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음성'
매순간 메시지를 주신다? 성경에 다 있다? 아무래도 좋다?
이 책은 하나님의 음성과 인도하심에 대해 말한 아주 훌륭한 책이다.
우리는 영혼의 파멸인 죄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매순간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우리는 무지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매달리다가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를 하기가 쉽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문제, 즉 하나님께서 우리와 대화하시기를 원하시는가에 대해, 또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가에 대해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3장에서는 하나님의 인도를 포함해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에 대한 세 가지 잘못된 해석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들은 통상적인 해석이지만 명백한 오류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인도를 받아 살려는 우리의 노력에 분명 큰 해를 끼치는 것들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고 있다.
첫번째 오해 - 매순간 메시지를 주신다는 견해
이 첫번째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생여정의 매순간 우리에게 할 일을 일러주신다. 적어도 우리가 묻기만 하면 언제든 일러주실 의향과 준비를 갖추고 계신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성경으로도,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교회의 공동체험으로도 입증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예컨대 베드로나 바울의 삶을 볼 때 그들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았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연합은 우리가 이 생에서 상상할 수 있는 - 우리가 과연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다면 - 가장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조차도 매순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 계시를 받았다는 징후는 어디에도 없다. 그분은 늘 순종하실 만큼 아버지와의 연합이 아주 깊었다. 그런데 이 연합은 삶이나 사역의 모든 세부사항에 대해 "지금은 이것을 하고 지금은 저것을 하라"는 식의 지시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숙한 뜻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이해에 기초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말씀하신다는 개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하나님의 사역은 우리를 매순간 그분의 명시적 지시에 묶어두지 않는다. 씨앗을 심고서 너무 깊이 간섭하면 정상적인 성장을 방해하게 된다. 식물의 생명도 그렇고 어린아이의 삶도 그렇다.
이 모델대로 살려고 발버둥치거나 적어도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을 잘 관찰해보면,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며 아무리 힘써도 결국 낭패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매순간 메시지를 주실 능력이 있다. 하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찬양함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데 사로잡힌 나머지 그분이 실제로 하시는 일의 실제적 요지를 놓치고 만다.
우리는 교육프로그램 개발, 전도집회 개최, 선교훈련, 기타 교회활동을 수행할 때 이 점을 필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집회에 나와 노래하고 손뼉치고 기도하고 헌금드리는 로봇집단을 만들려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배드릴 때도 그렇고 특정 사역이나 사역자를 모범으로 제시할 때도 그렇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각자 독특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돌릴 그분의 아들 딸을 키우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수단이 이 목적에 부합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어떤 책에서 또 주일 말씀에서, 다윗이 무엇을 하기 전에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먼저 기도했다는 것에 은혜를 받았다. 그후로 나는 사소한 것에도 하나님께 마음속으로 '지금 이 일을 할까요, 하지 말까요?'라고 묻고, 또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에 대해 기도했다. 물론 이러한 기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나의 삶이나 사역의 모든 세부사항에 대해 "지금은 이것을 하고 지금은 저것을 하라"는 식의 지시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숙한 뜻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이해에 기초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두 번째 오해 - 성경에 다 있다는 견해
이 두 번째 견해 역시 심각한 오류요 매우 해로운 것이라 생각한다. 성경을 높이려는 의도는 좋지만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열정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에는 우리 인생의 많은 상황에 관해 직접적 지침이 나와 있다. 그러나 인생의 다른 의문들에 접할 때마다, 우리 삶의 많은 구체적 상황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부득불 깨닫게 된다.
성경은 다음 주일에 어떤 찬송을 불러야 하고 다음 강연이나 설교 때 어떤 말씀을 본문으로 택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세부사항에 해서도 대개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키우는 법을 알고 싶다고 생각해보라. 성경에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은 나와 있지만 이 주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싶어하고 알아야 할 모든 것이 밝혀져 있지는 않다.
물론 원리는 모두 성경에 들어 있다. 그러나 원리대로 살려면 먼저 적용이 필요하다. 성경을 존중하고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각 개인에게 주시는 가르침, 즉 성경의 원리 안에 있되 성경의 세부내용을 벗어나는 가르침의 필요성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각 개인이나 상황에 대한 구체적 말씀이 성경에 들어 있다는 잘못된 기대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앞에서 말한 '성경룰렛'을 일삼게 된다. 그들은 성경을 아무 데나 편 다음 어느 구절이 걸리는지 보려고 마음대로 손가락을 갖다댄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뽑힌 구절을 읽고는 그대로 문제에 대입시킨다.
일부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방법을 사용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분명 성경이 권하는 절차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한없이 크신 분이므로 그분을 진지하게 찾는 사람의 삶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하신다. 심지어 더없이 미신적인 방법도 허용하고 사용하실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영적 삶을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이라는 증거는 아니다.
많은 독실한 성도가 불안과 절박한 필요 때문에 그런 일을 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인도의 내용대로 행하다가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큰 해를 입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들은 '성경 룰렛'의 패자다. 이런 불행한 사태는 예수님의 단순한 말씀과 얼마나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는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세 번째 오해 - 아무래도 좋다는 견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에 대한 이 세 번째 잘못된 견해는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고민에서 벗어나 마음에 평안을 누린다는 면에서 큰 설득력을 얻곤 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하나님과 자녀간의 의식적 대화의 가능성을 일체 포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341장)라는 유명한 찬송가가 있다. 이 소절만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지금의 주제와 정확히 일치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전체 가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일이 벌어져도 하나님의 인도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벌어지는 많은 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분이 분명 손을 들어 그것을 중단시키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한 예로 그분은 "아무도 멸망치 앟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 2:9). 그러나 무수히 많은 사람이 회개에 이르지 않아 멸망하고 있다. 하나님의 세상은 우리의 역할이 없어서는 안 되는 곳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만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고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도 중요하다. 일이 어떻게 되든 무조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인도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많은 사건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바로 우리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의 명시적 지시 없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일이 그 자녀의 상태와 수준의 최종지표이다. 우리와 하늘 아버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빠지기 쉬운 오류이다. 나는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믿은 후부터 쭉 눈물로 기도해왔었고, 전도를 했다. 그런데 교회 수련회 중 아버지께서 갑자기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때는 연락이 안 되어 상 나가는 것도 보지 못할 뻔하였다.
나는 이 일로 인해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는가? 나를 사랑하시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그러나 결코 아버지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고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아버지의 영혼을 더 사랑하시고 그가 구원받기를 원하심을 깨닫게 하셨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며, 설령 나쁜 일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하셨다.
4장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대화적 관계라는 개념 자체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며 나를 인도하실 의향도 있고 능력도 있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장이 도움이 될 것이다.
네 가지 부정적 반응
대개 사람들의 정직한 반응은 이렇다. 하나님은 평범한 인간들을 자신의 임재로 둘러싸고 그들에게 말씀하심으로 그들과 대화하실 마음이 없다. 하나님은 실제로 그들과 그런 식으로 대화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대화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이 책의 내용과 달리 각 개인과 대화하셔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화하실 마음이 있다. 하나님은 인도하실까?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시편 기자도 묻는다.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시 94:9). 나는 덧붙여 이렇게 묻고 싶다. "우리의 혀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서로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이 우리와 말씀하며 대화하지 아니하시랴?" 나는 하나님 아버지가 말도 없고 대화도 하지 않으시는 비인격적 실체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분은 실제로 대화하신다. 그러나 주파수가 맞춰져 있는가?
물론 우리가 듣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끼리도 상대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의 많은 메시지가 우리에게 쏟아져 우리를 통과하거나 우리 곁을 지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음성에 주파수가 맞춰져 있지 않다. 예수님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시면서도 그분은 청중에게 잘 듣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하나님은 대화하셔야만 한다. 기독교 리더십의 모본과 훈련에서 우리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을 지시대로 행하게 만드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세상의 리더십 구조를 다분히 따르고 있다. 사실 교회 안에서든 밖에서든 공동체 운영방식에서 이야기하는 '리더십'은 대체로 공허한 완곡어법에 지나지 않는다.
리더십- 이단과 그리스도
그들은 대부분 하나님이 일반구성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들 내의 1인 혹은 소수의 핵심 인물들에게만 말씀하신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이단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마음도 믿어서는 안 되고, 소속단체의 맥락을 벗어나서는 자신과 하나님의 의사소통으로 여겨지는 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배운다. 물론 상부에서 내려온 말씀에 동조해야 한다는 압력도 존재한다. 종종 추종자들은 모순된 선언을 수용해야 하며 지도자의 명령이라면 상식조차 깨끗이 저버려야 한다고 배운다. 이것이 많은 이단의 공통된 현상이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주류'에 속하는 종교단체들도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볼진대 자신의 리더십 모델이 사실상 이단의 길을 닦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도 적잖이 그런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 사역자로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충분한 동조와 지원을 확보하여 내 계획을 유지하고 확장할 목적으로 사람들 개인의 생각을, 그리고 주님의 인도와 의사소통에 대한 그들의 개인적 체험을 버리게 만들려는 동기가 내게는 얼마나 많은가.
내가 몸담고 있던 선교단체는 복음적이고 열심이 있는 단체이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심각하게도 이러한 리더십의 모델을 따르고 있다. 각 개인의 비전도, 또 생각도 지도자와 틀리면 자신의 비전을 버리고 지도자의 말에 순종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아프지만 이러한 점을 회개케 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만들 것을 믿는다.
5장- 침묵은 응답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적 관계에서 기도생활보다 더 중요한 부분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지 않을 때도 많지만 나는 언제나 그분이 응답하신다고 믿는다. 그분은 어떤 식으로든 언제나 우리에게 대답하신다. 흔히들 그렇듯이 자기가 구한 대로 주실 때에만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재미있는 현상이다. 구한 것을 주시지 않았을 때는 그분의 대답이 없었다는 말인가?
그 경우 하나님의 침묵이 곧 응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듣는 법을 안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것을 주시지 않을 때에도 통상적으로 우리에게 뭔가를 말씀하신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고 인정하는 법을 배웠다면 우리는 그것을 들을 것이요. 그것을 통해 자라갈 것이다. 바울의 유명한 '육체의 가시'가 분명 그렇다. 바울은 그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주님께 세 번 간구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응답할 줄 모르는 이방의 우상처럼 우리에게 무감각한 분이 아니다.
9장- 인도하심 그 이상의 삶
개인적으로 가장 은혜를 받은 부분이다. "영혼의 파멸인 죄에서 영혼을 건져내어 영혼이 건강과 평안인 거룩에 이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자녀들을 다루시는 목표다. 그런데 그분은 강요할 수 없고 우리 스스로 그것을 획득하도록 힘을 주셔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 그분의 자녀로 자유를 얻어야 한다면 그분이 취하셔야 할 길은 멀고 험한 길이다"(존 우드오만).
은혜와 성품
이 장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에 대해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정상적인 부모치고 자식들에게 자신의 뜻을 모호하게 밝힐 부모는 아무도 없다. 주셔야 할 말씀이 없는 경우라면 주시지 않는 것이 최선의 길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믿어도 좋다. 그럴 때는 그분의 도덕적 뜻 안에 있으면서 믿음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그분의 온전하신 뜻이다.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구하는 자는 적절한 기간 내에 관련문제에 대한 구체적 말씀이 주어지지 않을 경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특별한 상황에서 구체적인 말씀이 주어지지 않는 이유로는 우리가 하나님 속을 썩인 것 외에도 다른 이유들이 있다.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일반적으로 삶의 행로를 정할 때 대부분 우리 자신이 알아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천만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정권을 맡김으로써 우리의 성품을 개발하시기도 하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것을 시험하시기도 한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나라의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 부르시며 그래서 가능한 한 자주 - 사실상 혹은 실제로 -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경우 너를 향한 내 뜻은 너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는 것이다." 존 우드오만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제목의 심오한 장에서 이 점에 대해 탁월하게 이야기한바 있다.
우리의 영혼이 절대적으로 독립하는 만큼만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만큼만 우리의 영혼도 절대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영혼은 자신에게 충실한 영혼이다. 마음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의 뜻에 있다보니 그 무엇에도 요동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세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경건한 만큼 자유롭고 자유로운 만큼 경건한 영혼이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정해두신 인간 성품의 본질을 논하고 있다. 아이가 언제나 지시를 듣고 행해야만 한다면 그 아이는 책임감있고 유능한 인간으로 자랄 수 없다. 성품과 개성이란 본질상 내면지향적인 것이다. 이 내면지향적인 성품은 구속을 통해 완성된다. 인간은 안전을 얻으려는 전략으로 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혹은 두려움 속에 살다보니 하나님께 길을 가르쳐달라고 졸라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롭고 선하신 뜻을 진심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자랄 필요가 있다. 거기에 이르지 못한다면 우리의 문제는 어느 것으로도 풀리지 않는다. 설사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받는다 해도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가 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롭고 선하신 뜻을 진심으로 믿지 못하여 인생의 결정해야 할 문제 앞에 두려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험을 두려워하며 안전만을 추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미성숙한 자신을 발견하고 내가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자라야 함을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내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마땅히 행할 바를 알게 되고, 또 그분이 말씀하시지 않을 때도 마땅히 행할 바를 알기를 기도한다. 또 장애물이 있을 때는 그것을 찾아 제거하는 방법을 알게 되고, 장애물이 없을 때는 사랑과 평안으로 단호하면서도 침착하게 전진하는 법을 알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신실하심만 의지하여 더 큰 성숙으로 나아가도록 부르시고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언제나 우리 곁에 함께 계시는 아버지와 함께 대화적 관계 가운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매순간 메시지를 주신다? 성경에 다 있다? 아무래도 좋다?
이 책은 하나님의 음성과 인도하심에 대해 말한 아주 훌륭한 책이다.
우리는 영혼의 파멸인 죄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매순간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우리는 무지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매달리다가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를 하기가 쉽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문제, 즉 하나님께서 우리와 대화하시기를 원하시는가에 대해, 또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가에 대해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3장에서는 하나님의 인도를 포함해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에 대한 세 가지 잘못된 해석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들은 통상적인 해석이지만 명백한 오류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인도를 받아 살려는 우리의 노력에 분명 큰 해를 끼치는 것들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고 있다.
첫번째 오해 - 매순간 메시지를 주신다는 견해
이 첫번째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생여정의 매순간 우리에게 할 일을 일러주신다. 적어도 우리가 묻기만 하면 언제든 일러주실 의향과 준비를 갖추고 계신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성경으로도,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교회의 공동체험으로도 입증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예컨대 베드로나 바울의 삶을 볼 때 그들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았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연합은 우리가 이 생에서 상상할 수 있는 - 우리가 과연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다면 - 가장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조차도 매순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 계시를 받았다는 징후는 어디에도 없다. 그분은 늘 순종하실 만큼 아버지와의 연합이 아주 깊었다. 그런데 이 연합은 삶이나 사역의 모든 세부사항에 대해 "지금은 이것을 하고 지금은 저것을 하라"는 식의 지시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숙한 뜻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이해에 기초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말씀하신다는 개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하나님의 사역은 우리를 매순간 그분의 명시적 지시에 묶어두지 않는다. 씨앗을 심고서 너무 깊이 간섭하면 정상적인 성장을 방해하게 된다. 식물의 생명도 그렇고 어린아이의 삶도 그렇다.
이 모델대로 살려고 발버둥치거나 적어도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을 잘 관찰해보면,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며 아무리 힘써도 결국 낭패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매순간 메시지를 주실 능력이 있다. 하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찬양함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데 사로잡힌 나머지 그분이 실제로 하시는 일의 실제적 요지를 놓치고 만다.
우리는 교육프로그램 개발, 전도집회 개최, 선교훈련, 기타 교회활동을 수행할 때 이 점을 필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집회에 나와 노래하고 손뼉치고 기도하고 헌금드리는 로봇집단을 만들려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배드릴 때도 그렇고 특정 사역이나 사역자를 모범으로 제시할 때도 그렇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각자 독특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돌릴 그분의 아들 딸을 키우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수단이 이 목적에 부합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어떤 책에서 또 주일 말씀에서, 다윗이 무엇을 하기 전에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먼저 기도했다는 것에 은혜를 받았다. 그후로 나는 사소한 것에도 하나님께 마음속으로 '지금 이 일을 할까요, 하지 말까요?'라고 묻고, 또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에 대해 기도했다. 물론 이러한 기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나의 삶이나 사역의 모든 세부사항에 대해 "지금은 이것을 하고 지금은 저것을 하라"는 식의 지시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숙한 뜻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이해에 기초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두 번째 오해 - 성경에 다 있다는 견해
이 두 번째 견해 역시 심각한 오류요 매우 해로운 것이라 생각한다. 성경을 높이려는 의도는 좋지만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열정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에는 우리 인생의 많은 상황에 관해 직접적 지침이 나와 있다. 그러나 인생의 다른 의문들에 접할 때마다, 우리 삶의 많은 구체적 상황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부득불 깨닫게 된다.
성경은 다음 주일에 어떤 찬송을 불러야 하고 다음 강연이나 설교 때 어떤 말씀을 본문으로 택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세부사항에 해서도 대개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키우는 법을 알고 싶다고 생각해보라. 성경에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은 나와 있지만 이 주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싶어하고 알아야 할 모든 것이 밝혀져 있지는 않다.
물론 원리는 모두 성경에 들어 있다. 그러나 원리대로 살려면 먼저 적용이 필요하다. 성경을 존중하고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각 개인에게 주시는 가르침, 즉 성경의 원리 안에 있되 성경의 세부내용을 벗어나는 가르침의 필요성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각 개인이나 상황에 대한 구체적 말씀이 성경에 들어 있다는 잘못된 기대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앞에서 말한 '성경룰렛'을 일삼게 된다. 그들은 성경을 아무 데나 편 다음 어느 구절이 걸리는지 보려고 마음대로 손가락을 갖다댄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뽑힌 구절을 읽고는 그대로 문제에 대입시킨다.
일부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방법을 사용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분명 성경이 권하는 절차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한없이 크신 분이므로 그분을 진지하게 찾는 사람의 삶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하신다. 심지어 더없이 미신적인 방법도 허용하고 사용하실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영적 삶을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이라는 증거는 아니다.
많은 독실한 성도가 불안과 절박한 필요 때문에 그런 일을 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인도의 내용대로 행하다가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큰 해를 입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들은 '성경 룰렛'의 패자다. 이런 불행한 사태는 예수님의 단순한 말씀과 얼마나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는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세 번째 오해 - 아무래도 좋다는 견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에 대한 이 세 번째 잘못된 견해는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고민에서 벗어나 마음에 평안을 누린다는 면에서 큰 설득력을 얻곤 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하나님과 자녀간의 의식적 대화의 가능성을 일체 포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341장)라는 유명한 찬송가가 있다. 이 소절만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지금의 주제와 정확히 일치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전체 가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일이 벌어져도 하나님의 인도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벌어지는 많은 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분이 분명 손을 들어 그것을 중단시키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한 예로 그분은 "아무도 멸망치 앟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 2:9). 그러나 무수히 많은 사람이 회개에 이르지 않아 멸망하고 있다. 하나님의 세상은 우리의 역할이 없어서는 안 되는 곳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만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고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도 중요하다. 일이 어떻게 되든 무조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인도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많은 사건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바로 우리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의 명시적 지시 없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일이 그 자녀의 상태와 수준의 최종지표이다. 우리와 하늘 아버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빠지기 쉬운 오류이다. 나는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믿은 후부터 쭉 눈물로 기도해왔었고, 전도를 했다. 그런데 교회 수련회 중 아버지께서 갑자기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때는 연락이 안 되어 상 나가는 것도 보지 못할 뻔하였다.
나는 이 일로 인해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는가? 나를 사랑하시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그러나 결코 아버지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고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아버지의 영혼을 더 사랑하시고 그가 구원받기를 원하심을 깨닫게 하셨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며, 설령 나쁜 일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하셨다.
4장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대화적 관계라는 개념 자체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며 나를 인도하실 의향도 있고 능력도 있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장이 도움이 될 것이다.
네 가지 부정적 반응
대개 사람들의 정직한 반응은 이렇다. 하나님은 평범한 인간들을 자신의 임재로 둘러싸고 그들에게 말씀하심으로 그들과 대화하실 마음이 없다. 하나님은 실제로 그들과 그런 식으로 대화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대화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이 책의 내용과 달리 각 개인과 대화하셔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화하실 마음이 있다. 하나님은 인도하실까?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시편 기자도 묻는다.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시 94:9). 나는 덧붙여 이렇게 묻고 싶다. "우리의 혀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서로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이 우리와 말씀하며 대화하지 아니하시랴?" 나는 하나님 아버지가 말도 없고 대화도 하지 않으시는 비인격적 실체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분은 실제로 대화하신다. 그러나 주파수가 맞춰져 있는가?
물론 우리가 듣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끼리도 상대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의 많은 메시지가 우리에게 쏟아져 우리를 통과하거나 우리 곁을 지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음성에 주파수가 맞춰져 있지 않다. 예수님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시면서도 그분은 청중에게 잘 듣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하나님은 대화하셔야만 한다. 기독교 리더십의 모본과 훈련에서 우리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을 지시대로 행하게 만드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세상의 리더십 구조를 다분히 따르고 있다. 사실 교회 안에서든 밖에서든 공동체 운영방식에서 이야기하는 '리더십'은 대체로 공허한 완곡어법에 지나지 않는다.
리더십- 이단과 그리스도
그들은 대부분 하나님이 일반구성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들 내의 1인 혹은 소수의 핵심 인물들에게만 말씀하신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이단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마음도 믿어서는 안 되고, 소속단체의 맥락을 벗어나서는 자신과 하나님의 의사소통으로 여겨지는 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배운다. 물론 상부에서 내려온 말씀에 동조해야 한다는 압력도 존재한다. 종종 추종자들은 모순된 선언을 수용해야 하며 지도자의 명령이라면 상식조차 깨끗이 저버려야 한다고 배운다. 이것이 많은 이단의 공통된 현상이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주류'에 속하는 종교단체들도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볼진대 자신의 리더십 모델이 사실상 이단의 길을 닦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도 적잖이 그런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 사역자로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충분한 동조와 지원을 확보하여 내 계획을 유지하고 확장할 목적으로 사람들 개인의 생각을, 그리고 주님의 인도와 의사소통에 대한 그들의 개인적 체험을 버리게 만들려는 동기가 내게는 얼마나 많은가.
내가 몸담고 있던 선교단체는 복음적이고 열심이 있는 단체이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심각하게도 이러한 리더십의 모델을 따르고 있다. 각 개인의 비전도, 또 생각도 지도자와 틀리면 자신의 비전을 버리고 지도자의 말에 순종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아프지만 이러한 점을 회개케 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만들 것을 믿는다.
5장- 침묵은 응답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적 관계에서 기도생활보다 더 중요한 부분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지 않을 때도 많지만 나는 언제나 그분이 응답하신다고 믿는다. 그분은 어떤 식으로든 언제나 우리에게 대답하신다. 흔히들 그렇듯이 자기가 구한 대로 주실 때에만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재미있는 현상이다. 구한 것을 주시지 않았을 때는 그분의 대답이 없었다는 말인가?
그 경우 하나님의 침묵이 곧 응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듣는 법을 안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것을 주시지 않을 때에도 통상적으로 우리에게 뭔가를 말씀하신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고 인정하는 법을 배웠다면 우리는 그것을 들을 것이요. 그것을 통해 자라갈 것이다. 바울의 유명한 '육체의 가시'가 분명 그렇다. 바울은 그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주님께 세 번 간구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응답할 줄 모르는 이방의 우상처럼 우리에게 무감각한 분이 아니다.
9장- 인도하심 그 이상의 삶
개인적으로 가장 은혜를 받은 부분이다. "영혼의 파멸인 죄에서 영혼을 건져내어 영혼이 건강과 평안인 거룩에 이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자녀들을 다루시는 목표다. 그런데 그분은 강요할 수 없고 우리 스스로 그것을 획득하도록 힘을 주셔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 그분의 자녀로 자유를 얻어야 한다면 그분이 취하셔야 할 길은 멀고 험한 길이다"(존 우드오만).
은혜와 성품
이 장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에 대해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정상적인 부모치고 자식들에게 자신의 뜻을 모호하게 밝힐 부모는 아무도 없다. 주셔야 할 말씀이 없는 경우라면 주시지 않는 것이 최선의 길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믿어도 좋다. 그럴 때는 그분의 도덕적 뜻 안에 있으면서 믿음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그분의 온전하신 뜻이다.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구하는 자는 적절한 기간 내에 관련문제에 대한 구체적 말씀이 주어지지 않을 경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특별한 상황에서 구체적인 말씀이 주어지지 않는 이유로는 우리가 하나님 속을 썩인 것 외에도 다른 이유들이 있다.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일반적으로 삶의 행로를 정할 때 대부분 우리 자신이 알아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천만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정권을 맡김으로써 우리의 성품을 개발하시기도 하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것을 시험하시기도 한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나라의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 부르시며 그래서 가능한 한 자주 - 사실상 혹은 실제로 -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경우 너를 향한 내 뜻은 너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는 것이다." 존 우드오만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제목의 심오한 장에서 이 점에 대해 탁월하게 이야기한바 있다.
우리의 영혼이 절대적으로 독립하는 만큼만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만큼만 우리의 영혼도 절대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영혼은 자신에게 충실한 영혼이다. 마음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의 뜻에 있다보니 그 무엇에도 요동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세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경건한 만큼 자유롭고 자유로운 만큼 경건한 영혼이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정해두신 인간 성품의 본질을 논하고 있다. 아이가 언제나 지시를 듣고 행해야만 한다면 그 아이는 책임감있고 유능한 인간으로 자랄 수 없다. 성품과 개성이란 본질상 내면지향적인 것이다. 이 내면지향적인 성품은 구속을 통해 완성된다. 인간은 안전을 얻으려는 전략으로 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혹은 두려움 속에 살다보니 하나님께 길을 가르쳐달라고 졸라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롭고 선하신 뜻을 진심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자랄 필요가 있다. 거기에 이르지 못한다면 우리의 문제는 어느 것으로도 풀리지 않는다. 설사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받는다 해도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가 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롭고 선하신 뜻을 진심으로 믿지 못하여 인생의 결정해야 할 문제 앞에 두려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험을 두려워하며 안전만을 추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미성숙한 자신을 발견하고 내가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자라야 함을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내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마땅히 행할 바를 알게 되고, 또 그분이 말씀하시지 않을 때도 마땅히 행할 바를 알기를 기도한다. 또 장애물이 있을 때는 그것을 찾아 제거하는 방법을 알게 되고, 장애물이 없을 때는 사랑과 평안으로 단호하면서도 침착하게 전진하는 법을 알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신실하심만 의지하여 더 큰 성숙으로 나아가도록 부르시고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언제나 우리 곁에 함께 계시는 아버지와 함께 대화적 관계 가운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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