지나가면 제대로 헌신할 수 있을 것 같고, 지금 이 자리만 벗어나면 더 온전한 성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 지금 있는 이 자리가 늘 부족한 것 같고, 지금의 내 모습으로는 하나님 앞에 서기에도 어딘가 부끄러운 마음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사도바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결혼에 대해서, 이혼에 대해서, 불신 배우자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보냈습니다.

그 질문들 안에 공통된 불안이 깔려 있었습니다.

“지금 내 자리가 문제 아닌가요? 바꾸어야 더 거룩해지는 것 아닌가요?”

오늘 본문은 그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입니다.

 

 사도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인들이 편지로 보낸 구호를 먼저 소개합니다.

1절을 보면,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 자신의 말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 안의 금욕주의 그룹이 내세운 슬로건이었습니다. 그들은 결혼 자체를, 심지어 부부 사이의 관계까지도 영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바로잡습니다. 3절,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결혼 안에서의 관계는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의무입니다. 그것도 서로에게 지는 의무입니다.

 

 4절을 보면,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라고 말합니다.

남성 상위 사회였던 고린도에서 이 말은 충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아내만 남편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남편도 아내에게 속합니다.

결혼은 일방적 소유가 아니라 상호적 헌신입니다.

 

 7절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정리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사도바울은 결혼과 독신을 은사로 표현합니다.

 

헬라어로 '은사'는 카리스마(χάρισμα)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독신이 카리스마입니다. 그리고 결혼도 카리스마입니다. 어느 하나가 더 영적이고 어느 하나가 열등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맞게 주신 선물이 다를 뿐입니다.

 

 배우자 중 한 사람이 믿지 않는 경우에도 사도바울은 같은 원리를 적용합니다.

14절을 보면,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여기서 먼저 한 가지 오해의 소지를 풀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결혼을 전도 전략으로 이용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배우자를 반드시 내가 구원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결혼 관계를 붙들라는 뜻도 아닙니다.

 

 16절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이 말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혹시 아느냐?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은  결혼 관계 자체가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 안에 있으며, 믿는 배우자의 삶과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영향력이 흐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 전략이 아니라 삶의 증언입니다. 그러니 불신 배우자가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그 결혼을 포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17절에서 사도바울은 앞에서 다룬 모든 구체적 문제들의 신학적 근거를 선언합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사도바울은 이 원리를 세 번 반복합니다.

17절, 20절, 24절에서 매번 조금씩 다른 언어로, 그러나 같은 진리를 심화시키며 말합니다.

"부르심 그대로 행하라"(17절),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20절),

"부르심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24절).

세 번 반복 중 마지막이 가장 깊습니다.

단지 자리를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두 가지 예시로 이 원리를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할례와 무할례입니다(18–19절).

당시 고린도에는 헬라 문화에 동화하기 위해 할례의 흔적을 지우려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더 거룩해지기 위해 할례를 받으려는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의 대답은 간단명료합니다.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19)

외적 조건이 영적 신분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종과 자유인입니다(21–23절).

노예로 부름받은 자가 있습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이용하되(21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22절에,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종이지만 이미 자유인이고, 자유인이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 이것이 복음이 만들어낸 역설입니다. 사회적 신분이 뒤집혔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회적 신분이 더 이상 진짜 신분이 아닙니다. 진짜 신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신분입니다.

 

 23절에서 바울은 이 모든 논증을 한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이 말은 6장 20절에서 한 번 나온 말입니다.

그 말씀을 바울이 다시 꺼냅니다. 의도적 반복입니다.

어떻게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가? 

왜 어떤 신분도 당신의 진짜 신분을 결정할 수 없는가?

그 이유로 바로 ‘당신은 값으로 사신 존재입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이 구절을 읽으며 당시 교회에 선언했던 말이 있습니다.

중세 교회는 오랫동안 수도사와 성직자의 삶만이 진정한 거룩한 소명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농부의 노동, 어머니의 육아, 장인의 손일은 그저 세속적인 삶이었습니다.

 

 루터는 사도바울의 이 말을 근거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부엌에서 냄비를 닦는 하녀의 일이,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있다면, 거룩한 수도사의 기도보다 하나님 앞에 더 값진 것일 수 있다." 자리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이 거룩합니다.

 

 이 원리가 가장 날카롭게 드러난 곳이 고린도입니다.

고린도는 로마 제국의 주요 노예 무역 거점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처음 들은 사람들 중에는 실제 노예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사슬에 묶인 채 이 말씀을 들은 그 형제들이 "값으로 사신 것이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은 사슬을 풀어주겠다는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그들의 사슬보다 훨씬 깊은 곳을 건드렸습니다. 당신은 이미 가장 높은 주인의 소유다. 당신의 값은 이미 치러졌다. 이 세상 어떤 주인도, 어떤 신분도 그것을 취소할 수 없다.

 

 그러니 24절의 마지막 선언은 단순한 권면이 아닙니다. 복음의 선언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아직 배우자가 믿지 않는 그 자리에서, 여전히 어려운 형편 안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앞에서, 무언가 바꾸어야 비로소 시작되는 신앙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 그것이 사도바울이 이 긴 본문 전체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하나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집중해야 할 부분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는 말은 현재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체념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셨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분이 나를 사랑하셔서 기꺼이 값을 치르셨다는 말입니다.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를 지목하셔서, 값을 내시고, 이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부르심입니다. 부끄러운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은 짐이 아니라 영광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9:23) 여러분 예수님은 어쩌다 한번이 아니라 날마다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날마다 다시 십자가를 집니다.

 

 자기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에게만 맡기신 것입니다.

아직 배우자가 믿지 않는 그 자리에서의 십자가, 여전히 어려운 형편 그 자리에서의 십자가, 목장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날마다 지는 십자가입니다.

 

 무겁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하나님이 나를 신뢰하셔서 맡기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무게 속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신뢰하시고 맡기신 부르심의 영광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 나은 자리로 옮겨준 다음에 쓰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부르셔서, 지금 여기서 함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시는 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앞서 부른 찬송이 이것을 먼저 고백했습니다.

"나 맡은 본분이 무엇인가? 부르심대로 주 앞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맡은 본분이 있습니다. 그 자리는 화려한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주님이 맡기신 본분을 행합니다.

주님이 나에게 주신 그 본분을 오늘 하루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값을 치르신 주님께 합당한 영광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모두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맡겨진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묵상 - 하시깨묵】

① 어제 결단한 것을 오늘 어떻게 실천했습니까? 간단히 평가해 보십시오.

 

②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나타납니까?

(힌트: 우리를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부르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③ "부르심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24절)는 말씀이 오늘 나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어떻게 적용됩니까?

 

④ 지금 나는 어떤 자리를 조급해하거나 부끄러워하고 있습니까?

그 자리에서 주님이 오늘 나에게 맡기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오늘 하루 그 십자가를 어떻게 질 수 있겠습니까?

 

⑤ 기도문과 오늘의 실천 사항을 적어보십시오.

 

【추천 찬송가】

595장 나 맡은 본분은

 

【은혜의 찬양】

내가 주인 삼은 : https://youtu.be/h2U16lmPZCI?si=0JhVRrk0hJnjyunE

 

【새벽예배영상】

https://youtube.com/live/At87m95Kf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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