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두 가지 큰 죄가 있다.
다른 모든 죄는 여기서 생겨나는 것이니 즉 그것은 성급함과 게으름이다.
성급한 탓으로 사람은 낙원에서 쫓겨났고
게으른 탓으로 인간은 낙원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이둘 중에서도 하나만 지적한다면 그것은 성급한 쪽이다.
애초에 쫓겨난 것이 이 성급함 때문이니까.
- 프란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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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프카가 보는 인간의 두 가지 큰 죄 그리고 우리 지난날 모습
이곳에서 다양한 간증과 증거로 확인하듯
열심히 말씀을 좇아간 네비가 왜 이리 극심한 역기능을 하게 되었을까?
말씀이 성결하고, 그 성결한 말씀을 순수히 좇아갔는데 왜이리 큰 문제가 생겼는가?
이러한 문제제기를 여러번 여러분께 했었습니다.
단순히 이것이 나빴다 저것이 좋았다를 넘어, 그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
우리 자신과 하나님 섬김의 바른 도리에 대한 깊은 각성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위 카프카의 명언에 나타난 인간의 2가지 큰 죄, 이것은
네비의 역기능이 심화된 근본 배경에도 동일하게 대비되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빨리, 배가하는 제자를 키워내기 위해 돕는 이들을 끌고가는 형국은
"성급함/조급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향한 달란트가 다르고, 개성과 분량이 다른데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통일된 개성, 통일된 분량, 통일된 행위와 열매들로 측정되면서
개인의 고유성과 인격적인 필요들은 무시되죠..
쉬이 선생되려는 오류의 근원은
우리 인간의 오만이나 무모함, 영적 무지... 이런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바로 "게으름"의 관점에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바울의 서신서 시대와 다릅니다.
바울이 세상초등학문에 한 눈 팔지 말고,
또한 사람의 지혜의아름다운 것으로 가르치지 않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양육하였다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를 긍정함이 저를 부정하는 것이 되거나
저를 긍정함이 이를 소홀히 한다는 이원론적인 생각은 오히려 매우 위험하고 해롭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다원화되고, 다양한 인간의 지성과 개성이 다양하게 표현되고 존중받는 시대입니다.
그 당시는 어떤 신이든, 신의 계시는 그 문화공동체 모두의 관심과 주목을 받았지만,
지금은 예수님의 말씀조차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예수의 가르침은 기독인에게"라는 모토 속에 가려져
믿지 않는 이들에게 권위와 공감형성의 기초를 상실하고 있고 그 증거는 다양한 모양으로 이미 넘칩니다.
Sunny 형제가 잘 도전하였듯이,
우리가 우리 전 생을 던질 듯이 붙잡았던 신앙도,
여러가지 모양으로 쉬이 도전받고 의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도전과 의문에 대해서
"오직 믿음으로"
"오직 무오한 말씀으로"
"오직 초등학문에 눈길주는 어리석음을 피함으로"를 자랑스레 외치며 그 안에만 머무는 것은
대단히 신앙이 좋은 태도같지만, 실상 대단히
게으른 태도
독선적 태도
순진한 태도
무책임한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다른 이들의 삶을 좌지우지할 가르침을 주겠다고 나선 자들이 이렇다면...
'그들만의 리그'에서 정신적/영적 게으름의 신앙문화의 틀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청년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이 시대의 시대정신은 성경이 말하는 시대의 시대정신에 비해 매우 성숙하였고
시대 정신을 이끌고 고양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더 이상 성경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적어도 외양으로는)
시대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성경의 사랑과 경건의 도전이 아니라도
그보다 더 강력하게(적어도 현실적으로는) 사회속에 침투한 민주화와 경쟁, 자아실현의 가치 등으로 인하여
얼마든지 인간을 선하고 다수공동체를 위한 인간의 의지를 고양시키고 개발시켜갈 수 있는
정치/문화/사회적 토대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속에서, 그래도 "성경이 가라사대" 하면서
믿지 않는 이들을 모두 하등으로 생각하거나, 무시하는 행위
인문학적, 과학적 학문의 발견을 신학보다 열등한 것으로 매도하고 귀를 닫는 행위
하누리 형제가 나눈 것처럼 자신들의 경건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 하여
에어로빅하는 사람을 모두 매도하는 행위
이러한 행위들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성경에 대해 그나마 좋은 인상을 갖고 있던 이들마져 오해케 하는 일입니다.
더우기 네비의 주타겟인 엘리트들에게 있어서
이 시대속에서의 의무는 '초등학문'에 눈길돌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등학문'으로 성숙한 세상의 학문적 발견을
성경의 정신과 통합하기 위한 엄청난 시간 투자와 고뇌, 열정이라는 댓가를 요구하는
"지성적 노력"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생되려는 자, 리더가 되려는 자가 지어야 할 짐이요,
물질적 생산성과 효과성으로만 자신을 고양시켜가는 시대정신속에서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진리와 자유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만
사람이 일어서고 생명에 이르게 되는 신비요, 배운자나 덜 배운자에게 차별이 없는 놀라움이지만
이 마지막 때에 자신의 신앙하나 지키는데 천착하지 않고,
여러사람에게 여러모양으로 그 진리를 전달하고
공감을 일으키기를 소망하는 이들이라면, 분명히 지어야 할 십자가가 또한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노력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주의함 -
지성적 노력의 필요성을 간과하려는 우리 안의 게으름과의 투쟁 - 이 필요합니다.
임영수 목사님이 말씀하신 바 처럼,
그리스도의 진리는 못배운 자도 단번에 깨침에 이를 수 있는 것이면서도
많이 배운 자라도 한 말씀에 길을 잃게하고야 마는 신비로운 말씀임을 고백합니다.
잘 안다고 생각하고 조급한 판단과 지적 게으름에 빠질 때,
자기 자신과 타인, 젊은 세대와 인간, 속한 공동체와 세상을 이해하려는 지성적 노력의 경주에서 물러날 때,
잠시 잠깐 지켜본 그의 어리석음과 모자람, 과장됨이나 주눅든 모습으로 그의 인격을 규정/판단하고
믿음안에서 그의 내면과 존재가운데 진행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기대와 기다림을 접을 때에
그 때 제자는 제자되지 못합니다.
2. 스콧 펙 박사가 본 악의 심리학 - 게으름과 약자에 대한 태도
"끝나지 않은길", "아직도 가야할 길", "거짓의 사람들" 등의 책으로 유명한
스콧 펙박사는 그의 저서들에서
"큰 죄" 또는 죄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그의 상담학적 경험에 근거하여
게으름과 약자에 대한 태도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게으름이 만악의 근원이다" 하는 것에 많은 분들이 수긍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약자에 대한 태도"가 진정 악의 대표적 모습이라는 것은
약자의 입장에서 그 고통을 당하며 그 억울함과 파괴적인 영향을 섬세하게 읽어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확신입니다.
그런데,
스콧펙 박사가 지적해 낸, 약자에 대한 태도가
악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 - 전이될 때 - 거기에는 반드시
성급한 판단과, 기다려 주지 못하는 조급함이 있습니다.
강자앞에서는 그의 권위와 힘을 느낀 나머지 억제되던 우리 안의 죄성이
약자앞에서는 "실수"라는 변명구실을 핑계삼아 잘 고쳐지지도 않고 쉬이 들통나 버리지요.
두 성현의 통찰이 잘 일치하는 부분입니다.
3. 그 두가지 "큰 죄"는 다양한 모습으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죄란 무엇인가? 에 대한 물음은 하나님을 깊이 신앙하며 따르려는 분들이
일생 질문하는 주제입니다.
우린 얼마전, 익명상담게시판을 통해 자위행위로 인해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분의 나눔을 들을 수 있었고
저 또한 그랬습니다.
저는 평생 가위눌리는 것이 뭔지 모르다가, 2번 눌렸었는데,
그 때는 네비 나오기 직전인 대학 4학년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자위행위를 끊지 못한 실패감에 고통하며 죄책감에 잠들다가
가위에 눌려 죽을 것과 같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세월이 지난 후,
이제 확신하는 것은 정작 제가 죄책감을 느끼고 아파해야 할 죄의 제목은
이것이 아니었으며 그 이후로도 그런 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과 일상가운데에는 크고 작은 많은 죄가 있지만,
우리는 주관적으로 어떤 죄는 크게 여기고,
어떤 죄는 작게 여기든지 아예 죄로서 인식하지도 못하거나 억압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에서 조차
이러한 주관적 해석의 가능성을 스스로 인지한다면,
정작 하나님은 어떤 죄를 크게 보는가? 하는 물음은 매우 중요한 물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죄책감의 우선순위에 따라서, 우리의 영적여정은 매우 달라지게 되며
많은 경우, 우리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죄책감은 성령의 조명하심에 따른 것이라기 보다는
- 익명의 권위(문화적 성향/현견, 여론),
- 약한 양심(자기 자신의 동기에 대한 지나친 의심/결벽주의)
- 죄에 대한 제한적인 이해와 통찰
- 무의식적 방어기제인 죄와 어두운 과거에 대한 인식의 억압과 망각, 환상
등으로 인해 매우 왜곡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반성으로 썼던 것이
<치유/회복(To God)>에 게재된 "죄책감의 우선순위? "라는 글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현들이 큰 죄로서 지적해준
- 성급함
- 게으름
- 약자에 대해 무자비한 태도, 무시하는 태도, 불친절한 태도
는 오늘 저의 삶의 자리에 여전히 있으며,
저 자신이 어떤 죄에 대하여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에 빛을 던져줍니다.
직장 동료들에게, 주위 이웃에게,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
그래서 좀 전에,
연구원의 저 구석진 실험실에서 손에 기름칠해가며 땀을 뻘뻘흘리는
기능원의 모습이 안스러워 그에게 뭔가 하나 요구하러 들렀다가 간단히 나올 수 있는 것을
그의 이야기를 오래 들어주고, 참 어려운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격려해주고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아주고 나왔습니다.
그의 얼굴이 펴지고, 첨엔 떨며 열등의식가운데 저를 대하던 그가
말 표현이 편안해 지고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그것은 아주 잠깐의 시간만 들이면 되는 데...
내 생각에 빠져, 나의 바쁜 일정에 빠져, 나의 우선순위에 빠져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고, 기다려주기 싫어하고, 짜증내곤 했던 저의 모습들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그 분을 뒤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 2008년 어느날 초고(갈렙), 2011년 어느날 수정(뽀로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