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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나눔]6월 22일(월) 한 영혼을 세우는 말

작성자밀알(이선명)|작성시간26.06.22|조회수34 목록 댓글 0

【성경 말씀: 고린도전서 14:1–19】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말씀 나눔】

 여러분, 선물을 받으면 어떻게 하십니까?

소중히 간직하는 분도 있고, 나눠주는 분도 있고, 자랑하고 싶은 분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어디에 쓰는지, 누구를 위해 쓰는지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지가 드러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은사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있었습니다.

특히 방언은 그들에게 가장 귀한 은사였습니다. 방언은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신비로운 체험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방언이 공동체를 세우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훈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14장을 통해 이 문제를 바로잡습니다.

 

 사도바울은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왜 예언을 하라고 할까요? 방언이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18절에서 솔직하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어쩌면 사도바울은 방언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도바울이 예언을 더 사모하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말할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향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2)

방언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 자체로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4)

방언은 자기 자신에게 유익이 됩니다. 반면에 예언은 옆에 있는 사람을 세웁니다.

여기서 '덕을 세운다'는 말은 원래 집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건축 현장에서 쓰는 말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세워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방향의 문제일까요?

 

13장에서 사도바울은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14장에서는 그 원리가 은사 사용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 은사가 나를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옆 사람을 향하고 있는가?

나를 드러내기 위한 은사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세우기 위한 은사인가?

이것이 은사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 근본적인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은사를 판단하는 기준도 분명합니다.

이 은사가 한 영혼을 구원하고 세우는 데 도움이 되는가?

이것이 모든 은사를 살피는 기준입니다.

그 기준으로 보면 통역 없는 방언은 아무리 신비로운 체험이라도 공동체를 향해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6절부터 12절까지 세 가지 비유를 사용합니다.

피리와 거문고가 분명한 음을 내지 못하면 누가 무슨 곡인지 알겠습니까?

나팔이 불분명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겠습니까?

낯선 나라의 말을 하는 사람 앞에 서면, 나는 그 사람에게 외국인이 됩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11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라고 말합니다.

 

 제가 필리핀에 갔을 때, 현지 교회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예배 순서에 따라 찬양도 하고 설교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따갈로그어를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찬양의 곡은 낯설지 않았지만, 가사의 내용이 무엇인지, 설교가 무엇을 말하는지, 그들의 기도가 무엇을 구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한 시간 내내 앉아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어색함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거의 끝날 때쯤이 돼서야 통역하시는 분이 와서 그 어색함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외국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십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앞에 서 있는 모습.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는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

그런 경험이 있다면 얼마나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지, 얼마나 외로운지 압니다.

 

 통역 없는 방언이 예배 가운데 반복될 때,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지체는 바로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같은 자리에 앉아 있지만 외국인이 됩니다.

같은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소외됩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사랑의 실패로 봅니다.

같은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을 외국인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13절에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이 말씀은 은사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은사가 옆 사람에게도 닿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라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사도바울의 마음이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사도바울은 나는 영의 기도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도 하겠습니다. 신비로운 체험도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함께 아멘 할 수 있는 말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좋은 말로 축복해도 옆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면 아멘으로 응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7절에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옆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도바울은 19절에서 자신의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방언 일만 마디와 다섯 마디의 말이 서로 비교되고 있습니다.

숫자만 보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다섯 마디가 더 낫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다섯 마디가 한 사람을 가르치고, 세우고, 구원의 자리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기준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의 뿌리에는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의 소원이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농부 이야기를 하셨고, 잃어버린 양 이야기를 하셨고,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에 닿았습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사가 나를 향하면 훈장이 됩니다.

그러나 은사가 다른 사람을 향할 때 비로소 선물이 됩니다.

 

 새벽에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은사를 주셨습니다.

기도의 은사가 있는 분도 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분도 있습니다.

구제의 은사가 있는 분도 있습니다, 위로하는 은사가 있는 분도 있습니다.

목장에서 섬기는 손길도 은사입니다.

한 사람을 끝까지 기다려주는 마음도 은사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은사가 지금 누구를 향하고 있느냐?"

내가 받은 은사가 나를 돋보이게 하는 데 쓰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옆에 있는 한 사람을 세우는 데 쓰이고 있습니까?

목장 식구들과 함께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VIP와 함께 있을 때, 내 말과 기도와 섬김이 그 사람의 마음에 닿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의 기준은 분명했습니다.

"이것이 한 영혼을 세우고 있는가?"

하나님의 소원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소원을 함께 이루어 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흘러가는 은사가 가장 아름다운 은사입니다.

 

고작 다섯 마디여도 괜찮습니다.

그 다섯 마디가 한 사람의 마음에 닿고, 한 영혼을 세우고, 한 사람을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한다면 그것이 만 마디보다 귀합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께서 여러분 곁에 붙여주신 그 한 사람을 향해 사람을 세우는 사랑의 다섯 마디를 건네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묵상 - 하시깨묵】

① 어제 하루,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군가를 세웠습니까, 아니면 나를 세웠습니까? 솔직히 돌아봅시다.

 

②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나타나십니까?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 입니까?

 

③ "방언 만 마디보다 다섯 마디가 낫다"는 이 말씀을 내 삶의 어느 자리에서 적용해 볼 수 있을까요? (가정, 목장, 직장, 이웃)

 

④ 내가 받은 은사(기도, 말씀, 섬김, 구제, 위로 등)가 지금 주로 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⑤ 하나님이 나에게 붙여주신 VIP가 있습니까?

오늘 그에게 건넬 수 있는 '다섯 마디'가 무엇입니까?

 

⑥ 오늘 하루 결단할 한 가지를 기도문으로 적어봅시다.

 

【추천 찬송가】

새찬송가 218장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은혜의 찬양】

말씀 앞에서: https://youtu.be/JdO7ccZFvh8?si=j4HgLxQQLpaORcS0 

 

【새벽예배영상】

https://youtube.com/live/u88E3iHC5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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