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준비되면 스승은 저절로 나타난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 말을 해석 해온 의미 그대로는 아니다.
스승을 찾는 그대의 내밀한 욕망은
스승을 그대에게로 불러온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나타날 것에
그대가 준비되어 있을 때만이 그렇다.
그럼에도, 그것은 한 스승의 나타남일 뿐이다.
그대는 진정한 스승이나 교사가 나타나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기 쉽다.
왜냐하면 그는 그대의 관심을 끄는 한 친구의 안에,
사업상의 동료 안에, 그대의 이웃 속에,
혹은 그대의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 안에 숨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뛰어넘어 솟아오른 그대는,
더 이상 스승이나 교사를,
심지어는 ‘나’조차도 더 이상 찾지 않는 그대는,
‘나의 영원한 약속’의 신앙 안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다.
그대를 위하여 나는 한 만남을,
하나됨의 친교를 비축해 놓고 기다린다.
그대 인간의 마음이 감히 품을 수 없는 기쁨과 축복을,
그대 ‘영혼’의 축제를 준비해 놓고 있다.
이것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여기에 묘사된 그 어떠한 것과도 닮지 않은,
‘내가’ 드러나 있다는 책들의 가르침과도 모순되는,
저 천상에 호소하여,
그대가 의롭게 될 때까지는.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가 진실로 ‘나의 뜻’을 알기를 염원한다면,
이 신비는 그대에게 옷을 벗어 보이리라.
그대가 먼 미래의 일이라 할지라도,
어찌하여 ‘가장 지고한 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로
만족을 삼아야 한단 말인가?
어찌하여 ‘나의 완전함’의 현현을,
그런 제한된 존재 안에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인간의 몸을 입은 존재든, 영혼의 교사든,
길 안내자든, 지고한 스승이든, 천사든 말이다.
그대가 ‘나’에게로,
그대 내면에 있는 ‘신’에게로,
전지전능하고 어디에나 두루 있는 존재에게로,
모든 현현의 뒤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 영감을 불어넣는 ‘이데아’에게로
‘직접’ 올 수 있는데도,
왜 그리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그대 안에 있는데,
모든 지혜, 모든 권능, 모든 사랑이
오직 ‘나’에게서만 나오는데,
어찌하여 그대는 지금 ‘나’에게 오지 않는가?
어찌하여 그대는 ‘그대’를 통하여
‘나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도록
‘나’에게 준비를 시키지 않는가?
그대는 한 인간의 개성이다.
하지만 그대는 ‘신성하고’,
그러므로 완전하다.
그대는 자신이 하나의 몸을 입은
개성이라는 것은 믿지만,
신성하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
그대가 한 개성이라는 것도,
신성하다는 것도, 모두 진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비이다.
그대는 그대가 ‘생각하는’ 바. 바로 그 존재이다.
그대는 자신이 하나의 개성이라고 믿는가,
신성한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 둘 다인가?
그대는 ‘나와 하나’이다.
‘나’는 그대 안에 있고,
그대 인간의 개성 안에 있고,
그대 몸의 모든 세포 안에 있고,
그대 마음의 모든 속성 안에 있고,
그대 지성의 모든 기능 안에 있다.
‘나’는 그 ‘영혼’이고,
저마다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본질’이다.
그대는 ‘내’ 안에 있다.
그대는 ‘내 몸’의 한 세포이다.
그대는 ‘내 마음’의 한 ‘속성’이다.
그대는 ‘내 지성’의 한 ‘기능’이다.
그대는 ‘나’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대는 ‘나’이고,
‘나의 자아’이다.
우리는 ‘하나’이며,
언제나 ‘하나’였다.
내가 그대 마음으로 하여금
한 ‘스승’을 찾도록 관념을 심어준 것은,
그대를 ‘나’라는
이 ‘이데아’로 이끌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그대의 내면에 있는 ‘초자아적인 자아’,
‘빛의 천사’,
‘내 존재의 광휘’,
그대의 ‘신성한 주님이자 스승’에게로 그대를 이끌고,
거기에 대비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 ‘나’는,
그대의 ‘신적인 자아’는,
그대의 영혼이 그대로 하여금
그토록 찾게 했던 진정한 ‘스승’이다.
그대가 ‘나’를 만날 때,
그래서 그대 안에 ‘나’를 알게 될 때,
그때에야 비로소 그대는
자신의 인간 의식 안에서 기쁘게 ‘나의 제자’가 되리라.
넘치는 사랑으로 ‘나’를 모시게 되리라.
오직 ‘나’를 섬기는 일에만 관심을 두게 되리라.
그대 자신과 동료 인간들의 내면에 있는 ‘나’에게 봉사하는 일만이,
그대의 관심사가 되리라.
그때에야 그대는 어찌하여 “그대의 스승이 오직 한 명뿐”인지를,
왜 그가 곧 그리스도이기도 한지를 이해하게 되리라.
왜 그러한가?
모두가 내면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로서의 ‘나’는,
모든 이들의 ‘하나’이며,
‘유일한 참자아’이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모든 이들을 통하여 그대를 부르고 있고,
그대의 인간 의식에 가 닿고자 하고,
거기에 새기고자 애쓴다.
‘나’는 그대를 쉬임없이 가르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면 모든 길을 다 동원한다.
‘나’는 그대의 의식에 가닿는 수많은 길을 가지고 있고,
그대로 하여금 ‘나의 뜻’을 깨닫게 하기 위해
그 모든 길을 활용한다.
나는 수많은 목소리로 말한다.
인간이 품는 감정과 욕망의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자연의 목소리로 말하고,
경험의 목소리로 말하고,
심지어는 ‘인간의 지식’이라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렇다.
그 모든 것이 ‘나의 목소리’이다.
‘오직 한 가지 사실’만을,
‘나는 모든 만물 안에 있고,
나는 모든 것’이라는 그 사실만을,
그대에게 전하기 위한 ‘나의 목소리’이다.
그것을 전하기 위해
‘나’는 ‘나의 목소리’를
‘초자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나의 목소리’는,
그대 또한 이 ‘모든 것’의 일부라는 것을,
‘나’는 그대 안에 있다는 것을,
수천 수만 갈래의 길을 통해서 말한다.
그대가 ‘나’를 알아차리기를 기다리면서,
그래서 ‘초자아적 완전함’을 갖춘
‘나의 이데아’를 지상에 펼치는 데 있어서,
그대가 ‘깨어 있는’ 협력을 해주길 기다리면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이렇게 알아차리는 순간이 올 때만이, 그때만이,
그대는 ‘진정한’ 한 ‘스승’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때만이 그대는 깨닫게 되리라.
어찌하여 ‘나’만이,
그대 자신의 ‘초자아적 자아’만이,
인간의 몸을 입은
그대의 유일한 ‘스승’이 될 수 있는가를,
왜 ‘나’만이 그대의 ‘참스승’인지를.
그대는 또한 알아차리게 된다.
그대 안에 있는 진정한 스승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던,
‘개성을 입은 그대의 분리된 의식’ 속에서는,
어찌하여 하나의 육신을 입은 ‘그분’을 만나야만 하는지를,
그리하여 그대가 자신의 ‘그리스도 의식’ 속으로 들어설 수 있을 때만이,
그대 안에 있는 ‘나의 의식’ 속으로,
‘그분’의 내면에 있는 ‘나의 의식’ 속으로 들어설 수 있을 때만이,
‘그’는 친절하고도 자비에 넘치는 한 친구로서,
교사로서, 그대에게 존재하게 되리라.
그대가 그러한 ‘의식’에 가 닿을 때,
그때만이 그대는 ‘영혼’이라는 ‘위대한 형제애’ 속에서,
그대의 동료들을 알고 사귈 수 있는 자격과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때에야 비로소,
자아를 정복한 사람들,
자기보다 어린 형제를 돌보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사람들,
내면의 ‘신성한 하나’를 발견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정한 벗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신성한 존재로 여겨지는 어떤 사람이
그대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와,
자기 자신을 ‘스승’으로 부르게 한다면,
그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아직 ‘초자아적 존재’가 아니다.
스승 구실을 하는 사람일 수는 있겠지만,
그대의 ‘영혼’이 섬기기를 열망하는
‘신적인 존재’는 아닌 것이다.
그렇게 전적으로 ‘초자아적 존재’는 아닐지라도,
그대는 그런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에 만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대를 깨달음의 현장으로 데려가겠다.
자신의 개성적인 불완전함을
‘나의 초자아적 완전함’이라는 거울에 끊임없이 비추어 보고,
자신을 완성해 갔던 그의 인생 무대를 그대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대가 마침내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에게로 돌아설 그날을 기다리면서,
그대 자신의 ‘영혼’ 안에 깊이 깊이 숨어 있어,
오직 그대의 내면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나’를,
‘나의 초자아성’을,
유일한 삶의 푯대로서, 이상으로서,
바깥을 헤매며 진리를 찾았던
그대의 긴 여정 속에서도 그대에게
‘나의 완전함’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어 주었던 진정한 원천으로서,
알아차릴 그날을 기다리면서.
“내 안의 나”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