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으로 본 예배 (삼하 6:12-15)
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이 시간 “다윗으로 본 예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사람의 제일된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듯 예배가 그렇습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도, 성도가 살아가는 목적도, 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는 그것을 다윗에게서 발견합니다. 다윗은 지엄한 왕이었지만 무엇보다 예배자였습니다. 그는 전쟁터보다 성막을 사랑했고, 왕궁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했습니다.
다윗에게서 세 가지 예배의 원리를 봅니다.
1. 예배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12절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옮겨 갈새"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았습니다. 언약궤를 옮겨 오다가 무슨 일인지 하나님이 치셔서 제사장 웃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존함 글짜도 쉽게 부르지 못할 정도로 거룩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이, 제사장이 죽었으니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러나 법궤를 모신 오벧에돔의 집에 복이 임한 걸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도 되시지만 은혜와 복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교회 출석합니다.
그러나 모셔올 때 이번엔 안전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가까이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하길 목숨 바쳐 원했습니다. 하나님 가까이하다가 혼난 적은 없습니까? 율법적으로 대하다가 혼이 납니다. 즉 내가 잘해야 복 받는 줄 알다가는 큰 좌절을 얻습니다. 우리가 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혹은 내 거룩으로 다가가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빛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양심의 정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피의 복음을 모를 때 이야기입니다.
혹은 나답과 아비후처럼 다른 불을 드려도 안 됩니다. 세상 방법으로 섬기지 말란 말입니다. 그래도 다윗이 죽음을 걸고 법궤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을 더 가까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고넬료와 같은 경건함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시73:28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했고, 27절에서는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란 늘 예배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42편에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했습니다.
2. 예배는 자신을 다 드리는 것입니다.
14절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왕에게는 체면이 있습니다. 품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통치지에게는 화려한 왕복이 따로 있고 면류관도 있습니다. 군대에서 장성급만 되어도 행동거지에 대한 규범이 있습니다. 품위를 유지 하지 않으면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런 걸 챙기다가는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입은 옷이 에봇(אֵפוֹד)인데 이 에봇은 히브리어로 "에봇 바드"(אֵפוֹד בָּד) 즉 "세마포 에봇", "베 에봇"으로 찬란한 대제사장의 옷이 아니고 어린 사무엘이 입던(삼상 2:18), 겉옷 위에 가볍게 덧입던 조끼 같은 옷이었습니다.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는 말씀도 원문으로 보면 "온 힘으로 뛰며 춤추었다, 빙글빙글 돌며 춤추다, 힘, 능력, 전력 즉 전 존재를 다해 기뻐하며 춤추는 모습"을 뜻합니다. 전문 무희도 아니고 왕이 짧은 에봇에 힘을 다해 춤을 추었으니 아랫도리가 드러났던 것입니다.
얼마나 기쁘고 경외함에 몰입했으면 그랬을까요? 그래서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다윗의 춤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전인격적 항복이었다" 했습니다. 영국의 설교자 찰스 스펄전도 "예배는 입술이 아니라 심장이 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예배란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배우는 중요한 예배의 원리입니다. 막12:29에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처럼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보세요. 초대교회는 몸과 마음 힘과 시간과 목소리까지 드려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핍박시대라 잡히면 죽습니다. 목숨까지도 각오하고 예배했습니다. 마음으로만 예배하는 곳에는 성령의 불이 약하든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예배는 진리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13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왜 그랬을까요? 처음 언약궤를 옮길 때 웃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를 레위인이 메지않고 블레셋 방식대로 수레에 실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 잘못할 때는 용납하셨지만 신앙인들이 그렇게 하는 건 용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웃사의 사건으로 다윗은 두려워서 법궤를 옮길 수 없어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그 기간은 무엇이 문제였을까 반성하며 고뇌하던 시간이었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그러나 너무 두려운 나머지 제사장들에게 법궤를 매게 하고 조심조심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섯 걸음 째도 하나님이 치시지 않는 것을 보고, 안심한 다윗은 그 자리에서 소와 살진 송아지로 기쁨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예배는 진리 안에서 해야 합니다. 불로 응답하시는 예배를 못 드렸다면 왜 그랬는 진리 안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웃사'라는 이름은 "힘, 능력, 강함"입니다. 진리 떠나 인간의 우월한 방법으로 하면 안 됩니다. 사람 기쁘게 하려고 사람 중심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몇 사람이 모여 예배하다가 대교회에 가서 웅장한 예배를 드리면 예배하는 것 같고 대단하죠. 그들의 기도가 많다면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보다는 프로그램을 의지하고,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회개 없는 예배를 드린다면, 아무리 성대해도 사람이 모인 잔치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은 왕이기 전에 예배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하길 목숨 바쳐 원했고, 자신을 다 드렸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원인을 깨닫고 진리 안에서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 예배를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예배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찾고 기뻐하시는 가장 참된 예배를 드리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