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릇대로 잠을 설치는 것 말고는 알베르게에서 편하게 보냈다. 맨 처음 프랑스길 순례를 할 때 들렀던 숙소인데 모든 게 변했다. 북적거리며 음식을 나누어 먹던 정겨운 추억이 떠오른다. 침대 수를 대폭 줄여 순례객들이 더욱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쉴 수 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6시에 일어나 부산을 떨며 나갈 채비를 한다. 비가 오후1시 이후에 온다는 예보가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7시20분경 길로 나선다. 예보완 달리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워낙 미세해 곧 멈추리라 믿고 걸어 나간다. 채 5분도 흐르기 전에 산골 마을의 숲길로 들어선다. 비는 멈추기는커녕 더욱 세차진다. 우려하던 사단이 일어났다. 배낭에 저장된 판초우비와 덮개를 꺼내 신속히 대처한다. 한두 시간 지나면 그치리라고 기대하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생전 처음 판초우비를 입고 걷는데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그다지 부담을 주지 않는다. 더욱이 온도가 낮아 염려했던 땀의 공포도 사라진다. 포근하게 감싸주는 숲이 울창한 시골길이 넋을 잃게 할 정도로 너무나도 아름다고 고즈넉하다. 10여km 지나 차도와 마주친다. 길고 긴 차도가 주는 공포감을 반갑지 않은 비가 오히려 씻어준다. 끝이 없을 것처럼 보이던 지겨운 차도를 지나 조그만 마을의 쉼터에 다다른다. 15km 걸었다. 들어가려는 숙소는 7km 정도 남았다. 비도 거의 그친 상태라 거추장스러운 판초우비를 배낭에 집어넣을 겸 잠시 휴식을 취한다.
발길을 옮기기 시작하자 비가 또 내린다. 다시 판초우비를 꺼내 입는다. 빗속을 걷는 탓에 피로가 가중되어 속도가 현저히 줄었다. 묵으려는 알베르게는 왜 그리 안 나타나는지... 욕심을 버리고 뚜벅뚜벅 나아간다. 거의 녹초가 된 상태라 배낭의 무게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절망의 늪에 빠지려는 순간 숙소에 들어선다.
침대를 배정받고 샤워를 마치고 늦은 점심을 들려고 식탁으로 간다. 젊은 두 한국친구들이 배를 채우고 있다. 프랑스 길을 끝내고 무시아를 거쳐 피니스테레에 가려고 한단다. 숙소가 식당도 운영하기 때문에 순례객을 위해 내놓는 저녁을 두 친구를 포함해 예약하고 침대로 돌아온다. 7시30분에 시작하는 만찬을 기대하며 지친 심신을 연신 달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