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조연(助演)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마가복음 4:26-29)
제가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갖게 되는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왜 오늘 본문에는 씨를 뿌리는 농부의 수고가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저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 처가댁 부모님들을 보면서 시골에서 농사짓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인지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농담 중에라도 “저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적한 시골에 와서 농사지으며 살고 싶습니다.” 라는 말을 함부로 못합니다. 어르신들은 아침 일찍 들에 나가면 하루 종일 힘든 육체노동에 시달립니다. 농사일이 얼마나 바쁜지 시골에서 몇 달을 지내면서 부모님들이 하루도 마음 편히 쉬는 날을 거의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일이 하나 끝나면 또 다른 일을 해야만 살 수 있는 바쁜 농사일에 혹시 몸이라도 아프면 상황은 훨씬 더 어려워집니다.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시간적,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치료를 제대로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렇게 수고하고 애를 쓰며 자식들 다 가르치고 뒷바라지 하는 모습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농부가 씨를 땅에 뿌린 후에 당연히 있어야 할 농부의 수고가 나오지 않습니다. 밭을 갈고,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주며 사랑과 애정을 기울여 경작하는 농부의 수고가 생략되었습니다.
또 하나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갖게 되는 질문은 또 이런 것입니다. 실제로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자연현상의 도움이 가히 절대적입니다. 날씨가 도와주어야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습니다. 적당량의 햇볕과 비가 내려 주어야 하고, 적절한 온도와 바람이 불어 주어야 합니다. 요즘에는 비닐하우스를 이용해서 과일이나 특수작물들을 많이 하시기 때문에 인공적으로 이런 요소들을 맞추어 줍니다만, 논농사나 밭농사 같은 경우에는 적당한 기후가 필수적입니다. 반대로 씨앗이 잘 성장하기 위해서는 바람이나 태풍, 홍수와 가뭄 등 위협적인 환경이 없어야 합니다. 일 년 농사 다 지어놓고 하루아침에 수해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그런 외적인 요소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위험변수들이 모두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저 땅이 열매를 맺는 과정을 처음에는 싹으로, 그 다음에는 이삭으로, 그 다음에는 곡식으로, 이렇게 원론적으로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설교자로서 오늘 본문이 좀 밋밋하다는 느낌이 솔직히 듭니다. 본문에서 기승전결이 분명히 느껴지는 드라마틱한 본문일 경우에는 설교자로서도 좀 더 흥미를 가지고 연구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같은 본문에는 그런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습니다. 마치 답이 잘 정리된 모범 교과서를 읽는 것 같은 느낌도 솔직히 받습니다. 제가 설교자로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 ‘아니, 김 목사 저 사람이 교만한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몰라요.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느끼셨다면 용서하십시오. 그런데 제가 교만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성경은 당연히 하나님 말씀인데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겠어?” 하고 아무 문제의식 없이 대할 때가 많아요. 그래서 깨달음도 적고, 감동도 적은 겁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오늘 우리들의 언어와 시선으로 성경을 읽다보면, 성경을 통해 더 큰 깨달음과 감동을 얻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제가 오늘 표면적으로 아주 밋밋해 보이는 본문을 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목사 안수 받던 날, 섬기고 있던 길음교회 최래옥 장로님이 액자 하나를 들고 오셨어요. 이 분은 서울대를 나오시고, 지금은 한양대 국문과 명예교수로 계신 우리나라 구비문학의 대가(大家)세요. 이 분이 친히 붓글씨로 오늘 분문의 마가복음 4:26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성구를 적어 오셨어요. 국문학자답게 글씨 또한 명필이세요. 액자 한쪽에다 친절하게 저희 가족들 이름까지 빼곡히 적어 넣으셨어요. 제가 너무 감동이 되어서 아직까지 교회 사무실 벽에 그 액자를 걸어놓고 있습니다. 설교 준비를 하거나, 일을 하다가 좀 피곤해지면 그 액자를 유심히 쳐다봅니다. 그리고 “왜 최 장로님이 저 성구를 나에게 써 주셨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씨 뿌리는 농부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복음의 씨를 뿌리라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성구가 저에게 깊은 도전과 감동을 줍니다.
오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입니다. 특히 마태복음 13장 같은 데서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가 여러 개 등장합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31절)”,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33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44절).”,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45절)”,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47절)”
이 비유들의 공통된 강조점이 있어요. 먼저는 ‘천국이라고 하는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하는 거지요.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처럼,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처럼 대가를 지불해야 천국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강조점은 ‘천국은 처음에는 작은 것으로 시작되지만 훗날 시간이 지나면서 매우 큰 것으로 변해간다’ 하는 거지요. 예를 들어,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 가운데 하나인 겨자씨 한 알이 자라 마침내 큰 나무가 되고, 누룩이 작은 것이지만 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에는 아주 작게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이 점점 더 커져서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는 역사를 일으킨다는 거지요. 실제로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열 두 제자라고 하는 작은 겨자씨로 시작하셨지만, 지금은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제자로 자청할 정도로 기독교는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아마 그런 면에서 우리가 읽고 있는 씨앗비유도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이 씨앗이 자라 싹이 나고, 이삭이 되어, 급기야 충실한 곡식이 됩니다. 작은 것이 커져 간다는 면에서는 다른 비유들과 틀리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각 비유들은 다른 것들과 비교되는 그 비유만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비유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징은 무엇일까요? 제가 초반에 오늘 본문에서 씨를 뿌리는 농부의 수고가 나타나 있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지요? 실제로 오늘 본문에는 농부의 역할이 아주 제한적으로만 묘사되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씀드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농부가 아닙니다. 농부는 그저 연극으로 말하자면, 조연배우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우리 인생이 조연배우라는 이야기가 솔직히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점이 있어요. 그래도 사람이 수고하고 애써서 무언가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어야 직성이 풀리지 않나요? 맞습니다. 그래야 직성이 풀리고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런 면에서 우리의 기대치를 저버립니다.
농부가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그 다음 장면은 농부가 땀을 흘려 밭을 매고, 물을 주는 장면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농부는 밤낮 자고 깹니다. 심지어 농부는 그 씨가 나서 어떻게 자라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이 말이 농부가 게으르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농부가 밤낮 자고 깬다는 말은 농부가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농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들을 살아갑니다. 그 사이에 시간이 흘러갑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을 사는 동안 씨앗이 자랍니다. 농부는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에 무지합니다. 어떻게 그 씨가 자라나고 어떻게 열매를 맺게 되는지 농부는 알지 못합니다. 여기에 나타난 농부의 역할이라는 것은 단지 씨앗을 한 번만 뿌렸을 정도로 지극히 소극적입니다. 또한 씨가 자라나는 과정에 있어서도 농부는 철저히 소외됩니다.
어쩌면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전혀 무지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4:13). 그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많은 외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는 꼭 제자들을 따로 불러서 그들에게 그 비유의 참 뜻을 따로 가르쳐 주셔야만 했습니다.
오히려 씨가 자라고 열매를 맺는 과정에 있어서는 농부보다 훨씬 더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은 땅입니다. 28절에 보면,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라고 기록하고 있어요. 여기서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인간의 노력이나 지식이 필요 없이 단순히 땅의 힘만으로도 씨가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농부는 씨를 뿌릴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 씨를 열매 맺게 하는 것은 순전히 땅의 힘입니다. 여기서 ‘땅의 힘’은 무엇을 말합니까?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셋째 날에 땅을 만드셨어요. 그리고 땅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1-12).”
하나님께서 땅에게 주신 사명이 풀과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땅이 그 사명에 따라 풀과 채소와 나무를 내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씨가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너는 씨를 뿌릴 수는 있지만 열매를 맺게 할 수는 없다. 오직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씨를 뿌립니다. 그러나 그 씨를 자라나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엄밀히 말씀드려, 우리 인생의 주연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은 모두 인생의 조연배우입니다. 연극에서 아무리 조연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조연은 단지 조연이어야 합니다. 조연이 주연보다 더 관심과 조명을 받는다면 그는 조연의 역할을 망각한 것입니다. 연극에서 조연은 그저 주연배우를 도와 그가 더 연기에 몰입하도록 도와주면 그만입니다. 그것이 그의 사명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엄밀히 말씀드려, 씨를 뿌리는 자는 기대감을 가지고 땅에 씨를 뿌립니다. 그는 씨앗이 잘 자라 풍성한 수확 거두기를 소망합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 그리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긍정적인 애착을 갖는 것처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누구 앞에서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자긍심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인생의 조연배우는 자신의 본문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고 그 역할에 만족하며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주연이 되기 위해 욕심을 부리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주객이 전도된 실패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도바울의 고백을 들어야 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사도 바울의 말대로라면, “나 바울이나 아볼로는 조연배우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주인공이시다!” 이 말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지금 고린도교회에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 당시 고린도교회가 분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마치 씨를 심은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이 조연이 아닌 주연역할까지 해주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나 아볼로가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자, 다시 말해 조연배우가 아니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연배우가 되 주길 원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뛰어난 종교 지도자들이 되 주길 원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종교적 영웅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날에도 우리 시대의 교회들은 이와 비슷한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는 바울이나 아볼로처럼 뛰어난 종교적 영웅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는 이러한 종교적 영웅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조연배우가 더 많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언제든지 “예!”로 순종하며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 농부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그래서 언제든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교회에 이처럼 씨 뿌리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겸손히 수행해야 합니다. 종은 아침 일찍 들에 나가 열심히 일을 하고 양을 칩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는 쉬지도 못하고 주인의 식사를 준비합니다. 또한 주인이 식사할 동안에도 종은 그의 옆에서 수종을 들다가 주인이 모든 식사를 끝낸 후에야 비로소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주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들은 모든 수고를 끝낸 후에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눅 17:10).”
하나님의 부르심을 너무 야속(野俗)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주어진 사명에 따라 인생 조연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기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더 큰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비유의 맨 마지막 부분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29절).”
우리가 씨를 뿌린 후에는 그 씨가 어떻게 자라나고,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당신의 선한 일들을 신비로운 방식으로 진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땅 어딘가에서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 나라의 씨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준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뿐입니다. 마치 무대의 한 쪽 구석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감당하는 조연배우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비록 작고 하찮은 일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씨를 뿌리는 일처럼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씨를 뿌리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추수의 기쁨을 함께 누릴 것에 대한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논과 밭에 성실히 씨를 뿌린 자를 결코 잊지 않으시고 추수 때에 다시 그를 부르십니다. 이번 부르심은 그에게 씨 뿌리는 고통만큼이나 큰 추수의 기쁨을 선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추수의 기쁨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저는 여러분들이 이러한 기쁨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정년 기쁨으로 곡식 단을 거둘 것입니다. 마치 해산하는 여인이 지금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태어난 아기를 보고는 기뻐함으로 그 고통을 잊게 되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수고하는 애쓰는 우리들을 기억하셔서 반드시 기쁨으로 곡식 단을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소망과 기대가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인생의 고통으로 좌절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소망으로 조금만 더 인내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던 선한 일을 결코 멈추지 말고 계속하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하시고, 유쾌하게 되는 날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시고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은 그 귀한 역사에 동참할 명품 조연배우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겸손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릴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 귀한 초대에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