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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청자의 이야기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작성자ChungjaKim|작성시간11.02.21|조회수84 목록 댓글 2

오늘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듯한 날이었다. 일주일 동안 안 나오던 물이 오늘 아침에

수도꼭지를 트니 물줄기가 시원하게 흘러나왔다. 일주일?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물과 전기가 있고 인터넷도 되는 날, 이런 날을 수사님들과 나는 천국이 임했다고 기뻐한다.

이런 날이 실상 그리 많지가 않다. 그래서 천국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솨미나드의 주변은 작은 동산과 온갖 나무들로 가득하여 정말 아름답고 평화롭다.

아침에는 해 뜨는 정경, 저녁에는 이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는 곳,

여기에 주거환경까지 완벽하면 아마도 아프리카에서는 최상의 삶이 아닌가 싶다.

 

나는 주일이면 늦잠을 자고 우리 집 앞에 있는 현지인 성당 10시 미사를 간다.

말라위에는 영어와 릴롱궤 쪽에서는 지체와, 카롱가 쪽에는 툼부카를 쓰고 있다.

현지인 미사이니 만큼 툼부카로 미사를 드리는데 신부님들이 부족하여 주로 공소 예절로 드려지는데,

말이 공소예절이지 2시간 이상이 걸리는 대단한 말씀과 찬양의 예절이다.

매 주일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으면서 2시간을 함께 해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신부님들의 좋은 강론이나 같은 언어로 함께 부를 수 있는 찬양이 그립다.

 

평소에는 사목회장님이나 수사님들이 주례를 하시는데 오늘은 청년회간부가 주례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내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청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는 청년이 제대에 서서 독서와 복음말씀 선포,

또 모든 기도를 맡아하고 있었다. 내마음속에는 조금 전에 수사님들과 함께 선포한 천국이 임한 것이 아니라,

분심과 불쾌함으로 산만해지기 시작했다.아니 게다가 삼손이라는 그 청년은 40분이 넘게 강론까지 했다.

이제는 그 목소리까지 역겨웠다. 그렇다고 성당을 떠날 수는 없는 일이니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삼손이라는 청년은 키가 작으마한, 섬짓할 정도로 강렬한 눈빛을 가진 25세의 젊은이다.

왠지 가리옷 유다의 눈빛도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눈빛이다.

그는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로서 자신이 먼저 나에게 접근을 시도해 왔다.

자신은 솨미나드 청소년 그룹 대표인데 카롱가 시내에 있는 유스 센터를 가려면 2시간이나 걸어야하니

이곳에도 유스 센터를 지어 달라는 요청을 하러 온 것이다.자신이 책임지고 관리하겠다고 했다.

나는 처음에는 그의 적극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어 루수빌로 공동체와 상의해서 고려해보겠다고 했다.

그 후 그는 얼마나 자주 내 앞에 나타나는지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먹을 것을 사야하니 돈이 필요하다고 도움을 청했다.

나는 마음이 약해져 그가 요구한 돈을 주면서 빨리 회복되시길 바란다고 위로해주면서 그를 떠나보냈다.

말라위 사람들은 너무도 친절하게 관계를 시작하다가  언젠가는 돈을 요구하기 때문에 관계를 망쳐놓는다. 

 

지난 11월 음악부를 개설하면서 음악회를 준비하는데, 정식 학생도 아닌 이 청년은 계속 뮤직센터에 나타나서

학생처럼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나는 그에게 여기는 학생으로 등록 된 사람들만 들어와서 공부하는 곳이라고

말해도 떠날 생각을 안했다. 음악부 건물 안에는 도난 문제로 외부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기 것과 남의 것에 대한 개념이 확실치 않아서 방심하고 있으면 물건들을 도난당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남양성지 성모님을 훔쳐갈 까봐 벽돌집을 지어서 자물쇠를 달아 놓을 생각을 했겠는가?

우리는 상상도 못하는 일들이다.

 

음악부 오픈 기념 음악회가 있던 날, 학생들을 점심 먹으라고 식당으로 보낸 후,

나는 혼자 남아서 연습을 하다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나의 열린 핸드백 앞에 그 청년이 서 있었고

나를 본 후 당황해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서 우리의 관계는 최악으로 변했다.

분명 나는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언제 내방에 들어와서 왜 내 열린 핸드백 앞에 서 있었을까?

나는 화가 나서 그에게 큰소리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더니, 자신은 결백하다고 오히려 변명하려

드는 것이 아닌가? 아프리카인들은 결코 잘못했다고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그 후 알게 되었다.

들이 잘못을 인정하게 되면 법적으로 어떤 처벌을 받게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한다고

한다. 그 후 루수빌로의 직원으로부터 그의 평판이 좋지 않음을 알게 되니 더욱 기분이 씁쓸했다.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나에게 어떤 의도를 갖고 접근해왔는지 모르지만, 결국 그는 내게 상처를 주었다.

우리 집 근처에 살고 있는 그를 자주 볼 때 마다 마음이 펀치 않았다.

그가 성당 청년회에 간부로 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더욱 놀랐다.

는 어떤 마음으로 하느님 성전에서 봉사를 하고 있을까? 하느님은 그에게 뭐라 하실까?

아직도 그를 ‘사랑하는 나의 아들, 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아들“이라고 하실까?

답이 나오질 않는다. 하느님과 그의 관계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결하시겠지만,

나는 언제까지 그를 예수님을 배반한 가리옷 유다처럼 대할 것인가?

 

아직도 용서할 마음이 없었던 그를 오늘 성당에서, 그것도 제대위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복음 말씀이 진심이었기를.....그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아신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정의를 하느님 사랑 보다 더 앞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뜻은 이 세상에 용서 못 할 일이 없다는 의미 일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아시고도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시는데....

사랑보다 더 위대한 정의는 없다고 하지 않는가?

이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 뒤에는 하느님의 뜻이 숨어져있는 법이다.

오늘은 내가 그동안 겪은 이 불편한 마음을 치유해 주시고자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보여주시면서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내게 일러주신다.(마태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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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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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펠라 | 작성시간 11.02.21 하루에도 몇번씩 시험에 들게 하시네요..
    아마 지금 그곳에서 필요한건 물질적인 도움보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 정신적인 영성이 더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 작성자smilejina | 작성시간 11.02.24 교수님 힘드시겠어요 힘듦뒤에오는 결실이 빨리 맺히길 기원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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