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뮤직센터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하며,여섯아이의 아버지인 “반다”가 결근을 했다. 이유인 즉, 도둑맞은 소를 찾아 길을 나섰다고 했다. 소를 찾아 어디로 갔냐고 물어봤더니, 카롱가에서 자동차로 1 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치티파”라는 곳으로 떠났다고 했다.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든지 소는 부의 상징이다. 많은 소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부자라는 소리를 듣는다. 남자가 결혼을 하고 싶은 여자가 생기면 구혼을 하러 처갓집으로 가야하는데, 그때 소를 몇 마리나 가지고 가느냐에 따라 그 신랑의 위치가 정해진다. 보통 남자들은 2~3마리, 없는 사람은 한 마리정도 , 그러나 아주 없는 남자들은 외상으로 신부를 데려오기도 하는데, 그 결과가 때로는 비참하기 짝이 없다. 처갓집에서는 소를 안 가져 온 사위를 구박하기도 할 뿐 만 아니라, 때로는 딸과 손자, 손녀들을 아예 다시 집으로 데려가서 돈이나 소를 가지고 올 때까지 사위를 혼자 살게 한다. 그런데 만일 딸이 소를 안 가져온 사위보다 먼저 죽으면 처갓집에서는 딸의 시신을 빼앗아가 장례를 못 치르게 되면 사위가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빌려다 처갓집에 주고 시신을 받아 사위와 손자, 손녀들은 장례식을 치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다.그렇게 친절하고 온유해 보이는 말라위사람들에게 그토록 무자비하고 계산적인 사고방식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말라위의 현실이다. 그들은 물질에 너무도 밝은 사람들이다. 물론 가진 것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함께 살다보면 놀라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며칠 후, 경비원 “반다”가 다시 뮤직센터로 돌아왔기에 내가 물었다.
“소를 찾으러 갔다고 들었는데, 그래 소는 찾았나요?”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찾았다고 말했다. 나는 놀래서 “어디서, 어떻게, 누가 가져갔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아주 느긋한 음성으로 “우리 이웃 사람이 훔쳐다가 “치티파” 시장에 팔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치티파” 사장에 가서 기다렸다가 그 소를 되찾았어요“ 라고 했다.
“그래서 그 소도둑은 경찰에 넘겼나요?” 했더니 그는“ 아니요, 그냥 가라고 보냈어요. ”
“그냥 보냈다고?”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반다“는 찾은 소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3일이나 걸렸다. 물론 밤에는 길에서 눈을 붙이면서 낮에는 소걸음으로 100 km를 걸었던 것이었다. 그 고생을 하면서 소는 되찾았지만, 자신에게 그토록 해를 끼친, 나쁜 사람을 그냥 보내버린 것에 대해서는 나는 찬성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는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그 도둑질 한 사람을 용서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행한 나쁜 행위에 대해서는 경고를 주어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다는 오히려 자신이 소도둑을 그냥 보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듯했다. 그러나 범죄자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면 그가 베푼 용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듯 했다
말라위사람들은 어떤 경우든,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면 주술사의 마력으로 그 화가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믿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스스로 정죄하려들지 않는다. 겉으로 보면 그것이 참으로 성경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그 뒷면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어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할 용기가 없는 것뿐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온갖 범죄가 판을 쳐도, 심지어는 경찰까지도 범인을 잡아 처벌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을 나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말라위에는 소도둑, 자전거 도둑, 자동차 타이어 도둑, 심지어는 빨아 널은 옷까지도 훔쳐가는 일들이 많다. 이제는 더 이상 “가난하기 때문”에 라는 변명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범죄행위를 보고도 “무의미한 용서”로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도록 방심하는 것보다는 마음이 좀 불편하더라도 옳고 그른 것은 지적이 되어야 이 사회의 질서가 잡힐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무조건적인 용서일까? 아니면 잘못을 지적해주고 난 후에,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용서하라고 하신 것이 아닐까?
완전한 용서는 자신의 마음의 평화뿐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 자가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질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용서는 우선 나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진정한 용서를 받은 자에게는 회개의 길로 들어서는 축복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있기에 용서받은 자로서의 기쁨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