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아파트 베란다에 턱을 괴고 담배를 문다. 담배 연기를 내뿜다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박혀있다. 그래, 하늘엔 별이 있다. 내가 보지 못했을 뿐. 별은 하늘에 둥둥 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별을 찾지 않았던 거지. 무엇에 그리 쫓겨 다니라 별을 보지 못한 걸까. 도시의 하늘엔 별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내 마음이 별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땅만 보며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는 데만 깊이 빠져 있었지. 번쩍이는 네온사인에 별을 잊었던 거지. 집이라고 돌아오면 앞뒤로 막힌 높은 아파트에 묻혀 고개를 직각으로 쳐들지 않으면 찾을 수도 없었지. 눈앞에 별이 쏟아지듯 웃고 있는 모습을 본지가 너무 오래다. 우리의 삶터는 목뼈가 아프도록 뒤로 제치지 않고서는 별을 꿈을 찾을 수 없도록 바뀌었지. 아니 별을 찾으려는 꿈마저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한 거지.
공장에 다닐 땐 짬만 나면 커피 자판기로 달려갔다. 한잔을 마셔야 쉬는 것 같고, 노근한 몸도 풀리는 것 같아서. 일이 지치고 지루하면 찾는 것이 커피였다. 요즘 공장을 그만 두니 커피 마실 일도, 커피 생각도 나지 않는다. 오늘 내가 옮겨 갈 마을에 사는 친구를 만났더니 속이 알알하도록 매운 찜을 사준다. 오랜만의 외식에 배가 빵빵하도록 먹고 났더니 친구가 자판기 커피 한잔을 하자기에 마셨더니 커피의 약 기운이 살아났던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하루에 몇 잔씩 마셔도 예전엔 잠만 잘 잤는데. 아니, 잠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이 하나 더 있다. 오늘에서야 내가 앞으로 살 시골집을 계약했기 때문에 소풍 가기 앞날 잠 못 이루는 초등학생의 맘이 된 것은 아닐지. 아무튼 눈을 감아 보지만 머리는 말똥말똥 거린다.
아무튼 쉼표의 삶에 오늘은 한 가지 일에 마침표를 찍었다. 새로운 삶의 잠잘 곳을 만든 거다. ‘되살이’를 준비하며 다짐 한 것이 ‘내 것’을 없애는 거다. 무엇을 지녔다는 것은 당장에야 조금 편하고 여유로울지 모르지만 결국은 내 목을 옭아매는 올가미이기 때문이다.
집도 그렇다. 비어있는 집이 수두룩한데 굳이 내 것으로 만들 까닭이 없는 거다. 빌릴 수도 있고, 때론 세를 얻어 살아 갈수도 있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니 세상이 모두 내 것처럼 여겨진다. 마음의 부자가 된다.
아파트를 사고, 자동차를 가지고 했던 일이 때론 기쁘기도 하고, 사람 구실도 한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은 융자금 생각에, 차를 굴리려면 기름 값에 세금에 늘 일에 묶여 살아오지는 않았던가. 무엇인가가 ‘내 것’으로 될 때, 내가 간직했던 하늘의 맑은 별을 못 본 척 하지는 않았던가. 내가 지녀야 할 것은 사랑이다. 내 몸, 내 식구, 내 이웃, 내가 사는 겨레. 이토록 값지고 소중한 것이 많은데 나는 내 숨통을 조이는 것에 더 욕심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버릴 것이 수두룩하다. 함안 별천 계곡을 더럽히지 않으려면 빨리 내팽개쳐야 할 쓰레기가 많다. 버릴 것이 너무 많다보니 이제 버리려고 해도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한 가지씩 빨간 줄을 치며 버리자. 그것만이 가깝게는 내 몸을 사랑하는 것이고, 크게는 겨레를 사랑하는 길이지 않은가. 이게 ‘살이’다. 지저분한 욕심덩어리인 내겐 ‘되살이’이고.
빈 집과 작지만 우리 식구가 먹을 것은 가꾸어 먹을 수 있는 밭도 얻었다. 쌀농사를 지을 논도 많이 버려져 있다고 한다. 앞으로 몇 해가 될지 모르겠다. ‘되살이’가 뿌리 내릴 날이.
이제 당장 먹고 살 공장도 알아봐야 한다. 버티는 길은 내겐 노동이다. 공장이든 농토든.
홀로 ‘노동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 나를 버리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나를 살리며 가꾸어 가는 세상이 함께 사는 세상이지. (2003. 9.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