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고 "이럴 수가 있나"하고 안타까워하는 사건이 바로 예수님을 은 30을 받고 원수들에게 판 '가룟유다'의 지극히 어리석은 행동을 들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가룟 유다'의 배반은 하루 아침에 갑자기 되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점에서 두려움과 경각심을 갖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염두에 두고, '가룟 유다'의 배반을 통하여 교훈을 삼아 제2, 제3의 현대판 '가룟 유다'가 생겨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히6:6).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인 A.D. 27- 30년경에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되어 회계(재무)를 맡을 만큼(요12:6) 수리에 밝고 유능한 자입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스승이신 예수님을 원수들에게 은 30냥을 받고 팔아넘긴(마26:47-56) 배은망덕한 제자입니다. '가룟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그리욧 사람 유다'라는 의미입니다. 또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의미입니다. '가룟유다'는 그리욧 출신으로 그리욧은 브엘세바 북동쪽 약 29km지점에 위치한 현재의 "키르벳 엘카라 테인"으로 추정됩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다른 제자인 '유다'(일명 다대오, 마10:3)와 구별하기 위해 '가룟 유다'로 불렀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재무(요13:29)를 담당 했을 정도로 모두가 신임을 하였던 열심있는 야심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과 국가의 자유를 회복할 정치적인 왕이나 유능한 랍비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세속적인 영달을 취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많은 고난과 죽임을 당하리라"하는 말씀과 "그리스도의 왕국이 마지막 날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회의와 후회의 상실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상실한 마음속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요13:2).
이 세상 권세에 대한 야망이 좌절되자, '가룟유다'는 돈을 사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 '마리아'가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자,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이를 비판하였습니다.(마26:6-13) 즉 메시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상징하는 장사예식까지도 방해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습니다(요12:1-8).
예수님은 '가룟유다'를 제자로 삼고 사랑과 긍휼로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여러 번 주었지만 그는 그 모든 은총을 저버리고 급기야는 물질에 완전히 눈이 멀어버림으로써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까지 팔려고 대적들과 은밀하게 흥정하고(마26:14-16) 그것을 실행함으로써(마26:47-50) 결국 멸망의 자식(요17:12)이요, 마귀에게 속하여 예수님을 원수들에게 판 배반자(요6:70)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정죄되어 부당하게 사형을 선고받자 무죄한 스승을 판 일로 괴로워하다가 목매어 자살하였습니다(마27:3-5). 어떤 이들은 가룟 유다를 두고 유대를 진정 사랑한 애국자, 예수의 구속사역을 위한 숙명론적 상황의 희생자 등으로 미화시키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그를 "도적"(요12:6) 이요, "멸망의 자식"(요17:12)이요, "마귀"(요6:70)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게 되는 비운을 겪었는가?
1) 천국권세보다 세상권세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마20:20- 25)
요한복음 1장 46절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할 정도로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부패하였습니다. 백성들의 지도자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은 정복자 로마군들과 결탁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고 있었고, 종교적으로 예언이 중단된 지 400여 년이나 된, 정말 불확실하고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은 소망을 잃고 삶의 의욕마저 상실해버린 때에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귀족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에게,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 교훈(막1:27)의 권세"로 책망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으니,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이스라엘을 정치적인 자유와 국가적 자유를 회복할 메시야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왕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눅24:21).
여기에는 '가룟유다'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특히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재무"(요13:29)를 담당했을 정도로 모두가 신임을 하였던 열심있는 야심가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마16:23)하면서 부푼 꿈과 야망을 키우던 사람들에게는, "많은 고난과 죽임을 당하리라"는 말씀은 실망과 낙심을 가져다 주는 충격적인 폭탄선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금방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마16: 27- 28, 요 12:48)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조급해진 가룟 유다는 "괜한 짓을 하는구나"하는 피해망상과 함께 그러한 피해복구를 다른 것에서 찾으려 하는 상실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상실한 마음속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요13:2).
2) 돈에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요12:6)
이제 세상 권세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기 시작한 '가룟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성을 등에 업고서, 자기가 현재 맡고 있는 "재무담당'직을 통하여 물질을 소유하려는 계획으로 바꾸기 시작하였습니다. 돈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행동파인 '가룟유다'는 물질을 얻는 데에 머리를 쓰기 시작했고(마26:6)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상징하는 장사예식까지도 방해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요12:6). 급기야는 물질에 완전히 눈이 멀어버림으로써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까지 팔려고 대적들과 은밀하게 흥정하고(마26:14-16) 그것을 실행함으로써(마26:49) 결국 헤어나오지 못할 악의 구렁텅이에 완전히 빠져 들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주님이 오시고 성경이 폐하는 그 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조소거리가 되는 그런 비참한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2. 가룟유다를 통해 우리가 배울 교훈
1)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과 국가의 자유를 회복할 정치적인 왕이나 유능한 랍비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삼 년이나 생활했던 '가룟유다'는 예수님 곁에서 살았지만 예수님을 이처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그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면서도 믿지 않았기에 그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 역시 믿을 때 보게 됩니다. 육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는 믿을 때 알게 됩니다. 인간의 지성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알게 됩니다(마16:15-17, "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또한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것만큼 더 깊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알기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래 죄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이해가 되면 믿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신앙의 길에 들어서기가 어렵습니다. 이해가 안 되어도 단순하게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정도가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정도에 따라 변화와 성숙과 헌신의 정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2)물질을 너무 탐하였습니다.
제자들 중에 회개의 직무를 맡았던 '유다'는 공금을 착복하며 자신의 이(利)를 탐하여, 결국 자기의 스승된 예수님까지 은 30에 팔아 넘겼습니다. 산헤드린의 가장 큰 문제는 공개적으로 민중을 자극하지 않고 예수님을 체포하는 일이었습니다. '가룟유다'는 그와 같은 기회를 포착하여 그들에게 밀고하겠다고 제의하고 그 댓가로 은 30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유다'는 돈 문제 때문에 사도로서 선택된 축복된 생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즉 '가룟유다'는 특히 돈 문제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그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는 사실을 실제로 보여 준 인물입니다. 성도는 금전문제에 있어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약1:14-15,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3)마귀가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마귀가 주는 생각대로 행동하였습니다.
요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요13:21-30,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고 하였습니다.
4) 주님의 경고를 무시하였습니다.
마26:21-25,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계속적으로 언급하심으로써(요13:10, 11, 26) '유다'로 하여금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끝내 이 기회를 뿌리치고 무시하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 행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마27:3-5,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5)자신의 범죄를 위해 후회는 하였으나 참된 회개는 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은30을 받고 원수들에게 넘겨준 범죄에 대한 단지 후회하고 자책하는 것 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경우처럼 철저한 통회의 눈물로써 돌이킬 때 만이 비로소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은총을 배신으로 갚는 '가룟유다'같은 심성은 인간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따라서 삼가 근신함으로 늘 깨어 기도하여 마귀가 틈탈 기회를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룟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후회는 하였으나 베드로처럼 진정으로 회개치는 않고 오히려 그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자살하였습니다(마27:3-5).
6)자신에게 주어진 귀한 기회(사도로서 봉사할 수 있는)를 선용하지 못하였습니다.
'가룟유다'는 사도로서 시작해서 배반자와 자살자로서 생을 비참하게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애는 주께 가장 크고도 귀중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기회(사도로서 헌신하고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장 추악하게 사용함으로써 그에게 주어진 복된 기회를 망친 생의 본보기가 됩니다(행1:15-26). 유다의 죽음 이후 '맛디아'가 12번째 사도가 되기는 했으나(행1:26), 어떤 의미로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넓은 의미에 있어서 12번째 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 12번째 사도로서 귀한 직분을 가롯유다를 제외한 다른 열한 사람의 제자들처럼 아름답게 선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제게 좋을뻔 했던 자였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유다의 비극적인 종말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종말은 어떠해야 할 것입니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꼭 태어나야만할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