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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나눔]6월 23일(화)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은사

작성자밀알(이선명)|작성시간26.06.23|조회수35 목록 댓글 0

【성경 말씀: 고린도전서 14:20–40】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3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3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도 입】

 군 동기를 전도하려고 오랜 시간 공을 들였습니다.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던 중, 그 친구가 처음 교회에 갔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대학생 때 친구 따라 교회를 갔는데, 사람들이 집단으로 통성으로 기도하는데 이 친구 눈에는 광신도들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큰 소리도 큰 소리이지만, 알 수 없는 이상한 말로 '따따따따' 하는데 무섭기까지 해서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그 뒤로 다시는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고, 자신을 데리고 갔던 친구와도 절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상황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방언이 예배 중에 홍수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오순절 때와는 달랐습니다. 오순절에는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말로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고린도 교회는 어떻습니까?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예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고린도 교인들은 이 방언 기도가 신령한 예배의 증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립니다. 사도바울은 그들의 생각을 명확하게 반박하고 있습니다. 먼저 은사는 나를 드러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기 위해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먼저 성숙함을 이야기합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이 말은 단순히 나이를 먹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방언을 많이 한다고 성숙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기 체험을 자랑하는 것은 미성숙한 신앙입니다. 아이들은 자기가 받은 선물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어른은 그 선물로 누군가를 섬깁니다.

 

 그런데 21절에서 사도바울은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합니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오래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명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앗수르의 낯선 언어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은혜의 신호가 아니었습니다. 심판의 신호였습니다. 하나님이 등을 돌리셨다는 표적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배경으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드러냅니다.

예배 가운데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홍수처럼 넘칠 때, 밖에서 들어온 불신자가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이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느끼겠습니까, 아니면 '여기는 제정신이 아닌 곳이다'라고 느끼고 나가겠습니까?

 

 23절에서 사도바울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 말합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한다는 것입니다.

방언이 많다고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마음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은사입니다.

 

 24절을 보면,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예언을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불신자가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판단을 받습니다.

이것은 욕을 먹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 내 모습이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25절에는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여러분 이것이 진짜 예배의 열매입니다.

불신자가 들어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엎드리고, '하나님이 참으로 여기 계신다!'라고 선포합니다.

누군가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드릴 때, 하나님이 여기 계시는 구나!라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은사의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은혜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 그 영혼이 무릎을 꿇게 하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신앙의 선물은 바로 이 방향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26절에서 사도바울은 질서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예배 때 각각 찬송도 있고, 가르침도 있고, 계시도 있고, 방언도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사도바울의 답은 하나입니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덕을 세운다'(오이코도메)는 것은 사람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집을 지을 때 한 장 한 장 벽돌 쌓듯이 공동체를 세워 간다는 말입니다.

모든 은사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방언에 대한 지침이 이어집니다.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통역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언에 대한 지침도 나옵니다.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른 이들이 분별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규정들이 성령의 자유를 억누르는 것처럼 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규정들은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은사의 수혜자는 나 자신이 아니라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32절에서 사도바울은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말합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어떤 이들은 성령이 임하면 자기 통제를 잃어버리는 것이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반대로 말합니다. 참된 성령의 역사는 더 깊은 자기 절제를 낳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내 자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더 온전히 하나님의 뜻 아래 놓입니다.

 

 33절이 이 모든 것의 신학적 뿌리입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화평의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의 예배는 그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배당 안에서만 적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화평의 하나님을 믿는 내가 오늘 어떤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는 사람들이 편안해집니까, 아니면 긴장합니까?

내 말 한마디가 사람을 세웁니까, 아니면 무너뜨립니까?

목장 모임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까?

은사가 많아도 공동체를 어지럽힌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아닙니다.

 

 반대로 특별한 은사가 없어 보여도 사람을 세우고 관계를 이어주고 화평을 만들고 있다면, 그는 이미 화평의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화평이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예배의 질서는 교회 행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의 문제입니다. 무질서한 예배는 단순히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화평의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의 예배는 그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34절에 보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미 사도바울은 앞에서 여성이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은 여성의 입을 막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질서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남편의 예언을 아내가 공개적으로 평가하거나 반박하면서 예배가 혼란스러워지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집에서 남편에게 물으라는 것도 배움을 막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배의 자리와 배움의 자리를 구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사도바울의 원리는 같습니다. 나의 권리보다 공동체의 유익이 먼저입니다.

 

 37절이 이 모든 논의를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자신이 가장 영적이라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이 말씀에 가장 먼저 순종해야 합니다. 참된 신령함의 증거는 자신의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낮아지는 것입니다.

 

40절은 14장 전체의 결론 문장입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이것은 외형적 규칙이 아닙니다.

화평의 하나님을 반영하는 예배의 내적 본질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그분의 성품을 담아낼 때, 그 예배는 세상을 향한 선포가 됩니다.

 

 에드워드 킴벌이라는 주일학교 교사가 있었습니다.

1855년,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청년이 일하는 신발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아무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그 청년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는 가게 뒤 창고에서 그 청년과 단둘이 앉아 복음을 나눴습니다. 그 청년의 이름은 드와이트 L. 무디였습니다.

 

 킴벌은 특별한 은사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유명한 설교자도 아니었고, 신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한 영혼이 마음에 걸렸을 때 그 마음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한 번의 방문이 역사상 가장 큰 부흥 운동을 일으킨 사람을 낳았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은사가, 우리의 예배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나를 드러내는 방향입니까, 아니면 한 영혼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방향입니까?

 

 화평의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세워지는 공동체와 돌아오는 불신자가 있습니다. 그분이 계신 예배에서는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고, 사람이 엎드리고,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용해야 할 은사입니다.

 

 오늘 이 새벽, 여러분 마음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마음에 걸린다면, 그것이 이미 은사입니다.

전화 한 통일 수도 있습니다. 안부를 묻는 메시지 한 줄일 수도 있습니다. 함께 식사하자는 초대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창한 능력보다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을 통해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그분이 우리 예배의 원형이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모든 은사의 뿌리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오늘 하루,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한 영혼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사람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묵상 - 하시깨묵】

① 어제 내 신앙의 표현 (말이든 행동이든)이 나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까? 솔직하게 적어보십시오.

 

②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나타나십니까? (33절을 중심으로)

 

③ 25절에서 불신자가 예배 중에'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고 선포하는 장면을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 교회 예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요?

 

④ 방언과 예언에 대한 바울의 규정(27–31절)은'제한'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삶에서'나의 자유'를 내려놓고 공동체를 세운 경험이 있습니까?

 

⑤ 37절의 도전("자신을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말씀에 먼저 순종해야 한다")이 나에게 어떻게 적용됩니까?

 

⑥ 오늘 내 마음에 걸리는 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위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은 무엇입니까?

 

⑦ 오늘의 결단을 기도문으로 적고, 실천 사항 한 가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십시오.

 

 

【추천 찬송가】 26장 구세주를 아는 이들

 

【은혜의 찬양】

슬픈 마음 있는 자: https://youtu.be/I6zEuEteBKI?si=RCD5HrGAS4kCzO8j

 

【새벽예배영상】

https://youtube.com/live/2DSOVgz1v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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