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주시는 예수
(누가복음 7:11-17)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생각이 단순하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지만 생각이 많아지면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의심에 빠질 수 있습니다. 생각이 단순하다는 것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는 것을 받아 들인다는 것입니다. 명상이나 묵상을 할 때, 강조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라는 것입니다. 내 몸의 감각을 느끼고, 보고 듣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대부분 미래의 일들입니다. 가정해서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지금에 머무르지 못하고 생각이 앞서가는 것입니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자기 생각이 굳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정답을 정해놓고 상황을 판단하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있는 그대로 볼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많은 기적을 행하실 때 어떤 사람들은 놀라워하면서 ‘새 복음이다, 하늘에서 오신 분이다’ 라고 감탄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는 일 또한 사탄의 힘을 빌려 하는 것일 뿐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았는데 왜 예수님을 다르게 판단할까요?
예수님을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고 말하고, 말씀에 감탄하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 하나님의 약속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보고 듣습니다. 그러나 계명에 대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자기 생각이 굳어진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생각과 다른 말씀을 하시고, 다른 방법으로 일하시기 때문에 자기 생각으로 예수님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 다음 내용은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맞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묻는 것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메시아와 다르다고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질문을 받고 대답합니다. 22절에서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7:2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고 듣는 사람은 실족하지 않고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실족하지 않는 것은 의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고 듣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하는 일이며, 나사렛 회당에서 첫 설교를 하실 때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입니다.(눅4:18-19, 사 61:1이하)
앞에서 나온 여러 기적 행위와 오늘 말씀은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겠지요. 의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사역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믿을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7:1-10에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합니다. 이방인인데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백부장의 하인을 고친 것보다 더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죽은 이를 살려내시는 기적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아픈 사람을 고쳐 주었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지’ 라며 믿을 수 있지만 죽은 이를 살려냈다고 하면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는 가정을 먼저 하게 됩니다. 진짜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한 것, 잠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장례 행렬은 진짜 죽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들것에 실려 사람들이 메고 가는 시체를 주님이 살려내신 것입니다. 주님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나인 성이라는 농네로 들어가십니다. 그때 사람들이 죽은 이를 들것에 메고 장례 행렬을 이루고 나옵니다. 이 장면은 생명과 죽음이 교차하는 장면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주님과 기뻐하는 사람들의 행렬과, 죽은 이를 메고 슬퍼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마주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행렬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연민,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 어머니의 슬픔과 괴로움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공감하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처럼 해야 할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겠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슬퍼하는 어머니를 위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식 잃은 어머니를 보고 슬퍼하지 말라, 울지 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말이 위로가 될까요?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기쁨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할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에 손을 대고 멈추게 합니다. 죽음의 행렬, 슬픔과 괴로움을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시체를 향해 명령합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죽은 이의 관에 손을 대는 것은 부정한 일입니다. 율법을 어기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율법의 규정을 무시합니다. 율법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주님은 율법의 주인인 것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율법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이십니다. 율법으로 예수님의 기적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시체를 향해 명령합니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마치 살아있는 사람에게 말하듯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이를 살리실 때 항상 산 자에게 말하듯이 말씀하십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소녀야 일어나라’달리다 쿰(막5:41)이라고 명령하시고, 나사롤 살리실 때도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너라’(요11:43)고 명령합니다. 죽은 이들도 다스리는 권세가 있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주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명령하시자 청년은 일어나서 앉고 말도 합니다. 예수님은 청년을 어머니에게 돌려주십니다. ‘돌려주었다’는 표현은 슬퍼하는 어머니에게 기쁨을 돌려주신 것입니다. 청년은 어머니에게 희망이었고, 유일한 의지가 되는 사람입니다. 외아들을 잃은 것은 희망을 잃었고, 의지할 곳이 없어진 것입니다. 어머니의 삶은 슬픔과 절망, 두려움과 고통입니다. 그에게 아들을 돌려 줌으로써 희망과 기쁨을 얻게 한 것입니다.
생명은 기쁨이고 희망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심으로 기뻐하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하십니다.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들은 소리쳐 말합니다.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증언은 진실입니다. 큰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서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가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린 기적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왕상17:17-24, 왕하 4:32-37)
예수님은 큰 선지자로 오셨을 뿐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생명을 되돌리는 기적이 아니라, 죽은 이에게 명령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은 온 사방에 퍼집니다. 소문은 복음이 됩니다. 진짜 기적은 죽은 이를 살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사람들은 오늘 이야기처럼 기적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의 진정한 의미는 기쁨과 희망을 얻는 것입니다. 걱정과 두려움, 절망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시려고 주님은 오늘도 일하십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고 기뻐할 수 있다면 주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을 보고 듣지만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당신 오실 그 분입니까?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할까요?’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주님이 행하신 일을,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생명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려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아들이신 주님의 큰 사랑을 믿고, 주님이 나의 소망, 나의 기쁨이 되심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