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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태 목사 설교문

고린도전서 8:1~13 무엇이 형제를 세우는가?

작성자김규태목사|작성시간26.06.06|조회수53 목록 댓글 0

2026년 6월 7일(성령강림절 후 두 번째 주일)
고린도전서 8:1~13
무엇이 형제를 세우는가?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설득적 대지설교 형식
김규태 목사

*설교 주제문: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기 만족을 위한 권리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책임이다.

*설교 목적문: 성도들이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주장하는 데 머물지 않고, 형제를 살리고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사랑으로 자유를 절제하는 삶을 살도록 도전한다.

충북 보은에서 공동체 운동을 하던 한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해외 사역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공동체가 두 편으로 나뉘어 심하게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공동체라면 재산도 모두 공유해야 한다.”라고 주장했고, 다른 한쪽은 “공동의 재산과 개인의 재산이 함께 있어야 현실적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여러 날 논쟁하다 보니 공동체가 해체될 위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기도회 시간에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셨고, 사람들은 서로 껴안고 울며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다음 날에도 각자의 주장은 그대로였다는 사실입니다. 의견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바뀌었습니다. 더는 상대방이 미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정대서, 「자기중심성 벗어나기」(두란노, 2020);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5년 10월호), 47쪽에서 재인용.

사실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은 의견 차이 자체가 아닙니다. 사랑의 부재입니다. 반대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도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기간에 세운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떠난 후, 고린도 교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였습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였고, 많은 이교도가 우상에게 제사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제 막 기독교로 개종한 신자들이 우상에게 제물로 드려졌던 고기를 먹어야 하는지, 먹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일어납니다. 어떤 성도는
“성경은 술 자체를 금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어떤 성도는 “술은 절대 안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때로 교회 안에서 문화생활에 관한 차이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를 관람하거나 게임, 대중음악, 스포츠를 관람하는 일에 있어서 서로 다른 자세가 존재합니다. 심지어 한 교회 안에서도 다양한 예배 스타일의 차이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가령 교회의 예배 방식이나 기도 방식에 관한 차이가 존재하거나 성도들의 패션이나 헤어 스타일에 관한 시각 차이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특성을 고려할 때, 우리는 어떻게 건강한 공동체를 세워나가고,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세워나갈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기초로, 우리가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세우기 위해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세우기 위해서는 사랑을 추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1절)

과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가진 지식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을 알았습니다. 비록 이교도들은 하늘과 땅에 많은 신을 섬기고 있었지만, 성도들은 한 하나님,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막 기독교로 개종한 신자들에게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은 단순히 음식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고기에 불과했지만, 우상숭배에서 갓 돌아온 사람들에게는 과거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은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압니다.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 다녔던 초등학교 운동장이 매우 크게 느껴졌지만, 우리가 성인이 되어 바라본 학교 운동장은 예전처럼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은 온전한 것이 아니며, 우리는 지금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압니다. 그러나 사랑은 다릅니다. 언젠가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고전 13:8).

그래서 바울은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를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보다 “그 행동이 형제를 세우느냐 무너뜨리느냐?”를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형제를 세우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세우기 위해서는 나의 지식이 옳고 그름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사랑을 추구해야 합니다. 형제 사랑만이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세울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아느냐보다, 내가 얼마나 사랑하느냐가 공동체를 세웁니다.

둘째로, 우리가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세우기 위해서는 형제를 배려해야 합니다.

교회 역사에서 ‘아디아포라’(adiaphora) 논쟁이라 불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디아포라는 그리스어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즉 성경에서 명백하게 명하지도 금하지도 않은 영역, 문화적이거나 개인적인 선택의 영역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목회자는 가운을 입어야 하느냐, 입지 말아야 하느냐도 아디아포라의 영역입니다. 목회자 개인마다 입거나 입지 않는 것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있습니다. 그러나 입지 않는다고 정죄하고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출처: 이재훈, 「나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서울: 두란노, 2018); 「생명의 삶」(서울: 두란노, 2022년 5월호), 103에서 재인용.

이같이 바울에게도 우상에게 제물로 드려진 음식을 먹을 자유도 있었고, 먹지 않을 자유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8절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하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바울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이미 자유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는 부수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중요하게 여겼던 일은 자기의 행동으로 인해 믿음이 연약한 지체가 근심하고 시험에 드는 일이었습니다. 만약 자기의 자유로 믿음이 연약한 자가 시험에 든다면 먹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9절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미국에서 한인 목회를 하는 한 목사님이 교회가 속한 시(市)의 한 관계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시 인구수와 비교하면 교회가 아주 많다며, 이는 미국 사회에서 매우 드문 경우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지역에 있는 많은 교회 중 하나인 우리 교회가 이 지역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를 물었습니다. 그는 가장 작지만 정말 중요한 일을 부탁했습니다.

“천천히 운전하세요!” 주일이면 교회로 향하는 차량이 사방에서 시내를 통과하는데, 운전자가 동양인일 경우 대부분이 우리 교회를 떠올린다고 했습니다. “배려하며 운전하는 것, 조금 기다려 주고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교회가 우리 시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목사님은 급하게 운전대를 잡았던 자기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작은 배려가 때로는 적극적인 헌신이 될 수 있구나!’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권준, 「교회만 다니지 말고 교회가 되라」(서울: 두란노, 2014); 「생명의 삶」(서울: 두란노, 2022년 5월호), 115에서 재인용.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유가 아니라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랑할 수 있는 자유이며, 배려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나는 할 수 있다”만을 말하는 신앙이 아니라, “그러나 형제를 위해 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말하는 신앙입니다. 형제를 세우는 것은 나의 자유가 아니라 형제를 향한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세우기 위해서는 자기의 권리를 내려놓고 희생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과연 바울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관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우리 한 음성으로 10절과 11절을 읽겠습니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지식과 자유를 가진 성도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믿음이 연약한 자가 우상의 집에 앉아 음식을 먹는 성도의 모습을 보고 실족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단순히 배려의 차원이 아닙니다. 바울이 과연 무엇이라고 힘주어 말합니까?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심지어 바울은 지식과 자유를 가진 성도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곁에 있는 형제와 자매는 단순한 배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 곁의 형제, 자매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실 정도로 사랑하신 대상입니다. 우리가 쉽게 판단하고 무시하는 그 형제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내어주신 사람을 위해 우리가 권리 하나 내려놓지 못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셨는데 우리가 취미 하나, 자유 하나, 습관 하나 포기하지 못하겠습니까?

어니스트 고든(Ernest Gordon)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의 전쟁 포로가 되었습니다. 당시를 다룬 회고록에서 그는 강제 노동의 하루가 끝나고 간수들이 삽의 숫자를 헤아렸는데 하나가 없어진 일을 회상했다.

격분한 한 간수는 범인이 실토하지 않으면 영국군 전쟁 포로를 다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는 총의 공이를 당겼고 당장이라도 포로들을 하나하나 쏠 기세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한 포로가 차분하게 앞으로 나와서 말했습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그는 말없이 차렷 자세로 서 있었고 맞아 죽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사 53:7).

그들이 수용소로 돌아가 다시 삽의 개수를 세었습니다. 삽은 빠짐없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모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왜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줄까요? 한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자신을 내어줄 때 다른 사람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며, 바울이 말하는 형제를 세우는 희생입니다.
-출처: 팀 켈러, 「방탕한 선지자」(두란노, 2019);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6년 3월호), 57쪽에서 재인용.

예수님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권리를 내려놓는 사랑의 절정입니다. 바울도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형제를 위해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서약합니다. 그는 기꺼이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위하여 희생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13절)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자유의 절제입니다. 이것이 공동체를 세우는 희생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우리도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세우기 위해서는 자기의 권리를 내려놓고 희생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설교 초반에 말씀드린 보은 공동체의 사람들은 끝내 같은 생각을 갖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모두 같은 지식을 갖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사랑으로 형제를 세우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배려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권리 주장이 아닙니다. 희생입니다.

나의 지식과 자유와 권리 주장으로는 연약한 형제를 세울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랑과 배려와 희생의 자세가 연약한 형제를 세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유익을 구하기보다 형제를 세우는 일에 힘쓰십시오.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구하십시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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