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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해운인재양성의 첫걸음

작성자이소장|작성시간26.06.21|조회수35 목록 댓글 0

1988년 해운인재양성의 첫걸음.

1988년5월, 저는 부산 해무부 관리과장직에서
본사 대한상선과 한진해운의 겸직 교육담당 발령으로 
서울에서 1년간 근무하기로 작정하고,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해운일반 교재 집필로 업무지식의 이론교육과 승선 체험, 해외터미널견학등
해운사 최초의 체계적인 해운교육 시스템 구축을 목표로,
밤낮없이 교재집필과 보다 충실한 교육과정진행을 위한 
각부서장들의 의견수렴등 나름데로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1974년, 대한해운공사가 해외승선교육 시행의 신입사원 채용공고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한 이광희외 19명이 2명씩 10항차에 걸쳐,
부산항에서 미주 동해안 항로의 코리아프론티어(재래정기선)외 5척(13,000dwt급)에 
2-3개월간 승선의 OJT가 있었지만,
국내선사중 유일한 현장교육과정이 중단된후 해운교육은 전무하였다는 
이 광희부장님의 조언과 교육방향 설정 의견도 참조하였습니다.
 
기업문화가 다른 대한상선과 한진해운 직원들의 불협화와
부서간의  해운업무 전반에 걸친 이해 부족의 의사불통 개선에 교육이 매우 시급 하였고,
해운용어 또한 일본어와 영어의 매우 생소한 단어로 인하여 접근이 쉽지 않았으며,
해운일반교재와 체계적인 교육이 전무하였기에, 
제가 더 열정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1979년, 부산5부두 컨테이너전용부두 개장에 맞춰 취항했던, 
10DAY 간격 서비스, 북미서안항로의 수출Documant(B/L, OFM)작성하면서,
5일 바쁘게 일하고, 5일은 여유롭게 FMC General Rules과 해운업무전반을
미국 SEA-LAND 한국대리점사인 ㈜한진의 채창념차장님과 정의식과장님의 도움으로
더 깊이 터득할 수 있었고, 
부산지점 총무과로 옮겨서는 선박보급품과 선원노무업무 수행의 경험까지 
해운전반에 걸친 이론과 실무를 쌓았기에,
해운일반 교재 집필에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교재에는 선박과 선원, 운항, 터미날운영과 하역, 선하증권(B/L), 컨테이너 장비, 운임체계,  용선, 해상보험 등 해운업 전반을 담았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하여 밤 10시까지 15시간 근무후,
집에서 3,4시간 쉬었다가 새벽까지 원고 작성에 몰두 하였습니다.

남의 아파트 문간방 자취로 하루 한두 끼 식사의 영양부족과 피로가 쌓이면서, 
나중엔, 풍치의 잠 못이루는 고통에도 원고를 놓질 않았기에,
3개월 만에 430페이지 분량의 『해운일반』 교재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해운실무교육은 차장급 이하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하였습니다.
각 부서에서 2~3명씩 추천받아 매주 40명으로,
총 18주에 걸쳐 육상직원 700여명 전원을 모두 이수시켰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창문도 없는 답답한 밀실에서 하루 5시간씩 과정을 진행하였으며,
토요일에는 사전 배포한 50문항으로 시험을 치르게 하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일부 직원들은 “선박도 야간 운항을 하는가?”,
“대형 선박은 포트사이드로 어떻게 접안하는가?”
와 같은 질문을 할 정도로 운항에 대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또 여직원노사협의회에서는 교재에 한자와 영어 용어가 많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수강하는 직원들은 해운업 전반의 이론을 습득하여,
최하 80점에서 만점까지 수강생 평균 88점에 도달하는, 열의가 대단하였습니다.
특히 50문항의 사전배포 및 소속부서장에게 점수통보가 주효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차츰, 부서간 협업과 업무 회의 회수가 늘면서 근무분위기가 안정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출근해서는 신문을 읽거나 삼삼오오 잡담을 하는 광경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부과하지 않았던,
데머리지(Demurrage)와 디텐션(Detention)의 7일 경과시 
컨테이너사용료 징수의 국제 RULE을 직원들이 인식하게 되면서, 
화주와 영업부의 강한 반발에도 관리부서의 이명옥팀장 주도로 
체계적인 부과 제도도입을 한진해운 필두로 전선사로 확대되었습니다.
이는 컨테이너 회전일수 단축과 수익성 개선으로 이어지는 
숨어 있던 수익 창출의 발견이고 성과였습니다.
 
이와 병행하여 1.8만톤급 컨테이너전용선 코리안시리즈로
인천항에서 승선하여 4박5일간,
망망대해의 운항체험과 홍콩항과 기륭항 터미날 견학도 실시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해외여행과 식품수입이 금지되던 시기였기에,
대부분의 직원들에게는  해외여행이 첫경험이었고,
본선의 LA갈비와 선키스트오렌지, 캘리포니아쌀등의 특식은
난생 처음 맛보는 별미로 모두들 기억에 오래토록 남았을 겝니다. 
또 교육출장비의 달러지급으로 더 사기가 충전되어,
5차수 승선교육을 호평리에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원안은 키륭항에서 부산항까지의 승선으로 7일일정에서,
조영한상무님의 지시로 타이페이에서 대한항공기를 이용하여 귀국하는 걸로
1일 단축.조정하여 효율화 하였습니다.
 
승선교육 과정에서 여러 회사 출신 직원들 간의 갈등이 노출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조직 융합과 육해상 구성원간의 상호 이해도를 높이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6회차 부터는 2,700TEU적재의 2.6만톤급 신조선박인 한진뉴욕호시리즈의  
부산항-고베항-요코하마항까지 4박5일 승선후 도쿄공항에서 항공편으로
귀국하는 ROUTE로 남자직원에 이어, 나중엔 여직원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전직원들은 자사 상품과 해운업 지식을 두루 겸비한 전문인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교육이 대한상선과 한진해운,
그리고 대한항공과 한진에서 파견된 직원들과 해상직원들간, 
항해중인 선상이라는 특수공간에서의 교류로
하나의 해운인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감히 자평합니다.
 
서울근무 13개월째인 1989년 6월,
저는 대한조선공사 인수로 대지주사인 극동해운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이후  승선체험 프로그램을 BIG CUSTOMER와 대관청 까지 확대하여
 한진해운에 대한 홍보와 판매증대책으로 활용 되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국내 타선사들도 한진해운의 해운교육제도를 롤모델로 도입하면서 
국가의 수출입물량증가세와 더불어 해운발전이 가속화 되었습니다.
 
또 선원인사팀장, 홍영식부장님의 제안으로 
선원가족들의 승선체험을 제도화하므로,
해상직원과 가족간의 진정한 이해로 승선원의 직업에 대한 자긍심과 
사기진작을 더 높이는 애사심고취로,
그 당시 노사갈등을 완화하는 괄목할만한 성과도 있었다고 술회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조직문화와 육해상 직원들을 하나로 융합하고
해운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주는 과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리고 운항비절감형 신형선박의 Multiple Purpose Crew 교육양성으로
25명에서 18명 승선제로 정착시키기위하여 매진하셨던,
선장출신, 안완수팀장님과 1등 기관사출신,김명식과장의 
생산성향상과 수익성개선에 기여한 공로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저는 대한상선과 한진해운겸직의 교육담당 시절, 
해운일반교재 편찬과 승선체험교육과정 제도화의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열정이 넘치던 38세 그 시절을 제 인생에서 가장 보람찬 시기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남긴 발자취가 후배 해운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길 바라며,
우리나라 해운산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 소중한 기회를 주신 회사와
또 함께했던 모든 동료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특히 총무부 이종선 부장님, 김영헌과장님,
사내강사로 열과 성을 다해 주신 안옥중 이사님과 
선하증권 교재 집필에 도움주신 고, 엄윤대박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박 삼정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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