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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약 4 장 : 다툼과 자랑에 대한 권고(4)

작성자조약돌|작성시간26.06.19|조회수0 목록 댓글 0

약 4 장 : 다툼과 자랑에 대한 권고(4)

 

 

3]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본문은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치 말아야 할 이유이다. '형제를'의 헬라어는 '톤 아델폰 아우투'(*)로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형제들의 신령한 관계를 강조한다.

 

'율법'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 판단을 금지하라는 그리스도의 황금률을 의미한다.(Plumptre).

 

* 마 7: 1-5,12 -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 1: 25에서 언급된 자유의 법을 가리킨다(Hunter).

 

Ⓒ 예수께서 더 강화시키신 옛 도덕법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준행해야 할 삶의 법을 가리킨다(2: 8, Alford).

 

세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의 내용상레 19:18에 언급된 이웃 사랑에 대한 법이 야고보의 권면과 일치하기 때문이다(Burdick, Tasker).

 

우리가 서로 비방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본문은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첫째, 그것은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율법이 가르치는 사랑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가 있고 흠과 부족이 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상대방의 흠과 부족을 찾아 비난하기 시작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며 서로 큰 상처만 입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 사랑은 용서와 이해와 관용을 동반한다.

 

* 잠 10: 12 -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 벧전 4: 8 -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4]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둘째,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남을 헐뜯거나 멸시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곧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준행자가 아니라 재판자의 입장에서 서는 경우가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서로 비방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가 율법의 준행자이지 판단자나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시다. 그가 율법을 주셨고 모든 사람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것이다.

 

그가 어떤 이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실 수도 있고 또 다른 이들을 그들의 죄에 대해 공의로 판단하셔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내리실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로 죄 씻음과 구원을 받은 자들로서 겸손히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지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차 사사로이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 진리의 교훈은 하나님의 종들이 해야 할 교회적인, 공적인 판단과 비평의 사역을 금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이 그러했듯이, 오늘날 하나님의 종이며 교회의 파수꾼 된 목사들은 교회의 성결과 건덕(健德)을 위해 필요할 때 판단과 비평을 해야 한다. 이런 사역은 교회의 권징의 행위로 표현되기도 한다.

 

참된 목사들은 설교시에 교인들이나 교회의 잘못과 악을 지적하고 고치게 해야 한다. 오류와 악을 책망하고 바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주신 목적이기도 하다.

 

바울 사도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씀했다(딤후 3: 16).

 

예레미야서에 보면, 구약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에게 거짓된 평강을 설교하였다. 그러나 백성에게 진정한 평강은 없었고 있을 수 없었다(렘 8: 11).

 

왜냐하면 죄를 회개함이 없이는 참된 평강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참 선지자 예레미야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선언하였다.

 

특히, 구약 시대에 선지자 예레미야나 에스겔이 거짓 선지자들을 혹독히 책망하였듯이(렘 23장, 겔 34장), 신약 시대에도 초대 교회 때부터 거짓 교사들과 목사들에 대한 책망과 경고들이 필요하였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기를,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하였다(갈 1: 6-10).

 

또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말씀하기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라고 하였다(고후 11: 4,13-15).

 

베드로 사도도 거짓 선생들에 대해 성도들에게 분명히 경고했다. 그는 베드로후서에,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利)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하였다(벧후 2: 1-3).

 

유다도 유다서에서 분명하게 쓰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라고 하였다(유 3, 4).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회 역사상 찾아볼 수 없게 심히 이단적인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배격하지 않고 포용하고 교리적 순결성과 교회적 순결성을 강조하지 않고 인본적인 연합과 일치만을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심히 두려운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목사들이 교회들의 배교와 타협의 죄악에 대해 책망하고 외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목사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로마서 14장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종들의 판단과 비평의 사역을 반대한다. 거기에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라고 말씀했다(롬 14: 1-4).

 

그러나 그 말씀은 성경에 명백히 가르치지 않은 문제, 즉 성경에 명백히 명하지도 혹은 금하지도 않은 문제에 대하여 개인의 견해와 확신의 자유를 허용하는 말씀인 것이다. 예를 들어, 그 본문 다음에 언급된 대로 날과 절기에 관한 것과 먹는 음식에 관한 것이 그러하다(5, 6절).

 

그러나 성경은 다른 여러 곳들에서 명백한 오류와 죄악에 대해서는 판단할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6: 17,18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너희가 배운 교리=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고 말씀했고, 데살로니가후서 3: 6,14,15에서는,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고 말씀했다.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이 가르친 바와 같이 우리는 피차 사사로이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의 결점을 찾아 그를 비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히려 상대방의 부족과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 주려고 해야 하며,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본문의 말씀을 오해하여, 하나님의 종들이 성도들과 교회의 성결과 건덕(健德)을 위해 하는 교회적인, 공적인 판단과 비평의 사역이 성경에 위배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오히려 주의 참된 종들이 그런 사역을 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오늘날 교회들의 문제는 대다수의 주의 종들이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지적하고 책망하지 않고 침묵하는 데 있다.

 

오늘날에는 교회의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일들에 대해 지적하고 책망하고 비판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요청된다.

 

목사의 이런 사역을 위해 기도해야 할 책임이 신실한 성도들과 교회들에게 있다. 영적으로 혼탁해져가는 시대에 하나님의 참되고 온전한 뜻이 성실히 다 선포되기를 기도하자.

 

 

4: 12 -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앞 절에서 야고보는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율법을 재판하는 자의 자리에 앉은 행위임을 지적하였다.

 

본 절에서는 율법의 입법자나 재판자가 오직 하나님임을 밝혀서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자의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강조한다.

 

 

1]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입법자와 재판자'(노모데테스 카이 크리테스)는 하나의 관사에 두 낱말이 연결되고 있어 동일하시며 절대 변경될 수 없는 오직 하나이신 주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것은 율법을 정하는 것과 심판권을 오직 하나님만이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한다(Tasker, Lenski, Burdick, Martin).

 

 

2]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본 절은 입법자와 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위치를 확증시킨다.

 

* 마 25: 46 -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제정하신 분이며 율법의 준수 여부에 대한 재판자이시기 때문에 사람을 구원하실 수도, 혹은 멸하실 수도 있는 분이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사람들은 단지 율법을 준행하는 자에 불과하기 때문에(11절) 재판자만이 할 수 있는 판단을 하는 것은 죄악이며 금해야 할 행위이다.

 

 

3]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 데 티스 에이 호 크리논톤 플레시온'은 문자적으로 '그러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라는 의미로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는 강조형 반의 접속사 '데'(그러나)와 인칭 대명사 '쉬'(당신)가 합하여 일종의 수사학적 질문이다(Moo, Martin, Tasker).

 

야고보는 이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서 사람들이 타인을 판단하는 것이 절대 불가(不可)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킨다.

 

 

4. 허탄한 생각에 대한 경고(4: 13-17)

 

⑬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⑭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⑮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⑯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⑰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4: 13 -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너희 중에'라는 말은 이 교훈이 일차적으로 교인들에게 주신 것이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아님을 보인다. 물론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 교훈이 필요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하나님을 알며 섬긴다는 자들인데 바르게 살지 못하므로 그들에게 이런 교훈을 주신 것이다.

 

당시의 교인들 중에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1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 없는 헛된 계획이었다.

 

성도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1년 후의 일을 계획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1] 들으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게뉜'은 문자적으로 '지금 들으라.'는 의미로 수신자들로 하여금 지금 곧 주의해야 함을 나타낸다.

 

* 창 49: 2 -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 룻 2: 8 -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 시 34: 11 -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여기서 '아게'는 명령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부사적으로 사용되어 수신자들에게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한다(5:1, Manton, Tasker, Gibson, Burdick).

 

* 삿 19: 6 - 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여자의 아비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2]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너희 중에'라는 말은 이 교훈이 당시의 교인들에게 주신 것이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아님을 보인다.

 

물론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 교훈이 필요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하나님을 알며 섬긴다는 자들인데 바르게 살지 못하므로 그들에게 이런 교훈을 주신 것이었다.

 

* 창 42: 16 -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이니라 하고

 

* 겔 7: 9 - 내가 너를 아껴 보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치는 줄을 네가 알리라.

 

* 엡 5: 3 -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말하기를'(레곤테스'는 현재 분사로 현재 많은 삶들이 허탄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에 집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Burdick).

 

당시의 교인들 중에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것은 헛된 계획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계획은 다 헛되다.

 

본 절은 당시 유대인 중개업자나 상인들의 생각과 어투를 표현하고 있다(Manton, Moo).

 

야고보는 당시 상인들의 생활 관념과 태도를 꼬집어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하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어리석고 고집스런 교만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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