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勝利)로 가는 길.
롬7:15-25절, 390.391.395장. 3927 Bible 말씀연구소 박봉웅 목사.
오늘 밤 읽은 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의 자서전적인 내용입니다. 말하자면 사도 바울의 간증인 셈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진리를 편지로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율법은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말했습니다. 그 자신도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는 줄 알고 바리새적인 열심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이 있은 후에 그의 생애는 완전히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구원받고 중생한 사람도 영적투쟁은 끊임없이 계속되며 참담 하리 만큼 깊은 좌절을 맛볼 때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밤에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 깊은 진리를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우선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는, 모든 인간은 자기 속에 두 종류의 인격의 실체가 서로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여러 번 이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9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라고 했고,
22절 이하에는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罪)의 법(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성경(聖經)귀 절 들은 자기 분열(自己分裂)의,
비참한 결과(結果)를 깨달아 알게 된 사도 바울의 가슴 아픈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속에 터질 것 같은 아픔을 참다못해서 24절에서“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밤에 사도 바울의 영혼 깊이에서 우러나온 이 울부짖음에 여러분은 동의하십니까? 2009년 전에 사도 바울의 고뇌와 아픔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야누스적인 두 얼굴의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여기 고백(告白)한대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 쉽게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육신의 정욕 때문에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살다가 보니 내 심령 속에 또 다른 소리가 나를 채찍질합니다.
마음으로는 유신론을, 육신으로는 유물론을 따르게 되니 거기서부터 심한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말은 주님의 뜻을 따른다고는 하나 우리들의 행동과 삶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고사하고 늘 세상과 짝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말은 신본주의이지만 우리들의 행실은 인본주의적입니다. 우리 속에는 두 가지 법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두 가지 실체가 싸우고 있습니다. 중생한 사람이라도 두 종류의 세력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 가운데 두 종류의 실체가 싸우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고뇌하는 그 자체가 벌써 하나님의 은혜요 희망적입니다. 죽은 사람은 감각이 없습니다. 마취가 된 사람은 내장을 도려내어도 아픈 감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 정상적인 사람은 조그마한 상처를 입고도 아파합니다. 좀 더 큰 상처를 입는다면 울부짖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인 생활 신앙세계에도 꼭 같을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가슴앓이를 할 줄 아는,
예민한 영적 감각이 있는 사람이어야 골고다를 바라보고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 볼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신앙인이라 한다면 영적 생활에 실패했을 때, 그것을 슬퍼하고 안타까워 할 줄 아는 영적 예민함이 있어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꼭 같은 죄를 범하고 꼭 같은 실수를 했는데도 어떤 사람은 아무 감각이 없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것 때문에 고통당하고 괴로워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수도 없이 작정하고 노력하지만 또 다시 넘어지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합니다.
이럴 때 고뇌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이중적인 인격의 파열에서 오는 고뇌를 심각히 받을 줄 아는 사람은 희망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선 우리 속에서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소원대로 되지 않고 죄가 원하는 대로 끌려가는 자아에 대해서 탄식하며 고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고뇌와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고후7:9-10절에 보면 "…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중략)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놀라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기 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고 고뇌하고 슬퍼하는 것은 결국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가져 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쓸데없는 고민과 구별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모든 염려와 근심은 우리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언제나 고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최근에 우리들은 일찍이 사도 바울이 그렇게도 안타깝게 부르짖었던 영적투쟁의 고뇌가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강단들에서도 그저“평안하다", "좋다", "위대하다", "할 수 있다" 만을 말할 뿐입니다. 교인들도 가능하면 부담 없고, 가능하면 쉽고 편리하게, 가능하면 얽매이지 않는 것을 좋아하고 강단에서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달고 맛있는, 부드러운 것만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현대 교인들은 고뇌할 줄 모릅니다. 죄 때문에 고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크리스찬 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연약과 부족에 대해서 고뇌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회개할 수 있고 그 과정을 겪은 후에야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어떻게 부활이 있으며, 죄 때문에 고민하고 고통 함이 없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기뻐하십니다. 다윗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 때문에 고뇌할 줄 알고 몸부림치며 회개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51편에 철저히 자기를 회개하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은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다가 더 많은 고통을 겪고 있던,
사도 바울의 외침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그 상한 심령이 귀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기독교는 즐기는 기독교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물론 복음은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기독교의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싸우는 두 가지 실체 곧 성령의 법과 육신의 법이 싸우고 있는데 대한 철저한 고통이 없이 기뻐하는 것은 인본주의 사상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체험했던 것처럼, 자기 속에 싸우고 있는 두 실체 때문에 고뇌하고 고민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와 죄를 좋아하는 내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다 된다는 생각은 인간의 실존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선을 행하면서도 그 일을 통하여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하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미워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죄를 미워하면서도 죄에게로 바짝 다가가는 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 필요하고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고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자기 결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자기결단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만 가지고 어림없습니다. 그 이유는 내 속에 있는, 죄의 세력은 우리 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속에 있는 생명의 법 또는 주의 능력이, 이기도록 주님께 의지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는 것은 죄를 정복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수님의 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주님의 능력으로 죄를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도, 우리는 완전주의가 아닙니다. 우리는 한번 중생의 체험을 가진 후에는 죄도 안 짓고 실수도 안하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화(聖化)의 과정(科程)을 겪는 가운데 늘 약해서 쓰러지고 넘어지기를 계속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는 것은 정상이고 넘어지는 것은 비정상(非正常)입니다. 일곱 번 넘어지나 여덟 번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도는 넘어지지 않기 때문에, 귀한 것이라기보다는 넘어져서도 다시 일어나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고뇌하는 사람은 죄의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죄 때문에 고뇌할 줄 아는 사람이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깨닫습니다. 예수의 은총을 아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어야 이웃과 세계를 위해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선교 적 사명을 받은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마음속에 있는 두 가지 자아 때문에 고통을 당하면서도 문제해결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25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곧 사도 바울의 결론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두 가지 자아 때문에 고뇌할지라도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실 때 능히 죄를 어기고 승리한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길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로 말미암은 고뇌는 고뇌에 그치지 않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구원의 기쁨과 감사를 낳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을 맛보며 주 안에서 나의 죄를 이기고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어서 승리의 길을 가는 성도의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