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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한국 사람들에게 너무나 익숙해진 ‘넬라 판타지아’의 원곡 ‘Gabriel's Oboe’가 삽입된 영화 <미션>의 도입부 중 한 장면입니다. 롤랑 조페 감독의 1986년作으로서 기라성 같은 배우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잘 짜인 극,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 등으로 유명한 작품이지요.
저는 이번에 수강 중인 전공 수업 중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주제로 접하게 됐습니다. 종교적 색채가 다소 강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고찰해 볼만한 여러 문제들을 제시해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만 읽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대신 훗날에라도 한 번쯤은 감상하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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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션”은 교황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하는 한 추기경의 독백과, 순교한 신부가 십자가에 묶인 채로 강을 떠내려 와 폭포에 떨어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과라니 족에 파견된 예수교의 선교사가 죽자 교회에서는 가브리엘 신부를 후임으로 강 상류에 파견한다. 가브리엘은 폭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과라니 족 영토에 들어간 뒤 그의 오보에를 연주 한다. 예수의 가르침이 음악으로부터 시작되어 왔다는 가브리엘의 말처럼, 오보에 소리는 과라니 족의 마음을 열도록 하였고 가브리엘 신부는 그들을 따라 부족의 마을로 들어가게 된다.
한편 로드리고 멘도자는 남미의 원주민들을 포획하여 시장에 내다 파는 악랄한 노예 사냥꾼이었다. 그는 강의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가 과라니 부족 사람들을 포획하고 마을로 돌아갔다. 포획 임무를 마친 멘도자는 그의 연인 카로타에게로 돌아가지만, 그녀는 멘도자의 동생 페리페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크게 상심한 멘도자는 결국 동생을 죽이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잠시 동안 정글을 떠나 개척민 마을에 돌아온 가브리엘은 정글에서 만났던 노예 사냥꾼 멘도자가 수감되었음을 알고 그를 만나게 된다. 멘도자를 참회시키고자 마음먹은 가브리엘은 그를 과라니 족에게 데려가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멘도자는 갑옷과 무기를 짊어지고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고행의 길을 걷게 된다. 수많은 위기와 절망을 겪어가며 멘도자는 가까스로 과라니 족의 영토에 도착하여 자신의 죄에 대한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그의 눈물을 본 과라니 족 사람들은 멘도자를 용서하였으며, 멘도자는 그 곳에 머무르며 가브리엘 신부의 수행자로 살아간다.
한편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영토 분쟁이 일어나게 되어 과라니 족의 영토가 악명 높은 노예제 국가인 포르투갈에 편입되자, 추기경은 원주민들로 하여금 산 카를로스 교회에서 떠나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과라니 족 주민들과 산 카를로스 교회의 신부들은 결국 추기경의 명령을 무시하고 교회에 남을 것을 결정한다. 여기서 로드리고는 순종의 맹세를 저버리고 무기를 들어 침략자와 맞서 싸웠으며, 가브리엘 신부는 신앙의 힘이 사랑임을 깨닫고 무기 없이 싸움에 임한다. 그렇지만 멘도자와 가브리엘은 막강한 군대의 힘에 의해 결국 목숨을 잃게 되었고, 영화는 추기경의 독백으로 끝을 맺게 된다. “그리하여 신부들은 죽고, 저만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건 나고, 산 자는 그들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 죽은 자의 정신은 산 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http://blog.daum.net/myrevenge/18262192
함께 살펴 볼 장면은, 과라니 족이 제한 시간 내에 영토를 떠날 것을 통보받은 뒤의 상황입니다. 줄거리에서 이미 밝혔듯 멘도자(로버트 드 니로 分)는 침략세력에 항거하기로 합니다. 그를 비롯한 몇몇 신부들과 이들을 따르는 과라니 족의 일부는 만반의 준비를 하지요. 이렇듯 정의의 칼을 내세우는 멘도자와 달리 가브리엘(제레미 아이언스 分)은 사랑이라는 절대적 가치에 충실하려 합니다.
시간은 다가오고, 식민지로 거느린 다른 원시 부족을 앞세운 포르투갈 군의 무자비한 공격이 시작됩니다. 세력의 크기와 무력의 수준에 이미 압도되지만 멘도자와 신부들은 최선을 다해 싸우고, 일부 과라니 족 역시 분노의 창을 내던집니다.
평화로웠던 대지에는 어느덧 핏빛 물결이 범람합니다. 통나무 다리에 화약을 설치해두었던 멘도자는 그 회심의 한 방을 앞두고 침략군의 총탄에 쓰러지게 됩니다.
죽어가는 멘도자의 시선은 가브리엘을 향합니다. 폭력은 어떤 이유에서건 정당화될 수 없다던 그의 신념이 옳았기를 바랐기 때문이겠지요. 가브리엘은 아비규환의 와중에도 상징물을 들고 자신과 같은 뜻을 따르는 과라니 족들과 비폭력 저항을 펼칩니다.
그러나 그 결말은 예고된 죽음이었습니다.
가브리엘과 멘도자의 대립은, 자유의지에 의한 각기 다른 가치추구에 따라, 같은 목적(식민지 해방 및 과라니 족 수호)에도 상이한 대응 태도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신부로서의 규범에 주목한다면, 둘의 대립 구도 혹은 멘도자의 경우에는 목적론적 vs 의무론적 윤리설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때 가브리엘/멘도자의 행위에 우리는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요?
저는 가브리엘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평화주의를 옹호합니다. 자못 거룩한 인류애에 숭고미마저 느껴지지요. 하지만 악을 향해 돌을 던지지 않는 이상 평화는 오는가-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제가 신부라면 당장 무기를 손에 들 것 같거든요. 혹은 제가 과라니 족이라면 오히려 멘도자처럼 직접 맞서 싸워주는 쪽이 고마울 듯도 합니다. 그렇기에 멘도자의 길 또한 약자들을 위해 진심으로, 사력을 다해 싸웠다는 점에서 존중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폭력은 또 다른 악을 낳을 뿐이겠지요. 멘도자는 ‘정의’라는 완장을 차고 무력을 휘둘렀지만, 그의 심판은 또 다른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은 현대 사회, 예를 들면 사형제도에 대해서도 이어질 수 있는 논제입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누구나 ‘가브리엘적’ 가치에 수긍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종종 그것이 전혀 다른 가치들(흔히 ‘욕심’)에 깡그리 무시되고 짓밟히므로, ‘절대적 사랑’ 혹은 ‘평화’는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리는 것 아닐까요?
(전공 수업 때의 이야기를 거칠게나마 요약해 덧붙이자면, 이 영화의 비장한 결말에 대해서는 오리엔탈리즘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서구의 종교 지도에 의해 과라니 족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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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외 0215083 변상권 작성시간 11.10.07 중요한건 사람들도 모두 두가지의 가치 모두 소중하다고 여긴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은것 같습니다. 만약 이게 당장의 자기 가족의 일이라면, 거대한 힘앞에서 자기자신과 가족이 싸워하 하는, 삶과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는 현실적인 상황이고 가족누군가가 이미 벌써 피해를 입은걸 본후 상황이라면, 과연 의무론적 윤리설을 택할수 있는 사람이 몇명이 있을까요? 자신이 가장이고 가족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면, 우리 모두 의무론적 윤리설은 사치라고 생각하지는 않을런지요... 저 역시 게브리엘의 행동이 순고한 절대선이라는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역시 멘도자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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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외 0215083 변상권 작성시간 11.10.07 솔직히 감정이입이 조금 되는군요... 목적을 위해 수단이 정당화 될 수는 없지만, 절대선/규범의로서의 의무론이 우리에게 지나치고 과한 수단에 대해서 한번더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줄것이고, 완전한 멘도자가 되는것을 방지해주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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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국문07 조민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12.03 메타윤리를 배우고 나니 더 공감이 가는 말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