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용차 시동를 건다. 퇴짜를 맞고 씁쓸하게 돌아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오전 11시가 지난 시간이라 그런지 길은, 막힘없이 뚫려 답답했던 가슴까지 시원하게 풀리는 기분이다. 아들이 있는 창원을 향해 가속페달을 힘껏 밟는다. 아들을 향한 마음은 언제나, 가속이다.
아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 언저리가 짠하다. 밥은 무엇으로 먹는지, 김치도 없이 느끼하고 기름진 음식을 매일 먹고 있을 아들을 위해 알타리김치를 담고, 그가 좋아하는 콩나물을 맛깔나게 무치고 귤 사과 감 등 제철 과일도 한껏 챙겼다. 손수 세탁한 흰 티셔츠 2개도 차곡차곡 넣었다. 목 부분과 겨드랑이 부분이 누렇게 변해서 못 입겠다고 보낸 옷을 하루 동안 세제에 담가 빨았더니 새 옷처럼 하얗게 보여서 기분이 무척 좋았다. 부쩍 야윈 아들을 생각하며 지난 추석에 선물로 받은 정관장 홍삼 선물 세트도 빠뜨리지 않고 가방에 가장 먼저 넣고 보니 짐이 한 가득이다.
아들은 아직 미혼이다. 결혼하면 사돈의 사위일 뿐 남과 다름없다는 우스갯소리를 유념하면서도, 자신의 짝을 만나는 날까지 어미로서 공을 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엄마의 역할이 갈수록 난이도가, 높은 수학 문제를 푸는 듯, 쉽지 않다. 서로 마음 상한 일도 없는데 나를 대하는 아들의 말투는 초겨울 바람처럼 싸늘할 때가 많다. ‘마음에 무슨 불편한 것이 많은 것일까.’ 나는 애써 챙겨간 음식을 다시 가지고 가라고 할 때는 당황스럽고 섭섭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아닐 테지.
아들은 밀당의 대가다. 남편을 그대로 빼닮았다. 나는 늘 아들과 지는 게임을 하는 편이다. 그럴 때마다 취준생이라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런 거겠지, 라고 생각하며 나 스스로 위로해 본다.
아들은 어렵게 낳은 늦둥이다. 딸 들을 먼저 낳고 8년 만에 계획에도 없이 우연히 찾아온 선물 같은 아들이다. 남편과는 7살 차이가 나다 보니, 시동생 두 명은 나보다 나이가 다섯 살, 두 살이나 더 많아서 처음에는 참 어려운 관계였다. 아랫동서는 나보다 세 살이 많은 상태였다. 손아래 동서 두 명이 각각 동거생활을, 하고 있던 때였다. 나는 장손인 남편과 결혼했지만 제일 늦게 시집의 가족으로 합류한 셈이었다.
결혼하고 이듬해였다. 동서들은 연달아 출산을,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둘 다 아들을 낳았지만, 같은 해에 나는 딸을 얻었다. 서로 초보 엄마라 육아 경험을 공유하며 즐거운 일도 힘든 고충도 함께 나누며 좋았다. 문제가 발생했다. 내가 연달아 또 딸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걱정이 앞선 나와 남편은 조용히 있었다. 시어머니는 섭섭이를 낳았다며 은근히 눈치 주기 일쑤였다.
나는 내심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낳은 아기를 볼수록 신기하고, 두 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가끔 아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딸 둘을 잘 키우면 된다는 생각에, 주변 사람들의 기세등등함을 마음에 오래 두지 않았다.
집안일이 너무 많았다. 둘째 동서는 아들만 셋을 줄줄이 낳아 매사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 그러나 집안일은 모두 내 몫이었다. 1년에 기제사 여덟 번은 결코 쉬운 일도 아닌데 혼자 척척 해내며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쉴 틈 없이 튀김 여덟 가지, 생선 굽기,나물 볶기, 수육 삶기 등등 종일 해내고 나면 두 다리가 저릿해 왔다. 그 누구도 수고했다는 말을 표현하거나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당연히 나 혼자 다 해야 한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처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한 순간이다. 한편, 기대 자체를, 안 하기로, 마음 먹었다. 당연히 내 몫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으니 편안해졌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 아닌가, 남을 탓하기 전에 결국 나를 위한 마음 챙김이 아니었을까.
맏며느리인 나의 입지는 어쩌면 앙상한 겨울나무 신세가 아니었나 싶다. 제일 늦게 합류하였으니, 위계질서는 상상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손아래 동서가 세 살이나 많기도 하거니와 아들을 셋이나 낳았으니, 어깨에 힘줄만도 했다. 남편은 딸딸이 아빠였으니 시동생들 앞에 서는 한풀 꺾인 듯 주눅이 들어 보였다.
어느 날 문득, 남편에게 아들이 필요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남편의 의중을 물었더니 “아니···”라면서 자신의 마음과 다른 표현을 해서 나를 더 미안하게 했다. 그 후로 나는 아들을 낳게 해 준다는 유명한 산부인과를 찾아다니며 비법을 물어보았다. 의사가 시킨 대로 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아들을 낳는 일이 어찌 인위적으로 가능한 일이겠는가 싶어 두어 번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둘째 딸아이가 7살이 되던 날이다. 갑자기 입덧이 시작되었다. 설마, 설마··· 속으로 아닐 거라고 중얼거리며 산부인과를 찾아갔다. 의사가 검사 결과를 보여 주더니
“어! 임신이네,” 라며 웃어주었다. 그때는 내가 직장을 다니면서 성공 가도를 달리던 때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하느님은 두 가지 복은 안 주시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1996년 12월 겨울 햇살이 포근하던 오후, 아들은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남편은 퇴근 후 병원으로 달려와서 아들과 첫 대면을 한 그 장면이 웃지 못할 만큼 밝았다. 콧구멍이 평소보다 세 배나 더 크게 벌렁거리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들의 첫 인상이 너무 좋았다는 것이다. “이제 나도 딸딸이 아빠가 아니야, 수고했어,”라며 어깨가 세 뼘은 올라가 있었다. “저렇게도 좋을까?”
아들을 출산 후 달라졌다. “아들 안 낳고 이 집밥 먹을라고 했더나!”라고 역정을 내시던 시어머니의 호령도 잦아들어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들 낳을 생각이면 재산을 많이 모아서 우리 어영이를 주세요!”라며 호기롭게 말하던 동서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었다.
언젠가 아들의 생일날 편지 한 통을 정성껏 썼다. 아들! 넌 엄마 인생에 9회 말 역전홈런이야! 지난날을 생각하며 가속페달을 밟고 아들에게로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