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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나눔]6월 17일(수) 가장 아름다운 예배자

작성자밀알(이선명)|작성시간26.06.17|조회수34 목록 댓글 0

【성경 말씀: 고린도전서 11:2–16】

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6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14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16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말씀 나눔】

새벽에 예배당에 나오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은혜입니다. 잠을 떨치고 일어나 하나님 앞에 나오는 그 발걸음 안에 이미 갈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갈망, 오늘 하루를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고 싶다는 갈망, 그 갈망은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갈망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조용하지만 날카롭게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 은혜를 혼자 받으려 합니까, 함께 받으려 합니까?"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됩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됩니다. 은혜도 그렇습니다.

혼자 받은 은혜는 혼자서 끝납니다. 그러나 함께 받은 은혜는 배가 됩니다.

그리고 함께 받는 은혜는 자연스럽게 한 방향을 향합니다.

나를 향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합니다.

 

사도바울은 10장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1절)

그리고 곧바로 11장을 시작합니다. 예배 공동체 안에서 그 원리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아주 구체적인 장면으로 보여줍니다. 머리를 가리는 것과 드러내는 것. 이것이 오늘 본문의 주제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칭찬 후에 3절에서 하나의 원리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세 쌍의 관계가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와 남자. 남자와 여자. 하나님과 그리스도. 이것을 읽으면서 우리는 자칫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가 하는 위계 구조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의도한 것이 그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라는 세 번째 쌍을 넣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존재의 우열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신앙의 기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머리'는 누가 더 높은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관계 안에서의 역할과 질서입니다. 위계가 아니라 연결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 원리를 먼저 선언할까요? 7절에 답이 있습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여기서 '영광'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원문의 독사(δόξα)는 단순히 '찬양'이 아닙니다.

'어떤 존재의 아름다움과 빛남을 드러내다'는 의미입니다. 자식이 잘 되면 부모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아내가 아름다우면 남편의 자랑이 됩니다. 그 자랑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빛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결혼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가 있습니다. 오랜 경력을 가진 그가 후배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좋은 웨딩 사진은 사진작가가 보이지 않는 사진이다."

사진 속에 사진작가의 그림자가 들어오면, 그 사진은 실패입니다. 사진작가는 신랑 신부가 가장 빛나도록 자신을 완전히 지워야 합니다. 그가 보이지 않을수록 신랑 신부가 더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예배가 그렇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빛남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예배 안에서 피조물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남편의 자랑이 드러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는 남편을 자랑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아내의 아름다움이 빛나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드러나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당시 고린도 사회에서 자신의 영광과 지위를 드러내던 방식을 예배 안에서는 절제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논리입니다. 머리를 가리는 것은 여자를 억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안에서는 남편의 영광조차 예배 안에서는 자리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예배 안에서는 피조물의 모든 영광이 가려져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에는 로마 문화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공적 모임은 자기 지위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자리였습니다. 지위 있는 여성일수록 머리를 화려하게 치장하고 나왔습니다. 그것이 자신과 남편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이었습니다. 그 문화가 '그리스도 안의 자유'라는 신학적 언어를 포장지로 달고 교회 안으로 흘러 들어온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막아섭니다. 자유는 맞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나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흐를 때,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자기 표현입니다.

 

10절을 보면, 바울은 여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이 말씀을 본문의 흐름을 따라 읽어 보면, 바울은 당시 자신을 드러내던 문화적 상징을 예배 안에서는 내려놓으라고 권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남편이 시켜서가 아닙니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닙니다. 남편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스스로 가림으로써, 예배 안에서 그 영광이 드러나지 않도록 자발적으로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수동적 굴복이 아닙니다. 예배자로서의 능동적 결단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라고 말합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예배는 사람들만 모인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자리입니다. 성경은 그 거룩한 예배를 천상의 존재들과 함께 드려지는 예배로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예배 앞에 서야 합니다 . 예배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가장 잘 차려입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을 가장 잘 내려놓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창조 질서를 말한 직후, 11절에서 방향을 전환합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바울이 의도적으로 넣은 반전입니다.

7–9절에서 창조 순서를 들어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1–12절에서 뒤집습니다.

처음 여자는 남자에게서 났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모든 남자는 여자를 통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이 왜 이것을 말하는걸까요?

질서가 지배로 읽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창조 질서 안에서의 구별은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상호 의존의 선언입니다. 남자도 여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여자도 남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이것이 예배 공동체 안에서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를 내려놓는 것은 내가 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세우는 방식으로 함께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드러내는 대신 하나님을 드러낼 때, 옆에 있는 사람도 함께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나 혼자 받는 은혜가 함께 받는 은혜가 되는 순간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자유를 앞세우며 머리를 드러냈던 여성들은 무언가를 잃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름다움은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 순간 예배 안에서 드러나야 할 것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남편의 영광이 앞에 서는 순간, 예배가 본래 지향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은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울이 요구한 것은 머리 위에 천을 얹는 행위 자체가 아닙니다. 당시 고린도에서는 머리를 가리는 것이 그 신학을 표현하는 문화적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두건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질서를 존중하며 공동체를 세우는 마음과 삶의 태도입니다. 형식은 문화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식이 담아야 하는 신학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바울이 마지막 16절에서 말합니다.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고린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교회가 이 길을 걷습니다.

예배 안에서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함께 걷는 길입니다.

 

 공연이 끝나면 박수는 무대 위 배우들에게 쏟아집니다. 그런데 그 배우들이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무대 뒤 조명 기사 때문입니다. 조명 기사는 관객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디를 비추느냐에 따라 배우의 얼굴이 살아납니다. 조명 기사의 역할은 자신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배우를 비추는 것입니다. 그가 실수로 자신이 있는 쪽을 비추는 순간, 무대의 마법은 깨집니다.

 

 예배자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조명 기사입니다. 예배 안에서 빛이 향해야 할 곳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보이지 않을수록 하나님이 선명하게 드러나십니다. 내가 드러나려 할수록 그 빛은 엉뚱한 곳을 향합니다.

 

 그 모습을 먼저 보여주신 분이 있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주님입니다. 영광중에 계셨으나 그 영광을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내려놓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밝게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주님이 먼저 조명을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빛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예배 안에서만이 아닙니다.

오늘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우리가 서는 모든 자리가 예배의 자리입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목장 모임에서, 내가 드러나려 할 때마다 이 질문이 따라옵니다. 지금 조명이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나를 내려놓을 때 하나님이 드러나십니다. 내가 가려질 때 하나님의 빛이 살아납니다. 그것이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가장 구체적인 얼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가장 아름다운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오늘, 이 새벽, 조명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향하는 예배자로 살아가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드러내기보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가장 아름다운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오늘 하루 그런 삶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묵상 - 하시깨묵】

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머리'(κεφαλή)는 위계가 아니라 관계 안의 질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내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지금까지 나는 이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습니까?

 

②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는 표현이 억압이 아니라 예배 안에서 피조물의 영광을 가리는 신학적 선언이라고 했습니다. 내 삶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 대신 내 영광이 드러나고 있는 자리가 있습니까?

 

③ 사진작가 예화에서, "좋은 웨딩 사진은 사진작가가 보이지 않는 사진"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나는 누구를 드러내고 있습니까? 나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④ 11–12절의"그러나 주 안에서"는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창조 질서 안의 구별이 지배가 아니라 상호 의존이라는 말이 내 삶의 관계들에 어떻게 적용됩니까?

 

⑤ 하나님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어떤 분으로 나에게 드러나십니까?

 

⑥ 오늘 내가 해야 할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조명을 하나님께 향한다는 것이 오늘 나의 구체적인 자리에서 어떤 모습입니까?

 

⑦ 오늘의 묵상을 기도문으로 적고, 한 가지 실천 사항을 정해 보십시오.

 

【추천 찬송가】 465장 주 믿는 나 남 위해/ 21장 만 입이 내게 있으면

 

【은혜의 찬양】

주님 큰 영광 받으소서.:

https://youtu.be/skZlPg7TB6I?si=Kbd9o9Qw5XVqd_ON

 

【새벽예배 영상】

https://youtube.com/live/xQOjZgBRHh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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