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1일(성령강림절 후 네 번째 주일)
고린도전서 11:17~29
하나 된 식탁, 세상을 향한 증언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본문접맥적 주제설교 형식
김규태 목사
*설교 주제: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를 세우는 은혜의 식탁이다.
*설교 목적: 성도들이 서로를 배려하며 교회의 하나 됨을 실천함으로 복음을 드러내게 한다.
what’s problem?
오늘 본문을 읽다 보면, 바울이 매우 화가 난 사람처럼 말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22절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하겠습니까? 이 일에 대해서는 칭찬할 수 없습니다.”(새번역 성경, 22절)
왜 바울은 이렇게 강하게 책망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성찬의 자리에서 이미 복음이 허문 담을 다시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모임이 유익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해로움이 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있던 분쟁과 파당을 경계했습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함께 모여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21절에 나오는 ‘자기의 만찬’이란 단어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고린도는 무역이 활발한 항구도였지만, 빈부격차도 컸습니다. 고린도에는 상인, 선주, 토지 소유자, 공무원과 같은 부유층이 있었습니다. 반면 고린도에는 노예나 일용직 노동자, 항구 노동자와 같은 빈민층도 많았습니다. 문제는 고린도 사회의 계층 구조가 교회 안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초대교회는 오늘날과 같은 별도의 예배당이 없었기에, 주로 넓은 집을 소유한 성도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성도들은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교회에 모여서 안쪽에 있는 넓은 식당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성도들은 늦게 일을 마치고 교회에 모여서 바깥쪽 뜰에 앉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배 시간에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주의 만찬’을 행했고, ‘애찬’(愛餐, Agape Feast)이라고 불리는 공동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부유한 성도들은 자기 집에서 준비한 풍성한 음식을 자기들끼리 나누어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성도들은 제대로 음식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먹지 못해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마셔서 취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21절). 교회 안에 이미 존재하던 ‘분쟁’과 ‘파당’이 성찬의 자리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라고 책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22절).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성찬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성찬을 ‘자기 만찬’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습니다. 주님을 기억해야 할 식탁이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는 식탁이 되었을 때, 교회의 하나 됨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지 않습니까?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면 그들은 다 하나요, 다 평등한 하나님의 시민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성찬식에서 다시 차별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오늘 우리 교회에도 그러한 모습은 없을까요?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 목사님이 봉사를 통해 노숙자 한 분을 전도했습니다. 노숙자는 교회에 등록했고 한동안 성실히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분이 예배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길에서 우연히 그분을 만나 반갑게 인사하며 물었습니다. “요즘은 왜 교회에 나오지 않으세요?” 그러자 그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한동안 교회에 가 보니, 교회는 나 같은 사람이 다닐 곳이 못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법조인들이나 대기업에 다니시는 분들이나 의사 같은 교양 있고 훌륭한 분들인데, 저 같은 사람은 도무지 그분들과 어울리기가 힘들더군요.”
-출처: 김형태, 「은혜란 무엇인가」(IVP, 2026);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6년 6월호), 51쪽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노숙자의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십니까?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한국교회가 일부 중산층만의 전유물이 된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혹 우리 교회의 문턱은 누구나 마음 놓고 들어올 수 있을 만큼 낮은지 점검해 볼 일입니다.
what?
바울은 ‘주의 만찬’을 ‘자기 만찬’으로 전락시킨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무엇을 말합니까? 바울은 그들에게 ‘주의 만찬’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가르쳐 줍니다.
23절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는 바울이 가르치는 ‘주의 만찬 전승’이 주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나타냅니다.
바울이 가르치는 성찬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주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떼어먹는 것’과 ‘주의 피를 상징하는 잔을 마시는 일’입니다. 바울은 주의 피로 세운 언약을 가리켜 “새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누가복음 22장에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는 표현과 일치합니다(눅 22:20).
바울이 24절과 25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구절은 “나를 기념하라”입니다. 여기서 “기념하라”라는 헬라어 단어 ἀνάμνησις(아남네시스)는 단순히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기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과거의 구원 사건을 현재 가운데 새롭게 기억하고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기념하라”라는 말 속에 ‘기억’과 ‘참여’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지킬 때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왔다”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애굽에서 나왔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수백 년 전 사건이지만,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지키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현재의 사건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성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단지 2천 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를 추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가 오늘도 나를 살리고 있고, 나를 용서하고 있으며,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남네시스, 곧 ‘기억을 통한 참여’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성찬은 성도들이 모여서 먹고 마시는 단순한 행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찬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새 언약을 기억하고 그것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건입니다.
바울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성찬의 의미를 종말론적으로 해석합니다. 바울은 2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바울은 성찬에 참여하는 일이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반복적으로 주의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실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주의 구원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되어 함께 먹고 마시는 주의 떡과 잔은 이 세상 마지막에 완성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다리는 은혜의 방편이 됩니다. 이 말은 교회의 하나 됨이 훌륭한 선교의 방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의 하나 됨을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예수님의 기도처럼, 우리가 다 하나가 될 때, 세상은 우리의 하나 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함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임을 고백할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how?
그렇다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제시합니까? 바울은 “서로 기다리라”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33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33~34절)
바울은 만약 배가 고픈 사람이 있다면 미리 집에서 충분히 음식을 먹고 오고, 미리 교회에 왔다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기다리라고 권면합니다. 이러한 권면은 가난한 성도들도 충분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려는 조치였습니다. 배고픈 형제에 대한 ‘배려와 기다림’은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당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사회적 차별이 심했던 고린도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겠습니까? 만약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가난한 성도들에 대한 배려와 기다림을 실천할 수 있었다면, 분명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교회를 칭송하며 복음 앞으로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교회에 처음 온 새 가족을 기다려 주고, 믿음이 약한 사람을 기다려 주고, 나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서로 기다리라”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끝으로 한 케냐 선교사님의 글을 여러분과 나누면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선교지 케냐의 길거리에서 저희가 만난 장사꾼들은 물건을 ‘좋은 가격’(good price)에 주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무엇이 좋은 가격이냐고 불으면 ‘현지인 가격’(resident price)으로 주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같은 물건이라도 사람에 따라 파는 가격이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만찬의 경우는 어떨까요? 예수님의 살과 피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값없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모두가 차별 없이 이 성만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기다려야 합니다(고전 11:33). 이는 다른 사람들이 찾아올 때까지 수동적으로 자리를 지키는 것에서 더 나아가, 차별 때문에 그리스도의 초청에 다가오지 못하는 이들이 없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차별과 소외를 겪고 있습니다. 굶주리고 부모로부터 버려지고, 희망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을 향한 우리의 노력은, 그리스도의 초청을 그들에게 전하며 함께 성만찬에 참여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케냐에서 저희는 까만 손이 내미는 빵을 받았습니다. 알록달록 화려한 문양의 옷을 입은 케냐 여성이 다음 사람에게 잔을 나누었습니다. 가난과 성별과 배우지 못함으로 차별받았던 사람들이 케냐의 작은 교회에 모여 성만찬을 나누었습니다. 저희는 케냐 지체들과 함께 빵과 잔을 나누며 차별 없이 서로를 기다려 주는 법을 배웠습니다.
-출처: 주종훈 외, 「일상 성찬」(두란노, 2019); 「생명의 삶」(두란노, 2026년 6월호), 37쪽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어두운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차별이 교회의 하나 됨을 깨트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하나 됨이 세상의 차별을 깨트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교회는 성찬의 참된 의미를 기억하고 교회의 하나 됨에 힘써야 합니다. 성도들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기다림을 통해 교회의 하나 됨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어두운 세상에 밝은 복음의 가치를 드러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으로 하나 된 식탁이 세상을 향한 가장 강력한 복음 설교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교리를 읽기 전에 우리의 식탁을 먼저 봅니다. 서로 사랑하고, 배려함으로 주께서 이미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