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여전히 여러 가르침 속을 헤매며 서성이고 있다.
‘나’와 하나 될 것을 추구하는 열성 있는 이들을 위해,
나는 이제 ‘신성한 교사’를 보낼 것인즉,
‘나의 말씀’을 잘 들으라.
그대는 한때 모든 신비적인 책과 가르침에 심취한 적이 있었고,
내가 이를 허용했었다.
그런 가르침들이 찬사를 던지곤 하는 ‘나와의 합일’을 갈망하면서,
거기에 필요한 힘을 얻고 싶다는 내밀한 바람을 지니고 있었다.
그대가 심취했던 가르침들은,
그대에게는 그럴 만한 힘을 지닐 수 있는
소질이 보인다면서 그대를 부추기기까지 했다.
나는 심지어,
특정한 방법으로 호흡을 하고,
특정한 주문을 암송하고,
그래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스승’을 불러들인다는 믿음조차 허락한 적이 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그 존재가 그대의 교사가 되어,
더 높은 단계로 진보하게 하는 입문식을
치를 수 있도록 그대를 돕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입문을 하게 되면 존재의 내적인 경지가 높아져서,
‘나의 신성한 지혜’가 열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단지 이러한 것들을 허용했을 뿐이지만,
그대가 알아주길 바란다.
그대를 이런 책들로 이끌고,
그러한 욕망을 그대 안에 불어넣은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을,
그러나 명심할지니,
그대가 상상하는 것과 같은 그런 목적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렇다, 나는 그대를 그런 가르침 속으로,
그런 욕망과 믿음 속으로 보내서,
‘나의 신성한 이데아’를 표현하기 위해
내가 사용하는 그 ‘힘들’을,
그대 인간의 마음에 가리켜 보여주려고 했다.
나는 이러한 ‘힘들’을
하늘에 있는 ‘여러 천사 계급’으로 묘사해 왔다.
그렇게 묘사한 것은,
그대 인간의 지성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그 힘들을 ‘천사들’이나 ‘신적인 존재들’로
‘나의 의지’를 실행하는 ‘초자아적 도우미들’로 그려왔다.
태초부터 있었던 ‘나의 이데아’를 나타내는 과정에서
내가 고용한 존재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대는 이런 존재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홀려,
‘그들’을 당장 개성을 입은 사람인 양
생각하기 시작했다(몇몇 가르침에서는 사실, 이를 조장하기조차 한다).
그대는 그대의 삶 속에서 그들이 모습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그들이 인간의 일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래서 특정한 계율에 따라 살면,
‘니르바나’나 ‘불멸’을 얻을 수 있도록
그대를 도와줄 것이라는 상상까지 했다.
나는 의도적으로,
그대가 그런 기만에 빠지도록 허용했다.
그대가 열망하도록, 기도하도록,
주어진 모든 지시를 따르기 위해 열성을 바쳐 고투하도롤 했다.
심지어는 자기가 만들어낸 환상인 꿈인 줄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상적인 존재들을 잠시나마 만나보도록 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대 안에 있는 특정한 능력을 열어 주기도 했다.
그런 능력으로 인해 심령적인 존재를 지각할 수 있게 된 그대는,
영적인 삶에 치우치게 되었고,
그대의 욕망이 불러들인 그 존재들이 ‘스승’의 역할을 해주기를,
그래서 그대를 이끌어주기를 열망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존재들이란 스승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할 때가 왔다.
또한, ‘신성한 존재들’은 자신들을 스승이라고 칭하지 않는다는 것도,
‘나’, 오직 ‘나’만이, 그대 자신의 ‘참자아’만이.
그대를 위한 유일한 ‘스승‘이라는 것도,
그때에야 비로소,
그대는 그대의 형제들 안에서도 ’나‘를 알아보게 될 것이다.
인간이든 심령적인 존재든,
그대의 의식에 나타나 ’스승‘임을 자처하는 존재들은,
혹은 그대가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한 존재들은,
그대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개성적인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경이로운 ’진리‘를 말하고,
’경탄할 만한‘ 일을 행한다 해도,
인간이 이해하는 그런 ’신성한‘ 존재는 아닌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누군가 다른 존재에게서
’스승‘이라는 ’관념‘을 찾으려 하고,
그 ’스승’을 예배하려 하는 한,
그대에게는 그가 아무리 고상하고 신성하게 여겨진다고 할지라도,
그대는 결국 그 기간동안 만큼은 그러한 관념의 먹이가 된 것이다.
‘내가’ 진정한 ‘스승‘을 만나게 하고
친교를 나눌 수 있도록 허용하기 전까지는.
영광스럽게도 그런 특권이 그대에게 주어진다면,
그것은 단지 그대의 깨달음을 촉구하여,
그런 환상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때 그대는 ’스승‘이란 단지
한 개성에 지나지 않음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가 아무리 그대보다 깨달음의 면에서 앞서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한 개성이라는 것을,
그대의 가장 내밀한 ’영혼‘이 알기를 열망했던 ’신성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나‘는,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의 뒤에 있는 실재를
그대에게 가르쳐 보여줄 ’모든 관념‘을,
그대에게 제공해 준다.
’내가‘ 만약 분명 기만으로 보이는 것들에게로 그대를 이끈다면,
그래서 인간의 가르침 안에서 그대의 신앙이 길을 잃는다면,
그것은 단지 그대로 하여금 본질과 그림자를
더 분명하게 분별하도록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리하여 ’내가‘ 그대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토록 기다려 온
저 높은 ’이상‘의 세계에 대비토록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대는 그대의 개성이라는 것을 떨치고 일어나 ,
’나의 의지’가 재우치는 ‘욕망의 바람’을 통해서,
숱한 경이로운 일들을 수행하는 ‘욕망’을 통해서,
그대 인간의 마음이 품을 수 있는
저 이상의 세계로 뛰쳐오를 수가 있다.
의심쩍은 마음이 듣다면,
그대는 ‘말씀’의 ‘열쇠’를 응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스승’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스승’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스승’에 대한 관념은, 그대의 생각에 의해,
그대가 스승이란 이럴 것이라고 상상하고 염원하는 바로 그 존재가 된다.
다시 말하자면,
이 관념의 언저리에 그대가 짓는 생각에 의하여,
‘스승’은 그대가 상상하는 모든 자질을 소유하게 된다.
그대의 인간적인 마음은,
욕망을 통하여, 열망을 통하여, 숭배를 통하여,
어떤 ‘상상의’ 인물 안에서
이런 자질들을 기필코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상상의 인물은 여전히 한 개성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왜 그럴까?
그대는 아직,
‘초자아적인’ 존재를 마음에 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욕망과 생각의 강도에 따라
이 관념은 빠르든 늦든 실질적인 물질화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육신을 입은 한 개성을 그대에게 끌어당길 수도 있고,
환상의 꿈의 영역에서 개체화 된 존재를 끌어당길 수도 있다.
그대 인간의 마음이 그러하므로,
마음은 때로 인간의 여러 문제에 대해 설명과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스승’이란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인생 문제가 그런 식으로 풀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대를 실망시키고 기만할 사람을 그대에게로 끌어당겨서,
환멸과 참담함을 맛보게 하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나’에게로,
그대의 ‘참자아’에게로 돌아오게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대는,
그 동안에도 내내 그대를 향해 속삭여 왔건만
자존심과 에고의 목소리를 듣느라 분주한 나머지
귀 기울이지 안았던 ‘나의 목소리’를,
내면을 울리는 ‘참자아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리라.
아직 이런 경험을 하지 않은 그대에게,
인간이든 심령적인 존재든 그대가 열망하는 ‘스승’을
아직 만나 본 적이 없는 그대에게 말하노니,
그대 안에 있는 ‘나의 말씀’은 진리에 반응하도록
그대의 마음을 촉구하고 깨우는 데에 실패했다.
나는 나중에라도 그대를 ‘나’에게로 이끌 것이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그대는 ‘나’야말로 진정한 ‘스승’이라는 것을,
모든 생각의 뒤에 있는 ‘영감’이라는 것을,
바깥에서 찾든 안에서 찾든
‘스승’을 향한 모든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영감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내 안의 나"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