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鄧麗君 我的家在山的那一邊 (제3

작성자진캉시앤|작성시간12.04.15|조회수361 목록 댓글 3

我的家在山的那一邊~ (鄧麗君第十年的眞相)_有田芳生 著
우리 집은 산 그 옆에 있어요 (덩리쥔 제10년의 진상)_有田芳生 저술/ 김강현 번역
[私の家は山の向こう_テレサ.テン十年目の眞實] 文芸春秋 2005年 3月
[우리 집은 산 그 옆에 있어요_테레사 텐 10년째의 진실] 문예춘추 2005년 3월
[第3章] 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 [我身隨時光流逝] 제3장: 흐르는 대로 나를 맡긴 채 (제3장 6'7부)


[六] 6부

将一代歌手邓丽君放在中间,加深了中国和台湾互相较劲的力道。 在大陆一九八六年十二月北京文化艺术出版社出版了一本
《邓丽君自选演唱歌曲 225首》,以及广州岭南美术出版社出版了《邓丽君抒情歌曲影集》。两本都是《北京青年报》的
记者关键所编著的。前一本书的“后记”里,关键写自己透过“代理人”,宣称“所有歌谱都是邓丽君本人所提供”。为了帮书作宣传,
关键还透过“代理人”拿到邓小姐的传真及亲笔签名。邓丽君用A4 稿纸写“亲爱的朋友们!愿我的歌声给你们带来快乐!
”并且题上“邓丽君1985 三月十二日”的签名。邓丽君想过有朝一日要在大陆开演唱会,所以对自己的作品在大陆广为流传之事,
她没有任何的犹豫。 
한 시대의 가수 덩리쥔을 중간에 놓고, 중국과 대만의 상호간의 다투는 힘의 크기가 더 심해졌다. 대륙에서 1986년12월에
베이징 문화예술 출판사가 [덩리쥔이 친히 고른 콘서트 노래 225首]을 출판하였고, 그리고 꽝저우의 岭南 미술 출판사가
[邓丽君抒情歌曲影集]을 펴냈다. 이 두 권의 책은 모두 [北京青年报]의 기자 关键이 편집한 것이다.
앞의 한 권의 후기에, 关键은 자기가 대리인이라고 썼으며 모든 악보는 덩리쥔 자신이 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홍보를 하려고 책을 쓰기 위하여, 关键은 덩리쥔 샤오제의 사진과 친필 서명을 가지고 여전히 대리인으로 자처하였다.
덩리쥔은 A4 원고지에 "친애하는 여러분! 나의 노래가 여러분께 즐거움을 드리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덩리쥔 1985년 3월 12일"이라고 서명을 하였다. 덩리쥔은 언젠가는 대륙에서 콘서트를 열고자 생각하였는데,
왜냐하면 자기의 작품이 대륙에서 널리 퍼져 가는 일에 대해서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一九八七年《任时光流逝》的中文版《我只在乎你》大红,也是正值中国政府文化部艺术委员会副主任吴雷,在广东省珠海市进行演讲时:
“过去所有我们曾对邓丽君做的批判,不管是在政治上或是艺术上的,都有错误”的时期。 另一方面,台湾在音乐界有了很大的转变。
一九八七年七月十五日解除了戒严令。从一九四九年五月二十日开始实施的戒严令持续了三十八年。不仅集会、结社都开放自由之外,
连台湾去大陆访问也都解禁了。在戒严令时期,一般而言举凡歌词有违反爱国之意或是颓废的歌曲皆被禁止播放。
邓丽君的歌曲也有过被批判的时期。戒严令一解除,新的唱片公司陆续成立,音乐界出现了蓬勃发展的荣景。
台湾的国语流行歌曲也如渗透般地在进行改革。开放路线的中国大陆,其中邓丽君的歌声得到压倒性的众多支持。 
1987년 [任时光流逝]의 중국어 판 [我只在乎你]이 크게 인기를 끌었는데 이것도 마침 중국정부 문화부 예술위원회 부주임 吴雷가
광동성 珠海市에서 강연을 할 때이었다: 과거에 우리들은 덩리쥔이 한 것에 대하여 모두 비판하였으나, 정치적이나 혹은
예술적인 면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다 잘못된 시기이었습니다. 다른 한편, 대만은 음악계에 매우 커다란 변화가 있게 되었다.
1987년 7월 15일에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1949년 5월 20일에 시작된 계엄령은 38년간 지속되었다. 집회와 결사가 모두 자유롭게
되는 것 이외에도 심지어 대만에서 대륙을 방문하는 것도 해금되었다. 계엄령 시기에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가사는
애국의 정신을 위반하거나 퇴폐적인 가사는 모두 다 방송 금지를 당하였다. 덩리쥔의 노래도 비판을 당하는 시기를 보냈다.
계엄령이 일단 해제되자. 새로운 음반 회사가 잇따라 세워졌고, 음악계는 매우 융성하게 발절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다.
대만의 국어 유행가도 침투하듯 개혁이 진행되었다. 개방 노선의 중국대륙은 그중에서 덩리쥔의 노래가 압도적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直到一九八七年十月二十五日至十一月一日为止,中国共产党的第十三届全国代表大会在北京人民大会堂召开。
在会中赵紫阳代理总书记进行中央委员会报告,和“保守派”也达成共识,希望更推进改革及开放路线。
于一九八六年为了要求democratization,所以在北京、上海、安徽发生了许多students 运动事件。邓小平镇压了这些运动,
于一九八七年一月要胡耀邦总书记下台,强调反对资本自由化,但邓小平之后却指名要主张积极改革派的赵紫阳接任。 
1987년 10월 25일부터 11월1일에 이르기까지 중국 공산당의 제13회 전국 대표 대회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회의에서 赵紫阳(쟈오즈양)총서기는 중앙 위원회 보고를 하였는데, 보수파와 함께 공통의 인식도 가지게 되었고, 다시
개혁 추진과 개방 노선을 희망하였다. 1986년에 민주화를 요구하기 위하여, 그 때문에 베이징, 상하이, 안훼이 등지에서
수많은 학생운동 사건이 발생하였다. 덩샤오핑은 이런 운동을 진압하였고, 1987년 1월에는 胡耀邦(후야오방) 총서기가
사퇴하기를 요구하였고, 자본 자유화를 반대하는 것을 강조하였으나. 덩샤오핑은 나중에 적극적 개혁을 주장하는
赵紫阳(쟈오즈양)이 이어받기를 지명하였다.


这次的大会是史上第一次开放给外国媒体采访,所以很有名。虽只开放当日赵紫阳在报告的部分及闭幕日而已,
却挤进了约三百多位媒体人。在会场发生了九点开会前需测试大会的进行软体,原本应该要播放当时在中国盛行的歌《给世界爱》,
但是突然播出邓丽君的日文歌。 

要我喝了酒  就干脆地喝掉
被搂住的肩  有了这种感觉
是笨拙的相遇  但要化为美好
只要靠过去就好  一见钟情
就像浪花节曲一样  女人的一生 

《人生就像浪花节曲一样》(浪花節だよ人生は)(藤田作词、四方章人作曲)。
이 대회는 사상 처음으로 외국 매체와 인터뷰를 시작하였기에 매우 유명하다. 비록 개방하는 것은 단지 당일 赵紫阳(쟈오즈양)이
보고하는 부분과 폐막일 뿐이었지만, 약 300여 명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회의장에서 실시한 9시 개회전의 대회 진행을
시험하는데 필요한 소프트웨어는, 본래 마땅히 당시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던 노래 [给世界爱]을 방송하여야 했는데,
갑자기 덩리쥔의 일본어 노래가 방송되었다.

나더러  마시라기에 술을 마셨지요, 순진하게 마셔 버렸지요,
어깨를 껴안기니, 이런 느낌이 들었어요,
어리석은 만남은 그러나 아름답게 되길 바라요
기대기만 했다면 괜찮을 텐데, 한눈에 반했어요
마치 나니와 부시(節)같아요, 여자의 일생은..

[인생은 마치 나니와 부시 같아요: 나니와 부시이에요 인생은] 藤田 作词, 四方章人 作曲.

这首歌是在一九八一年由包括細川たかし、水前寺清子、木村友衛等十七位歌手争唱的作品, 曾引起许多话题。
是工作人员错放音乐引起的纷乱,但谁敢保证它不是为了用以突显追求自由化的意图而故意放的呢!
在中国的北京、上海、南京有很多音乐制作公司,北京的某公司就于一九八八年透过香港宝丽金唱片想找邓丽君开演唱会。
大陆中央电视台的邀请函上面这样写着: 
이 노래는 1981년에 細川たかし, 水前寺清子, 木村友衛을 포함한 17명의 가수들이 다투어 불렀던 작품으로, 일찍이 수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직원이 음악을 착각하여서 방송하여서 일으킨 분란이지만, 누가 감히 이것이 돌출적으로 자유화의
의도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며, 고의로 방송한 것이 아니라고 보증할 수 있겠는가! 중국의 베이징, 상하이, 난징의 수많은
음악제작 회사가 있는데, 베이징의 어떤 회사는 1988년 홍콩의 宝丽金 음반 회사를 통하여 덩리쥔 콘서트를 개최할 생각을 하였다.
대륙의 중앙 텔레비전의 초청장에 이렇게 썼다.

『 邓丽君小姐 为了促进海峡两岸的文化交流,加深两岸同胞的感情,祖国的繁荣与昌盛是我炎黄子孙的共同心愿,
继“第三届海峡之声音乐会”后,于今年九月二十三日至九月二十五日中秋节期间,将在北京由全国台湾同胞联合会、中国音乐家协会、
中央人民电台电视、中央电视、海峡之声电台电视共同举办“第四届海峡之声音乐会”。会中将有全国各地的艺术家聚集一堂,中央人民电台电视台、
中央电台、海峡之声电视台也将进行现场实况转播,向全国播送。因此希望您能参加演出及参加电视录影。如果您同意的话,
请及早告知您要唱的四首歌,并烦请您准备伴奏用的录音带。有关在北京表演的相关交通费、在北京的食宿费全由主办单位的组织委员会负担。
承蒙您的支持与配合,谢谢。       
中央电视台中华全国台湾同胞联合会
中国音乐家协会
中央人民电台
海峡之声电台
一九八八年四月四日』  
덩리쥔 샤오졔 해협 양안의 문화 교류을 촉진하기 위하여, 양안 동포의 감정과 조국의 번영과 발전을 더 돈독히 하는 것은
우리 염황 자손의 같은 바람입니다. "제3회 해협의 소리 음악회"의 뒤를 이어서, 금년 9월 23일부터 9월 25일 중추절 기간에,
베이징에서 전국 대만 동포 연합회, 중국 음악가 협회, 중앙 인민 라디오 텔레비전, 중앙 텔레비전, 해협의 소리 라디오
텔레비전이 공동으로 "제4회 해협의 소리 음악회"을 개최하는데, 이 음악회에 전국 각지의 예술가들이 한 곳에 모일 것이고,
중앙 인민 라디오 텔레비전, 중앙텔레비전, 해협의 소리 라디오 텔레비전도 현장 실황을 중계하여 전국으로 방송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공연에 참가하여 텔레비전 녹화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당신이 동의하신다면, 일찌감치 당신이 부르고
싶은 노래 4곡을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번거롭지만 반주용 녹음 테이프를 준비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베이징 공연과
관련된 교통비와 베이징의 숙식비는 모두 주최측의 조직 위원회가 부담합니다. 당신의 지지와 협력을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중앙 텔레비전
중화 전국 대만 동포 연합회
중국 음악가 협회
중앙 인민 라디오 텔레비전 해협의 소리 라디오
1988년 4월 4월

中华全国台湾同胞联合会,是中国共产党为了指导统一战线组织之下归属在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下的组织。邓丽君对突来的邀请感到怀疑。
能出席欣赏这种音乐会的人并不是一般的百姓,一定是高干及其家属。她认为如此一来歌星和观众之间就不会有真正的感动。
从文面上看来邀请的政治意涵非常地明显,所以就拒绝了邀请。之后还是继续有很多大陆的邀约。 特别热心的是新华社。
新华社是中国的国营报社——在香港设有分社。到一九九七年七月一日香港回归前,实质上是中国在香港的代表机关。
在内部他们称之为“中国共产党在香港、澳门的工作委员会”。当中有一项主要任务是去接近财经界人士、文化人和知识分子作统战工作。
新华社会去和邓丽君接触的背景是经过三年之久,在中国共产党内部不断地检讨之下,做出具有明显政治意图的决定。 
중앙 전국 대만 동포 연합회는 중국 공산당이 통일 전선 조직하에 지도하기 위하여, 중국 인민 정신 협상 회의에 속한 조직이다.
덩리쥔은 갑자기 초청한 것에 대하여 의심이 들었다. 이런 음악회에 참석하여 감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일반 국민이 아니고,
늘 고급 간부와 그의 가족들이었다. 그녀는 이처럼 되면은 가수와 청중간에 참된 감동이 있을 수 없다고 여겼다. 초청장을 보니
초청한 정치적 의도가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기에, 초청을 거절하였다. 이 뒤로도 여전히 수많은 대륙의 초청이 이어졌다.
특별히 열심인 것은 신화사이었다. 신화사는 중국의 국영 신문사로 홍콩에 지사가 있었다. 1994년 7월 1일 홍콩이 반환되기 전에,
실질적으로 홍콩에 있는 중국의 대표적 기관이 되었다. 내부적으로 그들은 이것을 "홍콩, 마카오에 있는 중국 공산당의 공작 위원회"
이라고 불렀다. 그중에 주된 임무 중 하나는 재계 인사 문화계 인사와 지식인에게 접근하여서 통일 전선 공작을 하는 것이었다.
신화사는 덩리쥔에게 접촉했던 뒷 사정은 약 3년이나 되었는데, 중국 공산당의 내부에는 끊임없이 검토하고는
분명한 정치적 의도를 드러내도록 하였다.

7
《北京青年报》的关键记者自从打电话给人在新加坡的邓丽君之后,北京的共产党指导内部里产生了很大的变动,
中国共产党北京市委员会的文教副书记徐惟成对《北京青年报》做了四项指示:
①请采访邓丽君的关键记者作深刻的自我检讨。
②要关键暂时离开记者一职。
③在北京青年报社举办大会,要关键上台自我批判。
④这件事连带《北京青年报》的指导者也必须负责。 
[北京青年报]의 关键 기자는 싱가포르에 있는 덩리쥔에게 전화를 건 뒤로, 베이징의 공산당은 내부적으로 많은 변화를 만들게
지도하였고, 중국 공산당 베이징시 위원회의 문교 부서기 徐惟成는 [北京青年报]에 대하여 4가지 항목을 지시하였다.
① 덩리쥔을 인터뷰한 关键 기자에게 심각한 자아 검토 하도록 요청한다.
② 关键 기자에게 잠시 기자의 업무을 떠나도록 요청한다.
③ 베이징 青年报社에서 개최된 대회에서 关键 기자에게 연단에 올라서 자아비판을 하도록 한다.
④ 이 사건과 연관된 [北京青年报]의 지도자들도 반드시 책임을 진다.

关键记者立刻被指导机关叫去,因为是否要采访的妥当性,事前他没有请教指示所致,被批判为“对台湾事务是个重大问题”,
依个人的任意判断行事是有违反规律。身为中国共产党党员的关键就以“记取经验教训,及接受党的指导,
将在往后的工作上更为小心行事”作自我批判。 
关键 기자는 곧바로 지도 기관에 불려갔는데 왜냐하면 인터뷰가 타당한 것인지 아닌 지, 사전에 그는 검토해 줄 것을
요청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타이완에 대한 업무는 중대한 문제"이라고 비판을 당하였으며, 개인의 임의적 판단에 의한
업무 추진은 법률 위반이라고 이었다. 중국 공산당 당원의 신분인 关键 기자는 "경험, 교훈을 명심하고
당의 지도를 받아들여서 앞으로 업무에서는 더욱 조심스러운 행동을 하겠다"고 스스로 자기비판을 하였다.

但是,因报导引起国际性的回响反而救了关键。在“部外密”的《青年问题参考》(一九八五年二月九日)的文件中,
报告者因为关键写的文章透过香港、澳门在西方国家引起讨论话题。这个文件被呈到北京市长陈希同、
中国共产党北京市委员会副书记北京市纪律检查委员会书记贾春旺、及党的指导机关。而且在“注意保存”的文件中,
每天早、晚两次给党中央及政府干部看的《参考资料》(一九八五年二月十二日晚版)中提到,也报告台湾的反应。
贾春旺要关键来作报告。身为中国共产党他们想知道邓丽君在想什么。结果原本被处罚很重的关键因贾春旺得救了。 
그러나 국제적인 반향을 일으키어 보도 되었기에 오히려 关键 기자가 구제되었다. 대외비라는 [青年问题参考](1985년 2월9일)의
문건 중에서, 보고 내용은 关键 기자가 쓴 기사가 홍콩, 마카오를 통하여서 서방 국가에서 논쟁의 화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는
것이었다. 이 문건은 북경 시장 陈希同, 중국 공산당 북경시 위원회 부서기 북경시 기율검사 위원회 서기 贾春旺, 그리고
당의 지도 기관에 보고되었다. 게다가 "보관 주의"라는 문건 중에는,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두 차례 당 중앙과 정부 간부에게
보고되는 [参考资料](一九八五年二月十二日석간)에 실려 있었고, 또한 대만의 반응도 보고되었다. 贾春旺은 关键 기자에게
보고하기를 바랐다. 중국 공산당의 신분으로 그들은 덩리쥔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를 알고 싶어 했다.
본래는 매우 엄하게 처벌될 关键 기자는 결과적으로 贾春旺에 의하여 구제가 되었다.

关键记者打电话给邓丽君作采访时,她说看了《北京青年报 星期刊》的文章。在文章里有问到姑婆们“如果她回来了,你们想做什么?”
姑婆们就回答说:“我们不认识字,请帮我们写信给她,这两年我因为有气喘,但没有吃药,请她找找看是不是有什么药……”
邓丽君很在意这一段,就和友人陆文藻商量,二月中旬寄给关键记者四瓶气喘的药。 陆文藻是住在香港九龙达之路,上海出身。
陆文藻也是邓丽君的歌迷,经营成衣的外销生意,交游广阔,因此常会协助邓丽君的一些宣传活动。当邓丽君人不在香港时,
他会去陪邓妈妈说话。 
关键 기자는 전화를 걸어서 덩리쥔과 인터뷰를 하였을 때, 그녀는 [北京青年报 星期刊]의 기사를 보고 말을 하였다.
이 기사에서 고모들에게 묻기를 "만일 덩리쥔이 돌아오면, 당신들은 무엇을 할 생각인가요?
고모들은 곧 대답을 하였다: "우리들은 글자를 모르니, 우리들이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것을 도와주시길 바라요,
요즘 2년간 나는 기침 나지만, 약을 먹지 못했어요, 덩리쥔에게 무슨 약이 있는지를 찾아 달라고 부탁해 주세요..."
덩리쥔은 매우 주의깊게 이 내용을 보고 친구인 陆文藻과 상의를 하였다. 2월 중순에 关键기자에게 기침약 4병을 보내었다.
陆文藻은 상해 출신으로 홍콩의 구룡 达之路에 살고 있었다. 陆文藻도 덩리쥔의 팬으로 기성복의 해외 수출 사업을
하고 있어 교류가 넓었다. 이로 인하여 언제나 덩리쥔의 종종 홍보 활동을 도와주고 있었다.
덩리쥔이 홍콩에 없을 때는 그가 덩리쥔의 어머니를 모시고 이야기도 나누기도 하였다.

关键接到由陆文藻寄来的信及气喘治疗药,就向指导部报告“邓丽君托我将药寄给姑婆”。得到中国共产党北京市委员会的许可,
关键在一九八五年三月八日前往河北省大名县邓台村。这里是邓丽君父亲出生的地方,还住着姑婆们。
同行的还有县政府及县台湾关系事务所的相关人员,当他们将药交给姑婆时,引起全村的大骚动。姑婆们也托关键写信给邓丽君。
这些经过都被随行的北京电视台拍摄下来,作成“去邓丽君的故乡”的节目播出。 
关键 기자는 陆文藻이 보내온 편지와 기침 치료약을 받고는, 곧바로 지도부에
"덩리쥔이 고모들에게 약을 전해 달라고 내게 맡겼다"고 보고를 하였다. 중국 공산당 북경시 위원회의 허가를 얻어서,
关键 기자는 1985년 3월 8일 하북성 대명현 등대촌(河北省大名縣鄧台村)으로 갔다. 이곳이 덩리쥔 아버지가 태어난 곳으로
아직도 고모들이 살고 있었다. 같이 현(縣) 정부와 대만 관련 업무 부서의 인원들이 갔었는데. 그들이 고모들에게 약을
전해 줄 때, 온 동네에 큰 소동이 일어났었다. 고모들은 关键기자에게 덩리쥔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탁하였다.
이런 과정은 모두 다 수행한 북경 텔레비전이 촬영하여서 "덩리쥔의 고향을 가다"라는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三月十七日,从北京飞往广州的关键,在十九日下午第一次和陆文藻见面,后来关键称之的“代理人”就是指他。
这次的会面是想要谈在大陆开演唱会的具体构想,陆文藻说演唱会想在北京及上海举行。如果可能的话,
时间上希望是在一九八六年上半年举办。陆文藻跟关键说邓小姐的意思是:“这个问题想了好几年,已经在美国、日本、
东南亚举办过演唱会,身为中国人歌星的我,怎么可能不为中国同胞而唱呢?” 
3월17일, 베이징에서 광저우로 돌아온 关键 기자는 19일 오후에 처음으로 陆文藻과 만났다. 이후 关键 기자는 대리인으로 불리는
사람이 바로 그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번의 만남은 대륙에서 콘서트를 개최할 구체적 구상을 이야기하려고 생각한 것으로,
陆文藻은 콘서트가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개최될 수 있다고 말을 하였다. 만일 할 수 있다면, 시간은 1986년 상반기에 개최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陆文藻은 关键 기자와 덩샤오졔의 의견을 이야기 하였다. "이 문제는 수년간 생각하였어요, 이미 미국, 일본,
동남아에서 콘서트를 개최하였는데 중국인 가수인 내가, 어찌 중국 동포를 위해서 노래를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陆文藻说是邓小姐的意思,为了筹措演唱会的资金提出了详细的企划案。一个是跟日本、美国、英国的企业募款,
但邓小姐认为“这不是上策”。她提出“更好的方法”是制作演唱会CD,在大陆则是发行录音带来贩卖,
门票的收入及向国外电视台收取的收入全部捐出,将其中百分之五十捐给大陆文化艺术基金会或是身心障碍福利团体当基金,
百分之三十捐给台湾的文化艺术基金会,另外的百分之二十捐给香港的文化艺术基金会。 
陆文藻이 설명한 것은 덩샤오졔의 의견으로, 콘서트를 준비할 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상세한 계획을 내놓았다. 하나는 일본,
미국, 영국의 기업과 함께 모금하는 것이었으나. 덩샤오졔는 이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고 여겼다. 그녀는 "더 나은 방법"은
콘서트 CD를 제작하는 것으로 대륙에서는 녹음 테이프를 만들어 판매하고, 입장권 수입과 외국 텔레비전 방송사에서 받은
수입은 전부 기부를 하는데, 이 중에서 50퍼센트는 대륙 예술 기금회 또는 심신장애 복지 단체에 기금으로 충당하고
30퍼센트는 대만의 문화예술 기금회에 기부하고, 그 외의 30퍼센트는 홍콩의 문화예술 기금회에 기부하는 것이었다.

五月中旬,关键记者和陆文藻再次会面,将姑婆托他的信及在村里拍的二十多张彩色照片交给陆文藻。
五月下旬在香港交给邓丽君的母亲及弟弟,带回去给生病的父亲邓枢看。手上拿着信和照片的邓枢大声地哭说:“我生了重病,
可能这辈子再也回不了大名县的家乡了。” 关键记者从三月到十一月当中,一共在广州、深圳、上海、北京和陆文藻见了十三次面,
但是中国共产党北京委员会的指导部里有人对关键的行动产生不悦。“有关邓丽君的问 题由相关的部门接手处理即可”。
因为关键很想亲自做此事,所以请中国共产党北京市委员会的贾春旺、统一战线工作部、共青团北京市委员会、
《北京青年报》将所有干部集合起来,让他们看邓丽君演唱会的实况录影带。 
5월 중순 关键 기자는 陆文藻과 다시 만나서 고모들이 그에게 맡겼던 편지와 고향에서 찍었던 20여 장의 컬러 사진을 陆文藻에게
전달하였다. 5월 하순에 홍콩에서 덩리쥔의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전달하여서, 병이 난 아버지 鄧樞에게 가지고 가 보여 주었다.
손에 편지와 사진을 들고 있는 邓枢는 큰소리로 울면서 말을 하였다. "나는 중병에 걸렸기에 아마도 남아 있는 여생 동안 다시는
대명현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구나" 关键 기자는 3월부터 11월 사이에 함께 광저우, 선전, 상하이, 베이징에서 陆文藻을 13차례
만났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 베이징 위원회의 지도부에서는 关键 기자의 활동에 대하여 즐거워하지 않았다.
"덩리쥔과 연관된 문제는 관련 부서가 인수하여서 처리를 하면 된다" 关键 기자는 스스로 이 일을 하고 싶었기에, 중국 공산당
북경시 위원회의 贾春旺, 통일전선 공작부, 공청단 북경시 위원회, [北京青年报]에게 부탁하여서 모든 간부를 함께 모이기로 하고,
그들에게 덩리쥔의 콘서트 실황 녹화 테이프를 보게 하였다.

一九八五年十一月二日晚上,在北京市宣武区的天桥剧场有一场“南腔北调表演会”,这个天桥剧场是第一个歌剧表演及芭蕾舞表演的设施。
关键看到中国共产党中央书记的王兆国同在现场,趁机快步走到身边说:“兆国同志,我有话跟你说。”王兆国立刻笑着回答:
“要说邓丽君的事吧。” 关键回答:“是的”,就将邓丽君的事报告一遍。 王兆国听了一阵子的话之后说: “我本身赞成邀请邓丽君来,这样吧,
你立刻写个报告书,邮寄给我。” 关键非常的高兴:“寄报告书给你是吧。”王兆国回他说:“继续进行这件事,我会接手这事,你就寄过来吧。
1985년 11월 2일 밤에, 북경시 宣武区의 天橋극장에서는 "南腔北调表演会(전국사투리 발표회)"가 열렸다. 이 天橋 극장은
처음으로 만들어진 오페라 공연과 발레 공연장이었다. 关键 기자는 중국 공산당 중앙 서기인 王兆国을 현장에서 보고는 기회를
틈타서 곁으로 달려가 말을 하였다. "王兆国 동지, 나는 당신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王兆国은 곧바로 웃으며 대답하였다.
"덩리쥔에 관한 일을 말하려는 것이지요. 关键 기자는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곧 덩리쥔의 일에 대하여 보고를 다하였다.
王兆国은 보고를 다 듣고는 말을 하였다. "나 자신은 덩리쥔의 초청을 찬성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당신은 곧바로 보고서를 써서 나에게 보내시오" 关键 기자는 매우 기뻐하였다: "보고서를 당신께 보내드리지요."
王兆国은 그에게 대답하였다: "계속 이 일을 진행하시오, 나는 이 일을 인수하여서 당신에게 맡길 것이오."

于是关键就在十一月十三日写好要寄给王兆国的《继电话采访邓丽君之后的相关报告》,用了十张A4 的纸写成。这份报告书经过
《北京青年报》指导部的检查,于十五日送到王兆国的住处。 关键在报告里标出邓丽君在大陆举行演唱会的条件、
她在对台湾统一政策里的重要性等,就像文中就写着:“我感到邓丽君是一位热爱祖国、渴望统一的人,且具有前瞻性的观点,
又极具有大胆的精神,是个有理想的杰出者。” “她所有的表现显示出对大陆有信心,也信赖对我党的方针,
她更相信祖国势必完成和平统一,对未来充满美好的希望。” 
그래서 关键 기자는 11월 13일에 王兆国에게 [덩리쥔과의 인터뷰를 한 뒤 계속된 관련보고]를, A4 용지 10장에다 잘 써서 보냈다.
이보고서는 [北京青年报]의 지도부의 검열을 거쳐서 15일에 王兆国의 집으로 보내졌다. 关键 기자는 보고서에 덩리쥔이 대륙에서
콘서트를 개최하는 조건을 밝혔으며, 그녀에게는 대만에 대한 통일 정책에서 중요성이 있으며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나는 덩리쥔이 매우 뜨겁게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통일을 갈망하는 사람이며, 또한 앞날을 내다보는 식견을 가진 사람이며,
또한 몹시 대담한 정신을 갖추었는데 이는 이상적인 인물이라고 느꼈다. 그녀는 모든 표현에서 대륙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고
또 우리 당의 방침에 대하여 신뢰를 하고 있고 그녀는 더욱더 조국이 반드시 평화통일을 이룩하여서, 미래에 대하여 아름다운 희망이
충만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关键如此夸张的写着,是因为他想担任亲自去新加坡或是日本和邓丽君会面的任务。 关键从一九八五年七月一日到一九八六年夏天,
大约一年的时间,陆续提出和邓丽君有关的报告给中国共产党北京市委员会、同党统一战线工作部、文化部、共产党中央书记处、
国家安全部的指导者们。还有将邓丽君精选的录音卡带寄给同时是全国总工会、人民大会的代表,就是胡耀邦的长男胡德平,
透过不同的管道寄出。也寄到胡耀邦书记的指导部,结果,到目前为止以关键为主的“单线”运作在一九八六年六月变成了
中国共产党中央宣传部指导下属于国务院文化部和党的统一战线工作部为主,成立了一个邀请邓丽君到大陆的责任窗口。 
关键 기자는 이처럼 과장되게 쓴 것은 그가 직접 싱가포르 또는 일본으로 가서 덩리쥔과 만날 임무를 담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关键 기자는 1985년 7월1일부터 1986년 여름까지 약 1년 동안, 잇달아 덩리쥔과 관련된 보고서를 중국 공산당 북경시 위원회,
통일전선 공작부, 문화부, 공산당 중앙 서기처, 국가 안전부의 지도자들에게 제출하였다. 또한 덩리쥔의 특집 녹음 테이프를
아울러 전국 노조, 인민대회의 대표에게 보냈다. 즉 胡耀邦의 장남 胡德平으로, 여러 경로를 거쳐서 전달되었다. 또한 胡耀邦 서기의
지도부에도 전달되었는데, 그 결과 지금까지의 关键기자의 한사람에 의한 공작이 1986년 6월에는 중국 공산당 중앙 선전부 예하의
국무원 문화부와 공산당의 통일전선 공작부 위주로 바뀌게 되어서, 덩리쥔을 대륙으로 초청하는 책임 창구로 되었다.

一九八六年七月十八日,在上海锦江饭店七一七号房里,陆文藻和为邓丽君而设置的机关负责人见面。“邓丽君回大陆参观、访问、
开演唱会,想避免有太多的政治色彩,所以不要以文化部或是宣传部出面,希望是由民间团体全国文化艺术团体出面,
譬如说像全国青年联盟或是中国国际文化交流中心之类的部门来主办。” 演唱会在北京办五场、上海三场,邓丽君能停留最长的期限是一个月。
陆文藻还交代邓小姐想去杭州观光。除此之外官员还提议说不只是杭州,也可以安排去西安和桂林观光。
这时,他们聊到是否能在演唱会之前亲自和邓小姐见面商量。一个提案是在“绝对秘密而且安全”之下让邓小姐进入大陆。
另一个提案则是选择在华人较少的安全地,像日内瓦或是维也纳见面。关键认为有关和陆文藻先生会谈的相关报告以“机密”文件传给贾春旺。 
1986년 7월 18일에 상하이의 锦江 호텔 717호실에서 陆文藻는 덩리쥔을 위하여 설치한 기관의 책임자와 만났다.
"덩리쥔은 대륙을 돌아보고, 방문하고, 콘서트를 열지만, 너무 많은 정치색을 띠는 것은 피하고 싶다"고 대답하였고,
그래서 문화부 또는 선전부와 만나는 것은 바라지 않고, 희망은 민간단체 전국문화 예술단과 만나는 것인데, 예를 들어 말하면
전국 청년 연맹 또는 중국 국제 문화 교류 중심 같은 단체가 주최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콘서트은 북경에서 5차례, 상해에서
3차례로 덩리쥔이 머물 수 있는 가장 긴 시간은 1개월이었다. 陆文藻는 덩리쥔이 항주 관광을 하고 싶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이외에도 관리들은 또한 항주 뿐만 아니라 서안과 계림 관광을 할 수도 있다고 제안하였다.
이때 그들은 잠시 콘서트 전에 덩리쥔과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는 지를 의논하였다. 이 제안은 "절대 비밀리에 안전하게"라는
조건으로 덩샤오졔를 대륙으로 초청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제안은 중국인이 비교적 적은 제네바 또는 비엔나 같은 곳을
골라서 만나는 것이었다. 关键 기자는 陆文藻과 연관된 것으로 여겨지는 회담의 관련 보고를 비밀 문건으로 贾春旺에게 제출하였다.

陆文藻则在八月十二日在香港和邓丽君碰面,报告七月份会谈的情形。这个时期的邓丽君,对要在大陆开演唱会之事没有抗拒,
但唯一挂意的是三哥。三哥在一年前被国防部派至到美国进修,预定在一九八六年八月修成返国,
原本中校的三哥预计将在八六年晋升为上校,年底要结婚。如果在这时立刻开演唱会则会影响到三哥的晋升。 
陆文藻는 8월 12일에 홍콩에서 덩리쥔과 만나서, 7월에 있었던 회담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이 시기의 덩리쥔은 대륙에서
콘서트를 열기를 바라는 일에 대하여 거절하지 않았으나 단지 셋째 오빠가 걱정을 하였다. 셋째 오빠는 1년전에 국방부에 의하여
미국으로 파견되어 연수 중이었다. 예정은 1986년 8월에 연수를 끝마치고 귀국할 예정이었다. 원래 중령인 셋째 오빠는
86년에 대령으로 진급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연말에는 결혼을 하려고 하였다. 만일 이시기에 곧바로 콘서트를 여는 것은
셋째 오빠의 진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었다.

八月十四日和十六日在广州和陆会面的关键,在八月二十日提报告书给贾春旺。贾春旺于一九八五年九月被升为国家安全部部长。
这是执掌国家防谍业务的部门,立刻就让相关部会进行检讨。结果他们做出决定,认为邓丽君在中国大陆很有人气,
台湾当局也在利用她,兄长又是军人,以政治性看来极具该有的条件,所以让她在北京、上海开演唱会,
是对台湾统战策略上一个很重要的课题。经过相关部门的检讨结果,就把任务交给外交部。具体的任务工作是由新华社香港分社担任。
原本只是关键个人的关心而开始去与邓丽君的接触,竟然会发展成国家规格的任务课题。 
8월14일과 16일에 광저우에서 陆文藻과 만난 关键 기자는 8월20일에 보고서를 贾春旺에게 제출하였다. 贾春旺는 1985년 9월에
국가 안전부 부장으로 승진되었다. 이것은 국가 방첩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곧 관련 기관이 검토를 진행하였다. 결과 그들은
결정을 내렸는데. 덩리쥔이 중국 대륙에서 매우 인기가 있고, 대만 당국도 그녀를 이용하고 있고, 오빠도 군인이며, 정치적으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기에, 그녀를 북경, 상해에서 콘서트를 열게하는 것이 대만 통일 전선 전략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과제이었다.
관련 기관의 검토를 거친 결과 임무를 외교부로 이첩하였다. 구체적인 임무 공작은 신화사 홍콩 지사가 담당하게 되었다.
원래는 단지 关键 기자의 개인적인 관심으로 시작하여 덩리쥔과 접촉한 것이 마침내는 국가적 임무 과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一九四四年乔宗淮出生,为乔冠华的长男,并且担任新华社香港分社副社长,乔冠华是担任过中国政府的外交部长,是少数的精英高干。
在一九七二年的“中美首脑会谈”还是任外交部副部长时,依周恩来总理的意思,促成和美国国家安全保护辅佐官的季辛吉进行“上海会谈”。
新华社是国务院的事业部门下属的国营通信社。乔宗淮曾历任联合国驻日内瓦的大使及外交部指导的成员,
乔的妻子彭燕燕拜托活跃在香港社交圈、也是邓丽君的友人何莉莉,请她设法安排和邓丽君吃饭的机会。 
1944년 乔宗淮이 乔冠华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아울러 신화사 홍콩 지사의 부사장을 담당하였다. 乔冠华는 중국 정부의
외교부장을 지냈으며, 얼마 안 되는 현명한 고관이었다. 1972년 중미 수뇌 회담은 또한 외교부 부장 시절에 맡았을 때로, 周恩来
총리의 의견에 의하여 미국 국가 안전 보호 보좌관인 키신저와 의논하여서 상하이 회담을 성사시켰다. 신화사는 국무원의 사업부문
예하의 국영 통신사이었다. 乔宗淮은 일찍이 유엔의 제네바 대사와 외교부 지도급 간부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부인인 彭燕燕은
홍콩 사교계에서 활약하는, 덩리쥔의 친구 이기도 한 何莉莉에게, 그녀가 덩리쥔과 식사할 기회를 안배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

邓丽君和母亲赵素桂出发前往中环,在中国银行香港分行附近的会员制俱乐部。她们约在里面的上海菜餐厅碰面。
在打完招呼闲聊当中,乔宗淮有意无意地提及“要在大陆唱歌吗?”之事,并未提及具体的条件,只是重复“一定要来大陆”这种说法。
经过聚餐之后,彭燕燕几乎每天都打电话给邓丽君,也常常一起用餐。常在谈话中怂恿去大陆开演唱会,
所以不知不觉地在邓丽君的心中想要去北京的心情也加深了。 
덩리쥔은 어머니 赵素桂와 같이 中环으로 가려고 출발을 하여, 중국은행 홍콩 지점 근처의 회원제 클럽에 갔다. 그녀들은
안에 있는 상하이 음식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인사를 나눈 뒤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乔宗淮은 자신도 모르게
"대륙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나요?" 라는 이야기를 제안하였다. 결코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지만,
거듭하여서 "언제나 대륙으로 와야 한다는 이런 의견이었다. 식사를 한 뒤에 彭燕燕 거의 날마다 덩리쥔에게 전화를 걸어서
늘 함께 식사를 하였다. 늘 이야기를 하는 중에 대륙에서 콘서트를 열기를 종용하였다.
그리하여서 어느새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덩리쥔의 마음속에는 북경으로 가고 싶은 마음도 점점 깊어져 갔다.

但并未将想法告诉乔宗淮他们,因为有些政治性的难题不得不去解决。要接受去大陆开演唱会的邀请必须得到台湾政府的同意。
邓丽君回到台湾之后就和当秘书的弟弟及当军人的兄长一起去向相关部门打探。当他们说到有几个制作公司来邀约,
尤其是新华社特别热心时,当时的新闻局长邵玉铭就说“就当我没听说过”。邓丽君他们从交谈的气氛中,解读到“不可能会同意,
但可能会默认吧”的意思,所以开始具体思考要在大陆办演唱会之事。
그러나 결코 乔宗淮와 그 측근에게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생각하였는데, 왜냐하면 사소한 정치적인 어려운 문제를 어쩔 수 없이
해결해야 하였기 때문이었다. 대륙에 가서 콘서트를 개최하는 초청을 받아들이려면 반드시 대만 정부의 동의를 얻어야만 하였다.
덩리쥔은 대만에 돌아온 뒤에, 비서인 남동생과 군인인 오빠와 함께 만나서 관련된 기관을 찾아가서 의논을 하였다.
그들은 몇 군데의 제작사가 초청하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특히 신화사가 아주 열심이었을 때, 당시의 신문 국장인 邵玉铭이
"그러나 나로서는 들어 본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덩리쥔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 속에서 동의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으나,
묵인할 수 있었다" 라는 의견이었다. 그리하여서 구체적으로 대륙에서 콘서트를 개최하려는 일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如果选在上海,顶多是一万人的观众,而且恐怕都是政府及党的干部,只有特定的人才能看得到。
但是邓丽君其实是想唱给一般民众听,所以放大整个规格。是不是办个可以在天安门广场开放百万人免费入场的演唱会?
如果能实现这种任谁都可以来听的演唱会的话,就可以接受。从未去过的大陆是父母亲出生的地方,想象在那块土地上唱歌,
心情就越来越高昂。 但是,在邓丽君心中构想的百万人演唱会之事,竟被一场无法预测的国际事件无情地击毁。 】 
만일 상하이를 선택한다면, 겨우 만 여명의 청중 일뿐 것이고, 게다가 두려운 것은 모두 다 정부와 당간부로,
단지 특정 사람들만이 겨우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덩리쥔은 사실 특히 일반 청중에게 들려주기를 생각하였다.
그래서 커다랗게 규모를 키웠다. 천안문 광장에서 무료로 수백만 청중이 입장하는 콘서트가 가능할 수 있을까?
만일 이 같은 어느 누구라도 들으러 오는 콘서트을 실현할 수 있다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직 가 보지 않았던 대륙은
부모의 출생지로 그 땅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어하는 심정은 점점 더 높아졌다. 덩리쥔 마음속에 있는 백만 명이 참여하는
콘서트를 구상하는 일이 뜻밖의 예측할 수 없던 어떤 국제적 사건에 의하여 무참하게 부셔져 버렸다.


2.7M-VBR
鄧麗君'덩리쥔_[浪花節だよ人生は 나니와부시다요 진세이와]☜1984년 
[私の家は山の向こう_テレサ・テン十年目の眞實]_有田芳生 2005年3月'著
[등려군노래목록표'1250곡]☜내사랑등려군 번역 金康顯 진캉시앤 201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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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문헌) 원문목록
[序]
第1章 想い出の余白 (回憶中的空白) 제1장 추억의 여백
第2章 ふたたび (再次的) 제2장  다시
第3章 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 (我身隨時光流逝) 제3장 세월이 흐르는 대로 나를 맡긴 채
第4章 悲しい自由 (悲傷的自由) (제4장 서글픈 자유
第5章 冬のひまわり (冬季里的向日葵) 제5장 겨울의 해바라기
第6章 春を待つ花 等待春天的花蕊 제6장 봄을 기다리는 꽃
[后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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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류상욱 | 작성시간 12.04.15 그동안 등님의 흔적을 찾아 번역을 붙여 주신 진캉시앤님의 노고에 무한한 감사드림니다..!!
  • 작성자동연 | 작성시간 12.04.16 노래~ 감상 잘 했습니다. 진캉시앤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 작성자QAZee | 작성시간 12.04.16 제가 즐겨듣는 노래 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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