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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태 목사 설교문

열왕기상 19:13~18 거기에서 이름을 부르실 때

작성자김규태목사|작성시간26.06.15|조회수45 목록 댓글 0

2026년 6월 16일(화) 오전 6시 30분, 새로남교회
열왕기상 19:13~18
거기에서 이름을 부르실 때
대전홀리클럽 예배 설교문
내러티브 설교 형식
김규태 목사(하늘사랑교회)

오늘 귀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홀리클럽 회장님과 임원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몇 해 전에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왔었습니다. 그때 저는 갈멜산 정상에서 엘리야 동상을 보았습니다.

그날 제가 본 엘리야는 한 손에 칼, 다른 한 발로는 바알 선지자들을 밟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마는 넓었고, 이목구비는 뚜렷했습니다. 그의 모습에서 용맹함이 묻어났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이러한 엘리야를 기대했다면 매우 실망했을 것입니다. 지금 엘리야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캄캄한 동굴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 엘리야를 향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는 이 질문에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 질문에 여러분의 이름을 넣는다면,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들 것 같습니까?

엘리야는 호렙산 한 굴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가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날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를 떠나 유대 광야를 거쳐 사십 주, 사십 야를 걸어서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마치 그의 선조들이 사십 년간 광야에서 지냈던 것처럼, 그도 아주 먼 길을 걸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올랐습니다.

왜일까요? 왜 엘리야는 거친 광야 길을 걸어 이곳까지 왔을까요? 왜 그는 어두운 동굴에 몸을 숨긴 채 두려워했을까요? 여러분은 이러한 엘리야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건,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무찔렀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야는 두려웠습니다. 평상시 그의 모습과는 달랐죠. 어쩌면 그가 바알 선지자들과 싸우느라 체력을 너무 많이 고갈했는지도 모릅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새 가족 초청 행사를 마치고 탈진한 교역자와 같았으니까요. 그는 너무나 지쳐서 어디론가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찾아간 곳이 광야였고, 호렙산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경험이 없었습니까? 너무나 지쳐서 혼자만 있고 싶던 적은 없었나요? 방문을 걸어 잠그고, 두꺼운 커튼을 친 채 어두운 방 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고 싶지 않았던 적은 없었나요?

이제 여러분은 왜 엘리야가 그곳에 있었는지 짐작하시겠습니까? 그곳에서 엘리야는 많은 일을 경험했습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쉈습니다. 조금 있다가 큰 지진이 일어나 산을 흔들었습니다. 심지어 불이 일어나 모든 산을 태울 기세였지요. 그러나 엘리야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마음이 굳게 닫힌 엘리야를 굴 바깥으로 끄집어냈던 것은 의외로 세미한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는 엘리야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여러분은 이 질문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상황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엘리야가 그곳에 있어야 했는지를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셨을까요?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14절).”

여러분은 하나님과 엘리야 사이의 대화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목사님이 축도를 마치고 예배당 입구에서 성도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던 한 성도가 목사님을 향해 웃으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는 정말 은혜로웠습니다. 최근에 제가 들어본 설교 중의 최고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 성도를 향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성도님, 지난주에 유등천이 범람해서 다리가 붕괴했다는 소식을 들으셨나요? 나는 그 소식 듣고 지난 간밤에 한숨도 못 잤어요.”

여러분은 이 둘이 나눈 대화가 자연스럽다고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은 왜 엘리야가 호렙산에 있는지를 물어보셨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볼멘 목소리로 자기 밖에 남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대화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설이 어머니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녀는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결정했지요. 그때 집에서는 영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그녀는 가난하고 무능력한 아버지와 허드렛일로 생계를 꾸리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런 부모님에게 그녀는 희망이었죠.

그녀는 어려서부터 바쁘고 고단한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일과 동생을 돌봐야 했습니다. 그녀가 명문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과외를 하며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녀는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평생 누군가를 돌보며 무언가를 ‘해내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설이를 낳고 집에 있을 때도 온전히 아이와 마주 보며 놀아줘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설이는 엄마가 자신을 거부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었죠. 그럴수록 설이는 엄마에게 더 매달리며 보챘습니다. 그럴수록 설이 어머니는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이 어머니는 ‘누가 나에게 기대고 바라는 상황’이 다시 펼쳐지자, 부담감에 짓눌렸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설이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겠습니까?
-출처: 오종은, 「너무 사랑해서 아픈 부모에게」(두란노, 2022);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5월호), 201쪽에서 재인용.

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 더구나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죠.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방주를 지었습니다.

노아의 나이가 600세가 되던 해, 큰비가 사십 주, 사십 야 동안 땅에 쏟아졌습니다. 오직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 안에 들어갔던 노아와 가족들만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노아의 일생에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대합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세 아들은 땅에서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어느 날,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누워 있었죠. 어떻게 의인이요, 완전한 자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러한 노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비록 노아가 방주를 지었지만, 그가 느낄 수 있던 부담감은 없었을까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동네 친구들이 물살에 휩쓸려 나갈 때, 그가 느낄 수 있던 부담감은 없었을까요? 노아가 흔들리는 방주 안에서 가족과 동물들을 돌보았을 때, 그가 느꼈을 부담감은 없었을까요?

노아가 새로운 땅에 정착해서 포도나무를 심었을 때, 그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새로운 인류의 가장 역할을 감당해야 했던 노아의 어깨에 지워진 무거운 짐을 여러분은 느낄 수 있나요?

어쩌면, 노아도 우리처럼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햇볕 한 줄기 들지 않는 어두운 장막 안에 머물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귀에 헤드폰을 뒤집어쓰고 전설적인 록 밴드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음악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술에 취한 노아가 콧노래를 부를 때, 장막 앞을 지나던 세 아들이 자기를 모르는 체해주기를 바라지 않았을까요? 지금 노아에게 필요한 것은 부담감이 아니라 따뜻한 위로였습니다.

아까 소개해 드렸던 설이 어머니에게도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남편에게 위로받고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었죠.
-출처: 오종은, 「너무 사랑해서 아픈 부모에게」(두란노, 2022);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5월호), 201쪽에서 재인용.

“내가 만군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10, 14절).”

저는 엘리야에게서 부담감이 느껴집니다. 이제 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부담감, 그래서 이제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이 그에게서 느껴집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엘리야에게 무엇이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까?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외딴 지역에 있는 작은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 교회에는 15년 이상 담임 목회를 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성도 간의 분쟁으로 현재 남은 교인이 일곱 명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목사님은 그곳을 떠나지 않고, 주중에는 다른 일을 하며 생활비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예배 후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하잖아요. 나는 못생긴 나무니까, 어디 갈 생각도 못 하고 이곳을 지키고 있답니다.”

자신을 못생긴 나무라고 지칭하는 말이 진심으로 느껴졌습니다. 그 겸손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못생긴 나무이기에 교회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목사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종이기에 교회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에게 사명을 주셨기에 그 어려운 교회를 지키는 것입니다.
-출처: 이국진, 「사람이 여물어 교회가 꽃피다」(홍성사, 2015); 「생명의 삶」(두란노, 2024년 7월호), 97쪽에서 재인용.

하나님은 부담감에 눌려 있던 엘리야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15~18절).”

하나님은 엘리사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 아람 왕, 이스라엘 왕,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세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을 남겨두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무리 바알을 섬기던 아합왕과 이세벨의 횡포가 극심할지라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남겨두실 것입니다. 오직 나만 남았다고 한탄하며 스스로 죽기를 구했던 엘리야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절망의 자리, 낙심의 자리에 앉아 있던 엘리야를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심으로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역의 부담감을 안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을 부르셔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게 될 때, 우리는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나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야기 하나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토머스는 사업상 바쁜 약속으로 급히 차를 몰고 가는 중이었습니다. 교통 체증이 심한 시간이라 교차로에 들어서자마자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었습니다.

정지선에 멈춰 선 토머스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신호가 바뀌면 제일 먼저 쏜살같이 달려야지.”

그런데 신호가 깜빡이는 순간, 교차로에 시각장애인 부부가 나타났습니다. 남편은 어린아이의 손을 붙잡고 있었고, 아내는 갓난아이를 업고 있었죠. 부부가 뭘 착각했는지, 차들이 맹렬하게 달려들려는 찰나에 교차로에 들어선 것입니다.

토머스는 탄식했습니다. “큰일 났다. 보나 마나 달려드는 차들은 급정거하느라 요란할 테고, 차에 있는 사람들은 비키라고 아우성을 치겠구나.”

그런데 토머스가 염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차가 일시에 멈춰 선 것입니다. 누구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습니다. 앞 못 보는 가족을 위해 교차로 일대만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습니다.

그때 누군가 말합니다. “오른쪽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부부에게 방향을 일러 준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차에서도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합창이 이어집니다. 장애인 가족이 합창을 따라 인도 위에 올라서자, 운전자들은 손뼉을 쳐 줬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 가족을 위해 바쁜 시간에 차들이 멈춰 선 광경은 토머스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습니다.
-출처: 박성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용기」(두란노, 2015);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5월호), 29쪽에서 재인용.

혹시 여러분에게 어떤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수많은 믿음의 선진 들이 여러분을 향해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합창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혹시 하늘의 천군 천사가 여러분을 향해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합창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만약 제가 그 소리를 듣게 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힘을 내겠습니다!”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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