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등려군자료보기

《我的家在山的那一边》 テレサ・テン 邓丽君第十年的真相 文芸春秋 (中文版)有田芳生著

작성자진캉시앤|작성시간11.01.25|조회수3,153 목록 댓글 11

 

 

 

 

悲歡人生비환인생/ 鄧麗君등려군
beihuanrensheng
未知  词/ 未知  曲/ 金康顯  飜譯
专辑 : 怀念邓丽君 Teresa Teng 테레사텐 テレサ・テン
邓丽君 演唱 :《悲欢人生》3.30M
[悲歡人生비환인생.中国语]☜등려군노래듣기

 


有人说人生如梦
快乐欢喜 
有人说人生如云
欢聚悲离
哈, 虽然是各有各的人生观
我浪视悲欢的人生
欢聚的时候手牵着手
悲离的时候分开了手
孤独一个忧伤的喝着苦酒
孤独一个把烟卷拼命的抽
哈, 虽然是各有各的人生观
总归是悲欢的人生

有人是得意洋洋过了一生
有人是迷迷糊糊混了一世
哈, 虽然是各有各的人生观
我浪视悲欢的人生
我不怕贫穷我挣劳力
我不怕困难鼓足勇气
当这个世界使我转运
荣誉的宫殿我怎不去
哈, 虽然是各有各的人生观
我找寻快乐的人生 
当这个世界使我转运
荣誉的宫殿我怎不去 

[내사랑등려군] 
    사람들은 인생이 꿈같다고 말을 하지요 즐겁고 기쁜 사람들은 인생이 구름같다고 말하지요 즐거우면 모이고 슬프면 흩어지는 아, 비록 사람들은 자기만의 인생관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슬프고 기쁜 인생을 허망하게 바라봅니다 즐거워 한데 모일 때는 손에 손을 잡고 슬퍼서 헤어질 때는손을 놓아요 외로움에 너무 서글퍼하는 사람은 쓴 술을 마시고 외로움에 너무 괴로워하는 사람은 담배를 피우네 아, 비록 사람들은 자기만의 인생관을 가지고 있지만 어쨌든 슬프고 기쁜 인생이네.. 어떤 사람들은 자신만만하게 일생을 보내고 어떤 사람들은 정신없게 일생을 보내요 아, 비록 사람들은 자기만의 인생관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슬프고 기쁜 인생을 허망하게 바라봅니다 나는 애써 일을 해도 가난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는 어려운 것에 용기를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이 세상이 내게 자 떠나라 할 때 영예로운 이 궁전을 나는 어찌 떠나지 않으랴 아, 비록 사람들은 자기만의 인생관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즐거운 인생을 찾아요 이 세상이 내게 자 떠나라 할 때 영예로운 이 궁전을 나는 어떻게 떠나지 않을 수 있으랴.. [번역/진캉시앤]



2.5M-VBR
鄧麗君등려군_悲歡人生비환인생beihuanrensheng
最近更新时间:2003-1-10
其他曲名:슬프고 기쁜 인생..
자연으로 돌아가라면 기꺼이 가련다, 인생이란 즐겁기도 슬프기도 하쟎느냐..
덩리쥔도 이처럼 세상이 자 떠나라 하니 이 영예로운 궁전을 홀연히 떠났나 하네요.
[번역후기/진캉시앤]
[등려군노래검색목록표'1250곡]☜등려군노래찾기

 

 

 

 

 

 

 

 

 

 

 

 

 

 

 

 

 

 

 

 

 

 

 

 

 

 

 

 

 

 

 

 

 

 

 

 

 

 

 

 

 

 

 

 

 

 

 

 

 

 

 

 

 

 

 

 

 

 

 

 

 

 

 

 

 

 

 

 

 

 

 

 

 

 

 

 

 

 

 

 

 

 

 

 

 

 

 

 

 

 

 

 

 

 

 

 

 

 

 

 

 

 

 

 


 

我的家在山的那一边~(邓丽君第十年的真相)》——有田芳生著

우리집은 산 그 옆에 있어요 ( 덩리쥔 제10년의 진상)-----有田芳生 저술


《私の家は山の向こう―テレサ.テン十年目の真実》 (文芸春秋2005 年 3 月 )

 우리집은 산 그 옆에 있어요 테레사 텐 10년째의 진실  문예춘추 2005년 3월


【序】
第一章————回忆中的空白
第二章————再次的
第三章————我身随时光流逝
第四章————悲伤的自由
第五章————冬季里的向日葵
第六章————等待春天的花蕊
后记

 


第1章 想い出の余白
第2章 ふたたび
第3章 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
第4章 悲しい自由
第5章 冬のひまわり
第6章 春を待つ花

 

제1장  추억의 여백

제2장  다시

제3장  세월이 흐르는대로 나를 맡긴채

제4장  서글픈 자유

제5장  겨울의 해바라기

제6장  봄을 기다리는 꽃

 

[要旨]

요지
「つぐない」「愛人」「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などのヒット曲で愛された歌手テレサ・テンが旅行先のタイで急死してから十余年。スパイ説、中国政府の罠、天安門事件との繋がり…残された謎の数々。本当の死因は何だったのか?中国と台湾の現代史の狭間で翻弄されながら歌に生きた「アジアの歌姫」の真実。

 

「つぐない」「愛人」「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등의 히트곡으로 사랑을 받았던 가수 덩리쥔 테레사 텐이 여행지 태국에서 급서하고

10 여년. 간첩설, 중국정부의 음모 , 천안문사건과의 연관...남겨진 수수께끼의 여러가지. 진실된 사인은 무엇이었던가?

중국과 대만의 현대사의 틈새에서 우뚝 서서 존재감을 유감없이 들어내면서(   원문:  翻弄되면서 )노래로 살았던 아시아의 여가수 의 진실.

 

    역주:翻弄.......객관적이지 않은 단어로 생각됨


头像
  • 【序】
  •   서문

    邓丽君的光辉──中文版的发行
  • 덩리쥔의 눈부신 빛--------중국판의 발행

    一般日本人对邓丽君小姐的印象是她的歌声柔美悠扬,即使她已经过世,仍然历久不衰。
    2005年,邓小姐过世十周年的此时,日本的各家电视台都相继播出有关邓丽君的生涯记录,或是歌唱特别节目,而且都展现亮丽的收视率。本书也承蒙许多读者的爱戴,在许多报章杂志及电视节目中被广为介绍,甚至有作家给予了“杰作”的评价,也有作家说:是一本看了会“流泪”的作品。
  • 대체로 일본인은 덩리쥔 소저에 관한 인상은 그녀의 노랫소리가 부드러우며 아름답고 리드미컬하다는 것으로
  • 설령 그녀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오랜 동안 스러지지 않고 있다.
  • 2005년 덩리쥔 소저가 서세한지 10 년이 되는 이때 일본의 여러 텔레비전 방송국은 모두 덩리쥔의 삶과 관련된
  • 기록 또는 콘서트 특별 프로그램을 잇달아 방송하기 시작하였는데 뿐만 아니라 모두 좋은 시청률을 나타냈다.
  • 이 책도 역시 많은 신문이나 간행물 그리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널리 알려져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더 나아가 어떤 작가는 걸작이라는 평가를 내게 보내 주었으며 또한 작가는 이렇게 말을 하였다:
  • 이것을 한번 읽으면 눈물이 나게 되는 작품이다

  •  现今邓小姐的CD 在日本重新发行,同时也增加了许多新歌迷,当中有人是因为第一次听到邓小姐的中文歌而感动不已。我相信邓小姐往后势必也会永远活在我们的生活里吧。
    承蒙邓丽君文教基金会会长——邓长禧先生将此书出版为中文版,身为笔者的我,没有比这更高兴的事了,我也期望透过邓丽君小姐,能达到促进日本和台湾的友好关系。

  • 지금 덩리쥔 소저의 CD는 일본에서 다시 새롭게 발매되고 있으며 아울러 또한 많은 새로운 팬들이 늘어나고 있다.왜냐하면 그중에는 덩리쥔의 중국어 노래를 처음으로 듣고는 감동이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나는 덩리쥔 소저가  앞으로도 반드시 언제까지나 우리들의 삶속에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지요
  • 덩리쥔 문교 기금회 회장 덩창시(邓长禧)에게 이 책을 중국어판으로 출간하는데 승인을 얻었는데, 작가로서의 내가 이보더 더 흥분되는 일은 없었다. 나는 또한  덩리쥔 소저를 통하여 일본과 대만의 우호 관계를 촉진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二00 五年九月十八日
    有田芳生
  • 2005년 9월 18일
  • 有田芳生




第二章 再次的
第2章 ふたたび
제2장 다시


赵素桂经常梦见女儿,有时候梦见她在香港的餐厅享受美食边说话的样子,有时候梦见邓小姐大约三十岁左右的光景,穿着华服在演唱会舞台上唱歌。常常在梦醒之后,感到寂寞万分,也常常因为感慨,不管是去美国还是去日本都是“啊!我们都一起去过了那里”而陷入沉思。即使至今也常被这股记忆侵袭,因为到处都留下许多难忘的回忆。

 

 赵素桂는 언제나  꿈을 꾸었는데 딸이, 가끔씩 그녀가 홍콩의 음식점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모습의 꿈을 꾸었다.

종종 등소저가 아마도 30살 즈음에, 중화옷을 입고서 공연장 무대 위에서 노래를 하는 것의 꿈을 꿈꾸었다.

항상 꿈에서 깨어난 뒤에 깊은 쓸쓸함을 느꼈으며 또한 언제나 감격하였는데, 미국을 가든 아니면 일본을 가든지 모두 다 "아! 우리는 함께 그곳을 갔었구나"하며 깊은 시름에 빠졌다.

설령 지금껏도 언제나 이런 추억이 젖어 있더라도, 이로 인하여서 곳곳에 다 수많은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이 남아 있어요.

 


“听女儿的CD 已成为了一种习惯,尤其是在十几二十岁唱的歌曲令人怀念不已。先是在台湾出道,然后是到香港、日本发展时候的回忆特别鲜明,有时候星期六可以一口气听完八张专辑,一边听着歌声一边望着摆在家具上的相框,年轻时代的女儿正在微笑着呢!
每个月都会到金宝山的墓园,但如果在梦里有见到她,隔天势必一定会去墓园。在金宝山的墓园是台湾离日本最近的地方,基隆附近也是在我人生中有着深刻回忆的街道……”

 

딸의 CD를 듣는 것은 이미 하나의 습관이 되어 버렸으며, 더욱이 열너댓살 스무살때 불렀던 노래는 그리워하는 것을 멈추게 하게 못해요.

먼저 대만에서 데뷰를 하고 나중에 홍콩으로 , 일본으로 진출하였을 때의 추억은 특히 생생해요, 가끔은 토요일에 한꺼번에 8개의 앨범을 다 듣고 있는데. 노래를 들으면서 가구 위에 놓여진 액자사진을 바라보니 젊었을 때의 딸이 마침 미소 짓고 있어요!

달마다 늘 金宝山(진바오샨)의 묘원에 가는데 그러나 만일 꿈속에서 딸을 보면 하루 걸러서 반드시 묘원으로 가요. 金宝山의 묘원은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대만 지역인데 基隆부근으로  내 삶에서 가장 깊은 그리움이 있는 거리이에요.........

 


赵素桂的祖籍是在中国大陆山东省东平县,但她却是在黑龙江的哈尔滨出生,出生于民国十五年,西历则是一九二六年六月二十日,一直到五岁为止都待在那儿。父亲赵守业当时是担任哈尔滨市邮政局的局长,母亲赵张氏则是家庭主妇。因为中日战争,全家只好逃到河南省去避难,和先生邓枢是在河南省洛阳认识的。

 

赵素桂의 본적은 중국 대륙의 山东省东平县(산동성 동평현)이지만, 그녀는 오히려 흑룡강의 하얼빈의 출생이다.중화민국 15년 즉 서기로는 바로 1926년 6월 20일에 태어 났는데,내내 5살이 되도록 그곳에서 지냈다. 아버지 赵守业은 그때에 하얼빈 우정국의 국장을 담당하고 있었고, 어머니 赵张은 가정주부이었다. 중일전쟁 때문에 온 식구가 어쩔 수 없이 河南省으로 달아나 피난을 갔었다. 남편 邓枢와는

河南省의 洛阳에서 알게 되었다.


邓枢是在民国四年也就是一九一五年一月十日在河北省大名县出生,出生后母亲就过世了,当军人的父亲也在他四岁的时候就过世,当时国民党的军队到处迁移,所以村里的男人都去从军,无依无靠的邓枢也在十四岁的时候加入了军队,因为只要从军就可以不用担心无法过活。然后就在二十六岁的时候认识赵素桂,因为素桂祖母的友人就住在附近,所以热心地介绍。当时素桂只有十五岁,害羞的躲在祖母后面。在十六岁订婚,回想当初母亲跟自己说:“这个人要成为你的丈夫。”但不懂是什么意思。原因好像是父亲希望女儿嫁给军人, 因为素桂想就读蒋夫人宋美龄所创的育英学校,所以从洛阳搬到陕西的西安。而后结婚是在一九四三年十七岁的时候,婚礼是在洛阳举行,但居住在西安,丈夫也因为结婚而离开军职, 到洛阳附近的宣阳县税务局工作。

 

邓枢는 민국 4년 즉 1915년 1월 10일 河北省大名县(하북성 대명현)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난 뒤 어머니가 바로 세상을 떠났다.

군인이던 아버지도 그가 4살 때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때 국민당의 군대는 이리 저리로 이동하였기에 마을의 남자들은

모두 군대에 갔었다. 아무런 의지 할 곳이 없는 邓枢도 14살때 군대에 들어가게 되는데, 오로지 군대에 들어가게 되면 살아가는데

방법이 없는 것에 대한  염려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뒤로 26 살 때 赵素桂를 알게 되는 데, 왜냐하면 赵素桂의 할머니 친구가

부근에 살고 있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심히 소개를 하였다. 그때 赵素桂는 겨우 15살 이어서, 부끄러워서 할머니 뒤에 숨었었다.

16살에 약혼을 하였는데, 맨 처음에 어머니가 자기에게 말 한것을 회상하며:

이 사람은 너의 남편이 될 것이야. 그러나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까닭은 마치 아버지가 군인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赵素桂는 장개석 부인 宋美龄이 창립한 育英学校에서 공부를 하려고 생각하였기 때문으로 그래서 洛阳에서

陕西의西安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후에 결혼은 1943년  17살때 하였는데 혼례는 洛阳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집이 西安이어서 남편도 결혼으로 인하여 군대를 그만두었으며 洛阳부근의 宣阳县의 세무국에서 일을 하였다.

 

 

 

 

 

 


十八岁生了长男取名“小狗”,没有取正式的名字,就因为当时的食粮缺乏导致营养失调,才十个月大就夭折了。之后于一九四五年在西安生下次男,也就是后来的长男取名为长安,因为以前西安名为长安,就地取名的缘故。

 

18살에 장남을 낳자 小狗(강아지)라고 이름을 지었으나 정식 이름은 짓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때의 양식이 부족하여서 영양 실조에 걸려서, 10개월이 되면은 대체로 요절하였기 때문이다. 이뒤로 1945년에 西安에서 차남을 얻게 되는데 그래서 또한 나중에 장남을 长安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왜냐하면 이전에 西安의 이름이 长安이었기 때문으로 이 지명에서 이름을 얻은 까닭이다.


之后丈夫又在河南省郑州回到军队从军,一九四八年生下次男长顺,因为战争时期希望往后能生活顺遂,所以取名其意叫长顺。在一九四九年九月,一家人就随着被共军追赶的蒋介石军队,在广东省汕头和数百名士兵一起搭船撤退前往台湾。夫妇两人和四岁及一岁的儿子,与两位军中友人坐在甲板上的逃身艇,大部分的人都下到船舱去了,留在甲板上的人很少。当时素桂严重晕船,连喝水都会立刻吐出来,也因此三天后到达基隆后就不支倒地。过了许久,恢复意识的她才移动到台北的北投,现在北投这个地方在台湾是很有名的温泉乡, 在这里待了约两个星期。

이뒤로 남편은 또한 河南省郑州(허난성 짱저우)에 군대가 돌아 오자 군에 입대를 하였으며 1948년에 차남 长顺을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전쟁시기에 앞으로가 순탄한 생활을 하기를 바랬기에 그 이름의 뜻을 长顺이라고 하였다.1949년 9월에 온가족이 공산군에게 쫓기는 蒋介石 군대를 따라서 广东省汕头에서 수백명의 사병과 함께 철수하는 배를 타고서 대만으로 가게 되었다.

부부 두 사람과 4살과 1살의 아이는 두 사람의 군인 친구와 같이 피난선의 갑판위에 앉아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다 선창으로 내려 갔었고, 갑판위에는 아주 적은 사람들 만이 있었다. 그때  赵素桂는 매우 심하게 배멀미를 하여서 물 조차 마셔도 모두 다 곧 토해버렸기에, 이로 인하여 3일 뒤 基隆항에 도착한 뒤에는 버틸 수 없어서 땅에 넘어져 버렸다. 좀 시간이 지나고는 의식이 돌아온 그녀는 비로소 대북의 北投으로 이동을 하였는데 현재의 北投 이 곳은 대만에서  이름난 온천 지역이다.이곳에서 약 2 주간을 기다렸다.


一九四九年的十二月,蒋介石从重庆撤退到台湾,邓枢的军队一度被解散,然后再重新整编,邓枢被编为后备军调往宜兰县。也在那同时素桂跑出去到处寻找妹妹的音讯,听说当空军机师的妹夫在一九四七年移防到高雄,那里有空军基地。后来找到妹妹,素桂和儿子们就暂时住在高雄冈山。

 

1949년 12월 蒋介石이 重庆에서 대만으로 철수하자 邓枢의 군대는 한번 해산을 하였으며 이 뒤로 다시 새로이 개편을 하였고 邓枢는

개편하고는 후비군으로 宜兰县으로 이동을 하였다. 또한 그때 赵素桂는 여동생의 소식을 찾으려 온갓 곳을 뛰어 다녔는데, 듣기에 공군의 비행사 인 妹夫가 1947년에 高雄으로 이동을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곳에는 공군 기지가 있었다. 이 뒤에 여동생을 찾았고 赵素桂는

아들과 같이 잠시 高雄冈山에 다녀 왔었다.


素桂于一九五一年在宜兰产下三男,当时生活实在太贫苦,希望能带来“财富”,所以三男就取其意为长富。大概在宜兰住了一年,就搬往云林县褒忠乡龙岩村,房子是用红砖瓦盖成的房子,拉开木门有一间小小的平铺床的房间。大约在这里住了四年左右,一家人是从大陆迁来的外省人,几年当中和村人语言都无法沟通。

 

赵素桂는 1951년에 宜兰에서 세째 아들을 낳는데, 그 때의 생활이 실제로 너무나 가난하여서 재물을 가져오기를 바래서 삼남은 그 뜻을 살려서长富라고 이름을 지었다. 대체로 宜兰에서 1년을 살고는 林县褒忠乡龙岩村으로 이동을 하였다. 방은 붉은 벽돌과 기와로 얹어서 만든 방이었다.나무 문을 댕겨서 열면 아주 작은 한칸 짜리의 평상이 있는 방이 있었다.대체로 이곳에서 4년 정도 살았고 온 가족은 대륙에서 도망 온 외성인이어서, 몇해 동안은 마을 사람들과 말이 전혀 통할 방법이 없었다.


一九五三年一月二十九日,第四个孩子出生了,这次是个女儿,帮忙接生的是当时房东张素霞的大嫂当产婆。夫妇两人将女儿取名为“丽筠”。筠的意思是指剖开竹子,里面会有一层薄膜用于笛子,也就是指有透明清澈气质之意。这是毕业于北京清华大学的好友所提议的名字,因为是第一个女儿,所以特意想了一个漂亮的名字。之后在教会有了一个英文名“TERESA”,但是在家里大家都叫她小丫头或是丫头。这时候的丈夫也正式退休,转到军队的相关部门辅导队担任工作,隔年生下第四个儿子——长禧。

1953년 1월 29일 네째 아이가 태어 나는데 이 때는 딸이었다. 아이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던 이는 바로 그때 집주인 인 张素霞 아주머니가 산파를 담당하였다.부부 두 사람은 딸의 이름을 丽筠”이라고 지었다. 筠”의 뜻은 갈라 진 대나무를 가리키는 것으로 속에는 피리에 쓰이는 한장의 얇은 막이 있을 수 있다. 또한 투명하고 맑고 깨끗한 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북경의清华大学을 졸업한 친구가 제안한

이름이었다.왜냐하면 첫째 딸이기에 특별히 아름다운 이름을 생각하였다. 이 뒤로 교회에서 “TERESA”라는 영어식 이름이 있어지만,

집안에서는 모두 다 그녀를 작은丫头혹은 丫头(계집애)라고 불렀다.이 때 남편도 정식으로 전역을 하고는,  군대와 관련된 부문으로 전직하여서 을 도와 주는 일로 전환하여서 임무를 담당하였고 한해를 걸러서 네째 아들_---长禧를 낳았다.

 

 


“女儿是个普通的婴儿,会开口唱歌是在两三岁时候才会的,她会跟着收音机放出来的歌一起唱,特别印象深刻的是她三岁的时候,当时她一个人跑到住家附近的照相馆,跟老板说:‘我妈叫我来照相’,因为照相馆老板认识所以也很高兴地帮她拍照,但是我记得从来没有说过这样的话。如今仍留有那时候拍的照片,肩上斜背着一个小包包,身上穿着小点点的洋装,右手摆放在摄影棚的装饰架上,左手好像拿着什么东西,一副天真无邪的表情看着镜头的样子。”

 

딸은 평범한 어린아이로, 입을 열어서 노래를 할 수 있던 것은 두세살 적에야 비로소 할 수 있었고 그 아이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함께 따라 불렀는데 특히 인상이 깊은 것은 그아이가 세살 때인데, 그때 그아이는 혼자서 집 근처의 사진관으로 달려가서 주인에게 말을 하였다.: 우리 엄마가 나더러 사진을 찍고 오래요.그래서 사진관 주인은 그 연유를 알고서는 재미있게 그녀를 찍어 주었으나,나는 이제껏 그런 말을 한 것이 기억에 업사. 지금도 여전히 그때 찍었던 사진이 남아 있는데, 어깨에 비스듬하게 작은 보따리를 매고 몸에는 아주 작은 양장을 입고 오른 손은 촬영대의 장식대 위에 올려 놓고 왼손은 마치 어떤 물건을 쥐고 있는 것 같으며 ,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렌즈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并不是想要女儿成为歌星的,但因为是独生女,她想要的都会让她去做,所以四岁的时候让她学芭蕾舞。”母亲还记得当时老师还夸赞说:“妈妈,这个小孩跳得很好,腿的线条也很漂亮。”

 

결코 딸아이가 유명한 가수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으나. 외동딸이어서 그아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다 그아이에게 해 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네 살때 그아이에게 발레를 배우게 하였다. 어머니는 아직도 그때의 선생님이 또한 칭찬하면서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 이 아이는 매우 잘 춤을 추어요, 다리의 곡선도 매우 아름다워요.

 


一家在丽筠五岁的时候搬了几次家,住过台东、屏东,之后也住过台北的松山通化街,也就是现在很有名的夜市。两夫妻从搬到台东,邓枢就从部队退休,为了生活开始就从事小吃摊的生意,刚开始主要是卖些面食,搬到台北之后,也不知是运气差还是大环境不景气, 每天赚的钱还不够买煤炭,气得邓妈妈心里发誓,这辈子再也不卖面!于是就改卖了馒头, 把做好的馒头批发给学校或店家。

 

등려군이 다섯살이 될때 집이 여러차례 이사를 하였는데,台东、屏东에서 살기도 하였고 이 뒤로도 대북의 松山通化街에서도 살았고 또한

이곳은 지금도 유명한 야간시장이다. 두 부부는 台东으로 이사를 한 뒤로 邓枢는 군대에서 제대를 하였고 생계를 위하여 작은 음식 노점 장사를 하게 되었는데, 막 시작한 주된 것은 국수 음식 파는 것으로 대북으로 이사한 뒤로도 운이 나쁜 것인지 아니면 전반적인 경기가 나빠서인지 날마다 번 돈이 겨우 석탄을 살 수도 없을 정도이었다. 화가 나 등려군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결심을 하였는데, 한평생 다시는 국수를 팔지 않겠다고 하고는 이때 비로소 만두를 팔기 시작하였다. 잘 만드는 만두를 학교나 가게에 도매로 공급을 하였다.


还有令人印象深刻的是上幼稚园的丽筠为了在毕业典礼上演讲,不认识字所以请父亲教她。演讲时身高还够不到麦克风,必须站在小木箱上。因为幼稚园规定必须在白围兜左胸前别上手帕,五弟长禧依稀记得,丽筠总是在校门口帮弟弟别上手帕之后,一起出门,当时的家是住在到处都是水田的传统农村地带。

 

그리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은 유치원에 다니던 등려군이 졸업식장에서의 연설을 하려고 글짜를 모르기에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연설할 때 키가 여전히 마이크에 미치지 못하여서 작은 나무 상자를 딛고 하여야 하였다.유치원 규정에 의하여 반드시 하얀 스카프와 왼쪽 가슴에 손수건을 매달아야 하였는데 다섯째 长禧는 희미하게 기억을 하고 있다.

등려군은 언제나 학교 문앞에서 동생이 손수건을 매다는 것을 도와 주고는 함께 문을 나섰다.그때의 집은 곳곳이 모두 다 논이던 전통적 농촌 지대에서 살았다.


在丽筠六岁的时候,全家搬到台北县的芦洲,就是在她就读芦洲国小的时候,有了重大的转机。父亲的同乡好友李成清住在附近,他在军中的康乐队演奏胡琴,李是单身,因而经常到邓家走动,所以就有机会教丽筠唱歌。李成清说:“这小孩很有天分,可以走唱歌这一行。”之后就经常带她到劳军晚会表演。第一次登上舞台是在小学三年级的时候,常会唱从收音机播出来的美空云雀歌曲。当时的歌本里面有歌词、没有歌谱,所以只能跟着收音机练唱,而晚上最喜欢的事就是唱歌。

 

등려군이 여섯살 일때, 온 가족이 대북현의 芦洲로 이사를 하였는데 바로 그녀가 芦洲국립소학교에서 공부하던 때로 중대한 전기가 있게 된다. 아버지의 같은 고향사람인 친한 친구 李成清이 집 근처에 살았는데, 그는 군대의 九三康 밴드에서 胡琴을 연주하였다.

이李成清은 독신이어서 늘 등려군 집으로 놀러 왔는데 그래서 등려군에게 노래를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李成清이 말을 하였다:

이 아이는 매우 천부적이다. 그래서 노래하는 이 길을 갈 수 있다. 이 뒤로 언제나 그녀를 데리고 군위문 야간 공연을 다녔다.

맨처음 무대에 오른 것은  소학교 3학년 때이었다. 늘 라디오가 방송하는 美空云雀(미소라 히바리)의 노래를 불렀다.그때의 노래책에는 가사가 있으나 악보는 없었다. 그래서 단지 라디오를 따라서 노래연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밤에 가장 즐거운 일은 바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在女儿十岁的很流行《梁山伯与祝英台》的电影,我还带她去看电影,她竟然可以记住十多首的插曲,是大陆安徽省的‘黄梅调’。因为觉得女儿有天分,所以帮她报名参加华视的歌唱比赛,在不分年龄的比赛中,她唱电影主题曲《访祝英台》,打败了五十多位参赛者获得优胜,拿到‘优胜奖状’时非常高兴。记得当时女儿还跟我说:‘只要有比赛都想参加。’,所以之后常常都是说着:‘我会把奖状拿回来,你在家里等我喔’,然后就出门去比赛,也常拿大奖回家。

 

딸아이가 열살 때 매우 유행하던 《梁山伯与祝英台》의 영화를 나도 아이를 데리고 보러 갔었는데, 그 아이는 뜻밖에 열댓편의 삽입곡을

기억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대륙의安徽省의‘黄梅调’이었다. 딸아이가 천부적인 재주가 있었기에,그래서 그아이가 중화텔레비전의 노래자랑 콘테스트에 참가 신청을 도와 주었다. 나이를 나누지 않는 콘테스트에서 딸아이는 영화 《访祝英台》을 불러서, 50여명의 참가자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 하여서,우승 상장을 받을 때 매우 기뻤다.그때 딸아이가 내게 말을 하였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단지 콘테스트가 있기만 하면은 모두 다 참가하려고 해요. 그래서 이 뒤로 언제나 모두 이렇게 말을 하였다.:

나는 상장을 가지고 돌아 갈 수 있을 거예요, 엄마는 집에서 저를 기다리세요 네. 이러고는 집을 떠나서 콘테스트에 참가하였고 또한 늘 대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 왔다.


在学校的国语课时朗诵,都会被夸赞发音清楚而标准,在十一岁的时候得过全校演讲比赛第一名。”
参加歌唱比赛的事父亲并不高兴,反而是持反对的想法,他认为去唱歌还不如应该好好念书,社会的风气也是着重在考上什么明星学校居多,附近的小孩子考上哪个学校都是热门话题,所以丽筠初中就考上天主教会学校的金陵女中就读。

학교의 국어 시간에 읽기를 할때 언제나 발음이 맑고 깨끗하고 또 정확하다고 칭찬을 받았으며,11살때 전교 웅변대회에서 일등을 차지 하였다.

노래 자랑 콘테스트에 참가한 일을 아버지는 좋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반대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노래하는 것이 또한 얌전히 공부를

하는 것보다 낫지 않다고 생각하였으며, 사회의 인식도 어떤 명문학교에 합격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것이 주된 것이었다. 부근의 아이가 어떤

학교에 입학한 것이 모두 다 뜨거운 화제 꺼리 이었다. 그래서 등려군은 초등중학교를 천주교회의 金陵女中에 합격하여서 공부를 하게 된다.


一九六六年,十三岁的她成为台视的签约歌星,偶尔在每周播出一次的音乐节目中唱歌。当时台湾只有一家电视台就是台视,在三十分钟的节目“群星会”中,深受当时代表上海却移居香港的红歌星周璇的影响,会在节目中唱些她的怀念歌曲,因此母亲和女儿都认为一个月能上节目唱一次歌就非常的了不起了。

1966년 13살때 그녀는 대만 텔레비전과 계약을 한 가수가 되었으며,  이따금 매주 한번 방송되는 음악프로그램에서 노래를 하게 되었다.

그때 대만에는 오직 방송국이 하나만 있었는데 바로 대만 텔레비젼 이었으며, 30분간의 프로그램인群星会에서, 그때의  상해에서 홍콩으로 이주한 대표적인 인기가수 周璇의 영향을 깊게 받았는데, 프로그램에서 그녀의 추억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어머니와 딸아이는 모두 다 한 달안에 프로그램에서 한번 노래를 하였는데 매우 잘한다고 인정 받게 되었다.

 


学校大概在下午四点放学,一直到六点要补习,回家之后就大多会去军队的康乐队表演,因为她也是属于康乐队,回到家大概都深夜十一点了,隔天早上五点起床做功课,七点去上学。但这些事被学校知道后,丽筠就被学校的生活指导老师叫去,说:“不能接受你的行为”,要多注意,到底要唱歌,还是要休学。

학교는 대체로 오후 4시경에 끝나는데 이후는 쭉 6시 까지 복습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 온 뒤에는 대부분은 군대의 康乐队 공연에 갔었다.

그래서 그녀도 康乐队에 소속되었기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대체로 거의 다 밤 11시 가 되었다. 하루 걸러서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숙제를 하고는 7시에 학교에 등교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학교에 알려진 뒤에는 등려군은 학교의 생활지도 교사에게 불리워 갔는데, 말하기를:

너의 행동을 받아 드릴 수 없다, 조심을 많이 해야 하므로 끝까지 노래를 부르려면 그러면 학교를 쉬는 것이 좋겠다.

 

 


丽筠被逼去和父亲商量如何作选择,就在丽筠读初中二年级的时候。个性梗直的父亲隔天就跑到学校去,生气地对老师反应:“为什么要这样说!?”但父亲仍然反对休学,而母亲却认为休学也无妨,每当女儿拿下歌唱比赛优胜的时候,就会认为她有歌唱的才华,虽然不曾想过要走这一行,但是看她在歌厅唱歌受欢迎的模样,令人觉得是否应该让她去尝试。而且友人也表示赞成:“让她去这行发展比较好。”
丽筠的想法是如果可能,她想边念书边唱歌,但学校的态度却很强硬。看着女儿因休学而难过不已,素桂就让女儿去上“美尔顿”英文补习班。

 

등려군은 쫓겨나게 되자 아버지와 어떻게 선택할 지를 의논하였는데 등려군이 초급중학교 2학년 때이었다. 개성이 올곧은 아버지는 하루가 지난뒤 학교로 달려갔다. 화가 나서 선생님에게 따졌다: 어재서 이렇게 말을 하나요!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휴학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오히려 휴학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였다. 딸아이가 노래 자랑에서 우승을 차지 할때 마다, 딸이 노래하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일찍이 이 길로 가려고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 딸이 노래홀에서 노래하는 것을 바라는 모양으로 보여서,

사람들에게  딸에게 한번 마땅히 해보라고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게다가 친구도 찬성을 표시하였다:

그녀를 이길로 가게 하면 비교적 잘 발전할거야.

등려군의 생각은 만일 가능하다면, 그녀도 공부하면서 노래 하기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학교의 태도는 오히려 강경하였다.

그녀가 휴학 때문에 괴로와 하는 것을 그치지 못해 보이자 어머니는 딸을 美尔顿 영어학원에 보내었다.


“女儿成为属于中视的专属歌星,正式迈入歌唱这条路,是在‘每日一星’的节目中, 就是每天介绍一位歌星唱歌的十分钟节目,一星期上节目表演一次的固定演出,这是第一个固定演出的节目。”也在此时将本名丽筠改成艺名“丽君”,因为本名常被念错,所以改成笔划和字型比较漂亮的“君”字,是母亲临时想到的名字。

 

딸은 중화텔레비전의 전속 가수가 되어서 정식으로  노래하는 길에 발을 내딛게 되었는데 이것이每日一星( 날마다 별 하나) 라는 프로그

램이다. 즉 날마다 한 초대가수가 10분 동안 노래하는 프로그램이다. 한주일 프로그램 공연 한차례의 고정 출연이 바로 첫번째 출연프로그램이었다. 또 이때 본명 丽筠을 예명丽君으로 개명하였는데, 왜냐하면 본명이 언제나 잘 못 읽히기 때문으로 그래서 필획과 자형이 비교적 아름다운 君으로 고치게 되었다 이것은 어머니가 그때 생각난 이름이었다.

 

 


往后变成了一家的生计就仰赖女儿的收入,当时清晨四点起床准备,但女儿每月却赚六千或是八千的收入。虽然上节目的收入较少,但在歌厅演唱的收入却很丰沃。“虽然女儿的名气越来越大,但在我然后每天摆摊的收入每月大概有两千元,眼里看来女儿的态度却没有改变,如果硬要说哪里变了的话,那就是变漂亮了。”

 

이후로 한 집의 생계가 딸아이의 수입에 의존되게 되었는데 당시에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였는데 이러고 날마다 노점의 수입은 대체로 2천元이었다. 비록 프로그램에서의  수입이 적었지만 그러나 음악홀에서 공연한 수입은 오히려 많았다.

비록 딸의 명성이 점점 더 커갔지만 나는 이런 뒤에 날마다 노점에서의 수입은 한달에 대체로 2천元이었다. 속으로 딸아이의 태도를 보아하니 전혀 바뀐 것이 없어요 만일 좀 엄밀하게 어디가 바뀌었나 말을 하자면 그것은 예쁘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当时家里的院子养了一只母鸡,每天会生下一颗蛋,就拿来慰劳女儿的辛苦,每次看姐姐有蛋吃,弟弟长禧就会很羡慕。大约是在长禧念高中的时候,歌厅演唱完的回家途中, 丽筠就说想去买手表,为了庆祝弟弟念中学,就买了一支自动的精工表作礼物。对长禧而言, 这是他的第一支手表。那时候长男在印刷厂工作,之后自己也开了一间印刷公司,二男则是去跑船,三男进了军校,因女儿收入的增加,得以搬到较大的房子住。

그때 집안의 뜰에서 한마리의 암닭을 키웠는데 날마다 달걀 하나씩을 낳았다. 그래서 딸아이의 고생을 달래려고 갔다 주었는데

누나가 달걀을 가지는 것을 볼때마다 동생인 长禧는 매우 부러워 하였다. 아마도 长禧가 고급 중학교에 다닐 때로 음악홀에서 노래를 다 마치고 돌아 오는 길에 등려군은 , 동생의 고급중학교 진학을 축하하려고 시계를 사러 가겠다고 말을 하고는 자동식의 고급시계를 선물로 사주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첫번째 시계이었다. 그시절 장남은  인쇄 공장에서 일을 하였고 이 뒤로 스스로도 인쇄 공장 회사를 차리게 되었다.

둘째오빠는 배를 타러 갔고 셋째 오빠는 사관학교에 갔고 그녀의 수입이 늘어나기 때문에 비교적 큰 집으로 이사하여서 살 수 있었다.

 

 

 


在一九六七年九月,宇宙唱片发行了邓小姐生平的第一张专辑唱片,名叫《凤阳花鼓》的专辑,里面收了《桃花江》、民谣《凤阳花鼓》,和由《何日君再来》改名的《几时你回来》等歌。这张唱片的标题写着《邓丽君之歌第一集》的编号,结果这系列总共出了十九张唱片。
在台北有一家叫做夜巴黎的歌厅,一场是九十分钟的表演,大概会有十五位歌星演唱,邓小姐在这个歌厅创下连唱七十天的惊人纪录。每当她唱完歌,观众就会一直叫安可,结果都会变成加唱两首、三首、四首……让其他歌手感到不悦,之后被要求唱压轴,但邓妈妈就推说“女儿还小,让年长的前辈场压轴比较好”也不被采纳。那时已经出唱片的邓丽君不只会唱自己的歌,还会唱日文歌《手提箱女郎》、披头四的歌、民谣等。还曾经有同台的女歌星要求经纪人把邓丽君排除掉,邓妈妈就会安慰女儿说:“不用那么伤心,有才华的人到哪里都可以生存。”

 

 

1967년 9월  우주 음반회사는 등소저 생애의 첫 앨범 음반을 출시하였는데 《凤阳花鼓》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앨범으로 그속에는

《桃花江》、민요《凤阳花鼓》,《何日君再来》이 개명된《几时你回来》등이 들어 있다. 이 앨범 음반의 제목으로《邓丽君之歌第一集》쓰여졌으며 일련번호는 결과적으로 이 시리즈에서 모두 다 19장의 음반이 나왔다.대북에는 夜巴黎(밤의 파리)라는 음악홀이 있는데

한번 공연은 90분으로 대체로 15명의 가수가 출연을 하는데 등소저는 이 음악홀에서 연속으로 70일간 노래를 하는 놀랄 만한 기록을 만들었다.그녀가 노래를 다 부를 때마다 청중들은 내내 앙콜을 외쳤다. 결과적으로 모두 두곡 세곡 네곡 노래를 더 하게 되어서 다른 가수를

기분 나쁘게 만들었으며 이 뒤에 마지막 순서(영광스런 순서)에 노래하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등려군 어머니는 딸이 아직은 어리기에 더 나이가 많은 선배들이 마지막 순서에 노래하는 것이 훨씬 좋다며 핑계를 대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이미 음반이 출시된 등려군은 자기의 노래를 부를 뿐만 아니라 또한 일본 노래인《手提箱女郎》、비틀스 노래, 민요등을 불렀다.

그리고 이전에 같은 무대에 서는 여자 가수가 매니저에게 등려군을 빼달라고 요구하였는데 등려군 어머니는 딸을 달래며 말을 하였다:

이렇게 마음 아파 하지 말아라 재주가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도 모두 다 살수 있다

 


第四张唱片终于有自己的新歌——《晶晶》,之前的唱片一直唱别人的歌。就在台湾第一部连续剧《晶晶》一九六八年播出时,她唱的主题曲,是由古月作曲,唱片风行到必须排队才买得到,引起非常大的轰动,但是邓丽君却比较喜欢上电视节目表演。
在一九六九年十六岁的时候,就参加电影《谢谢总经理》的演出。电影里面饰演在一位年轻有为的总经理所开的公司上班,因一些困难的解决而和老板谱出恋曲的故事,在当时的台湾电影院开演前会有二十分钟的歌唱歌唱表演,前十天每日限定两场的舞台现场来了非常多的观众,有人甚至听完邓丽君唱歌就回家。

제4의 앨범 음반은 마침내 자기의 신곡인——《晶晶》이 실렸으며 ,이전의 음반은 모두 다 다른 사람의 노래를 불렀다.

대만에서 첫번째의 연속극인《晶晶》이 1968년에 방송이 될때,그녀가 부른 주제곡이 바로 古月 작곡으로 음반이 인기가 있어서 반드시

줄을 서야 살 수 있었다. 매우 커다란 인기를 모았으나 등려군은 오히려 비교적 텔레비전 프로그램 출연을 기뻐하지 않았다.

1969년 16살때 영화 《谢谢总经理》에 출연하였는데 영화에서 한 젊고 유능한 사장이 경영하는 회사에 출근하는 역할을 연기하였으며 어떤 빈곤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장과 사랑의 노래를 작곡한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대만의 영화관에서는 상영전에 20분간 노래를 부르고 상영을 하였다. 이후10일 간 날마다 2회 한정인 무대 현장에 많은 관객이 왔었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등려군의 노래를 다 듣고서야

집으로 돌아 갔다.

 

 


在这年邓丽君也参加了新加坡总理夫人举办的义演活动,对邓丽君而言此行是第一次出国,她很讶异为什么吃的菜和平时吃的口味几乎相同,后来听说这里的人很多都是从福建省来的才明白原因。
一九七0 年到香港登台发展。和“香港丽歌厅”签约表演,决定在香港表演时,就为自己取了个英文名字“TERESA·TENG”,在香港发行的唱片上也都会同时标示“邓丽君” 和“TERESA·TENG”。

 

이해에 등려군도 싱가포르 총리 부인이 주최한 자선 활동에 참가하였으며 등려군으로서는 이번 여행이 첫 출국이었다.

그녀는 어째서 먹는 음식이 평상이 먹던 맛과 거의 같은 지가 의아하였는데 나중에 듣자하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다 福建省에서 왔다는 것을 듣고서는 까닭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1980년 홍콩 무대에 올라 발전을 하였다. 香港丽歌厅”(홍콩 음악홀)과 공연 계약을 하여서, 홍콩에서 공연을 하기로 결정하였을 때,자기를 영어 이름으로 TERESA·TENG을 골랐으며 홍콩에서 출시되는 음반에도 모두 다 등려군과 TERESA·TENG”이라고 표시하였다.


丽君曾到香港九龙有家叫做“东方”歌厅唱歌时,住宿在香港岛的喜来登酒店,那时候还没有地铁,必须搭船过岸。平日的话是下午两点到四点半,晚上七点半到九点半,十点到十二点,一天唱三场,若是星期六、日则是下午一点到三点,三点到五点,然后晚上两场一天唱四场的公演。一场公演大约会有十位左右的歌星唱歌,一人唱两首,一开始邓小姐是唱中场的顺位,但跟着人气的高涨,唱的顺序就越来越后面。

 

등려군은 홍콩의 九龙에 东方”이라는 음악홀에서 노래를 부를 때 홍콩 섬의 喜来登酒店(쉐라톤 호텔)에서 머물렀으며 그때는 아직도 지하철이 없어서 반드시 배를 타고서 강을 건넜다.평일을 말하자면 오후 2시부터 4시반 까지 밤에는 7시반부터 9시반 까지, 10시부터 12시 까지, 하루에 3차례 공연을 하고 만일 토,일요일에는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3시부터 5시까지 이런 뒤에 밤에는 2차례 하루에 4차례의 공연을 하였다. 한차례 공연은 대체로 10명 정도의 가수가 노래를 불렀는데 한사람이 2곡을 불렀고 처음에는 등소저가 노래 순위가 중간 쯤

이었으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서 노래 순서도 점차로 뒤로 가게 되었다.


“妈妈!今天来了好多客人,很高兴!”邓小姐常说这句话。
此时发行《晶晶》这张唱片的宇宙公司因为经营不善而倒闭,因此就和香港的乐风唱片公司在一九七一年十二月签约。这家公司原本是以马来西亚为据点的公司,然后在新加坡、香港、台湾都有分公司。这时以古月为笔名的左宏元就被指派当邓小姐的唱片制作人。
古月就是为欧阳菲菲的第一张唱片担任制作人,也为翁倩玉作曲过。担任邓丽君的制作人,古月不仅为邓丽君写谱,连宣传用的文章都亲自写,因此素桂常做饺子请送邓小姐回家的古月当宵夜。

 

엄마! 오늘 아주 많은 관객들이 와서 매우 기뻐요! 등소저는 늘 이런 말을 하였다.

이때  《晶晶》앨범을 출시한 宇宙公司는 경영이 좋지 않아서 문을 닫게 되었다.그리하여 홍콩의 乐风唱片公司와 1971년 12월 12일 계약을 맺었다. 이 회사는 원래 말레이지아를 근거로한 회사이었고 이후에 싱가포르 홍콩 대만에 모두 지사가 있었다.

이때 古月을 필명으로 하는 左宏元이 등소저의 음반 제작자로 파견되었다.

古月은 欧阳菲菲의 첫앨범 담당 제작자이었는데 또한 翁倩玉을 위하여 작곡도 하였다. 등려군을 담당하는 제작자인 古月은

등려군을 위하여 악보를 썼을 뿐만 아니라 홍보용 글조차도 모두 다 손수 썼었기에 등려군 어머니 素桂는 언제나 만두를 만들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古月에게 야식으로 등소저를 통해서 보내주었다.

 

 


“轻快的歌曲发音较短,所以容易让人感到孩子气,你已经十八岁了,所以应该唱一些比较大人味的歌了。”
邓小姐也认同这个看法。
《谢谢总经理》这部电影也于这一年在香港上映。邓小姐被选为史上最年轻的白花油慈善公主,当年十八岁,也参加电视剧《天涯共此时》的演出。邓小姐对成名这件事只向母亲说“是荣幸”。

 

경쾌한 노래는 발음이 비교적 짧아서 쉽사리  어려 보인다고 느낄 수 있는데, 너는 이미 18살이 되었으니 따라서 마땅히 조금은 비교적 성인의 느낌이 나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

등소저도 이런 생각에 동의하였다.

《谢谢总经理》이 영화도 이 한해동안 홍콩에서 상영이 되었다. 등소저는 사상 최연소로 白花油慈善公主로 뽑혔는데, 그때 18살이었다.

또한 텔레비전 드라마《天涯共此时》에도 출연하고 있었다.등소저는 유명해진 에 대하여 단지 어머니에게만 이야기하였다."영화스러워요"

 


一九七二年,十九岁的邓小姐被选为香港十大歌星,一九七三年因主演电影《歌迷小姐》使得《千言万语》歌曲大卖。当《彩云飞》这部悲情小说要拍成电影时选用《千言万语》作为插曲,古月作曲后,监制人就向古月说:“小孩子怎么会唱大人的爱情歌呢?”,古月就找了几个人来录唱这首歌给监制人听,最后还是邓小姐被选上。也在这一年,她在北投买了一栋别墅,又为父亲买了一台美制的跑车当作礼物,父亲每天都会发动引擎热车,也曾不小心开车撞到墙壁过。

 

1972년 19살의 등소저는 홍콩의 10대 가수로 선정이 되었고 1973년에는 주연한 영화《歌迷小姐》로 인하여 《千言万语》노래가

많이 팔리게 되었다.《彩云飞》이라는 비극 애정소설을 영화로 만들려고 할때 《千言万语》를 삽입곡으로 쓰게 되었다.

古月이 작곡을 한뒤에 감독이 古月에게 물었다: 작은 아이가 어떻게 어른의 사랑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古月이 몇사람을 찾아서 이 노래를 녹음하여서 감독에게 들려 주었는데 마지막으로 여전히 등소저가 선택되었다.

또한 이해에 그녀는 北投에 별장을 한채 구입하였고 다시 아버지를 위하여 아름답게 만든 스포츠카를 선물로 사드렸다.

아버지는 날마다 늘 엔진을 켜서 차를 따뜻하게 하였으나 부주의하게 차를 몰아서 벽에 부딛쳤었다.

 

 

 


在华人的世界出名之后,就有来自各地的邀约,邓小姐和母亲常到香港、越南、新加坡、马来西亚、印尼、泰国……等东南亚国家巡回公演,演出的地方有中国餐厅、饭馆、夜总会等等。其中令邓小姐印象最深刻的算是去越南演出的那次了。从饭店坐三轮车去会场, 总统夫人招待九百个美国大兵和越南女人所生的小孩,在西贡的戏院里看邓小姐的表演。
邓小姐每次出国都不曾忘记买礼物,出国前会为弟弟长禧量脚,买溜冰鞋给他,也会为父亲买劳力士表或是西装布料。一回到台湾就一定会聊及当地的土产及特色,“新加坡的街道很干净”、“台湾的摩托车和计程车太乱,为什么无法改善呢?”,弟弟长禧也常因此和她争论一个小时以上。

중화인의 세계에서 이름이 난 뒤로 여러 곳에서 초청이 있어 등소저는 어머니와 같이 홍콩 월남 싱가포르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시아를 순회공연하였다. 공연한 곳은 중국 음식점, 식당, 나이트 클럽등등 이었다. 그중에서

등소저에게 인상이 깊었던 것은 월남에 가서 공연한 그 때일 것이다.식당에서 삼륜차를 타고 공연장으로 갔는데 수상 부인이 미국군인과 월남여인이 낳은 아이 900여명을 초대하여서 사이공의 극장에서 등소저의 공연을 관람하였다.

등소저는 출국할때 마다 선물을 사는 것을 잊은 적이 없었는데 출국전에 동생 등장희를 위하여 발크기를 짐작하고 스케이트를 그를

위하여 샀었고 또한 아버지를 위하여 로렉스 시계나 양복감을 샀었다.

일단 대만으로 돌아 오면 언제나  현지의 토산품과 특색에 대하여 이야기를 가졌다. 싱가포르의 거리는 매우 깨끗해요, 대만의 오토바이와 택시는 너무나 혼란스러워요. 왜 고칠 방법이 없나요? 동생 등장희도 언제나 이것때문에 누나와 같이 한동안 논쟁을 하였다.

 

 




一九七三年三月,日本宝丽多唱片公司让佐佐木幸男和中村準良两人,一起到香港旅行四天三夜。佐佐木曾担任泽田研二,中村则担任过野口五郎的制作人。旅行的目的说是希望去和香港宝丽多做敦亲拜访,但事实上是要犒赏他们平时工作的辛劳。
佐佐木和中村一到香港就直奔香港的宝丽多唱片公司,和当时香港制作部的部长郑东汉先生一起在饭店用餐时,被问及想去哪里?他们就回答想去听歌,郑东汉立刻就预约歌厅。

 

1973년 3월 일본의  宝丽多 唱片公司는 佐佐木幸男와 中村準良 두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홍콩 여행 3박 4일을 하게 하였다.

佐佐木는 泽田研二을 담당하였고 中村는 野口五郎를 담당한 제작자 이었다. 여행의 목적은 홍콩의宝丽多 에 가서 친선방문을 하기를 바랐으나 사실상 그들의 평시의 업무의 고생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佐佐木 와 中村는 홍콩에 도착하자 바로 홍콩의 宝丽多唱片公司로 달려가서 그때 홍콩의 제작부서의 부장인 郑东汉과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어디를 갈 지를 물었다. 그들은 바로 노래를 들어러 가자고 대답하였고 郑东汉도 바로 음악홀을 예약하였다.

 

 


用完餐到达歌厅已经晚上九点多了。当晚大约有两百位客人,歌厅因为规定有喝酒的客人不能坐到舞台前的位置,只好坐到后方的桌子去,当时有位女歌星在唱歌。节目里安排十位女歌星唱歌,五人伴奏乐团的演奏不是走音就是节拍太乱,萨克斯风的人还伸脚表演呢!
一人唱两首歌,只有最后的歌星唱三首,佐佐木不禁地叫出来:“啊!好姑娘。”音质和表情都很好,看起来不像中国人的歌星,中村却说:“不,这个之前的女孩比较好。”的确前一位歌星和观众的互动较好,但以歌唱而言,最后一位比较出众,那就是邓丽君小姐。
当时因为喝了酒,又坐在很远的地方所以看不清楚。所以他们决定要再来看一次,一定是有“什么”让他们这样想,而中村和佐佐木的意见竟然一致。

 

 

 


隔天,他们就请郑东汉先生为他们收集邓丽君的唱片。听过唱片他们认为音质让人感到温柔有气质,即使在日本也相当会被认同的角色,佐佐木和中村作出了这样的判断。在日本歌坛已经有香港的陈美龄和台湾出身的欧阳菲菲出道了,但他们认为邓小姐会成为和这两人不一样的歌星。
当夜,他们就坐在歌厅前四排的座位上,喝着可乐看表演。看了压轴的邓小姐表演后,就越觉得很好。不只歌唱的好,还有一种聪慧的气质。对佐佐木而言,是否能成为歌星,具有知性的感觉很重要。在回日本前,佐佐木说:“我想亲自制作这位歌星。”便请郑东汉先生去谈有关合约的事。

다음날 그들은 郑东汉에게 자신들을 위하여 등려군의 음반을 수집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음반을 듣고서는 그들은 목소리의 수준이 따스한 분위기가 있게 느껴진다고 인식하였으며 설사 일본에서도 상당하게 인정받는 인물로 인정되리라고 하여서 佐佐木와 中村는 이런 판단을 내렸다. 일본 가요계에는 이미 홍콩의 陈美龄과 대만 출신의 欧阳菲菲가 이미 데뷔를 하였으나 그들은 등소저가 이 두사람 같은 가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날 밤 그들은 음악홀의 앞쪽 4번째 줄에 앉아서 콜라를 마시며 공연을 보았다. 대단한 등소저의 공연을 다 보고는 매우 좋았다는 것을

좀더 알게 되었다. 단지 노래하는 것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종의 총명한 느낌도 있었다. 佐佐木에 의하면 가수로 성공하렴면 지성을

갖추었는 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고 하였다.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佐佐木는 말을 하였다:

나는 손수 이 가수를 위하여 제작을 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郑东汉에 부탁하여 계약과 관련된 일을 논의하고자 하였다.

 

回到东京的翌日,位于世田谷区池尻大桥的宝丽多唱片公司了,五十岚泰宏制作本部长正在主持制作人会议。佐佐木在会议中报告出差状况,然后拿出唱片指着封面,极力主张务必签下邓丽君。其实佐佐木从香港回东京的夜晚,因为兴奋无法入睡。他心想不早一天将她签下来,就可能被别家公司签走。佐佐木很坚决的说着,被这股魄力所震慑的制作本部长就说:
“知道了,舟木,你明天立刻去香港签约。”
当时担任制作签约部部长的舟木先生就被命令去和邓小姐签约。

 

동경으로 돌아간 다음날 世田谷区 池尻大桥에 있는 宝丽多唱片公司에서 五十岚泰宏제작 본부장이 마침 제작자 회의를 하고 있었다.

佐佐木는 회의 중에 출장상황을 보고 하였는데 이런 뒤에 봉투에서 음반을꺼내며 반드시 등려군과 계약을 하여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사실 佐佐木는 홍콩에서 동경으로 돌아 온 밤에 흥분하여서 잠들 수 가 없었다. 그의 마음은 그녀와 계약을 체결하는 데

하루도 빠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는데 다른 회사와 계약을 할 수 도있었기때문이다. 佐佐木는 매우 강하게 정곡을 찔렀는데

이런 박력에 의하여 겁먹은 제작본부장은 이렇게 말을 하였다: 알았다 舟木씨 당신이 내일 당장 홍콩으로 가서 계약을 하시오.

그때 제작을 담당한 계약부 부장인  舟木는 임명되어서 등소저와 계약을 하러 갔었다.


为了交涉合约,他们选在九龙尖沙嘴的美丽华酒店见面。因为邓小姐没有和经纪公司签约,所以所有工作上的细节都由母亲素桂照料,而舟木先生带着笑容说:
“日本是全世界第二大的音乐市场,到日本学习应该不错,和母亲一起来吧!”
正在说明合约的条件时,邓小姐突然说:“想去日本看一下。”
舟木先生认为有希望。但邓小姐迟迟未说出“我要去”令他很在意。身材姣好又美丽,感觉很清新,就是一副歌星的模样,这是舟木先生对邓小姐的第一印象。
“可以一起用餐吗?”舟木邀约之后就结束了这个第一次的会面。

 

계약 교섭을 위하여 그들은 구룡의 尖沙嘴에 있는 美丽华호텔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등소저는 계약 대행회사가 없었기에 그래서 모든

작업의 세부사항은 모두 다 어머니 素桂가 돌보아 주었다. 그래서 舟木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하였다:

이본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음악 시장입니다. 어머니와 같이 일본으로 가서 공부하는 것이 응당 좋을 것같습니다. 

마침 계약 조건을 설명하는 때에 등소저는 갑자기 말을 하였다: 일본을 한 번 가볼까 생각합니다.

舟木가 희망이 있다고 판단을 하었다.그러나 등소저는 "나는 가기를 바란다"고는 꾸물 거리며 말을 하지 않았서 그를 매우

신경쓰이게 하였다. 몸매도 아름답고 날씬하고 감각도 매우 맑고 신선하여서 바로 스타 가수의 모습이었다, 이것은 舟木의 등소저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나요?  舟木는 초대하고는 이 첫 만남을 끝냈다.


和舟木道别后,邓小姐对母亲说:“不知道该怎么办比较好?”然后素桂就打电话给在台湾的丈夫,得到的答案是“反对”,女儿就说:“那就不去了。”母亲也回答:“好啊。”但此时在邓小姐的内心,有一股“在东南亚各地已经出名成为一流歌星,应该到外国去挑战” 的想法油然而生。
即使一起在尖沙嘴的大上海饭店一起用餐时,她的应对看不出心意有什么改变。她表现出有兴趣的样子,但始终没有开口说出:“就做吧。”舟木从香港宝丽多公司得到的讯息是因为双亲反对,理由是在香港的收入已经很好,不必刻意到日本冒险。香港宝丽多的人看到邓小姐谈不成,因此就推荐别的女星,就说那找别的女星来怎么样呢?连郑东汉都说:“算了吧!”即使如此,舟木先生仍然非常执着,尤其有位日本通跟他说:“邓丽君是台湾版的美空云雀”,更令他卯足全力。

 

舟木과 헤어진 뒤에 등소저는 어머니에게 말을 하였다: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어머니 素桂는 대만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얻은 대답은 반대이었다. 딸아이가 대답하였다:

그럼 가지 않겠어요. 어머니도 대답하였다: 좋아. 그러나 이때 등소저의 속마음은, 동남아시아의 여러나라에서 이미 이름이 나서 일류가수가 되었는데 외국에 가 도전을 반드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절로 일어났었다.

설령 함께 尖沙嘴의 커다란 上海饭店에서 식사를 하였지만 그녀의 응대는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알수는 없었다. 그녀는 관심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일을 하고 싶어요.舟木는 홍콩의 宝丽多公司로 부터 받은 정보는,이미 홍콩에서의 수입도 좋기 때문에 부모가 반대하고 있어서 고심하여서 일본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홍콩의 宝丽多公司의 직원들은 등소저와의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다른 여자 가수를 추천하려고,

 다른 여자 가수를 찾아보는 것이 어떠십니까 ? 하였다. 郑东汉조차도 말을 하였다:

설령 그렇다 해도, 됐어요! 舟木는 여전히 매우 집착을 하였다. 특히 한 일본통이 그에게 말을 하였다:

"등려군은 대만의 미소라 히바리(美空云雀) 입니다 " ,더욱더 그더러 전력을 다 기울이게 하였다.

 


舟木先回东京之后再飞到台湾,为了要去说服父亲邓枢。在台北市德惠街的统一饭店接受邓枢招待用餐,谈话后证实宝丽多的情报是正确的,父亲认为“现在的收入已经非常丰沃,没有必要非到日本去,而且女儿去到人生地不熟的地方也不习惯。”但舟木并没放弃, 因为他知道其实邓小姐本人是有兴趣到日本发展。
舟木更是直接到北投的邓宅去,想说服反对赴日的父亲。这次舟木发现,反对的程度没有之前那么强烈了,经过冗长的说服,终于得到邓爸爸“那就交给你了!舟木先生”这句话。
母亲听了以上的话也决定尊重女儿的意思。 舟木接受所有他们提出的要求:如在日本的居住问题、契约金、希望的条件等。舟木先生每每问及邓小姐什么事,她总会说:“问妈妈”,感觉上她并没有什么不安与担心。

 

舟木은 먼저 동경으로 돌아간 뒤에 다시 대만을 날아 갔다.아버지 邓枢를 설득하기 위하여서였다. 대북시德惠街에 있는 統一饭店

에서 邓枢의 초대를 받아서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한뒤에 宝丽多의 정보가 정확하였다는 것을 실증하였다.

아버지는 현재의 수입도 매우 많아서 일본에 반드시 가야 할 필요가 없고 게다가 딸이 사람도 땅도 낯설은 곳으로 또 익숙하지 않은

곳에 갈 필요가 없다고 인식하고 있었다.그러나 舟木 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 등소저 본인은 일본 진출에 흥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舟木는 더욱 더 직접 北投의 등려군 본가로 가서 일본 진출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설득할 생각을 하였다.

이때 舟木는 반대하는 정도가 이전 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긴 설득을 하고는 마침내 등려군 아버지의" 그럼 당신에게

허락하겠소,舟木先生"이런 대답을 얻었다.

어머니는 이상의 말을 듣고는 또한 딸아이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결정하였다. 舟木는 그들의 내놓는 모든 요구를 받았드렸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의 거주 문제,계약금, 희망의 조건 등이었다.

舟木는 모든 문제마다 등소저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물어 보았는데 그녀는 언제나 대답하였다:

"어머니에게 여쭈어 주세요." 느낌으로 그녀는 결코 불안감이나 걱정이 전혀 없어 보였다.


素桂认为女儿去日本之前应该学会用日文打招呼,所以即使在新加坡工作期间,也请了一位华人家庭教师教女儿日文。但邓小姐马上就想睡觉,也会说:“现在没心情上课。”必须想个在日本工作时要用的名字,素桂觉得用中文名字较好,但邓小姐好像不认为“邓、丽、君”的发音好听,因而不想用此名。因为在香港用“TERESA·TENG”的艺名,所以她就跟母亲说:“妈,用这个好了。”一到日本就用“TERESA·TENG”的艺名发片,日本公司也同意这个名字。

 

어머니 素桂는 딸이 일본으로 가기 전에 일본어로 인사등을 할 수 있도록 공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기에 설령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동안이라도 중국인 가정교사에게 딸아이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등소저는 곧바로 졸리워하였는데 또한 이렇게 말을

하였다: 지금은 공부할 마음이 없어요. 일본에서 일할 동안에 쓸 이름을 생각하여야 해요, 어머니 素桂는 중국어 이름을 쓰는 것을 좀더 좋아 하였으나 그러나 등려군은 邓、丽、君이라는 발음이 듣기에 좋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여서 이 이름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홍콩에서 쓰는 TERESA·TENG라는 예명이 있기에,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께 말을 하였다:

어머니, 이것을 쓰면 좋을 것 같아요! 일본에 가게 되면 TERESA·TENG라는 예명으로 음반을 낼래요. 일본 회사에도 이 이름에 동의하였어요.


到日本发展,经纪业务归渡边制作公司管理,而唱片的制作发行则由日本宝丽多负责。一开始签约两年,第一次签约日期是一九七三年四月十二日,依邓妈妈和邓小姐同意,签下的第一份合约内容里,第一年的酬劳是每月日币二十五万元。那个时代的日本大学毕业的公务员最高职等的薪水是日币五万五千六百元。签约公司是和属于渡边制作公司的子公司桑梓直接和邓小姐签经纪约,再由桑梓公司去和宝丽多签约的形式。暂时住宿在赤坂的新日本饭店,费用由渡边制作公司负担,音乐则是由宝丽多和渡边音乐出版公司共同制作,邓小姐有百分之二的版税可抽。接下来就是进行在日本出道的准备工作。在一九七三年十一月,邓妈妈和邓小姐第一次到日本,那时邓小姐才二十岁。

 

일본에 진출하고서의 업무 경영은 와타나베(渡边)制作公司가 관리를 하고 음반의 제작은 일본 宝丽多가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일단 2년의 계약을 하였고 첫 계약의 일시는 1973년 4월 12일이었고 등려군 어머니와 등소저의 동의에 의하여 체결된 첫번 계약서에

첫해의 보수는 매월 일본돈으로 25만 元이었다. 그 때 일본 대학 졸업의 공무원의 최고직의 월급이 일본돈 55,600 元이었다.

계약 회사는 渡边制作公司에 속한 자회사인 桑梓와 직접 등소저와 경영을 계약하였다. 다시 桑梓公司가 宝丽多와 계약을 맺는 형식이었다.

잠시 신쥬쿠(宿在)의  아카사카(赤坂)의 新日本饭店에 머물렀으며 경비는 渡边制作公司가 부담을 하였다.

음악은 宝丽多와 渡边音乐出版公司가 같이 공동으로 제작하기로 하였다. 등소저는 2 %의 인세를 받게 되었다.

이어서 일본에 진출하는 것에 대한 준비 작업을 진행하였다. 1973년 11월에 등려군 어머니와 등소저는 첫으로 일본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등소저는 겨우 20살이었다.

 




到羽田机场接机的人群里,樱井五郎也在当中。樱井当时担任渡边制作公司的名歌星石田步、大信田礼子、安·露易丝等名歌星的统筹经纪人。有一天,被上司井泽健叫去,交代担任要来日本发展的邓丽君之经纪人。因此樱井就去听完邓丽君所有的唱片,开始策划选什么歌给要出道的邓丽君唱。在羽田见到邓小姐的第一印象是“福婆婆”的长相,但不讨厌。不美的“福婆婆”却曾被日本认定为最漂亮的美女呢!他很直觉地认为“这女孩会红”。

 

 

 하네다(羽田) 공항에 직접 온 사람들 속에는 樱井五郎(사쿠라이 고로)도 그안에 있었다. 樱井五郎는 그때 渡边制作公司의 유명가수인 石田步、大信田礼子、安·露易丝(안 루이스)등 유명한 가수등을 총괄담당 하는 매니저 이었다.어느날 상사인 井泽健에게 불리워 갔는데 일본에 진출한 등려군의 매니저 담당이 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래서 樱井는 등려군의 모든 음반을 다 듣고는 무슨 노래를 골라서 데뷰하는

등려군이 부르게 할 지를 기획하기 시작하였다.

 하네다(羽田) 공항에서 등소저를 본 첫 인상은 마치 福婆婆 같은 모습이지만 밉지는 않았다. 아름답지 않은 “福婆婆는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로 오히려 인정이되었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 소녀가 인기를 만히 끌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邓小姐是个态度柔和,外表给人清纯的感觉。看过无数歌星的樱井,发觉到她和一般女孩不同的优点,好比虽然不是艺人,但是走在街头会引人多看一眼的人大有人在,但邓丽君是属于经过琢磨后自然散发出一种光芒的人物。应该用什么方式在日本呈现,到底能被接受到什么程度?其实在樱井的心中有许多的不安。

 

등소저는 태도가 온화하고 겉모습이 깨끗하고 순수한 느낌을 주었다.수 많은 가수를 보았던 樱井는 그녀에게서 일반적인 소녀와는 다른 장점을 발견하였는데 예를 들면 비록 예술인은 아니지만 그러나 길거리를 가다가 한번 보면 사람을 이끄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러나

등려군은 훈련을 거친 뒤에 자연히 일종의 광채를 발산하는 인물에 속하였다. 어떤 방식으로 일본에 데뷰하여야 하는 지 도대체 어느 정도

받아드려야 하는 지? 사실 樱井의 마음속에는 많은 불안감이 있었다.

 

 


出道曲子是由渡边制作公司主导,走偶像路线。在七0 年代日本歌谣界初期,流行小柳琉美子的《我的城下町》(わたしの城下町)、天地真理的《水色之恋》(水色の恋)、欧阳菲菲的《下雨的御堂筋》(雨の御堂筋)等流行歌曲,所以新歌就请曾帮天地真理、陈美龄作词过的山下路夫写,再请帮南沙織、欧阳菲菲写下畅销歌曲的筒美京平作曲。

데뷰한 노래는 渡边制作公司가 주도하였는데 우상 트렌드를 시도하였다. 70년대의 일본 가요계 초기는 小柳琉美子의 《我的城下町》(わたしの城下町)、天地真理(아마치 마리)의《水色之恋》(水色の恋)、欧阳菲菲의《下雨的御堂筋》(雨の御堂筋)등의 유행가가

인기가 있었는데 그래서 신곡은 天地真理에게 부탁하여서,陈美龄이 작사하고 山上路夫(야마가미 미치오)가 곡을 쓰게  하였고 다시

南沙織(미나미 사오리)에게 부탁하여서 欧阳菲菲가 썼고 인기가 있던 筒美京平에게 작곡을 하게 하였다.

 


佐佐木和樱井一起带着邓丽君到电视台去见习。星期一去看日本NTV 电视台的《红白前十名》及富士电视台的《夜晚的热歌舞台》,星期二去看TBS 电视台的《唱吧!演奏曲》,反正每天就是去看各家电视台的音乐节目,从星期一至星期五参观了所有的电视音乐节目。
“因为将来我们势必要上这些只有日本一流歌星才能上的节目。”一听到佐佐木这样激励的话,邓小姐的眼睛立刻为之一亮,而且最令邓小姐吃惊的是,不管看哪个音乐节目,都是由大乐团在伴奏。
“东京实在太棒了。因为市场很大。”

 

佐佐木와 樱井는 함께 등려군을 데리고 텔레비전 방송국으로 가서 견학을 하였다. 월요일 일본NTV방송국의《红白前十名》과 후지 텔레비전의《夜晚的热歌舞台:한밤의 뜨거운 노래 무대》를 보러 갔었고, 화요일에는 TBS의 《唱吧!演奏曲:부르자 연주곡》,하여간 날마다 여러 방송국의 음악 프로그램을 가서 견학하였다.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모든 TV방송국의 음악프로그램을 참관하였다.

"왜냐하면 장래에 우리는 반드시 이런 일본의 일류 유명가수만이 오를 수 있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여야 합니다.'佐佐木의 이런 격려의 말을 듣자, 등소저의 눈동자는 곧바로 반짝이였고, 게다가 등소저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이었다.어떤 음악 프로그램이건 간에 모두 다 큰 악단이 반주를 하였다."동경은 실제로 너무 좋았어요. 왜냐하면 시장이 매우 컸어요"

 

 


邓小姐用着很不道地的日文说出她感受到的印象。从决定在日本工作之后,邓小姐立刻练习在笔记本上写日文。她母亲若被问:“H~ai”(好吗?),母亲只回答:“H~AI”,从不开口说日文,有关工作上的部分也不曾开口说过任何话,只是默默无闻地照顾女儿而已, 不像一般的日本星妈。

등소저는 잘 못하는 일본말로 그녀가 받았던 인상을 이야기 하였다.일본활동이 결정된 뒤부터 등소저는 곧바로 노트에 일본어를 쓰면서

연습을 하였다. 그녀의 어머니가 만일 질문을 받게 되면::“H~ai”(好吗?:안녕하세요?)어머니는 즉시 대답을 하였다:“H~AI”,

전에 일본어를 말해 본적도 없었고 일과 연관된 것도 일찍이 어떤 말도 하지 않았으며 단지 아무도 모르게 그저 딸만 돌보았는데,

일반적인 일본의 스타 어머니와는 같지 않았다.

 

 


佐佐木们尽量选择在便宜的餐馆用餐。有一天在有乐町铁轨下的烧肉店吃猪脚,邓小姐说了好几次“好吃”,表情看起来非常高兴。第一次吃日本料理是在涉谷东急广场九楼的“味田之屋”日本料理店吃鲑鱼茶泡饭,她也很喜欢日本的涮涮锅和茶碗蒸。
一九七四年二月七日,邓丽君因为感冒发烧,所以在家睡了一整天,晚上起身后往窗外看去,她发现有白色的东西飘舞着,这是有生以来第一次看见下雪。邓小姐感动地欢呼起来,在日本的新生活充满了新鲜的刺激。

 

佐佐木등은 식사하기에 적합한 음식점을 찾는데 진력을 하였다. 어느날 有乐町의 전철 아래에 있는 烧肉店에서 돼지다리를 먹고 있었는데,

등소저는 여러차례 맛이 있다고 말을 하였는데 표정은 보기에 매우 기뻐보였다. 처음으로 일본음식을 먹은 것은 涉谷东急广场의 9층에

있는 味田之屋라는 일본요리점으로 鲑鱼茶泡饭(연어お茶漬け)를 먹은 것이다. 그녀도 일본의 涮涮锅和茶碗蒸(샤브샤브 냄비와

 


当中,邓小姐回台湾一次,为了在日本正式发片于一九七四年二月十五日又再度赴日。到达羽田机场就直奔赤坂王子饭店旧馆记者会现场,会场里已经有上百位的采访媒体,邓丽君一进场,一阵阵的闪光灯就闪个不停。没想过反应会这么热烈,所以很吃惊。坐在邓丽君两旁的,是宝丽多的五十岚制作本部长及渡边制作公司的井泽。
邓丽君在发片前,公司用“香港的红玫瑰”一词作宣传,意指“香港最红的歌星”。当时邓小姐已经二十一岁,但公司却发表为十九岁在会场公司放去年十一月邓小姐第一次到日本录音的《是今夜还是明天》(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穿着迷你裙的邓小姐好像真的在跟唱一样。

 

 

그러던 중 등소저는 한차례 대만으로 돌아 갔었고 일본에서 정식으로  1974년 2월15일에 출시를 위하여 다시 일본으로 건너 갔다.

羽田공항에 도작하자 마자 곧바로 赤坂王子饭店 구관의 기자 회견장으로 달려갔는데, 회견장에는 이미 백명이 넘는 인터뷰 매체가 모여 있었다. 등려군이 회견장으로 들어 서자 간간히 사진 플래쉬가 끊임없이 터졌다.

이런 뜨거운 반응을 생각하지 못하였기에 매우 놀랐다. 등려군의 양켠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일본의 宝丽多회사의 五十岚제작본부장

과 渡边制作公司의 井泽이었다.

등려군은 음반 출시전에, 회사는 “香港的红玫瑰”(홍콩의 붉은 장미)라는 것으로 작사한 것을 홍보하였는데 “香港最红的歌星”(홍콩의 가장 인기있는 유명가수)를 의미하였다.그때 등소저는 이미 21살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오히려 19살로 회견장에서 발표하였고 작년 11월에 등소저

가 처음으로 일본에 와서 녹음한 《是今夜还是明天》(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를 내 놓았고,미니스커트를 입은 등소저는 마치 정말로

같이 노래하는 것 같았다.

 


记者会结束后,分给在场所有人员一人一朵玫瑰花。当佐佐木正要离开时,等在门口的TBS 电视台记者铃木明就对他说:“这样太过分了,不会引起日本和台湾的问题吗?邓丽君是台湾出身的,应该改称她为台湾的玫瑰吧?”
其实铃木曾在邓丽君十六、七岁时在台湾的歌厅登台演唱期间,就去看过她的表演而大受感动,当时就认定她如果在日本唱歌一定会红。而当邓小姐真的在日本出道,令他雀喜万分的同时,“最喜欢的台湾歌星”却被说成“香港的歌星”,令他无法忍受。对佐佐木而言,他是在香港遇见邓小姐而签约,所以认为邓小姐是“香港的玫瑰”,但事实诚如被指责的一 样。

 

 

 

기자회견이 끝난 뒤 회견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사람씩 장미꽃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佐佐木正가 막 떠나려 할때 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TBS 방송국 기자인 铃木明가 그에게 말을 하였다:

이러면 너무나 지나친 것입니다. 일본과 대만의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을 까요? 등려군은 대만 출신이니 당연히 그녀를 대만의 장미라고

고쳐 불러야 하지 않나요?

 

사실 铃木는 일찍이 등려군이 16,7살때 대만의 음악홀 무대에 올라 공연할 때,그녀의 공연을 보러 가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었다.

그때 그녀가 만일 일본 가요계에 있다면 반드시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등려군은 정말로 일본에 진출하게 되자 그를 매우 기쁘게 하였고 아울러"최고의  대만 인기가수"를 오히려 "홍콩의 인기가수"로

불리우게 되는 것이 그로서는 참을 수 없게 하였다.

佐佐木입장에서 말하자면 그는 홍콩에서 우연히 등소저와 만나서 계약을 하였기에 등소저는 “香港的玫瑰”의 가수라고 생각하였으나

사실은 정말로 지적된 것과 같았다.


邓丽君以流行曲调的《是今晚还是明天》一曲出道,光是三月份就上了四十五个电视节目,因同属与渡边公司,所以能在大牌歌星森进一四月二十六日至五月三日在日剧的演唱秀上唱歌。但印制的三万张唱片没卖出,在日本当时的歌曲销售排行榜只进到第七十五名而已。
邓小姐对这个结果感到自责。“卖不出去是因为我不好,我必须更加努力才行。”
舟木先生好几次安慰了自责的邓小姐说:“刚开始都是这样的啦。”其实因为在香港挖掘邓小姐,当谈不成邓小姐时,有被问及“改签能演能唱的优雅怎么样?”的那位优雅也已经在日本出道,而且相对于邓小姐的《是今夜还是明天》排行榜第七十五名的成绩,优雅的《处女航》却拿到排行榜第二十四名。在香港自己的地位远超过优雅,但在日本的成绩却输她,这点让邓小姐感到非常郁闷。

 

등려군은 유행곡《是今晚还是明天: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로 데뷰를 하였는데 겨우 석달만에 45개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등장하였다.

渡边公司와 같은 소속이었기에 최고인기가수인 森进一가 하는 4월 26일 부터 5월 3일까지의 日剧의 공연show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그러나 발행된 3만장의 음반은 팔리지 않았는데 일본에서 당시의 노래 판매순위표에는 겨우 75위에 진입하였을 뿐이었다.

등소저는 이결과에 대하여 자책감을 느꼈다.

팔리지 않는 것은 내가 잘하지 못해서 입니다 나는 반드시 좀더 노력하여야만 합니다.

舟木는 여러차례 자책하는 등소저를 위로하는 말을 하였다: 막 시작한것은 모두 다 이렇습니다. 사실 홍콩에서 등소저를 발굴하였기에,

등소저와 의논하지 않았을때, 노래도 잘하고 연기도 잘하는 우아한 사람이라고 고쳐서 홍보하면 어떨까? 하는 그  사람이 우아하게 일본에 이미 진출하였고 게다가 등소저의《是今晚还是明天: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가 순위표 제75위 올라가있으며, 우아한 《处女航》가 오히려 순위표 제24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물어 보게 되었던 적이 있다.

홍콩에서 자기의 지위는 우아한 수준을 훨씬 넘었으나 일본의 성적은 그녀를 오히려 지치게 하였고 이점이 등소저를 매우 우울하게 하였다.

 


《是今夜还是明天》这首曲子,樱井认为是别的歌星唱不来的曲子,而且对电视节目的伴奏乐团而言太难了,无法达到唱片水准的演奏,所以通常只能交代他们伴奏最简单的版本。
为什么不卖?樱井以观众的立场去思考问题的原因:这首曲子给人一种上流社会格调太高的印象,而且以邓丽君的容貌和音质去判断,基本上而言,不应该把她做成流行曲风的歌星。
“这个女孩绝对只能作唱演歌。”
樱井下了这样的结论。

 

《是今晚还是明天: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이노래에 대하여 樱井는 다른 가수는 부를 수 없는 노래이고 게다가 텔레비젼  프로그램의 반주악단에 근거하여 말하자면 매우 어렵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음반 수준의 반주를 할 도리가 없었기에 보통 그들에게 가장 간단한

버젼으로 하라고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었다.

왜 팔지 않나요? 樱井는 청중의 입장에서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였다: 이노래는 일종의 상류사회의 격조가 너무나 높은 인상을 주고 있고

게다가 등려군의 용모와 음질로 판단하여서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그녀를 유행가 스타일의 가수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이 여자는 절대적으로 엔카를 할 수 밖에 없어요.樱井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因为邓丽君的出道曲未红,所以对挖掘邓丽君的佐佐木而言也是个打击。虽说在音质和感情上的表演都十分优异,但没有做红的理由,是因为日文不道地?还是将原本二十一岁的年龄谎称为十九岁设定主打十多岁的年轻族歌迷是个错误?……就这样烦恼了一个多月, 几乎每日无法成眠。

 

등려군이 데뷰한 노래가 아직 인기를 얻기 못하였기에 그래서 등려군을 발굴한 佐佐木로서도 하나의 부담이라고 할 수있다.

비록 음질과 감정상의 표현이 모두 충분히 뛰어나더라도 그러나 인기를 얻지 못하는 까닭은 , 이것은 일본어를 하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원래는 21살의 나이를 19살로 낮추고 10대의 어린 연령층의 팬들을 주로 대상으로 한 설정이 잘못인가? ...

이런 고민이 한달이상 지속되어서 거의 날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这个时期作曲家筒美京平已经写好了四首流行曲风的曲子来坚持走演歌路线,就和佐佐木商量,不向公司报备之下偷偷地请猪俣公章作曲。猪俣公章当时是专为森进一作曲的作家,佐佐木请专长写演歌的猪俣写流行风的歌曲,因为猪俣曾经,连DEMO 带都做好了,但因为樱井为森进一写过流行风的曲子《我的朋友再见》(さらば友よ)。山下路夫写来一首名为《雨的空港》的词,仿柯尼·法兰西斯的感情,场景设定为欧洲。柯尼·法兰西斯是在一九六0 唱红《可爱宝贝》及《VACATION》的美国歌星。

 

 

이 시기에 작곡가 筒美京平는 엔카의 길을 견지하도록 이미 4곡의 유행가 스타일의 노래를 좋게 만들어 놓았으며 佐佐木와 의논하여서

회사에는 보고를 하지 않고서 猪俣公章에게 남몰래 작곡을 의뢰하였다.猪俣公章는 그때 오로지 森进一을 위하여 작곡하던 작곡가로,

佐佐木가 엔카를 쓰는 것이 특기인 猪俣에게 유행가 스타일의 노래를 써달라고 부탁을 하였다.그러나 猪俣는 이미 DEMO 테이프 조차도 다 만들었는데 왜냐하면  樱井가 森进一를 위하여 유행가 스타일의 《我的朋友再见》(さらば友よ)를 이미 써놓았기 때문이었다.

山下路夫는 《雨的空港》이라는 가사를 노래 한곡을 써놓았는데,仿柯尼 Francis의 정서, 배경은 유럽으로 설정하였다. 仿柯尼 Francis는 1960년에 인기리에 불렀던 《可爱宝贝》와 《VACATION》의 미국 유명 가수이다.

 


被委托写歌的猪俣说:“你们也真是的,怎么要求这么稀奇的事呢?”但在一周内却写了三种曲风给他们。佐佐木是喜欢优美旋律的人,但樱井想做的是比较通俗的歌,樱井甚至主张将佐佐木用小提琴伴奏完成的序曲版重新制作改为小喇叭演奏。樱井的意见是曲子像“西田佐知子唱的歌较好”,佐佐木让步了。所以编曲选择采用活跃在流行风派的森冈贤一郎,理由是不想让曲风呈现太道地的演歌所下的工夫。
舟木一听佐佐木说第二张单曲改走演歌路线时,“到底会红吗?”的疑问让他很不安。听到完成后的曲子,认为很适合森进一唱,但判断应该不是邓丽君唱的歌曲。
“再做一首试试看吧。”

 

노래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은 猪俣가 말을 하였다: 당신들도 참 나, 어떻게 이런 흔치 않은 일을 요구하십니까? 그러나 일주일안에 3가지 스타일의 우아한 선률을 가진 곡을 그들에게 써주었다. 佐佐木는 우아한 선률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樱井는 만들고 싶었던 것은 비교적 통속적인 노래이었다. 樱井는 심지어 佐佐木에게 바이올린으로 반주하여 완성한 서곡을 새로이 작은 나팔 연주로 고쳐서 만들기를 주장하였다.樱井의 의견은 곡이  西田佐知子가 부른 노래가 비교적 좋아 보인 것 같다는 것이다. 佐佐木는 양보를 하였다.

그래서 편곡은 유행가 스타일로 활약하는 森冈贤一郎이 선택되었는데 까닭은 뜻밖에 노래 스타일이 많은 시간을 들여서 만든 너무나 감정적인 엔카로 보인다는 것이다.舟木이 듣고는 佐佐木에게 두번째 앨범을 엔카 스타일로 가라고 말을 하였고, 아무튼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까? 하는 의문이 그를 매우 불안하게 하였다. 다 된 뒤의 노래를 듣고는 森进一가 부르면  매우 적합하다고 여겼고, 등려군이 부를 노래는 아닐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다시 한번 노래 한곡을 써 주세요!

 

 

 


舟木这样说,佐佐木却强硬地回答:“就用这首歌。如果不行,请换掉我。”这年的日本唱片大赏被选中的歌是森进一唱的《襟裳岬》,这种融合流行曲风和演歌的曲子深深地抓住每个听众内心的时代,舟木只好也让步,在翌日录音。最初的歌名是《雨的空港》,但因为欧阳菲菲唱过《雨的机场》(空港就是机场),所以就把“雨的”拿掉成为《空港》。

 

舟木는 이렇게 말을 하자,佐佐木는 오히려 강경하게 대답하였다:이 노래를 바로 씁시다. 만일 하지 않으면 나를 교체해 주시길 바랍니다.

올해의 일본 음반 대상으로 뽑힌 노래는 森进一가 부른 《襟裳岬》인데,이런 유행스타일과 엔카의 융합 노래는 깊숙하게 청중의 속 마음을 움켜쥐는 시대이었다.舟木는 할 수 없이 양보를 하였고 다음날 녹음을 하였다. 최초의 노래 이름은 《雨的空港》이었으나,

欧阳菲菲가 불렀던 《雨的机场》(空港就是机场)때문에,그래서 雨的”이라는 단어를 빼버리고 《空港》으로 하였다。


七月一日发片的第二张单曲《空港》,客层设定在二十岁到二十五岁的粉领族,所以真的成功推出。而且依调查结果显示四十岁左右的男性歌迷居多,而且很快地在有线放送的点歌也反应出来,实际卖出了七十多万张的唱片。邓丽君因为这个歌拿下了一九七四年度日本唱片大赏的新人奖(拿下最优秀新人奖的是麻生洋子的《逃避行》),然后奠定了往后二十年在日本的歌唱界成为名副其实巨星的基础。
但邓丽君内心的纠葛也是在此时开始的。在香港、台湾是如同美空云雀一样的大牌明星,但在日本却只被当成一般的新人,而且只能接受日本对新人的一般待遇,节目中的访谈对话以新人待之,即使参加演出也只能像新人一样唱一小段。

 

 

7월 1일 출시된 제2 싱글《空港》은,주 대상을 20살 부터 25살까지의 여자 오피스걸들로 설정하였고 그리하여서 정말로 성공을 바랬다.

게다가 조사 결과에 의하여 40 살 전후의 남성 팬들도 다수 차지 한다고 나타났다.

그리고 매우 빠르게 유선방송에서 노래 신청하는 반응이 나타났다.실제로 17만장의 음반이 판매되었다. 등려군은 이 노래로 인하여 1974년 일본음반 대상의 신인상 (최우수 신인상을 차지한 사람은 《逃避行》를 부른 麻生洋子이다)을 차지 하였고,이리하여서 향후 20년간의 일본 음악계에서의 성공한 명실상부한 슈퍼스타의 주춧돌을 다지게 되었다.

그러나 등려군 속마음에 갈등도 이때 시작되었다.홍콩,대만에서는 美空云雀와 마찬가지의 초특급 슈퍼스타로 여겨지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오히려 일반적인 신인으로 여겨지고 있을 뿐이었고 게다가 신인을 대하는 일본의 일반적 대우를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고

프로그램에서의 인터뷰와 대화도 신인으로서 대우할 뿐이었다. 설령 공연에 참가하더라고 단지 신인처럼 작은 시간만 노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事情就发生在某次上电视节目演出的时候,因为从香港来的玲玲、兰兰竟然讶异要和邓丽君共用一间休息室,因此很生气地对着所属公司太阳音乐的福田时雄说:
“为什么陈美龄一个人使用个室,而邓丽君却和我们共用一个呢?”对她们而言,要和邓丽君这种等级的巨星共用同一室是无法想象的。一见到邓小姐出现之后,玲玲和兰兰竟兴奋地说:“请邓小姐帮我们签名。”
还有一次,为日本男性周刊的拍摄去冲绳拍照,事前是有听说要拍泳装照,但当工作人员拿出比基尼泳装时,邓小姐却吃惊地回答:“中国人才不穿这种泳装,不喜欢。”
几经说明在日本新人出道时常需要拍这种泳装照片,但邓小姐仍顽固地不肯屈就,结果工作人员只好拿出很朴素的连身泳装给她穿才完成拍照。
在日本的出道,一直到上轨道为止,在邓丽君的内心里并不能说是一帆风顺。

 

 

일이 어느때인가 텔레비전 프로그램 공연을 할 때 일어났는데 홍콩에서 온 玲玲,兰兰이 뜻밖에도 등려군이 한칸의 대기실을 공용으로

쓰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였기에 이때 화를 내면서 소속회사 太阳音乐의 福田时雄에게 말을 하였다:

어째서 陈美龄은 개인 대기실을 사용하는데 등려군은 오히려 우리들과 공용으로 써야 합니까?

그녀들 입장에서 말을 하자면 등려군과 같은 이런 등급의 슈퍼스타와 공용으로 대기실을 쓰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등소저가 나타난 것을 보고난 뒤 玲玲,兰兰은 뜻밖에 흥분하여서  말을 하였다: 등소저,  우리에게 싸인 좀 해 주세요.

그리고 언젠가 일본의 남성 주간 잡지의 사진을 찍으러 오키나와로 촬영을 갔는데 사전에 수용복 사진을 찍는다는 것을 들었으나,

등소저는 촬영팀원이 비키니 수용복을 가지고 오자 등소저는 오히려 놀라며 대답하였다: 중국인은 정말로 이런 수영복은 입지 못해요,

싫어요.

여러번 일본의 신인이 데뷰를 할때는 언제나 이런 수영복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지만 등소저는 여전히 완고하게 촬영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결과적으로 촬영팀원은 하는 수 없이 소박한 올인원 수영복 을 그녀에게 주어서 입고 난 뒤에야 비로소

사진을 찍었다.

일본에서 데뷰하고서 내내 궤도에 오를 때 까지 등려군의 속마음은 결코 순풍에 돛을 단 것 같다고 말할 수 없었다.

 

 

 

 





对邓小姐而言,在日本无论是饮食上或居住新日本饭店等民生问题,大致可以适应, 惟独遇到最大的难题,就是语言。比如说“watashi(我)”,就老是发音为“wadashi”诸如词类的发音问题一直无法熟练。也因为在语言上的障碍无法跨越,邓小姐曾因此数度向母亲表示想回台湾。但想在日本当歌手,就得克服语言这个难关不可。

 

등소저 입장에서 말을 하자면 일본에서는 음식이나 신일본호텔에서 거주하는 것을 막론하고 생활에서의 문제가 대체로 적합하였으나

유독 가장 커다란 난제를 만났는데 바로 언어이다. 예컨데 “watashi(我)”를 말하자면,언제나 발음이 “wadashi”로 되었는데, 예컨데

품사의 발음 문제같은 것을 내내 연습할 도리가 없었다.

또한 언어상의 장애에서 이를 극복할 방법이 없었기에 등소저는 일찍이 어머니에게 대만으로 돌아가자는 의견을 여러 차례 나타냈다.

그러나 일본에서 가수가 되려고 생각하려면 반드시 언어에서의 이런 난관을 반드시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担任母亲素桂翻译的,是毕业于台湾师范大学后归化成日本籍的小提琴家佐井芳男先生。母亲不但请佐井先生教女儿日文,还打算为女儿移居到有华人邻居的公寓。因为邓小姐向母亲反映,住饭店无法得到充分的休息,大约找了一个多月,一直找不到合适的住处,最后才在原宿找到房东是华人的奥林匹亚大厦,这才使邓小姐结束了半年多的饭店生活而安定下来。七楼高的建筑里,邓小姐的新房子位于四楼,有两房两厅,邓小姐为寝室挑选白色的家具及床铺,床边的桌上放了许多化妆品,桌边放了一面随时能照到全身的大镜子。邓小姐常躺卧在床上看日文教科书,或是在床上玩扑克算命,通常她会在深夜两点就寝,早上七点起床。

 

어머니 素桂를 담당한 통역자는 대만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귀화하여서 일본 국적이 된 바이올린 연주자인 佐井芳男이었다.

어머니는 佐井芳男에게 딸아이의 일본어 지도를 부탁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딸에게 중화인 이웃의 아파트로 이주 시킬 작정이었다.

등소저가 어머니에게 말을 하기를 호텔에서 지내는 것은 충분한 휴식을 가질  방법이 없었기에 대체로 한달 여 찾았으나  내내 알맞은 살집을

찾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비로소 原宿에서 중화인이 주인인 올림피아 빌딩를 발견하였다. 이것이야 말로 등소저가 반년 여의 호텔 생활을 끝내고 안정되게 쉴수 있게 되었다.7층 높이의 건물에 등소저의 새로운 방은 4층이었고 두개의 방과 두개의 홀이 있으며 등소저는 침실에 흰색 가구와 침대와 깔개를 선택하였다. 침대 곁의 탁자위에는 많은 화장품을 놓아 두었고 탁자 곁에는 언제나 전신을 비춰 볼 수 있는 커다란 거울을

놓아 두었다.등소저는 늘 침대위에 누워서 일본어 교과서를 보았으며 아니면 침대에서 포커 점을 치곤 하였다. 언제나 그녀는 깊은 밤 2시에 잠에 들수 있었으며 아침에는 7시에 일어 났었다.

 

 


因为《空港》的热卖使得邓小姐日益忙碌,当时一个月要跑四、五家酒店或歌厅,对新人而言,这算是一份不错的收入,但邓小姐却常向母亲哭诉“不想在醉客面前唱歌”、“为什么来日本非得在这种地方唱歌不可”……其实邓小姐在台湾也曾到歌厅唱歌,原本对歌厅的环境气氛并不陌生,但因为在日本,和客人的应对方式与台湾不同,不禁产生了厌恶感。其中最令她痛苦的就是常被要求一起跳舞或是一起对唱,甚至在表演当中嘴客会大喊把衣服脱掉之类粗俗卑劣言语。邓小姐向公司提出“日本男人太霸道”、“宁可不要酬劳希望能停止此类的演出”等声明,之后她就不再到酒店及歌厅唱歌了。

 

《空港》의 열렬한 판매가 등려군을 날로 바쁘게 하였기에 그때 한달에 4,5개의 호텔이나 음악홀을 뛰어 다녀야 했다. 신인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것은 나쁘지 않은 수입이었지만 등소저는 오히려 울면서 언제나 어머니에게 호소하였다:

술에 취한 손님 앞에서 노래를 부를 생각이 없어요. 어째서 일본에 와서 이런 곳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안되나요............사실 등소저는

대만에서도 일찍이 음악홀에서 노래를 불렀었다. 원래 음악홀의 환경과 분위기는 결코 낯설지는 않았지만, 일본에서는 손님과의 응대 방식이

대만과 같지 않았기에 혐호감이 생기는 것을 금치 못했다. 그중에서 가장 그녀를 괴롭혔던 것은 바로 함께 춤을 추거나 함께 번갈아 노래 하는

것을 요구받는 것이었다. 심지어 공연할 때 취객들 중에서 큰 소리로 옷을 벗은 사람들이 저속하고 비열한 말을 하였다.

등소저는 회사에게 "일본남자의 지나친 횡포와, 차라리 보수를 받지 않을 지언정 이런 부류의 공연을 멈추어 주길 바란다"는 등의

성명을 제출하였고 이뒤로 그녀는 다시는 호텔이나 음악홀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邓小姐很喜欢去上“8 时!全员集合”的电视录影,她觉得在节目中表演翻筋斗很好玩,有时候也会表演特殊才艺,也常随志村健的团体下乡公演唱开场打头阵,成员当中的加藤茶和高木会特别照顾她。
很快地,邓小姐两年的合约,酬劳在第二年就从原本的二十五万日币调高为五十万日币,甚至第三年就调升为一百二十万日币。一九七六年七月十日在新宿路易道举行第一次演唱会,身穿黑旗袍的邓小姐面对稀疏的观众唱了十五首歌,还因为太紧张,在唱《再见!我的爱人》时没有跟上音乐的节拍,当时会场的角落坐了一位贵宾,日本演员川谷拓三先生,很认真地倾听邓小姐歌唱。这个时期的邓小姐要上很多电视及电台节目又常下乡公演,忙到一个月只能休假一天。

 

등소저는 매우 기쁘게 "8시! 전원 집합'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녹화하러 갔었는데, 그녀는 프로그램에서 공중제비 공연이 매우 재밌다고 느겼으며 때로는 또한 특수한 기예를 공연할 수 있었다.또한 때때로 志村健의 팀을 따라서 지방으로 내려가 첫 순서로 무대를 여는 공연도 하였다. 그 단체 사람중에 加藤茶와 高木가 특별히 그녀를 돌보아 주었다.

매우 빠르게 지나서, 등소저의 2년간의 계약은 둘째 해의 보수는 원래 25만 엔에서 50만 엔으로 증액되었고 심지어 셋째 해는 120만 엔으로 증액되었다.1976년 7월 10일 新宿路易道에서 제1차 콘서트가 열렸는데 검은 색 치파오를 입은 등소저는 너무나 적은 청중을 놓고서 15곡을 부르게 되었는데 또한 너무나 긴장이 되어서 《再见!我的爱人》을 노래 할 때 음악의 박자를 따라하지 못하였는데 그때 공연장 구석에 한 귀빈이

앉아 있었는데 일본의 배우 川谷拓三로 매우 진지하게 등소저의 노래를 경청하였다. 이때의 등소저는 많은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라디오 프로그램 또한 언제나 지방으로 가서 하는 공연을 하여야 하였기에 매우 바빠서 한달에 겨우 1일을 쉴 수 있었다.

 


一九七五年邓小姐和香港宝丽多唱片公司签约,唱红了电影主题曲《小城故事》、《甜蜜蜜》等名曲,并于一九七六年在香港举办第一次的个人演唱会,当时的演唱会是没有酬劳,只有交通费和食宿费而已。在日本也连续发行《アカシアの夢(针槐之梦)》、《夜のフェリーボート(夜之渡船)》、《ふるさとはどこですか(故乡在何方)》等名曲,月薪又调升到二百五十万日币,可说是歌唱事业一帆风顺!就在广受好评的时候,事件却发生了。

 

 

1975년 등소저는 홍콩의 宝丽多唱片公司와 계약을 맺는데 인기리에 불리워 지는 주제곡《小城故事》、《甜蜜蜜》등의 명곡 그리고 아울러

1976년에 홍콩에서 열린 제1차 개인 콘서트, 그 때의 콘서트는 보수가 없었고, 단지 교통비와 숙식비 뿐이 있었다.일본에서도 잇달아

출시된 《アカシアの夢(针槐之梦)》、《夜のフェリーボート(夜之渡船)》、《ふるさとはどこですか(故乡在何方)》등의 명곡. 월급이 또 250만 엔으로 증액 되었다. 그래서 음악 사업이 순풍에 돛단 듯 잘 된다고 할 만 하였다!

널리 좋은 평판이 받아들여지던 때에 사건이 오히려 일어 났다.

 





一九七九年二月十七日发生了影响邓小姐一生的“护照事件”。大约在晚上八点左右,当时任职日本宝丽多唱片公司编成部部长的舟木稔先生,也就是促成邓小姐签约赴日发展及担任邓小姐在日本时的监护人,在自己家里接到电话通知。
“舟木先生,邓小姐被抓走了,马上到饭店去吧!”
邓妈妈的翻译佐井芳男先生打来的电话,慌慌张张地说。
“日本出入境管理局的官员和印尼大使馆的人员都来了,好像是护照出问题……”
当时佐井先生还问邓小姐:“你在开玩笑吗?”
可是电话中传来的是邓小姐焦急地回答:“是真的!”

 

1979년 2월 17일에 등소저에게 영향을 끼친 여권사건이 발생하였다. 대체로 밤 8시경 그때 일본宝丽多唱片公司 편성부 부장을 담당한 舟木稔

은 또한 등소저에게 일본 진출과 등소저를 담당하는 일본의 후견인으로 계약하기를 재촉하였던 사람인데,자기 집에서 전화로 알려 주었다.

“舟木씨, 등소저가 붙잡혀 갔어요 어서 호텔로 가보세요"

등려군 어머니의 통역 佐井芳男이 전화를 걸어와서는 허둥대며 말을 하였다.

"일본 출입관리국의 직원과 인도네시아 대사관의 직원이 모두 왔는데, 여권이 문제를 일으킨것 같아요...."

그때佐井는 또한 등소저에게 물었다; " 당신은 농담하고 있나요?"

그러나 전화에서 들려오는 것은 등소저의 초조하게 하는 대답이었다: 정말이에요!

 


舟木先生一接到联络,匆忙地赶到赤坂的东京希尔顿饭店(现已改名为CAPITOL 东急饭店),与已在大厅等待的佐井会合,就立刻冲上楼到七三六房。进房后房里只有邓妈妈沮丧地坐在沙发上,邓小姐已经被逮捕到位于港区港南的东京出入国管理事务所。
原来一九七八年退掉东京的住所之后,邓小姐就以香港为据点继续演艺活动,本来应该是在一九七九年初到新加坡及香港公演,之后要回日本录新歌,最后再到美国的行程。舟木先生一时无法理解发生了什么事。
一月十日邓小姐持台湾护照从台湾飞香港,二月十四日邓小姐结束香港的工作时,心想离日本工作还有空档,便想前往日本时过境台湾住个二、三天,探视父亲。但是如果用中华民国护照入境就必需要再办出境的手续,而最快也要二十天方能办妥。当到达桃园中正机场的证件审查时,邓小姐从皮包里拿出一本印尼护照,询问证件查验人可否用此护照进入台湾。而查验人员告诉邓小姐,没有签证不能入境。
有位男士就在入境审查窗口附近,目睹这一切的经过。因为这位男士使邓小姐在接下来的人生陷入低潮,当然邓小姐在当时完全没有注意到这位男士的存在。

 

舟木는 연락을 받자 급하게 赤坂의 동경힐튼(希尔顿)호텔(지금은 CAPITOL 东急饭店로 이미 개명하였다)서둘러 뛰어 갔다.

큰홀에서 기다리던 佐井와 만나서 곧 바로 736호실로 뛰어 올라갔다. 방으로 들어가자 방안에는 단지 등려군의 어머니가 풀이 죽은 채 소파에앉아 있었다. 등소저는 이미 체포가 되어서 港区港南에 있는 동경 출입국 관리 사무소로 가 있었다.

본래 1978년 동경의 주소에서 퇴거한 뒤에 등소저는 홍콩을 계속 연예활동을 하는 거점으로 생각하였다. 원래는 1979년 연초에 싱가포르와 홍콩 공연을 하여야 하였고 그뒤에는 일본으로 돌아와서 신곡을 녹음하려고 하였다. 마지막에 다시 미국에 갈 여정이었다.

舟木는 한때 무슨일이 생겼는 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1월10일 등소저는 대만 여권을 가지고 대만에서 홍콩으로 날아갔으며, 2월 14일 등소저는 홍콩의 활동을 끝냈을 때 일본에서 작업를 벗어나서 여가를 가질려고, 일본으로 갈때 대만을 경유하여서 2,3일 머무르며 아버지를 찾아 보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만일 중화민국 여권을 가지고 입국하면 반드시 다시 출국 수속이 필요하였고 가장 빨리 하더라도 처리하는데 적어도 20 일이 걸리었다.

그리고 심사직원은 등소저에게 비자가 없으면 입국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한 남자가 입국심사 창구 가까이에 있었는데 이 모든 과정을 다 보았다. 그리고 이 남자는 등소저를 이 다음의 인생을 나락으로 빠지게 하였는데, 당연히 등소저는 그때 전혀 이 남자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被拒绝入境的邓小姐只好飞往日本,在距离搭乘华航016 班机飞往日本的等待空档,邓小姐打电话给在香港的母亲说:
“我先去日本,你两天后回来。”
她交代之后,也提到在台湾入境时的护照问题。
邓妈妈还严厉地提醒邓小姐:
“我不是跟你说过,印尼护照哪里都可以用,就是不能在台湾用的吗!?”要邓小姐务必小心。

 

입국이 거절된 등소저는 부득이 일본으로 날아 가야만 하여서,일본으로 가는 중화항공 016 편기를 탑승하려고 기다리던 등소저는 홍콩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말을 하였다:

저는 먼저 일본으로 가니,엄마는 이틀 뒤에 돌아 오세요.

그녀가 이를 알려주고 난 뒤에 또 대만 입국할 때의 여권 문제를 이야기 하였다.

등려군 어머니는 엄중하게 등소저에게 일깨워 주었다:

나는 너에게  인도네시아 여권을 어디서나 전혀 쓰지 말라고 하였잖니, 그러니 대만에서도 쓰면은 안된다!

등소저는 반드시 주의를 하여야 하였다.

 

 

 

 


没想到就在那之后的第三天就出事了。邓小姐回到日本的翌日,邓妈妈随后就赶到。二月十七日傍晚,邓小姐和邓妈妈偕同两位友人到赤坂的“楼外楼饭店”用餐,吃完上海料理的虾腰汤面、炒青菜等料理后,即返回住宿的饭店。到达饭店时,邓妈妈在大厅瞄到一位带着墨镜的男人,邓妈妈突然莫名其妙地胆颤心惊了起来。
邓小姐和邓妈妈回到房间休息,随即电话就响了,有位自称是印尼大使馆的人员说,现在人在饭店大厅,有事要请教邓小姐。除了大使馆员之外,还有日本入出境管理局官员随同,他们没收了邓小姐的护照,又拍了几张照片之后,就把邓小姐给带走。

 

 

그 다음날의 제3일에 일이 일어난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등소저가 일본으로 돌아간 다음날 등려군 어머니도 이어서 서둘러 돌아 왔다.

2월 17일 저녁때 등소저는 어머니와 함께  두명의 친구를 데리고 赤坂의 “楼外楼饭店”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 상해요리 虾腰汤面,炒青菜등을 다

먹고 난 뒤, 곧바로 숙소로 돌아 왔었다. 호텔에 다달았을 때 등려군 어머니는 홀에 있는 선글래스를 낀 남자를 쳐다 보자, 등려군 어머니는

갑자기 까닭도 무른채 가슴이 뛰고 간이 서늘해지기 시작하였다.

등소저는 어머니와 함께 방으로 돌아 와서 쉬고 있는데 곧이어 전화가 울렸다.자칭 인되네시아 대사관 직원이라는  사람이 말을 하기를,

지금  호텔 로비에 있는데, 일이 있으니 등소저를 바꿔 달라고 하였다. 대사관 직원 이외에 또 일본 출입국관리국직원이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등소저의 여권을 압수하였다. 또 몇장의 사진을 촬영하고는 등소저를 데리고 갔었다.


翌日,舟木先生及邓妈妈被入管局传去,要他们据实以报。舟木先生将从邓妈妈那里得知邓小姐是从香港歌迷那里拿到护照之事据实报告,除此以外并不清楚。当天未能和被邓收监的邓小姐会面,隔天舟木先生才获准可以和邓小姐会面。会面时邓小姐显得憔悴,心神不宁的样子。
“因为我的不小心引起了大乱……妈妈还好吗?”
邓小姐只担心母亲,也请求舟木先生“请尽快把我弄出去。”
听到邓小姐这样的话,舟木先生只能安慰地说“不用担心,马上就能出来了……”舟木先生认为只要见到面就能使邓小姐比较安心,所以每天都去看邓小姐。邓小姐一心一意地挂念邓妈妈的状况及何时可以被释放。

 

다음날 舟木과 등소저의 어머니는 출입국 관리국에 의하여 이끌려 갔으며 그들에게 사실에 근거하여 대답하도록 하였다.

舟木는 등려군 어머니로 부터 등소저가 홍콩 노래팬들로 부터 여권을 받은 일을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이외에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날 수감된 등소저와 면회를 하지 못하였고 그 다음날 舟木는 등소저와 면회 허가를 받았다. 면회때 등소저는 초췌하고, 마음이 편치

않은 듯 보였다.

제가 조심을 하지 못해서 커다란 난리를 일으켰기 때문에.........어머니는 여전히 좋나요?

등소저는 오로지 어머니만을 걱정하였고, 舟木에게" 빨리 저를 꺼내서 나가게 해 주세요"라고 부탁하였다.

등소저의 이같은 말을 듣고는 舟木는 그저 위로할 수 밖에 없어서 걱정마세요 곧 나올 수 있어요! ..........라고 말을 하였다.

 

舟木는 단지 얼굴만 보더라도 등소저를 비교적 안심시킬 수 있다고 여기어서 날마다 모두 등소저를 보러 갔었다. 등소저는 한마음 한뜻으로 어머니의 상태를 걱정하였고 언제나 풀려 나는 지를 물었다.


此时的台湾和国际间正处于极艰难的困境里。一九七九年一月一日美国为了和中共恢复邦交就和台湾断交,当时和台湾有邦交的国家只有南韩、沙乌地阿拉伯、南非等二十一个国家,被国际孤立的情势也影响到一般社会层面,邓小姐深感台湾陷入前所未有的苦境,还曾捐款给国防基金。不巧就在这不久之后,就发生了护照事件。台湾媒体大肆报导,其中,《中国时报》以“持购买的印尼护照入境被拒……”、“回香港立刻转机赴日被日本警察逮捕……”等说法将整个事件的经过描述地非常仔细,因为那是有特别的原因。
在海关目睹邓小姐和海关审查官员对话的男人,就是《中国时报》当时的驻机场记者。他看到在入境审查被拒的邓小姐直飞日本,就询问审查官员详细的来龙去脉,记者随即也向当时是印尼政府在台联络窗口的印尼商会求证,询问是否有发护照给邓小姐之事,而得到的答案竟然是“NO!”此时邓小姐正在赴日的途中,印尼商会的人员立即通知日本入国管理局,结果造成邓小姐在日本被捕。

 

 

이때 대만과 국제관계는 마침 가장 어려운 곤경에 빠져 있었다. 1979년 1월 1일 미국은 중공과의 우호관계 회복을 위하여서 대만과

단교를 하였고 그때 대만과 우호관계를 가진 나라는 단지 南韩、沙乌地阿拉伯(사우디아리비아)、南非(남아프리카 공화국)등 21개 나라이었다.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정세도 일반 사회의 분위기에 영향을 주었으며, 등려군은 대만이 일찍이 없었던 곤경에 빠지는 것에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또한 일찍이 국방기금에 돈을 기부하여 왔다. 공교롭게도 이것이 얼마되지 않았는데 여권 사건이 일어났다.

대만 매체는 제멋대로 보도하였는데 그중에서 ,《中国时报》는" 구입한 인도네시아 여권을 가지고 입국하다가 제지 되다....."

"홍콩으로 돌아가자 곧바로 비행기를 갈아타고 일본으로 갔는데 일본 경찰에 체포되다................" 등 의견으로  사건의 전 과정을 매우 자세하게 그리고 있는데 , 왜냐하면 그것은 특별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었다.

세관에서 등려군과 세관 심사직원과 대화하는 것을 보았던 남자는 바로 《中国时报》의 당시 공항 주재 기자이었다.

그는 입국 심사에서 거부된 등소저가 일본으로 곧 날아가는 것을 보고는 바로 심사 직원에게 자세한 내막을 물어 보았고, 기자은 곧이어서 당시 인도네시아 정부의 대만 주재 연락창구인 인도네시아상회에 증거를 요청하여서, 등소저에게 여권을 발급한 일이 있는지 여부를

물어 보았다. 그러나 얻은 대답은 뜻밖에 NO! 이었다, 이때 등려군은 마침 일본으로 가는 도중이어서, 인도네시아상회의 직원은 곧바로

일본 입국 관리국에 연락을 하였고 결과적으로 등소저는 일본에서 체포되게 되었다.

 

 

 


事件被媒体刊出之后,台湾政府透过相关部门对舟木先生施压,要他将被释放后的邓小姐立刻送回台湾,另外也再三要求日本政府强制遣返。被国际孤立的台湾政府正处于必须尽力提升“国家意识”之际,却发生了代表台湾的邓丽君惹出护照事件,因此非常坚持要求“遣返邓丽君”。综合当时所有的情势,一般都认为只要邓小姐一回台湾,在机场就会被扣押调查。
舟木先生反复地衡量各种可能性:当时台湾政府正施行戒严令的时代,若是将邓小姐送回台湾,一、二年之内邓小姐将无法从事演艺活动;也可能好几年都无法出国,甚至更坏的情形是可能必须从此退出歌唱界,无法唱歌。忧心与日俱增,所有宝丽多唱片公司的人员都担心不已,他们去找曾打过最高法院诉讼的辩护律师商量,请他们到法务部奔走,邓小姐也是流着泪坚决主张“暂时不要回台湾!”只想避免被强制遣返回台。
女子收容所里是榻榻米式的房间,大约收容了二十多名女子,其中大部分是大陆籍女子,因此邓小姐不会因没人说话,而显得颓丧。所有的调查是由入国警备科及入国审查科执行。入管科说“明天就会释放”,但却一直拘留着邓小姐。邓小姐所持有的印尼护照是由印尼政府发照的,护照号码是“D003124”,名字栏上登记为“ELLY·TENG”,二十六岁,贴的是邓小姐本人的照片。根据警备处的调查,若是用中华民国护照入境非邦交国,需要很多时间办手续,所以为了方便工作,邓小姐才持有印尼护照。

 

사건이 매체에 의하여 실리게 된 뒤에, 대만 정부는 관련 기관을 통하여 舟木에게 압력을 주어서,그에게 등소저를 풀어 주어서 곧바로 대만으로 돌아 오게 하였으며, 다른 사람들도 여러 차례 일본정부가 강제로 돌려보내게 요구하였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대만 정부는 때 마침 국가의식을 어쩔 수 없이 올리려고 애를 써야 하는 시기에 봉착하였는데, 오히려 대만을 대표하는 등려군이 여권 사건을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등려군 송환을 매우 강하게 요구하였다.당시의 모든 정세를 종합하면 일반적으로 모두 다  등소저가 대만으로 돌아고기만 하면 공황에서 체포및 조사를 받으리라고 여겼다.

舟木은 여러번 여러 가능성을 따지었다: 당시 대만 정부는 때 마침 계엄령을 실시하고 있는 시절이었는데 만일 등소저가 대만으로

돌아 가면,1,2 년 동안 등소저는 연예활동에 종사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또한 아주 오랜동안 출국할 방법이 없을 것이고 심지어  삼엄한 분위기는 반드시 이때부터 가요계에서 퇴출되어서 노래를 부를 도리가  없을 가능성도 있었다. 모든 宝丽多唱片公司의 직원들은 걱정해 마지 않았다.

그들은 일찌감치 최고법원에서 소송하는 변호사를 찾아서 상담을 하였고 그들에게 법무부를 분주하게 다녀주기를 부탁하였으며,

등려군도 눈물을 흘리면서 단호하게 "잠시 대만으로 돌아가지는 않을래요! 오로지 강제로 대만으로 추방되는 것만 피하려고 생각해요!"

여자 수용소에는 다다미 식의 방이었으며, 대체로 20여명의 여자를 수용하고 있었다.그 가운데 대부분은 대륙국적의 여자들이었기에,

이로 인하여 등소저는 말할 사람이 없어서 사람이 없어서 말을 할 수 가 없었기에 풀이 죽어 보였다.

모든 조사는 입국경비과와 입국심사과가 집행을 하였다. 출입국관리과는 "내일은 풀려날거예요" 그러나 오히려 내내 등소저는 갇혀 있었다.

등소저가  소유한 인도네시아 여권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발행한 것으로 여권번호는 “D003124" 이었다. 이름칸에는 “ELLY·TENG”으로 등기가

되어 있었고 26살, 그리고 붙여진 것은 등소저 본인의 사진이었다. 경비처의 조사에 의하면,만일 중화민국 여권을 사용하여서 비 우방국을

입국하였다면 매우 오랫동안 수속을 하여야 하였기에,편리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등소저는 인도네시아 여권을 소지하였다.

 

 

 


当时被国际孤立的台湾,举凡政治家、财经界人士都拥有除了中华民国护照之外的第二本护照,会持有如美国、加拿大等的其他护照,这几乎是众人皆知之事。但像邓小姐这样身为艺人而拥有第二本护照是非常少见的,因为当时的台湾歌星几乎没人能在海外开演唱会。
而艺人想拿到出国许可证最少需要费时二个月,甚至需要花一年时间才拿得到的也有:首先必须向当时主管音乐、演艺活动的教育部申请,再由新闻局检视艺人的实力及视当时的状况,判断是否有必要出国;之后再由警察局作形式上的许可,最后再经外交部准许,在审查过程当中还可能被戒严总司令部传唤去作思想调查。因为当时必须要有护照及出国许可证才能出国,虽然如果有海外的应聘书就可以将两个月的申请期缩短为十天,但无论如何对当时的艺人而言,出国申请是一件非常麻烦的事,而且只要签证一到期就必须回台重新申请。为了让邓小姐证件申请顺利,舟木先生甚至还亲自拜会过新闻局及外交部,尤其在《空港》一曲畅销时,邓小姐的工作非常忙碌,但只要签证一到期就不得不回台湾。
一九七八年八月,邓小姐和友人们在聊天时,刚好提到出入境时的困扰。一名贵夫人歌迷的儿子刚好在印尼政府担任高官,贵夫人歌迷因同情邓小姐的处境,好意地对邓小姐说会帮忙她想办法。
就在约半年后,一九七八年十一月,邓小姐在新加坡拿到护照,为了酬谢给护照的人,还包了二万港币。这本护照就是邓小姐在入境台湾时所使用的那本护照。

 

그때 국제적으로 고립된 대만은 모든 정치가 재계인사들은 모두 중화민국여권이외에 별도의 여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를 들면 미국 카나다 같은 다른 여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등려군 같은 연예인으로서는 별도의 여권을 가지고 있던 것은 매우 볼 수 가 없었는데, 그때 대만의 가수는 거의 해외에서

공연을 하던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예인은 출국 허가증을 받는데 최소한 2달이 걸렸다. 심지어 일년의 시간이 허비되고서야 비로소 얻을 때도 있었다. 우선 그때 음악, 연예활동을 주관하는 교육부에 신청을 하고는 다시 신문국이 연예인의 실력을 조사하였고

그때의 상황을 살피고는 출국할 필요가 있는 지 여부를 판단하였다: 이뒤에 다시 경찰국이 형식적인 허가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다시 외교부의 비준을 거쳤다. 심사 과정에서 계엄총사령부에 소환당하여 사상조사를 받으로 갈 수 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 반드시 여권과 출국 허가증이 있어야만 출국이 가능하였다. 비록 만일 해외의 초청서가 있다면 2개월의 신청기간이 10일로 단축될 수 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연예인의 입장에서 말하면 어째튼 출국신청은 매우 번거로운 일이었고, 게다가 비자가 일단 만료가 되면은 반드시 대만으로 돌아와서 다시 신청을 하여야 하였다. 등소저의 비자 신청을 순조롭게 하려고  舟木는 심지어 또한 스스로 신문국과 외교부를 방문하였고 특히 《空港》이 매우 잘 나가고 있을 때 등소저의 일이 매우 바뻤으나. 비자가 일단 만료가 되기만 하면은 어쩔 수 없이 대만으로

돌아 가야 하였다.

1978년 8월 등소저와 친구들이 한담을 하고 있을 때 마침 출입국의 번거로움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한 귀부인 팬의 아들이  마침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고관이어서 귀부인 팬이  등소저의 처지를 동정하여서 호의로  그녀를 도와줄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말을 하였다.약 반년뒤 1978년 11월 등소저는 싱가포르에서 여권을 받게 되었는데 여권을 준 사람에게 사례를 하기 위하여 2만 홍콩 달러를 준비하였다.이 여권이 바로 대만에 입국할 때 사용한 바로 그 여권이다.


非法入境在法律上是处三年以下的徒刑或易科罚鍰十万日币(当时),在调查过程中,可以明白邓小姐非但没有恶意还知道台湾当时特殊的情况,入管局最后做出不起诉不罚金的判决。护照上的名字虽然不同,但护照并非伪造而是“真品”。因为这次事件可能牵涉到印尼政府的官员,所以延长了邓小姐拘留的时间。结果他们将事件以真伪不明做了结,模糊焦点、不了了之。日本入管局也做出强制驱逐邓小姐出境,一年之内不可入境日本的处分。
一周后,二月二十四日,邓小姐终于恢复自由之身。警备科的人员异口同声地称赞邓小姐“是个了不起的人”。因为收容所所给的伙食是外叫的便当,通常遇到有钱人的囚犯,通常都会故意说“不合口味”、“无法吃这种食物”的怨言,特意取得许可后叫高级便当来吃。但是邓小姐从未抱怨过任何怨言,不但称赞便当好吃而且会吃完它,然后一定不忘说:“ご馳走さまでした(谢谢您的美食)”、“ぁりがとぅござぃます(谢谢!)”。

 

불법으로 입국한 것은 법률상 3년이하의 징역이나 또는 10만 엔의 벌금에 처하는데(당시), 조사과정에서 명백하게 등소저는 악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대만의 특수한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출입국관리국은 끝내 불기소나 벌금을 부과 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여권상의 이름이 비록 같지 않았지만 여권은 결코 위조 된것이 아니고 진품이었다. 이 사건에 아마도 인도네시아 정부와 관련된 관리때문에,등소저의 구류의 시간이 연장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사건을 진위가 불명하며, 촛점이 모호하여 중간에 흐지부지하게 결론을

내렸다. 일본 출입국관리국도 강제로 등소저를 국외로 내 보내며, 1년이내에는 일본의 국경을 들어 오지 못한다는 처분을

내렸다.

일주뒤 2월 24일  등소저는 마침내 자유의 몸으로 회복되었다. 경비과의 직원은 이구 동성으로 등소저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하였다. 왜냐하면  수용소에서 주는 급식이 바깥에서 말하는 벤토(도시락)이었는데 보통 돈이 있는 죄수같으면 늘 일부러 입에 맞지 않는다고 하며 이런 음식은 먹을 수가 없어요 라는 불평을 하고는 특별허가를 얻어서 고급벤토를 구해다 먹었다.

그러나 등소저는 아무런 불평도 없었고 뿐만 아니라 벤토가 맛이 있다고 칭찬을 하였으며, 또 다 먹고는 언제나 다음처럼 말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잘 먹었어요 고마워요":“ご馳走さまでした(谢谢您的美食)”、“ぁりがとぅござぃます(谢谢!)”。

 


被通知会被释放到美国时,邓小姐因为过于兴奋,几乎无法吃晚餐所给的炸鱼日式定食便当,也几乎无法成眠。要被释放时,化了淡妆的邓小姐对同房的囚犯们说:“让我唱一首歌表达我对你们亲切照顾的谢意。”囚犯们在邓小姐唱完国语歌之后大声拍手叫好,邓小姐要出收容所时,低头向所有警备职员点头道谢:“大變お世話になりました!(谢谢你们的照顾!)”
舟木先生在前一天让邓小姐亲笔书写用来应付媒体的日本式谢罪文:

 

 

 미국으로 추방된다는 통지를 받았을 때 등소저는 너무나 흥분하여서  저녁식사로 주어진 생선프라이 일식정식 벤토를 먹을 수가 없었다. 또한 거의 잠을 자지도 못하였다. 석방될때 옅게 화장한 등소저는 같은 방의 죄수들에게 말을 하였다:

내가 여러분에게 친절하게 돌보아준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표하기 위하여 노래 한곡을 부르겠어요.

죄수들은 등소저가 중국어 노래를 다 부르고 난뒤에 커다란 박수로 환호를 하였으며 등소저는 수용소를 나올때 모든 경비직원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고개를 끄떡이며 감사의 말을 하였다:

너무나 신세를 졌습니다!:“大變お世話になりました!(谢谢你们的照顾!)” 舟木는 하루전에 등소저에게 스스로 글을 써서

매체에 대하여 일본식 사과를 하게 하였다.


 



“给大家带来许多骚扰,也让所有歌迷们担心了,非常抱歉!我将赴美完成原本预定的演唱会,等表演结束后,再回台湾。”
在签名处邓丽君很郑重地签下本名邓丽筠, 下方又加签日文及英文的“TERESA·TENG”,日期是在一九七九年二月二十三日。“我想会有很多的媒体来,记得脸上保持微笑喔!”对舟木的建议,邓丽君笑着回答:“是啊。”办完入管事务所的手续走到外面,果真如预期一样来了很多的媒体,穿着格子衬衫、黑长裤,然后披着毛皮外套的邓丽君,左手拿着LV 提包,脸上勉强地露出笑容疾步坐进车厢,但许多电视台的记者仍大声喊问着问题。到达成田机场,舟木将母亲及邓丽君带往特别休息室,帮她准备了一张泛美航空飞往洛杉矶的机票(当时约三万台币)。这一飞开启了邓丽君小姐的新世界。
途经旧金山到达洛杉矶之后,邓小姐打电话给母亲:“我已经没事了,现在到了美国,妈妈您也立刻来。”不用说,素桂立刻飞奔赶往美国与女儿相会。碰面时邓丽君感慨地说:“最令人难过的是台湾的媒体完全不了解状况,只会骂我是背叛者。”但很讽刺的是往后一年多自由自在的生活对她而言,竟是最宁静的时期。

 

여러분께 많은 괴로움을 끼치고 또한 모든 팬들에게 걱정을 하게 하여 매우 죄송합니다!

저는 미국에 가서 원래 예정한 콘서트등을 완성하고는 공연을 다 마치고는 다시 대만으로 돌아갈거예요.

서명할 곳에 등려군은 매우 정중하게 본명 邓丽筠(등려균)을 서명하고 아래에 다시 일본어와 영어로 “TERESA·TENG”를 서명하였으며,

날짜는 1979년 2월 23일이었다.

"나는 아주 많은 매체가 올거라고 생각했어요, 얼굴에 미소를 짓는 것을 기억해요 네."舟木의 건의에 대하여 등려군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래요 .  출입국관리 사무소의 수속을 다 처리하고 바깥으로 나가니,과연 예상처럼 많은 매체가 왔는데, 격자 무늬 블라우스 검은 바지를 입고난 뒤 모피 외투를 입은 등려군이 왼손엔 LV 가방을 들고 얼굴에는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빠른 걸음으로 차안에 올라탔다.그러나 수많은

텔레비전의 기자는 여전히 큰소리로 질문을 하였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니,舟木는 어머니와 등려군을 특별 휴게실로 안내하고는 그녀가 panam항공의 로스앤젤레스 행 비행기 표를 준비하는 것을 도와 주었다(당시 약 30만 대만달러). 이 비행이 등려군 샤오졔의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샌프란시스코을 거쳐서 로스 앤젤레스에 도착한 뒤 등소저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저는 이미 괜찮아졌어요. 지금은 미국에 도착했으니

어머니도 어서 오세요. 말할 것도 없이 어머니素桂는 곧바로 미국으로 날아 가서 등려군 샤오제를 만났다.

서로 만났을 때 등려군은 감격하여 말을 하였다: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대만의 매체가 완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서 그저 내가 배신자라고

매도하는 것이어요. 그러나 아이러니 한 것은 이후의 1년 여의 자유로운 시간이 그녀로서는 의외로 가장 평온한 시기이었다.

 

 

 

 

 

 


第六章 等待春天的花蕊
제6장: 봄날의 꽃이 피어나기를 기다리며


一九九五年五月八日邓丽君过世的消息一经报导后,台湾的《独家报导》就报导她是军方的谍报员。原情报局的高官谷正文证实“邓丽君==谍报员”。这篇报导特别在亚洲各地引起话题,不仅在日本《每日新闻》在国际版上刊出报导之外,《周刊宝石》还以断定式的文章报导“邓丽君是从事二十年的秘密谍报员!!”。依谷正文的说法,邓丽君是归属在国家安全局的“第三处”。
若报导属实,那冲击性会很大,对邓丽君的评价也将大大的改变。她是否真的是情报员?我为了和谷正文见面在一九九五年七月二十四日到台湾。

 

 

1995년 5월 8일 등려군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한번 보도 되자, 대만의《独家报导:독점 보도》는 그녀가 군측의 첩보원이라고 보도를 하였다. 전직 정보국의 고관 이었던谷正文이 "등려군은 첩보원"이라고 증언하였다. 이 보도는 특히 아시아 여러나라에서 화제를 불러 일으켰으며,일본의《每日新闻》의 국제판 에서 보도한 것 뿐만 아니라 이외에도 ,《周刊宝石》도 단정적인 문장으로 "등려군은 20 년간

비밀 첩보원을 하였다"!! 라고 보도하였다.谷正文의 추측에 의하면, 등려군은 국가안전국의“第三处”에 속하였다는 것이었다.

만일 보도가 사실이라면 이충격은 매우 커서,등려군에 대한 평가도 대대적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정보원? 이었나.나는 谷正文과 만나기 위하여 1995년 7월 24일 대만으로 갔었다.

 

 

 


台北市永康街。走近地址之处立刻可以看到建筑物。是一栋旧公寓。按了一楼门铃,回应声很大。是谷正文本人。上楼之后有好几扇门,正在犹豫时,有一扇门开了,探出头的谷正文说:“这边。”身体看起来非常硬朗,完全看不出已经八十四岁了。和想像中在情报局工作的风貌有所差异,反而显现出一副“好爷爷”的慈祥感觉。
一九一一年五月出生的谷正文,于一九三五年二十四岁时进入情报局,六十岁时退休时官阶是少将。谷正文所属的情报局历史源远流长。当蒋介石是“国民革命军”的总司令时,为了收集北伐前线的军事情报,而于一九二八年成立“审查部”开始的单位。在一九三二年日本军侵略上海,将特务组改为“特务处”。到了一九三七年又变成了军统局(军事委员会调查统计局)。为了全面对日抗战,非常受重视的情报工作就在这时候开始的。之后又改为保密局(一九四六年)、情报局(一九五五年),最后于一九八五年改为军事情报局。

 

 

대북시 永康거리. 장소에 가까이 가자 곧바로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오래된 아파트이었다. 일층의 벨을 누르자 큰 목소리의 대답이 있었다. 이사람이 谷正文 본인이었다. 윗층으로 올라가니 열개의 문이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문 하나가 열렸다. 머리를 내밀며

谷正文이 말을 하였다:" 이곳이요. " 몸은 매우 건강하여 보였다. 정말로 이미 80 살이 넘은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상상속의 정보국 관리하던 풍모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으나, 오히려 "좋은 할아버지" 의 자상한 느낌이 보였다.

1911년 5월 출생의 谷正文은 1935년 20 살때 정보국에 들어갔으며, 60살에 관직에서 少将으로 전역하였다.

谷正文이 소속된 정보국의 역사는 매우 깊었고 길었다. 장개석이 국민당 혁명군의 총사령관을 맡고 있을 때,북벌전선의 군사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1928년 심사부로 창립되어 시작된 부서이었다.1932년 일본이 상해를 침략하였때 특무조를 특무처로 개편하였다.

1937년에 이르러 또 다시 군통국(军统局(军事委员会调查统计局))으로 개편하였다.。전면적인 항일 전쟁을 위하여 매우 중시된 정보공작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 뒤로 또 다시 保密局(1946년)、情报局(1955년),마지막으로 1985년 군사 정보국으로 바꿨다.

 

 


国家安全局则是于一九五五年设立,下属于国防会议,里面细分为海外情报、大陆情报、对谍报、情报通信及通信监听的五大部门。之后于一九六七年二月一日,归属于总统直辖的国家安全会议的下属机关。国家安全局就是负责指导及调整国内的情报机关及治安机关。历代的局长全部是军人,而且都是上将级的人员担任。被称为台湾的“CIA”(美国中情局)或称为“TCIA”。但是和CIA 不同的是没有行使权。依《独家报导》文章内所写的谷正文的证词,邓丽君是属于“对谍报”的第三处。
谷正文在抗日战争时待在山东省是游击部队的成员,于一九四一年曾经成为日军的俘虏。蒋介石被赶出大陆移至台湾后,担任国防部保密局的侦探组长,约有十五年都在专门取缔共产主义的工作者。在台湾共产党于一九八二年结党成立,战后虽经镇压但仍然持续在活动。更换为情报局之后谷正文担任监察室主任。

 

 

국가 안전국은 1955년 설립이 되었고 국방회의에 속하였다. 내부에는 세분을 하여서 해외 정보, 대륙정보,첩보 대책(“对谍报”), 정보통신과 통신 감청의 5개 부분으로 나누었다. 이뒤로 1967년 2월 1일 총통 직할의 국가 안전회의의 소속기관이 되었다. 국가 안전국은 국내 정보기관과 치안 기관을 지도와 조정을 담당하게 되었다.역대의 국장은 모두 군인이었고, 上将급이상의 장군이 담당하였다. 대만의 “CIA”(美国中情局)혹은“TCIA”라고 불리웠다.그러나 CIA 와는 같지 않은 것은 행사권이 없다는 것이다.《独家报导》이 보도한 기사에 쓴 谷正文의 증언에 의하면,등려군은 “对谍报”의 제3처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谷正文는 항일전쟁시기에 산동성에서 대기할 때 유격부대원이었다.1941년 이전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었다.

장개석이 대뮥에서 대만으로 쫓겨날때 국방부의保密局의 侦探组长을 담당하였다. 약 15년동안 공산주의자들의 간첩을 잡는것을 전문으로 하였다. 대만공산당이 1982년  창당하였을때 전쟁뒤에 비록 진압이 되었으나 계속 활동을 하였다. 정보국으로 바뀐뒤에 谷正文이 감찰실 주임을 담당하였다.

 

 


依谷正文的证词,邓丽君“被吸收成为谍报员”,明确地指出是“属于国家安全局的第三处的管理”。立即向坐在沙发对面的谷正文发问。向他说明我自己也采访过邓丽君本人的经过。谷正文立刻惊讶地反应说“啊!是吗?”,首先跟他说明《周刊宝石》刊载的内容,问他是如何采访。
“有个中国人打电话来,说了约二十分钟,就这样而已。”
“只有二十分钟?那邓丽君属于国家安全局第三处管理的谍报员之说有何根据?”
突然被问到重点,只见谷正文歪着头静静地说:

 

谷正文의 증언에 의한 등려군은 " 포섭되어 첩보원이 되었으며"그리고 명확히 '국가 안전국의 제3처의 관리에 소속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곧 소파에 앉아있는 건너편의 谷正文에게 질문을 하였다: 그에게 내가 스스로 등려군 본인과 인터뷰한 경위를 설명하였다.谷正文은 바로 의아해 하면서 설명하였다:"아! 그래요?" 우선 그에게 《周刊宝石》이 게재한 내용을 설명하였는데 그는 어떻게 인터뷰를 하였는지를 물었다.

" 한 중국인이 전화를 걸어와 이야기를 하였는데, 약 20분간 말을 하였는데,이것 뿐입니다."

"단지 20분요? 그 등려군은 국가 안전국 제3처 관리에 소속된 첩보원이라는 추측은 무슨 근거가 있나요?"

갑자기 중요한 것을 질문 받게 되자 谷正文 다만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용히 말을 하였다:

 

 

 

 

 

 

 


“没问过那话啊。若是刊出谍报员的文章,应该是谁说的吧!”突然哑口无言的我,只好问:“那她做了多久的任务?”结果回答:“不知道。”“但是据文章说是你证实,在军事统治局工作时,邓丽君被吸收为情报局的不是吗?你也见过她本人的吧!”沉默许久的谷正文有点生气地说:“没有什么统治局,我也没见过邓丽君。”完全不对题。就如同文章中将“情报局”错写成“统治局”的指证一样。
“文章里不是有写你有看过她?那你在情报局有看过她啰?”经我这样一问,他竟然
意外地回答我:“我有在电视上看过她,若说近距离看则是在一九六0 年十月左右在东方饭
店的歌厅里看她唱歌,一次而已。”
一九六0 年的邓丽君才七岁,这跟谷正文的证词里提到的“十三岁”有出入。
“但你说你认识邓丽君的父亲,你们怎么认识的?”
“没!我没见过她父亲。”

 

"그 말은 묻지 않았나!. 만일 첩보원의 기사가 발간이 되면은 마땅히 누가 말한 것일 터인데!" 갑자기 아무런 말도 못한 나는 어쩔 수 없이 물어 보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임무를 하였나요?"

결과를 대답하였다:" 몰라요" "그러나 기사의 근거는 당신이 증언한 것입니다, 군사 统治局 시절 때,등려군이 포섭되어서 정보국이 되지 않았나요? 당신도 그녀 자신을 보았지요! 오랫동안 말이 없던 谷正文는 약간 화가 나서 말을 하였다:" 무슨  统治局 이 있나, 나도 등려군을

보지는 못했다."

완전히 말이 맞지 않았다. 기사 속의 “情报局”을 “统治局”으로 잘 못 쓴것을 지적하는 것 같았다.

" 기사속에는 당신이 그녀를 보았다고 쓰여져 있잖아요? 그럼 당신이 정보국에서 그녀를 보지 않았지요?" 내가 이처럼 질문을 하자,그는 뜻밖에 의외의 대답을 하였다.:" 나는 텔레비전에서 그녀를 본적이 있어요.만일 가까이에서 보왔던 것은 말하자면, 1960년 10월 경 동방호텔의 음악홀에서 그녀가 노래하는 것을 보았는데 단 한번 뿐이었습니다."

1960년의 등려군은 겨우 7살이었고 이것은 谷正文이 기사에서 언급한 "13살"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당신이 등려군의 아버지를 안다고 말하였는데 당신들은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 아니요! 나는 그녀의 아버지를 만났던 적이 없어요"

 

 


到底是怎么一回事?《周刊宝石》里以“在台湾家中谷氏说出”报导。若直接读那篇文章真的令人以为是记者直接采访,谷正文作出具体的证词。再问一次这件事,他就将采访的详细经过告诉我。
“有一天,有个中国人打电话来自称是那家杂志的人,之后谈了约二十分钟。而《独家报导》的电话则更短喔!”
“但是谷先生的照片有登出来不是吗?”问到这里他说:“没到家里来的记者是无法拍照的,应该是从哪里的杂志找出来的吧?”谷正文的表情偶尔带着笑容,但大多轻描淡写的样子。听他这样说不像是有隐藏什么事。于是又问:
“那为什么会用你的名字来当邓丽君是谍报员的证词呢?”

 

도대체 어찌 된셈인가? 《周刊宝石》에서 "대만 사람중 谷氏가 말하였다" 라고 보도하였는데, 만일 직접 이 기사를 읽었다면 정말로

기자가 직접 인터뷰를 하였고,谷正文은 구체적인 증언을 하였던 것으로 믿게 하였다.

다시금 이 일에 대하여 물었는데 그는 인터뷰한 상세한 경위를 나에게 이야기 하였다.

"어느 날, 한 중국인 전화를 걸어와 스스로 그 잡지의 직원이라고 하였으며 이뒤로 약 20분간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独家报导》의 전화라면 너무나 짧지 않나요!"

간혹 웃음을 띠면서 대부분대충 말하고 넘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나 이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므슨 일을 숨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또 질문을 하였다:" 그럼 어째서 당신의 이름을 써서 등려군이 첩보원이라는 증거로 삼았을 까요?"

 

 

 

 

 

 


“那是因为看了她的棺木上盖有中华民国国旗及国民党旗,我判断她生前是有担任任务。”
“但是,那应该是没有根据的吧!在文章有提到你说你有看过她被吸收的内部证明文件。”谷正文脸上显得有点困惑,但过了不久他开口说:
“我没看过那个文件,也没说过记忆里她是谍报员,如果文章里这样写,那一定是记者自己乱写的内容。”
其实在访问谷正文家的前二天,和最初报导邓丽君==谍报员的《独家报导》的总编辑有一些事情发生。那就是因为谷正文的电话没有登录在一般的电话簿上,所以打电话到编辑部问,结果是总编辑接的电话。向他说明想去请教谷正文有关文章内容之事,结果他说可以介绍,但希望陪同一起去采访。由于他的要求令我感到可疑。我回答可以后,他就说要我明天再给他打电话。
翌日,依照约定的时间打电话过去给总编辑,他说谷正文已经八十四岁了,应该还在睡午觉,所以请我傍晚再打一次电话。但他又说因为工作太忙了,所以无法一同去采访。到了傍晚再次打电话,结果是明天十点半去采访谷正文家,总编辑再次说想一起去。

 

" 그것은 그녀의 관위에 덮혀 있는 중화민국 국기와 국민당 당기를 보았기에 나는 그녀가 생전에 임무를 담당하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가 있는 말이 아니예요! 기사에서는 당신이 포섭되었다는 내부증거 문건을 보았다고 말하였다고 제시되고 있어요"

谷正文는 얼굴에 조금은 곤혹스러워하며, 그러나 오래지 않아 말을 열어 말을 하였다:"나는 그 문건을 본적이 없어요,또한 기억속에 그녀가 첩보원이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만일 기사속에 이렇게 쓰여 있다먼 그것은 반듯이 기자가 스스로 제멋대로 쓴 내용입니다."

 

사실 谷正文 집을 방문하기전 2일 전에, 최초로 등려군이 첩보원이라고 보도한《独家报导》의 총편집장에 사정이 생겼다.

그것은 谷正文이 걸었던 전화는 등록되어 있는 일반 전화부에 있지 않았기에,  편집부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었다.결과적으로 총편집장의 전화이었다.그에게 谷正文에게  기사의 내용과 연관된 일을 설명들으러 가려고 한다는 것을 설명하였는데, 결과적으로 그는 소개해 줄 수 있다고 하였으나, 함께 인터뷰를 가야 하기를 바랬다.그가 요구하는 것 때문에 나는 의심스러워 하게 되었다. 나는 좋다고 하자,

그는 내가 내일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다음날 약속된 시간에 따라서 전화를 걸고는 총편집부에 갔는데, 그는 谷正文이 이미 84세 이므로 마땅히 또한 낮잠을 자고 있기에 내게 밤에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 일이 너무 바쁘다고 말을 하였고 그래서 함께 인터뷰를 갈 도리가 없다고 하였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 다시 전화를 걸자 결과적으로 내일 10시 반에 谷正文 집으로 인터뷰를 가자는 것이었다. 총편집장는 다시 함께 가겠다고 말을 하였다.

 

 


但是到了当天,却看不见总编辑的踪影。采访告一段落后,向谷正文提到《独家报导》总编辑之事,决定再打电话跟他说,采访已经结束能不能快一点来。他回答说:“知道了。”边听谷正文说着过去的事,经过了三十分钟、一个钟头后,也不见总编辑出现。再次打电话去,结果女职员说“我转给他听,请等一下”,过了一会儿,女职员又回答“他不在”。看我和对方的交谈,在旁的谷正文脸上有着复杂的表情。我又再问他:“有邓丽君是情报员的证据吗?”
“没有证据”谷正文苦笑地回答。
这就是“所有”的经过。结果《独家报导》的总编辑也从未现身过。

 

 

그러나 그날이 되자 오히려 총편집장의 종적을 보지 못하였다. 인터뷰가 일단락 지어 진뒤, 谷正文에게 《独家报导》의 총편집장의 일을 이야기 하자, 다시 전화를 걸어서 그와 이야기 하여서, 인터뷰를 이미 좀 빨리 할 수 있는 지를 끝낼 수 있는 지를 결정하였다.그는 대답을 하였다:" 알았습니다. 谷正文이 지난 일을 알아 맞추는 것을 들으면서 30분이 지났고 또 한시간이 흘렀으나 총편집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러 갔더니 결과적으로 여직원이 말을 하였다:"제가 그에게 돌려 주겠으니 들어 보세요 좀 기다리세요. 여직원은 또한 대답하였다:" 그는 없어요" . 내가 상대방의 대화를 보더니, 곁에 있는谷正文이 얼굴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또 다시 그에게 물었다: 등려군이 정보원이라는 증거가 있나요?

"증거는 없어요" 谷正文이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였다.이것이" 모든" 과정이었다. 결과적으로 《独家报导》의 총편집장은

 여태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日本的电视台在之后又报导邓丽君是谍报员之事。我也向来询问的电视台人员说明以上的情形,他们仍然作此报导。譬如一九九五年十月十一日TBS 电视台播出的“情报空间J”的节目中就以“邓丽君怪死的真相”作特集的主题,拿下将近百分之二十的超高收视率。之后,随着节目去采访的宇崎出现在《朝日艺能》(一九九五年十二月七日号)的杂志中,用“邓丽君是国际谍报员,暗中活跃在日本、香港及法国”的煽动标题作文章。介绍宇崎“单独采访到原是将军的谷正文,成功地找出邓丽君是谍报员的重要证词”。
宇崎问:“为了交换条件(取得护照)而从事特务工作吗?”谷正文回答:“就是这样。”“被交代去联络人,或是转达手信的工作。”又断言说在一九七九年引起的“护照事件”,“其实国家安全局早就什么都知道了,那本护照其实就是国家安全局给的”。以上全都是虚构的。

 

 

일본의 텔레비전방송국은  이뒤에 또 등려군이 첩보원이라 것을 보도하였다.나도 원래부터 알고 있던 텔레비전 직원이 이상의 상황을 설명하였는데, 그들은 여전히 이 보도를 하였다. 예컨데 1995년 10월 11일에 TBS방송국이 방송한 “情报空间J”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등려군 의혹의 사망의 진상"이라는 특집 주제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거의 20% 의 높은 시청률을 차지하였다. 이 뒤에, 프로그램에 따라서 인터뷰를 하러 간 宇崎가 《朝日艺能》(1995년 12월 7일자)의 잡지 속에서, "등려군은 국제첩보원으로 몰래 일본,홍콩,그리고 프랑스"에서

활약하였다고 선동하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었다. 宇崎는" 단독으로 전직 장군이었던 谷正文과 인터뷰를 하여서 성공리에 등려군이 첩보원이었다는 중요한 증거를 찾았다"고 소개하였다.宇崎가 물었다:" 교환조건( 여권취득)을 위하여서 특무 공작에 일하였나요?"

谷正文이 대답하였다:" 바로 그래요."" 연락하러 가는 사람으로 되거나 아니면 손으로 들고가 전달하는 공작이었어요."

또 단언하여 말을 하였는데 1979년 일어난 여권사건은 사실 국가 안전국이 일찍 부터 무엇이든 다 알고 있었어요, 그 여권은 사실  국가 안전국이 준것이에요" 윗글이 모두 다 허구이었다.

 

 

 


一九九六年一月出版了原先在电视节目中播出的“邓丽君怪死的真相”为主,“再综合补充采访”由宇崎真、渡边也寸志着笔写成《邓丽君的真实》(德间书店)一书。这书也是用谷正文当提供证词的人,以“台湾的老将军说的重大证词‘邓丽君做了三十年的谍报员?’”作为开头的介绍,第三次出现的《独家报导》的文章,里面写着宇崎因为这个内容被吸引之 后而去拜访谷正文。宇崎问谷正文:
“邓丽君真的是谍报员吗?”谷正文回答:

 

 

1996년 1월에 출판되었고 전에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방송된 "등려군 의혹사인의 진상"을 중심으로,"다시 종합하고 보완한 인터뷰"를

宇崎真,渡边也寸志이  《邓丽君的真实》(德间书店 발행)이라는 책으로 썼다.

이책도 谷正文이 주었던 증거를 가진 사람이 "대만의 늙은 장군이 말한 중대한 증언으로" 등려군은 30년간 첩보원을 하였나?"로 설명이 시작되는데,세번 발표된 《独家报导》의 기사에는 그 안에 宇崎가 이 내용을 들었기 때문에 谷正文을 방문하러 갔었다고 되어있다.

宇崎가 谷正文에게 물었다:

"등려군이 정말로 첩보원이었나요?" 谷正文이 대답하였다.

"

 

 

 

 

 


“是的,不会错,她是国家安全局的谍报员。”和《独家报导》是相同的说法。依谷的说法,成为谍报员的动机主要是想换取出国时,必须要有国家安全局的许可的目的。当初负责的人说:“认为邓丽君可以用”,所以对她做了身家调查,“也有邓丽君相关的档案”。谷正文的结论是:
“可以很自信地说邓丽君是谍报员,因为是事实。如果有人要告发这是谎言的话,那就随便好了。”
这是谷正文采访的菁华。笔者将采访的结论这样写:
“谷正文的证词有相当的具体性,若不在场的人是无法知道。”
即使证词有很多的具体性,但若没有根据的话,只是重复“有可能”、“可以推定的话”,那结果只是单方面的推论而已。依谷的采访文章他说:“邓丽君为了出国,希望有谍报员身份的便利”,说邓丽君第一次出国是去香港,而且是在一九六七年或一九六八年的时候。
但是邓丽君第一次离开台湾出国去的地方是一九六九年,去新加坡。而且第一次去香港则是在一九七0 年。这对邓丽君而言,是有事实的基础资料。和事实不符的言论若称他有“具体性”,而且毫无怀疑地去记述,未免太缺乏说服力了。

 

"그래요, 틀릴 수 가 없어요. 그녀는 국가안전국의 첩보원이에요." 《独家报导》과 같은 의견이에요. 谷正文의 의견에 따르면,

첩보원이 된 동기는 주된 것이 출국할때 반드시 필요한 국가안전국의 허가를 얻으려는 목적과 바꾼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의 책임자가 말을 하였다: " 등려군이 쓸 수 있다고 여겨서 그녀에 대한 신상 조사를 하였으며 또 등려군과 관련된 문서를 가지고 있어요".

谷正文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매우 자신있게 등려군이 첩보원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사실이니까요. 만일 이것이 거짓말이라고 고발한다면, 그래요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

이것은 谷正文과 인터뷰한 요점이다. 작가는 인터뷰한 결론을 이렇게 썼다.:" 谷正文의 증언은 상당한 구체성이 있어요.만일 현장에 있지

않았다면 알 도리가 없는..."

설령 증언이 매우 구체적이라도,그러나 근거가 없다면, 단지 "가능성, 추정될 수 있다"는 것의 반복일 뿐이며,그 결과는 단지 일방적인 추론 일 뿐이었다.谷正文의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말을 하였다:" 등려군은 출국하기 위하여, 첩보원 신분의 편리함을 바랬을 것이다."그리고 등려군이 맨처음 출국한 것은 홍콩으로 갔던 것으로, 게다가 1967년 또는 1968년 무렵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등려군이 매처음  대만을 떠나 출국한 곳은 1969년 싱가포르로 갔던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홍콩으로 간 때는 1970년이다.등려군 입장에서 말을 하자면, 사실에 기반을 둔 자료이다. 사실과 맞지않는  언론이 만일 그사람도 구체성이 있고, 게다가 조금도 의심없다며 써내려 갔다면 , 너무나 설득력이 없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打出“邓丽君怪死的真相”这种煽情的言语当做节目的主题播出,更在两个月后发行成书籍,多次使用唯一证词的谷正文并广为流传“邓丽君==谍报员之说”,为什么谷正文又要自己去回锅这个“谍报员之说”的事呢?因此我再次于一九九六年四月二十九日到台北去采访谷正文。
谷正文和上一次去采访时一样,笑容满面地迎接我。首先发问的是“《邓丽君的真实》书中所提到的内容是您在什么时候说的?”谷正文说,这个证词是在一九九五年七月二十三日来的电话,于二十四日在台北市内的饭店中进行访谈。也就是在我采访他的三天前。为什么针对同一个人物同一个主题进行访谈,结果才没隔几天就有一百八十度的不同,实在无法理解理由何在?谷向《邓丽君的真实》的作者及《独家报导》做出相同的说明。但是我采访时并不知道谷正文在数天前所说的内容。

 

 

"등려군의 의혹사망의 진상"이란 선정적인 말로 프로그램의 주제을 만들어서 방송하였고 게다가 2달 뒤에 책을 만들어서 발행하였으며,

여러번 유일한 증언을 한 谷正文을 이용하여서 아울러 "등려군은 첩보원이라는 의견을" 널리 퍼뜨렸다. 왜 谷正文는 또한 스스로

"첩보원이라는 의견"을 다시금 되살리려고 하였나.? 그래서 나는 다시 1996년 4월 29일에 대북에 가서 谷正文과 인터뷰를 하였다.

谷正文는 저번 첫 인터뷰를 할때와 마찬가지로 만면에 웃음을 띠고서 나를 맞이하여 주었다. 우선 질문한 것은"“《邓丽君的真实》이라는 책속에 제시된 내용이 당신이 어느 때 말한 것인가요?"

谷正文이 말을 하였다. 이 증언은  1995년 7월 23일에 전화가 와서, 24일에 대북시내의 호텔에서 인터뷰를 한 것 입니다.

또한 이것은 바로 내가 그와 인터뷰한 3일전 이었다. 어째서 동일한 사람에 대하여 동일한 주제로 인터뷰를 하였는데 결과가 이다지 며칠도 되지않았는데 180 도 같지 않은지,실제로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 할 수 가 없었다. ?  谷正文이 《邓丽君的真实》작가와 《独家报导》를 같은 설명을 하였지만 내가 인터뷰할 때는 결코 谷正文이 수일전에 말한 내용을 알 수 없었다.

 

 

 

 


我的问题大都重复问相同的事。只有一个重点就是“有什么具体的根据说邓丽君是谍报员吗?”和预测的结果相同。谷正文只重复回答:“没有”。若硬说有什么新发现的话,那就是他说:“国家安全局的人来问知不知道邓丽君的事,但也不是很认真的在问。即使配合帮忙军方,但也不能就算是谍报员。”在《邓丽君的真实》里,谷正文说国家安全局第三处的吴所长,曾来找过谷商量邓丽君是否“可用”之事。所以理论上就变成谷正文所属的情报局,和国家安全局合作去管理邓丽君了。但是国家安全局并没有立场去指挥情报局,而且第三处也并非派遣谍报员的部门。担任此任务的是第二处。和他指出“只是为了出国方便,希望有谍报员身份的便利”之事与事实也不符。签证的取得是向教育部及新闻部申请,经戒严总司令的思想确认,由外交部发出许可之后,经由法务部的出入境管理局发证。所以谷正文所言的“出国绝对需要国家安全局的许可”之事也不正确。若真要说邓丽君是谍报员的话,
那就不会发生“护照事件”了。

 

나의문제는 대부분 반복하여서 같은 것을 질문하였다. 다만 중점은 바로 "등려군이 첩보원이라는 무슨 구체적 근거가 있는가?"

하는 것이고 예측된 결과와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이다.谷正文이 단지 여러번 대답하였다." 없어요" 만일 다시금 어떤 새로운 발견이 된다면 그때 그가 말을 하였다:" 국가 안전국의 사람이 와서 등려군의 일을 아는지 물었으나. 또한 매우 진지하게 묻지는 않았다. 설령 군측을 도왔다고 하더라도, 또한 첩보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邓丽君的真实》에서, 谷正文은 국가 안전국 제3처의 吴소장이 일찌기 자기를 찾아와서  등려군이 쓸만 한지를 의논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이론상 谷正文의 소속된 정보국이 되었으며, 국가안전국과 합동으로 등려군을 관리하였다. 그러나 국가 안전국은 결코 정보국을 지휘할 입장이 아니었다.게다가 제3처는 결코 첩보원을 파견하는 부서가 아니었다. 이 임무를 담당하는 것은 제2처이다, 그에게 " 오로지 출국의 편리를 위하여 첩보원의 신분의 편리를 희망하였다"는 일과 진실은 부합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비자 취득은 교육부와 신문부에 신청하고, 계엄총사령부의 사상 검증을 거쳐서 외교부가 허가를 발급한 뒤, 법무부의 출입국 관리국이 비자를 발급하는 것이다. 그래서 谷正文이 말한 "출국에 절대 필요한 국가 안전국의 허가"라는 일도 정확하지 않았다.

만일 정말로 등려군이 첩보원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그럼 "가짜 여권 사건"은 일어났을 수가 없었다.

 

 

 

 


谷正文还在电视台的节目里说过“请她为情报局做谍报活动”、“她不是普通的谍报员”。而且谷正文当时的工作是检举台湾共产党员及收集情报的工作,并没有立场去要求邓丽君从事谍报活动。那为什么在电视节目中做这些没有根据的发言呢?谷正文则苦笑地回答:“因为电视台的人拜托我说她是谍报员。”不知道是不是真的被电视台的人所拜托,但这些就是“谍报员之说”的真相。

 

谷正文은 또한 텔레비전 방송의 프로그램에서 " 그녀에게 정보국을 위하여 간첩활동을 해달라고 부탁하였다,"그녀는 보통의 첩보원이 아니다" 라고 말을 하였었다.게다가 谷正文이 하는 당시의 업무는 대만 공산당원 검거와 정보수집을 하는 업무로 결코 등려군에게 첩보 활동을 요구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럼 어째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근거가 없는 발언을 하였나? 谷正文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였다:
" 텔레비전 방송국의 직원이 나에게 그녀가 첩보원이라고 말해주기를 부탁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정말로 텔레비전 방송국의 직원에게 부탁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 첩보원 설"의 진상이었다.

 

但是消息只要被报导一次就会深深的烙印在许多人的印象中,正所谓的“亡灵”经变本加厉后会成为更粗暴且违反常理以“暴戾”的型态出现。谷正文最初在《独家报导》中说的文章,之后成了“邓丽君==谍报员说”的唯一根据并且被广为流传。例如香港发行的《明报月刊》一九九四年四月号中,引用才出版二个月的《一代歌后邓丽君》之书,介绍“邓丽君==谍报员”之说,也是根据谷正文过去的证词而写成的文章。跟发生在日本的情形基本相同。

 

 

그러나 뉴스는 한번 보도가 되기만 하면은 곧 깊은 낙인이 수많은 사람들의 인상속에 찍히게 되어서 때 마침 이른바 "망령"이 본래 모습보다 더 심하게 되어서 더 조악하고 상식에 어긋나는 잔혹한 형태로 나탄게 되었다. 谷正文이 처음으로 《独家报导》에서 말한 기사가 이후에는 ,

"등려군이 첩보원이라는 설"의 유일한 근거와 아울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예컨데 홍콩에서 발행된《明报月刊》의 1994년 4월호에서

인용하자 마자 2개월간의 《一代歌后邓丽君》이라는 책이 출반되었는데, "등려군이 첩보원이다"리는 설을 소개하였으며, 또한 谷正文이 과거에

말한 증언과 이를 썼던 기사의 근거이었다. 일본에서 발생된 정황과 기본적으로 같았다.

 

 


二00 四年二月六日,日本富士电视台的“无法向别人说的人生秘密”的节目中,播出邓丽君。节目里面的画面播出类似是邓丽君的日记,而且念出写在日记里的内容。譬如其中有一段说“一九八一年十一月七日,从刚才到现在就一直盯着戒指看,是因为晚上他向我求婚了。”还介绍邓丽君的日记里记载着对×××事件的愤怒及死亡当天的情形。
但是,邓丽君并未遗留下日记。根本是不存在的日记。但这些连笔迹也不同的文章却被这样播出,富士电视台的公关部长是如何解说的呢?
“我认为是依一九九六年出版,可信度很高的评传《邓丽君的真实》书中,将她曾说过的话语串联后,在容许的范围内做出的报导”(《周刊新潮》二00 四年二月十九号)。

 

2004년 2월 6일 일본 후지 텔레비전 방송국의 "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인생의 비밀"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등려군을 방송하였다.

프로그램에서 화면은 등려군 일기 같은 것을 방송하였다. 게다가 일기속에 쓰여진 내용을 읽혀졌었다. 예컨데 그중에는 이런 부분이 있었다

" 1981년 11 월 7일, 조금전 부터 지금까지 내내 반지낀 손가락을 바라보았는데, 밤에 그가 내게 구혼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등려군 일기에 ×××사건의 분노와 그날의 살육 상황에 대하여 쓰여져 있는 것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등려군은 결코 일기를 남기지 않았다.중요한 것은 있지도 않은 일기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필적 조차도 같지 않은 글이었지만,

이렇게 방송이 되었다.

후지 텔레비전 방송국의 섭외부장은 어떻게 해명을 하였는가?

"나는 1996년 출판된 것에 따라서 신뢰도가 높은 평전《邓丽君的真实》이라는 책속에서 그녀를 일찌기 하나 하나 설명 되었던, 허용된 범위내에서 하였던 보도라고 여겼습니다"”《周刊新潮》2004년 2월 19일호

 

 


根本就没有所谓像《邓丽君的真实》书中所写的邓丽君的话。那个节目用了数十个根本就是很明显的错误事实,但令人更讶异的是,邓小姐过世了将近十年的此时,竟然将这本书说成是“可信度很高的评传”。
因为一则台湾的八卦报导,而在香港及日本引起燎原之火的“邓丽君==谍报员”之说法,唯一的根据都是谷正文的证词,而且他本人也承认那不过是臆测而已。而且,很热心地证实“邓丽君==谍报员之说”的谷正文,是曾在《独家报导》杂志中写了两年有关“白色恐怖”连载的人,之后以“白色恐怖秘密档案”之名集结成书。书的发行出版社是独家出版社,这个出版社和发行《独家报导》周刊杂志是同一家公司。

 

 

아예 이른바 《邓丽君的真实》같은 책속에는 쓰여진 등려군의 이야기가 없었다. 그 프로그램은 수십개의 근거를 가지고 하였지만 매우 분명한 잘못된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람들로 하여금 의아하게 한 것은 등소저가 세상을 떠난 뒤 근 10여년이 지난 이때, 뜻밖에 이책을 "신뢰도가 매우 높은 평전"이라고 한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대만의 스캔들 보도 그리고 홍콩과 일본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던"등려군이 첩보원이다"는 설의 유일한 근거는

바로 谷正文의 증언이었으며 게다가 그 자신도 그것은 그러나 억측일 뿐이라고 인정하였었다.뿐만 아니라 매우 열심히 등려군이 첩보원이라는 설을 증언하였던 谷正文은 일찌기《独家报导》잡지에서 2년간 백색 테러와 연관된 연재를 하였으며, 이후로 "백색 테러 비밀 문서"를 모아서 책으로 펴냈었다. 책의 발행 출판사는 独家 출판사이었고, 이 출판사는 《独家报导》주간 잡지사와 같은 계열 회사이다.

 

 

 

 

 

 





几度被谣传的谍报员之说,在邓丽君的生前完全找不到线索,应该是媒体捏造出来的内容。当然家人及友人也感到很疑惑,但也不是太重要的事,所以不是很在意。对于邓丽君过世后突如其来的谷正文证词,赵素桂说:
“如果她真是谍报员的话,那就成了三十年来连我这个母亲也不知道的事。所有海外的公演全都是我在安排,完全没有和国家安全局接触过。”
但是,事实上却发生了连邓小姐本人都不知情的“谍报员事件”。那就是和因中国报社第一次采访到邓丽君引起话题的《北京青年报》关键记者有关联的事件。

 

여러번  유언비어로 알려졌던 첩보원 설은 등려군이 살아 있을 때의 완전한 단서를 찾지 못하였다.마땅히 매체가 날조하여 만든 내용임에 틀림이 없었다. 당연히 가족과 친구들도 매우 의심을 가졌지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에 마음에 많이 두지 않았다. 등려군이 세상을 떠난 뒤에 갑자기 이처럼 나온 谷正文의증언에 대하여 赵素桂가 말을 하였다:

"만일 딸이 정말로 첩보원이었다면, 그럼 30년이 되도록,나 엄마 조차도 몰랐다는 말이 되는데, 모든 해외 공연은 모두 다 내가 관리한 것으로,

정말로 국가 안전국과는 접촉이 없었다."

 

在一九八五年一月二十九日关键记者打电话讲了一个钟头,采访到人在新加坡的邓丽君的访谈之事,被刊登在《中国青年报》,又被国际媒体转载,关键记者在中国媒体一举成名。说到“越洋电话”就成了关键的代名词。“越洋电话”就是打电话到国外的意思。在当时的中国,用电话打到国外采访之事是非常罕见,更何况采访到的人是众多人民所关心的邓丽君。这件事在媒体界及一般社会大众之中,也引来了许多注目。

 

 

1985년 1월 29일에 关键기자가 전화를 걸어서 한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였는데, 싱가포르에 있던 등려군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인터뷰한 일이, 《中国青年报》에 실렸으며,또한 국제 매체에 실렸으며. 关键기자는 중국 매체에서 일거에 유명하게 되었다.

“越洋电话”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关键의 대명사가 되었다.“越洋电话”는 곧 외국에 전화를 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전화를 걸어서 외국과 인터뷰를 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고,더욱이 하물며 인터뷰 대상인 사람이 아주 많은 인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등려군이었기에. 이 사건은 매스컴 세계와 일반 사회의 대중사이에서도 수 많은 주목을 불러 일으켰다.

 


关键是在一九四七年六月十七日出生于北京市。父亲关俊英是北京市朝阳区市政局长的共产党员。关键中学毕业后就进入军方当通信员,一九七二年被分发到北京市建材工业局的宣传科。又被调移到北京市修缮材料公司的劳动者理论组,于一九八0 年二月成为《北京青年报》的记者。追着名人跑的工作中,成功地采访到邓丽君是他当记者第五年的时候,三十七岁时拿到的独家新闻。因此关键被称为“先进记者”、“优秀青年记者”。
一九八六年初开始关键萌发了想去日本留学的想法。他认为去日本留学不仅可以拿到学位,还可以直接地联络上邓丽君。那年的夏天,他的日本新闻记者友人介绍一位到中国旅行的日本人给他认识。为了就是自费到日本念书时,可以请那位日本男人当他的保证人。把“谍报员说”扩大的《邓丽君的真实》之中也提到关键,记载了许多虚拟的描述。例如指称这个日本人其实是“台湾的情报员归化成日本人的人”、“是邓丽君引荐这个情报员给关键记者”等。这又是另一个完全造假的内容。

 

关键은 1947년 6월 17일에 북경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关俊英은 북경시 朝阳区市政局长의 공산당원이었다. 关键은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

곧바로 군대에 입대하여 통신원이 되었다. 1972년 북경시 건재공업국의 宣传科로 배치가 되었다. 또 다시 북경시修缮材料公司의 劳动者理论组

로 전근되었다. 1980년 2월에 《北京青年报》의 기자가 되었다.유명인사를 뒤 쫓는 일을 하던중, 성공리에 등려군을 인터뷰한 것은 그가 기자를 한지 5년째가 되던 때로, 37살때 차지한 신문 특종이었다.

이로 인하여 关键은 “先进记者”、“优秀青年记者”라고 불리웠다.

1986년 초에 关键은 일본 유학을 할 생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을 가는 것은 단지 학위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또한 직접 등려군과 연락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해 여름 그의 일본 신문기자 친구는 중국에 여행을 온 일본인을 그와 인사를 시켜 주었다.

설령 자비로 일본에 가더라도 공부를 할때를 위하여 그 일본 남자에게 그의 보증인 되어 주기를 부탁할 수 있었다.

“谍报员说”을 확대하였던《邓丽君的真实》 가운데에서도 关键이 나오지만, 수많은 거짓된 묘사가 실려 있었다.

예컨데 이 일본인은 사실상 "대만의 정보원이 일본인으로 귀화한 사람"이거나,"등려군이 이 정보원을  关键기자에게 추천하였다"등등을 지칭한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완전히 날조된 내용이었다.

 

 

 


关键于一九八七年一月二十三日搭中国民航机到达成田,来接机的保证人带他到在新宿的东京语言学校报到。当天晚上就在保证人横滨的家中开欢迎会。他最初是住在学校的宿舍中,但因同寝室的室友都是别国籍的学生以致无法安心读书,所以就搬到杉并区本天沼的房子和中国人一起住。后来又因“某个理由”在不得已的情况下又搬到调布市若叶町。终于把人在北京的三十六岁妻子及十一岁的女儿叫来同住。
到了一九八八年,关键前半年都在上日文课,但后半年就必须面对选择。那就是是否要进入评论家养成的专门学校就读,或是去念大学。如果可能他更想去美国。
一九八八年十月,东京地区中国留学生学友会创办了《新大陆》这本杂志。编辑部是设在东京饭田桥的中日友好会馆后乐寮一六八号室。关键从一九八九年的一月号开始加入编辑工作,每次都会自己写稿。这本杂志目的是为了宣传中国而专写给留学生看的内容,所以出版的经费有中国大使馆的教育部援助。

 

 

关键는 1987년 1월 23일에 중국민항기를 타고서 成田공항에 도착하였는데, 마중을 나온 보증인은 그를 데리고 동경언어학교에 가서 등록하게 하였다. 그날 밤에 보증인의 横滨(요코하마)의 집에서 환영회를 열었다.

그는 처음에는 학교 기숙사에 있었으나, 같은 방 친구들이 모두 다 다른 나라 학생들이어서 마음놓고 공부를 할 수 없었기에

杉并区 本天沼에 있는 집으로 이사하여서 중국인들과 같이 살았다. 나중에 또 "어떤 이유"로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다시 调布市 若叶町

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북경에 있던 36살의 아내와 11 살의 딸을 불러서 함께 살았다.

1988년이 되자, 关键은 전반기에는 일본어 공부를 하였지만, 후반기에는 반드시 선택을 하여야 하였다.

그것은 바로 평론가 양성 전문학교에 진학 할지, 아니면 대학에 갈 지를 결정하여야 하는 것이다.

만일 가능하다면 그는 미국에도 갈 생각이었다.

1988년 10월 동경지구 중국 유학생 학우회는 《新大陆》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편집부는 동경의 饭田桥에 있는 中日友好会馆

后乐寮 168호실에 있었다. 关键는 1989년 1월호부터 편집부 작업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는데, 언제나 스스로 원고를 썼었다.

이 잡지의 목적은 중국을 홍보하는 것과 유학생에게 볼 내용을 오직 쓰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출판경비는 중국대사관의 교육부가 도와 주었다.


一九八九年四月,在中国大陆因胡耀邦去世,在各地发生很多要求democratization 的students运动。这时期的关键刚好从语言学校毕业后到日本拓殖大学当旁听生。为了呼应国内,在日本的留学生当中也展开了许多活动。在后乐寮里聚集了二十多人参加讨论,结果发出支持democratization 的声明。关键没有公开姓名但其实是活动的主要成员之一。这时期他也出现在留学生于五月十八日办的支援democratization 组织的“留学生团结联合会”,二十一日在东京港区的三河台公园举行democratization 的串联集会。
打出的口号是“李鹏总理drop the reins of government”、“ democratism 万岁”、“反对施行martial law”。当初预测只有一百名的参加者,结果却来了二千五百人。这一天在大阪、名古屋、仙台也有举行集会,全日本约有四千人参加。几乎所有的留学生团体都一反常态地主张反对government 的立场,当中还有人写传单支持×××的students,写出激烈批评文章的人就是关键。某个活动家说在示威的队伍中碰到他,和他聊过之后可以感受到他“思想解放”。还曾听他很高兴地提到“在大陆第一次采访到邓丽君之事”。但是长发、清瘦、寡言的关键,自从参加这个示威活动之后,他就消失在所有democratization 活动的现场。

 

1989년 4월 중국 대륙에서는 胡耀邦이 사거하였기에 여러 곳에서 매우 많은 democratization를 요구하는 students운동이 발생되었다.

이시기의 关键는 마침 언어 학교를 졸업하고는 일본拓殖大学의 청강생이 되었다. 국내와 호응하기 위하여, 일본의 유학생들 중에서도

수많은 활동이 전개되었다. 后乐寮에 20 여명이  토론에 참가하러 모여서, democratization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되었다.

关键는 이름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활동하는 주요한 멤버중 한명이었다.

이시기에 그도 유학생들이 5월 18일에 주도한 democratization을 지원하는 조직인"留学生团结联合会”에 나타났으며,

21일에 동경의 港区의 三河台公园에서 democratization을 위한 연대 집회를 거행하였다.

내걸은 구호는 “李鹏总理drop the reins of government”、“ democratism 만세”、“martial law실시 반대”이었다。

당초 예측은 단지 100 명이 참가할 것이었으나, 오히려 2500 여명이 오게 되었다.

이날 大阪、名古屋、仙台에서도 집회가 열렸으며, 전 일본에는 약 4000 명이 참가 하였다.

거의 모든 유학생 단체가 모두 다 평상시와는 다르게 government를 반대하는 입장을 주장하였으며 그중에는 또 ×××을 지지하는 전단을 쓴 students도 있었는데, 격렬하게 비판을 한 글을 쓴 사람이 바로 关键이었다.

어떤 활동가는 시위하는 무리 가운데에서 그를 우연히 만나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그가 "思想解放"을 하였다고 느낄수 있었다.

또한 일찍이 그가 매우 흥분하여서 대륙에서 최초로 등려군과 인터뷰를 한 일을 이야기한 것을 들었다고 하였지만 머리가 길고 야위고

말수가 적은 关键은 이 시위활동에 참가한 뒤부터, 그는 모든 democratization활동의 현장에서 사라지었다.

 

 

 


×月×日,发生了×××事件。从此一直到七月间,中国公安人员就开始注意留学生的动向。关键初到日本时先在池袋、新宿的电影院中做清洁工作,之后又在中东野的柏青哥店打工。最后终于能每周帮香港杂志《争鸣》、《动向》、《镜报》写稿赚取生活费,都写些有关北京political 一些内幕,分别以“罗泳”等几个不同的笔名写稿。因“某个理由”而搬到调布市住的原因,就是不想让同住的人知道他大量写稿传真给香港的事。
关键只有见过邓丽君一次,在一九八九年十月二十八日朝日电视台录制“邓丽君十五周年纪念特别节目”的时候遇见,以记者身份进到观众席。他到日本之后就用“关敏男”的名字和唱片公司接触。这个名字曾向大陆《人民日报》的解说员提过。关键曾写信寄到新加坡邓丽君的家中过,写着因为到日本留学,所以经济困难希望能援助。邓小姐因此曾跟弟弟长禧提到“你记得关键那个记者吗?该怎么办?”结果寄了二百美金给他。

 

 

 

모월 모일 ×××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부터 내내 7월 동안 ,중국 공안이 유학생의 동향에 주의를 하기 시작하였다.关键는 처음 일본에 왔을 때 池袋,新宿에 있는 영화관에서 청소작업을 하였고 이 뒤로 또 다시 中东野의 파친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마지막에는 매주 홍콩 잡지《争鸣》、《动向》、《镜报》의 원고를 써주고 생활비를 벌 수 있었다.모두 다  북경의 political한 내막과 관련된 것을 쓴 것으로, “罗泳”등으로 나누어서 여러개의 같지 않은 필명으로 원고를 썼었다.

"모종의 이유"로 인하여서 调布市에서 이사하여 산 원인은 바로 뜻밖에 같이 사는 사람이 그가 대량으로 원고를 써서 홍콩으로 팩스를 보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关键는 단지 등려군을 한번 보았을 뿐인데. 1989년 10월 28일 아사히 텔레비전방송국이 "등려군 15주년 기념 특별 프로그램"을 녹화할 때 우연히 만났던 것이다. 기자의 신분으로 청중석에 나갔다. 그는 일본에 온뒤에 “关敏男”이라는 이름으로 음반 회사와 접촉을 하였다. 이 이름은 일찍이 대륙의《人民日报》의 해설원에게 제기하였던 적이 있었다.

关键은 일찍이 싱가포르의 등려군 집으로 편지를 써서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일본에 유학을 하고 있기에 경제적으로 곤란하니 도와 주기를 바란다고 썼었다.등소저는 이때문에 일찎이 남동생 长禧에게 "너는 关键라는 기자를 알고 있니?어떻게 하면 되겠니?"하고 물어 보았다. 그래서 미국돈 200 달러를 보내주었다.

 

 

 


关键突然出现在邓丽君面前,眼看录影即将结束时靠近去叫邓小姐。邓小姐一听到他的名字就唤起所有的记忆,工作人员看到有点困惑的邓丽君就将他挡住,关键说:“可以一起拍照就好吗?”邓丽君拒绝并且快步离开。因为她不安地想到×××事件后,说不定又会被当作政治上的利用。经过这短暂的接触并且被强烈拒绝的关键,对邓丽君的关心就急速的消失了。

 

 

关键이 갑자기 지금 등려군의 앞에 나타 났는데. 녹화하는 것을 보다가 곧 끝날때 다가가며 등려군을 불렀다.

등소저는 그의 이름을 듣자 모든 기억이 떠올랐는데, 일하는 직원이 조금은 곤혹스러워하는 등려군을 보고는 그를 제지하였다.

关键이 말을 하였다.: "함께 사진을 찍어도 좋은 가요?" 등려군이 거절을 하고 아울러 빠르게 떠나 가버렸다.

그녀가 불안하게 ×××사건 뒤에 아마도 또 정치적인 이용을 당할 까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짧은 접촉과 아울러 강한 거절을 당했던 关键은 등려군에 대한 관심이 급속하게 사라져 버렸다.

 

 

 


关键从一九八八年到一九九一年以“访问亲友”的名义一共回北京四次,做了很多的采访,包括访问了北京市副市长及司法部副部长等。
第四次回北京是在一九九一年九月八日的夜晚。关键在九月十一日上午,跑到在《人民日报》大众工作部工作的妹妹的办公室,请她拿出党内的文书档案借他看。请她带出五百多份党内的文书资料。送到市内朝阳区的家里,资料叠起来大概有二十公分厚。十三日上午,妹妹又送来几个“秘密等级”的资料。下午关键到西长安街饭店和日本记者会合后一起回到家里,请他将资料安全地带出国。资料装在纸箱内用围巾包着,到了深夜记者正在影印资料,从电力的使用量察觉到有“异样”的北京市国家安全局就跑进记者的房内。影印已接近尾声,一共印了二百八十四张。

 

关键이 1988년 부터 1991년 까지 " 친지 방문"이라는 명분으로 모두 4차례 북경으로 돌아 갔으며 ,

北京市 副市长과 司法部 副部长등을 방문하였던 것을 포함하여, 매우 많은 인터뷰를 하였다.

4번째 북경으로 돌아 간것은 1991년 8월의 밤이었다. 关键은 9월 11일 오전《人民日报》대중부서에서 일하는 누나의 사무실로

달려 갔다.

누나에게 당내의 문서들을 꺼내와 빌려 주어서 보여 주기를 부탁하였다. 누나에게 500 부의 당내의 문서 자료를 꺼내오기를 부탁하였다. 시내의朝阳区의 집으로 보냈는데, 자료의 높이가 대체로 20 cm 정도이었다. 13일 오후 누나는 또 비밀등급의 자료 몇가지를 보내주었다. 오후에 关键는  西长安街饭店에서 일본기자와 만난 뒤에 함께 집으로 돌아 갔다.

그에게 자료를 안전하게 가지고 출국하는 것을 부탁하였다. 종이상자 내에 있는 자료는 머풀러로 싸여있었다. 깊은 밤이 되자 기자는 마침 자료를 복사하고 있었는데, 전력의 사용량 때문에 이상 한것이 발각되어서 북경시 국가 안전국이 방으로 뛰어 들어 왔다.복사는 이미 끝부분에 이르고 있었다. 모두 284 장을 인쇄하였다.

 

 

 

 

关键在九月十六日白天从某个在国家机构的女性友人那里拿到十多件的机密资料。约在晚上十点左右回到住宿的饭店。原来预定要在翌日回日本。晚上十一点多,房门被大声地敲着,突然开门进来的是北京市国家安全局的搜查员。搜查员照着纸上念:
“北京市人民检查分院批准北京市国家安全局合法执行拘提关键。”
搜查员出事搜查令后,为了找出“机密文件”、“秘密文件”开始搜房。关键全身颤抖不止,因为关键将被以“将国家机密非法提供给外国人士”、“间谍罪”被逮捕。被收押的秘密文件一共是五百四十三件。
第四次从日本返回北京也不是没有不安。关键在汪道涵访问日本时,曾在大谷东京饭店会面时,问到“回去没关系吗?”,得到的回答是“你没有任何问题吧”,所以关键就放心了。因为汪道涵就是成为党、政、军最高领袖江则民的前任上海市长,也被认定是接班人,更是对台湾的联络窗口“海峡两岸关系协会的会长”。关键相信有这么大“大人物”的保障
应该安全。

 

 

关键는 9월 16일 대낮에 국가기구에 있는 어느 여자 친구에게서 그곳의 10여건의 기밀 자료를 받았다.대체로 밤 10시 경에 숙소인 호텔로 돌아 왔다. 원래 예정은 다음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밤 11시가 지나서 방문이 큰소리가 나면서 두들겨 지더니,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들어온 것은 북경시 국가 안전국의 수사원이었다.

수사원들은 서류를 보면서 읽었다: "北京市 人民 检查分院은  北京市 国家安全局이 合法的으로 关键을 拘禁 执行할 것을 批准함。”
수사원들은 영장을 제시한 뒤에 “机密文件”、“秘密文件”을 찾기 위하여 방을 뒤지기 시작하였다.关键은 온몸을 떨었으나 멈출 수 가 없었는데, 关键이 " 국가 기밀 을 불법적으로 외국인사에게 제공함" " 간첩죄"등으로 체포되었기 때문이었다.

압수된 비밀문서는 모두 543 건이었다.

4번째 일본에서 북경으로 돌아 온것도 불안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关键은 汪道涵이 일본을 방문하였을때 일찍이 大谷东京饭店에서 만났을 때 "돌아가도 괜찮나요?" 하고 물었더니, 얻었던 대답은 " 당신은 어떤 문제도 없어요 " 그래서 关键은 안심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汪道涵은 곧바로 당,정,군 최고 영수인 江则民의 전임 上海市장으로 또한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었고, 또한 대만에 대한  관련 창구인 "海峡两岸关系协会的会长" 이었다. 关键은 이같이 대단한 " 거물인사"의  반드시 안전하다는 보장을 믿었다.

 

 


被逮捕的关键四十四岁。提供内部资料的妹妹也同时被逮捕。一九九三年四月二十九日北京市中级人民法院作出判决。因非法将国家机密提供给外国人惩役十五年,褫夺公权三年,间谍罪惩役十年,褫夺公权五年。复数犯罪惩役二十年,褫夺公权五年。关键被送进北京第一监狱,关在十个人一间的牢房里。
因知名记者被逮捕而引发诸多揣测。于是中国共产党北京市委员会为了消除谣传,提高国家安全意识,不得已之下只好在《北京日报》(一九九三年五月十五日)上报导详细的事件内容。因为“他被逮捕,有很多人不明白原因而产生怀疑,造成诸多揣测”。因此在中国盛传他“是日本间谍”、“是台湾间谍”,报纸上写关键是受台湾国民党驻日间谍组织的请托回国。关键是因为认识了台湾的《中央日报》记者,然后被介绍给国民党海外工作委员会的驻日代表。回北京前一天,在东京新宿百货公司的咖啡厅二楼见面时,收取了五万日円。因此是接受“间谍组织”的要求,进行情报收集。  

 

 체포된 关键은 44살이었다. 내부 자료를 제공한 누나도 같이 체포되었다. 1994년 3월 29일 북경시 中级人民法院은 판결을 내렸다. 불법적으로 국가 기밀을 외국인에게 제공한 것으로 인하여 징역 15년, 公权박탈 3년, 간첩죄 징역 10년 ,公权박탈 5년 이었다. 복수 범죄는 징역 20년,공권 박탈 5년 이었다. 关键은 북경 第一监狱으로 이송되어서, 한방에 10명이 있는 감방에 갇혔다.

알려진 기자이기에 체포된 이후로 수많은 억측이 일어 났었다.그래서 중국 공산당 북경시 위원회는 유언 비어를 없애고,국가 안전 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北京日报》(1993년 5월 15일)에 상세한 사건 내용을 보도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 그가 체포되자 수많은 사람들은 원인을 잘 몰랐기에 의심이 생기며 많은 억측이 유발"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하여 중국에서는 그가" 일본의 간첩이다", "대만의 간첩이다" 라고 널리 알려졌으며,신문에는 关键가 대만 국민당 주일 간첩조직의 청탁을 받고서 귀국한 것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关键은 대만의 《中央日报》기자를 알고 난 뒤 국민당 해외 공작 위원회의 주일 대표를 소개받았기 때문이었다.북경으로 돌아 오기 하루 전에 东京新宿의 백화점의 커피점 2충에서 만났을 때 5만 엔을 받았었다.이로 인하여 "간첩조직"의 요구를 받았고 정보 수집을 진행하였다는 것이었다.

 

 

 

 

 


当然,北京市国家安全局提供的“自白”是有夸大之处。例如说他是东京留学生组织的指导者以及拥有五个头衔,除了是《新大陆》的编辑以外都是假的。在《北京日报》头版上还刊载关键笑容满面,左手拿着许多一万日圆钞票的照片。这应该是被逮捕后拍的照片,理由是想造成关键是因为金钱目的而成为“间谍”的印象。
关键在这年九月十七日移监到北京市郊外的北京市第二监狱。然后就发现他的下颚长了恶性肿瘤,就“保外就医”。但被诊断为无法痊愈,为了接受治疗被允许假释。
回到社会上的关键找不到安定的工作。因为缺乏治疗费也曾求助日本友人,请他们寄钱。以捡破烂为生的他,有一天在废纸堆中发现混在里面的共产党中央的资料,关键就报告给旧时的长官。因为他想表示对党效忠的心意。长官就跟他说:“看来你已经洗心革面了。”过了不久,关键就离开人世。
以前关键工作过的《北京青年报》社内至今仍然忌讳谈及此“事件”。住在北京市内关键的妻子至今也沉默不语,当然她也不知道邓丽君对关键而言,在政治上的工作及任务相关的“后续”之事。
당연히 북경시 국가 안전국이 제공한 "자백" 은 지나 친 곳이 있었다.예컨데 그가 동경 유학생 조직의 지도자 이고 아울러 5개의 학위를 가지고 있다고 했으나,《新大陆》의 편집이외에는 모두 다 거짓이었다.

《北京日报》 1면에 关键이 웃으면서 왼손에 수많은 1만엔 일본지폐를 들고 있는 사진을 게재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체포된 뒤에 찍은 사진이었다. 이유는 关键이 금전을 목적으로 간첩을 했다는 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생각되었다.

关键은 그해 9월 17일 북경시 교외에 있는 北京市第二监狱으로 이감이 되었다. 이뒤에 그의 턱에 악성 종양이 자라서, 곧 형무소 밖에서 진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진단을 받고는 완치할 방법이 없다고 하여서 치료를 위하여 가석방이 허락되었다.

사회로 돌아온 关键은 안정된 직장을 찾을 수 없었다. 치료비가 없었기에 또 일전에 일본인 친구들에게 돈을 부쳐달라고 도움을 구했다.고물을 주워서 살던 그는 어느날 폐지 더미 속에서

흩어져 있던 공산당 중앙의 자료를 발견하게 되는데.关键은 곧바로 옛날의 상관에게 보고하였다.

그는 당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는 마음을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상관은 그에게 말을 하였다:'보아하니 너는 이미 마음을 씻고 깨끗해졌구나"

"머지 않아서, 关键은 세상을 떠났다.

이전에 关键이 일 했던 《北京青年报》사내에는 지금도 여전히 이"사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기피되고 있다.북경시내에 살고 있는 关键의 처자식은 지금도 말없이 묵묵히 지내고 있다.

당연히 그녀도 등려군과 关键의 처지에서 말하자면 정치적인 공작이나 임무의 관련의 “后续”의 은 알지 못한다.

 




和邓丽君曾订过婚但未能结婚的郭孔丞,于一九八六年七月二十三日在香港香格里拉饭店举行结婚典礼。结婚的对象是在银座高级俱乐部“皮罗波”工作的日本女人。
最后的情人史帝芬·保罗于邓小姐过世二年后的的一九九七年,在泰国清迈待了半年之久。有人看到他住在便宜的帕克怕卡饭店,用摩托车载着当地的女人在街上奔走。一九九八年向香港无线电视翡翠台(TVB)兜售邓丽君私人录影带画面,作成了“邓丽君 最后私密生活”的特别节目。每天播出十五分钟,连续播出九天。一九九八年、一九九九年回香港邓丽君的房子居住了约半年后又不见踪影。最后在二000 年确认到他回法国待了四个月。和邓家人的联络,从此就断讯了。
最初和招聘邓丽君计划有关的王兆国,于一九九0 年十一月成为中国共产党中央台湾工作办公室主任,国务院台湾事务办公室主任,是党与政府对台湾政策的负责人。二00 三年又升为全人代副委员长,于二00 四年召开“宪法改正案报告”。而贾春旺于一九九八年三月当上公安部长,二00 三年三月在全人代中被选为最高人民检察院院长。

 

등려군과 이미 약혼을 했으나 결혼을 하지 못했던 郭孔丞은 1986년 7월 23일에 홍콩의香格里拉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의 대상은 银座高级 클럽“皮罗波”에 일하는 일본여자이었다.

마지막의 애인인 스테판 파올로는 등소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난 1997년 ,태국 치앙마이에서 반년동안 머물렀다.

사람들은 그가 저렴한 帕克怕卡호텔에 머물며, 오토바이에 현지 여자를 태우고 거리를 분주히 돌아 다니는 것을 보았다. 1998년 홍콩의 无线电视翡翠台(TVB)에 등려군의 사생활 비디오 테이프 를 팔아서 "등려군 최후의 비밀스런 사생활"이라는 특별 프로그램을 제작하였다.

매일 15분씩 방송하였으며 연속으로 9일을 방송하였다. 1998년 1999년  홍콩으로 돌아 와서 등려군의 집에서 약 반년 동안 살았으나 종적을 보지는 못했다.마지막으로 2000년에는  그가 프랑스로 돌아 가서 4개월을 지냈다는 것이 확실하였다. 등려군 집식구와는 연락이 이때부터 끊어지게 되었다.

 

최초로 등려군 초청계획과 관련있는 王兆国은 1990년 11월에 중국 공산당 중앙 대만 공작 办公室主任, 국무원 대만 사무 办公室主任, 이 되었고 이것은 당과 정부의 대만 정책에 관한 책임자 이었다.

2003년 또다시 全人代副委员长로 승진되었고 2004년 “宪法改正案报告”를 하였다. 그리고 贾春旺은 1998년 3월에公安部长에 임명되었으며 2004년 全人代에서 最高人民检察院院长으로 피선되었다.

 





一九八九年八月底的香港和往年一样,每天都很热。二个月前发生的×××事件带给歌手邓丽君精神上很深的伤害。曾经决定要到中国办的演唱会,在×××广场上应该会有百万人欢喜聚集的样子,想像无数次的梦想因而破碎了。
“无法有唱歌的心情”

这句向工作人员说的话,道尽了“所有”邓丽君内心的写照。

 

 

1989년 8월 말 홍콩은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날마다 매우 뜨거웠다. 2개월전 발생한 ××× 사건은 가수 등려군에게 정신적으로 매우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일찌기 중국에 가서 콘서트를 하려고 결정하였으며, ××× 광장에서  백만 명의 사람이   모여서 기뻐하는 모습을 여러번 상상하였지만 부서져 버렸다.

" 노래할 마음이 있을 수 없었다"

이말은 일하는 동료에게 하였던 말로, 등려군의 내심을 말로서 " 모두 "다 그려냈다.


“常梦见从浅水湾上有很多tank 开过来”,就是PLA 的tank,轰隆隆的巨响朝自己住的赤柱传来。“很恐怖,我一定被他们盯上了。”说着此话的邓丽君对在大陆发生的事件,无法当作与己无关之事,参加支援democratization 演唱会,当×××事件发生后也一直在手臂上带丧章,所以认为自己已成为被中国监视的对象也不是不可思议之事。
取消六月份原本预定去日本宣传的行程,也是因处在这种精神不安定的状况下所致。但经过时间的流逝,邓丽君的情绪有了些和缓。金牛座唱片公司则安排十月去日本之前,让日本媒体到香港采访她的计划。

 

 

"늘 浅水湾에서 수많은 탱크들이 밀려오는 것을 꿈속에서 보았어요",즉 PLA(중국인민 해방군)의 탱크가 큰 소리를 울림이 자기가 사는 赤柱(스탠리)로 전해 왔어요.

"매우 무서웠어요. 나는 늘 그들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어요" 이말은 등려군이 대륙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언급한 것으로, 자기와 무관한 일로 생각할 방법이 없어서,democratization를 지원하는 콘서트를 참가하였고, ××× 사건이 일어난 뒤에 내내 팔에 丧章을 두르고 있었기에 스스로 이미 중국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

6월에 원래는 일본에 가서 홍보를 할 일정을 취소한 것도 이런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하에 일어난 것 때문이었다.그러나 시간이 흘러 가자,등려군의 정서도  조금은 풀어지게 되었다.

金牛座唱片公司은 곧바로10월 일본으로 가기 전에, 일본매체가 홍콩으로 와서 그녀를 인터뷰하는 계획을 안배하였다.


出现在电视或杂志的采访团面前的邓丽君和平常一样,表情显得很安详。拍完照录完影的某个晚上,租来一条船,想在甲板上用餐。因为鱼虾的美味,随着也喝多了葡萄酒。原本带着墨镜用餐的邓小姐有些醉意之后,就干脆拿掉墨镜继续喝。不知道是谁说了“唱歌吧!”,起身而立的邓小姐开心地用手摸住两颊说:
“我想唱《香港》!”
这首曲子是抒情歌也包涵了邓丽君对香港的情愫。邓丽君清唱着这首歌,时而高高举起两手的食指,时而用手抚住胸前或脸上,兴致高昂地唱着。和往常她常常作的V 字型手势一样没有任何异状。

 

 

텔레비전 또는 잡지의 인터뷰 기자 앞에 모습을 들어낸 등려군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표정이 매우 침착해 보였다.

사진을 다 찍고 녹화도 다 마친 어느 날밤, 배 한척을 빌려서 갑판위에서 식사를 하려고 생각하였다. 생선과 새우가 맛이 좋았기에 이어서 포도주도 많이 마셨다.

원래는 선글래스를 쓰고 식사를 하는 등려군도 조금은 취기가 있은 뒤라, 호기 있게 선글래스를 벗고는 계속해서 마셨다.

누가 "노래해!" 라고 말을 하였는지는 몰랐지만 일어난 등려군은 즐겁게 손으로 양볼을 만지면서 말을 하였다:

"내가 《香港》을 부를게요!"

이노래는 서정적인 노래이면서 등려군이 홍콩에 대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등려군이 맑게 이 노래를 다 부르면서 때때로 양손의 식지를 높게 들거나 손으로 앞가슴이나 얼굴을 만지기도 하였고, 기분이 좋아서 노래를 하였다. 평상시와 같이 그녀는 늘 V 자 형태의 손가락 모양을 짓는 등 어떤 이상도 없었다.

 


翌日,在浅水湾海边摄影的时候,邓丽君身穿黑洋装及白色外套,头上戴了一顶镶有黑边的草帽,手上拿着白丝质的披肩,面对镜头脸上挂着微笑。背景是以前的浅水湾酒店的大门。这个饭店有法国的里比艾拉式建筑物及意大利风格的庭园的遗迹,现在是一间餐厅。香港岛上的观光胜地。邓丽君的优雅刚好和这里的幽美空间融为一体。
在这家由贝尼秀拉饭店经营的欧式餐厅“阳台餐厅”,及后方有高楼大厦作背景的拍摄持续进行下。
“我不会将现在的心情忘记。”

 

다음날 浅水湾 해번에서 촬영할 때, 등려군은 검은 빛 양장과 흰 빛 외투를 입었고 머리에는 검은 빛 테두리가 있는 밀짚모자를 쓰고 손에는 흰 명주 망토를 손에 들고서 렌즈 앞에서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배경은 이전의 浅水湾호텔의 정문이었다.

이 호텔은 프랑스의 里比艾拉식 건축물과 이태리 스타일의 정원의 유적이 있으며 지금은 식당이다.

홍콩섬에서 관광 명승지이다. 등려군의 우아함은 때 마침 이곳의 그윽하고 아름다운 공간과 하나로 어우러 졌다.

이 건물에는 贝尼秀拉(peninsula) 호텔이 경영하는 유럽식 식당“阳台餐厅”이 있고 이어서 뒷쪽에는 고층 빌딩이 만드는 배경을 계속하여서 촬영을 하였다.

 

 

"나는 지금의 심정을 잊을 수 없어요"

 


她不是在向谁说此话而是在喃喃自语。×××事件成了悲伤记忆的……这就是日后贴在巴黎家中寝室的那一张照片当中所蕴涵的深意。移居到巴黎的邓小姐,每天一望到这张在浅水湾拍的相片,就想起要在×××办的百万人演唱会梦想无法实现而悔恨及愤怒。
邓丽君走到可以瞭望浅水湾海面的阳台上,一阵阵小波浪拍打着海岸边,脸上浮现着宁静微笑的她。终于把外套脱掉,轻轻地将披肩挂在左肩上。连续的快门声下刻画了许多永恒的瞬间。一九八九年的邓丽君被永远地纪录下来。

 

 

 

 

그녀는 누군가를 향하여 이말을 한것이 아니라 스스로 중얼댄 것이었다.

×××사건은 비참한 기억의...... 이것은 바로 나중에 파리의 집의 침실에 붙어 있던 한 장의 사진속에 함축되어 있는 깊은  뜻이 되었다.

파리로 이주한 등려군은 날마다  浅水湾에서 찍은 이 사진을 바라보며 ×××에서 하려던 백만인 콘서트를 꿈속에서 그리며 실현할 도리가 없어서 회한과 분노를 되새겼을 것이다.

등려군은 浅水湾의 바닷가를 바라 볼 수 있는 베란다로 달려갔는데, 간간히 작은 물결이 해안가를 부딪치고 있었고, 얼굴에 편안한 미소 짓던 그녀는, 마침내 외투를 벗고 가볍게 망토를 왼쪽 어깨에 둘렀다.

연속하여 터지는 경쾌한 샤타 소리는 수많은 영원한 순간을 새겼다.

1989년의 등려군은 영원히 아로새겨 졌다.

 

 

 


 

 

后记

张玉玲小姐是一九九五年十一月发行的邓丽君《星愿》专辑中朗诵邓小姐遗作之人。听她清澈的声音,清楚地传达对邓小姐的深厚友谊。问张小姐“最深刻的记忆?”时,“没有真正的怀念”这句话令人出乎预料。她又说“不知道她到底是怎么样的人”“至今仍然无法相信她已经过世,所以不听音乐也不看照片”应该是内心发出来落寞的感情表现吧。张小姐会如此说,是因为邓小姐不会说出真心话,只能揣测她内心真正的想法。张小姐认为“从小就成名的她,在精神上应该很孤单,但她仍然不会将脆弱及悲伤的一面表现出来,总是表现出一副很快乐的样子”,曾作过空服员又是同世代的张小姐内心和邓小姐有相同的感受。这是我一九九六年在台北和她谈话时的一幕。

 

 

후기

张玉玲 소저는 1995년 11월 발행된 등려군《星愿》앨범중에서 등소저의 유작을 낭독한 사람이다.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를 들으면, 청초하게  등소저에 대한 깊고도 도타운 사랑이 전달된다.

장소저에게 " 가장 깊이 새겨진 기억은?"하고 물으니, " 진정한 그리움은 없어요"이말은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녀는 또 말을 하였다" 그녀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 지금도 여전히 그녀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서,음악을 듣지 않거나 사진을 보지 않아요 "  속으로 쓸쓸한 감정을 들어내고 있었다.

장소저는 이처럼 말을 하였는데 이것은 등소저가 진심어린 말을 하지 못하고, 단지 그녀의 내심의  진정한 생각을 추측할 수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소저는 "어렸을 때 부터 유명해진 등려군은 정신적으로 매우 고단하였으나 그녀는 여전히 여리고 슬픈 면을 들어 낼 수가 없었기에 늘 매우 쾌활한 모습만 들어 냈지요"

일찌기 스튜어디스가 되었고 또한 같은 시대의 장소저 속마음은 등소저처럼 같은 감수성을 가졌다고 여겼다.

이것은 내가 1996년 대북에서 그녀와 이야기를 하였던 한 장면이었다.

 

 

 


我访问过非常多的人,但是没有一个人讲过邓小姐的坏话,这是邓小姐人格上高尚的特质。另外给人印象深刻的是对方若是工作上的对象她就会保持距离。就像张玉玲小姐说的一样,即使是好友她也未必会说出真心话。邓小姐的内心到底是如何呢?因此从中国、台湾的现代史去找寻,便成为我的采访重点了。
想写邓丽君是在确定要开始执笔写《歌屋 都春美》(文春文库)的时候,要回溯到一九九二年,到表参道上金牛座唱片公司和负责的工作人员提及此事,他们回答说因为本人很少来日本,很难采访。这是最开始的时候,从那时候开始经过了十三年。在一九九四年十月二十四日邓小姐还跟我说“明年在香港找个时间好好聊”。结果最后的采访是在日本那次简短的谈话。

 

나는 매우 많은 사람을 방문하였으나 등소저의 험담을 한 사람은 없었는데 이것은 등소저 인격에서 고상한 특질이다.

이밖에 사람들에게 주었던 깊은 인상은 상대방이 만일 일하는 대상자이라면 그녀는 거리를 유지할 것이다.

마치 张玉玲 소저가 말한 것 같이 친한 친구인 그녀 조차도 진심을 말하려고 하지는 않은 것이다. 등소저의 속마음은 도대체 어떠하였을까? 그래서 중국부터 , 대만의 현대사를 찾아 보려고

하였는데 나의 인터뷰의 중요한 점이 되었다.등려군에 대하여 쓰려고 생각한 것은  《歌屋;카라오케 都春美; 미야코 하루미》(文春文库)를 쓰기 시작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이었으며,

1992년 을 회고하려고 할때 表参道(오모테산도)에 있는 金牛座唱片公司에 가서 책임자와 이일을 이야기 할때, 그들은 등려군이 그다지 일본에 자주 오지 않기에 인터뷰 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로, 이때 부터 시작하여서 13 년이 지났다. 1994년 10월 24일 등소저는 또한 나에게 말을 하였다:" 내년에 홍콩에서 시간을 좀 내서 이야기를 나누지요".

결과적으로 마지막 인터뷰는 일본에서의 그 때 짧은 대담이었다.

 

 


到了一九九五年,已经收集了许多基本资料,但却发生了日本地下铁沙林事件。不得不将邓小姐的采访搁下(注:有田先生这十多年来几乎每天都要上各日本电视台节目作评论,是有名的评论家尤其是日本奥姆教的权威),开始每天忙碌的日子。就在五月九日的傍晚,我从日本NTV 电视台要去赤坂的TBS 电视台的途中,接到友人的电话跟我说:“邓丽君过世了”、“啊……骗人的吧”,朋友又说:“连遗体的画面都播出来了”,到了电视台立刻确认外电新闻,也请他们借我看遗体的画面,当时我感到很过分,但不得不接受事实。每天依然忙碌不已但是仍然到台北参加五月二十八日的葬礼。坐在最后面的歌手王菲脸上哀伤的表情令我印象非常深刻。
到了棺前要献花的时候,看到横躺着的邓小姐的脸庞,我不禁地流下泪。和邓小姐侄女站着谈话,她说姑姑曾说过:“在日本有人要把我写成书”,听到此话时内心不是高兴而是令我难过不已,因为邓小姐曾说过:“我往后人生的重点就是为了中国的和平自由而努力。”,她那种认真卖力的精神我竟然未能充分倾听及理解。虽然邓小姐曾接受过无数的采访,但是谈及有关中国politics 问题的采访对她而言,应该是新鲜的,并且是她乐意的,但不料她竟然迎接这突如其来的死亡。我内心充满了失落感,有时候会有“写不出来”的想法。但这是邓小姐曾说过的:“我的荣幸”的工作,若不想放弃只好一点一滴的前进,因为这是和邓小姐的约定。

 

 

 

1995년이 되자 이미 수많은 기본 자료는 수집이 끝났으나. 오히려 일본에서 지하철 샤린 가스 사건이 일어났다. 어쩔 수 없이 등소저의 인터뷰를  보류하였는데,( 주:有田 선생은 이 십여년 간 거의 날마다 여러 일본의 텔레비전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평론을 썼던 , 유명한 평론가이며 특히 일본의 옴 진리교에 권위자이다), 날마다 바쁜 날을 보내기 시작하엿다.

5월 9일  저녁무렵에 나는 일본 NTV 텔레비전방송국에서 赤坂에 있는 TBS텔레비전방송국으로 가는 도중에 친구의 전화를 받았는데 내게 말을 하였다:

" 등려군이 세상을 떠났어!, 아......거짓말 이지!, 친구가 또 말을 하였다:' 유체 화면 조차도 모두 다 방송되었어" 텔레비전 방송국에 가서 곧바로 외국 보도를 확인하였다.

또 그들에게 유체의 화면을 보여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그때 나는 매우 긴장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날마다  여전히 바빴으나 여전히 대북으로 가서 5월 28일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가장 뒷줄에 앉아있던  가수王菲 얼굴에는 애상한 느낌이 내게 매우 깊게 인상을 새겨 주었다.

헌화를 하려고 관 앞으로 나아 가서  누워있는 등소저의 얼굴을 보고는 나는 흘러 내리는 눈물을 그칠 수 가 없었다. 등소저의 조카와 서서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녀는 고모가 이렇게 말을 하였다고 하였다: 일본에 어떤 사람이 나에 대해 써서 책을 만들려고 한다" 이말을 들을 때 속으로는 기쁘지가 않았고 오히려 고통을 참기 어렵기만 하였다. 왜냐하면 등소저가 전에 이렇게 말을 하였다:" 나는 이후로 인생에서 목표는 중국의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노력할 것예요." 그녀의 이런 진지한 노력하는 정신이 내게 뜻밖에  충분하게 경청하여 이해가 되게 하지는 못했다.

 

비록 등소저가 일찍이 무수한 인터뷰를 하였지만. 중국politics 문제와 관련된 언급을 한 인터뷰는 그녀로서는 신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울러 그녀는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뜻밖에 그녀는 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내심 쓸쓸함이 가득 차 있었고 때때로 쓸 수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이 것은 등소저가 전에 말한 것인데: " 영광"스런 일입니다.   만일   아주 작은 전진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면 이것은 등소저와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邓小姐过世时,金牛座唱片公司印制了邓小姐的年表,上面印有我要写邓小姐的书“将于近期发行”,甚至在邓丽君出道二十五周年纪念,一九九九年宝丽多唱片公司发行的精选辑的封带上也印有“有田芳生著《邓丽君 两个祖国(暂定)》 预计九九年发行”的消息。打算一口气写完它,但是从构想到完成花了十三年的理由是,无法决定整体架构所致,因为邓小姐的存在本身就是巨大无比。不是不写,是写不出来。如此的日子过了许久,后来接受作家服部真澄先生几次的架构建议,有了刺激及想写的意欲。
我边写着邓小姐的稿子,边看着书架。书架上放了许多邓小姐的照片,从年轻到熟年, 有空虚的表情,也有在巴黎住家那张珍贵的照片。她的签名、照片、录影带等资料环绕早我的四周,这种生活持续了好几年,就如同写都春美时一样,一天会听几小时的歌,所以我持续了每天听几小时邓小姐悠扬的歌声过日子。
若问自己是否有缺憾?那答案是“有的”。就是未能实现亲自将这本书交到邓小姐本人手里之事。而且也无法如愿地向养育她,最了解她的母亲赵素桂女士告知工作已经完成。因为母亲已于二00 四年十二月十八日享年七十八岁时辞世。是位非常安静又贤淑之人。
若是没有这位邓丽君口中的“最尊敬之人”,就不会有“歌手邓丽君”的存在。

 

등소저가 세상을 떠났을 때 金牛座唱片公司는 등소저의 연표를 인쇄하였다. 윗면에 내가 쓰고자 하는 등소저의 책이 " 가까운 시기에 발행한다:" 고 인쇄되어 있었고, 심지어 등려군 데뷰 25 주년 기념으로 1999년 宝丽多唱片公司가 발행한 정선 앨범의 띠지에도 " 有田芳生 저술《邓丽君  두개의 조국(暂定)》 99년 발행 예정”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일시에 책을 완성하려고 생각하였으나, 구상부터 완성까지 13년이나 허비하였던 이유는 구상을 전체적으로 결정할 수 밖에 없었던 탓이었다. 왜냐하면 등소저의 존재 그 자신은 비할 바 가 없이 매우 위대하였다.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쓸 수 없는 것이었다.이처럼 날짜만 많이 흘러 갔는데 나중에 작가인 服部真澄先가 몇차례 구상을 건의하였던 것을 받아 들였는데,

자극과 쓰고자 하는 의욕이 있었다.

나는 등소저의 원고를 쓰면서 서가를 바라 보기도 하였다. 서가에 놓여 있는 수많은 등소저의 사진은 어린 시절 부터 중년까지,공허한 표정도,파리의 집에 있던 그 진귀한 사진도 있었다.

그녀의 서명, 사진, 비디오 테이프 등 자료가 일치감치 나의 둘레를 에워싸고 있었고 이런 생활은 꽤 여러해 지속되었다. 마치 都春美의 이야기를 쓸때 , 날마다 몇시간이고 노래를 들었던 것처럼, 그래서 나는 날마다 몇시간이나 등소저의 유려한 노래를 들으며 날들을 보냈다.만일 스스로 안타까웠던 점이 있는지를 묻는 다면? 그 대답은 " 있다" 이다.

설령 이책을 등소저 본인에게 손으로 직접 전해 주지는 못하였지만.게다가 또한  그녀를 길러 주었고 가장 잘 이해하는 어머니 赵素桂여사에게 작업이 이미  다 완성되었다는 것을 뜻대로 알릴 방법이 없었다. 어머니가 이미 2004년에 12월 18일에  향년 78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분은 매우 차분하고 현숙한 사람이었다.

만일  등려군이 말하던 "가장 존경하는 분"이 없었다면, 아마도 “歌手邓丽君”의 존재도 없었을 것이다.


我曾于一九九八年七月十六、八日,二00 一年八月二十八日及二00 二年六月二十四日在台北采访赵素桂女士,加起来她足足和我聊了十多个钟头。原本计划作最后确认时于二00 四年十一月三日到台北想再见面,但因为身体不适只好作罢。
担任邓小姐秘书的弟弟长禧先生对我的采访可说是从头协助到结束。也感谢日本“养育之父”的舟木先生,及其工作人员们的证词才有采访的开端,尤其因舟木先生的协助,方便了许多的采访。
二000 年七月到北京采访时想和《北京青年报》的关键见面。因为他是中国第一位采访到邓小姐之人,但是当局有许多令人无法理解的回应,“不要查关键的事比较好喔!”“你想采访什么呢?”还接到中国共产党中央宣传部间接的忠告要“住手吧”。真的无法从命,本书的采访中最困难的一个就是和关键相关的事件。很想和到过日本留学的关键见面,但是已经无望了!而道出“邓丽君是谍报员”的谷正文先生如今病倒,也无法再和他交谈了。

 

나는 일찍이 1998년 7월 16일,8일 2001년 8월 28일과 2002년 6월 24일에 대북에서 赵素桂여사를 인터뷰를 하였는데,그녀가 나와 10 여시간이나 넘도록 더 하였다. 원래 계획은 마지막으로 2004년 11월 3일에 대북에서 다시 만날 생각을 하고 이를 확인하고자 하였으나 몸이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취소하였다.

등소저의 비서를 담당하였던 남동생 长禧는 나와의 인터뷰에 대하여 처음 부터 끝까지 협조적이었다고 말할수 있었다.

또한 일본의 "길러 준 아버지" 舟木에게 감사하였고, 그에 따라서 작업을 도와 준 사람들의 증언도 인터뷰 초기에 언급하였다. 특히 舟木의 협조로 많은 인터뷰가 쉽게 진행되었다.

2000년 7월에 북경에 가서 인터뷰할 때 《北京青年报》의 关键과 만날 생각을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등소저와 중국사람으로는 첫번쨰로 인터뷰를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으나, 당국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하게 하였는데," 关键의 일을 조사하지 마시오 그러는게 아마 좋을 것이오!"당신은 무엇을 인터뷰할 생각인가요?" 또한 중국 공산당 중앙 선전부의 간접적인 충고는 "손을 떼라!"는 것이었다. 정말로 지시를 따를 방법이 없어서, 이책에서 인터뷰하는 중에 가장 어려웠던 것은 바로

 关键과 연관된 일이었다. 일본에 유학생으로 왔던 关键과의 면담을 많이 생각하였지만 이미 바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등려군이 첩보원이다"이라고 말을 하였던 谷正文은 지금은 병으로 쓰러져 있어서 또한 그와 다시 이야기를 할 수 도 없게 되었다.

 


邓小姐最后的情人史帝芬,和他在香港见过面,但自从他回巴黎之后就消失踪影。不只是邓小姐,连她周遭的一些个性丰富的人们的踪迹也变得虚渺。各个章节的名称是从邓小姐唱过的歌里挑选出来的,登场人物的种种“人生的季节”都表现在那里面。
执笔的过程中有在国会图书馆关西分馆帮我找中文资料的大村纱惠子,及帮忙调查海外航空班次记录的武田纯子的协助。老是贸然要求馆野雅子帮忙翻译中文资料,采访翻译的胡家雯及郭丽兰也往来了十年。

 

于日本NTV 电视台节目的“THE SUNDAY”中,曾到香港、台湾、清迈采访时受到相川弘隆、行方久司、屋良朝建先生们的照顾。在编集的过程中有文艺春秋第二出版局局长松井清人、次长吉永龙太、担任校阅的坂本文先生的鼎力支持。若是没有各位长期的协助,是无法写成此书的。我想有点大声地传达我现在的心情,谢谢!
我将于五月八日到台湾参加邓小姐逝世十周年的纪念活动,想在墓前献上此书。然后顺道到双亲邓枢先生及赵素桂女士墓前报告。金宝山苍郁的茂林环抱着邓小姐们的安息地, 想必此景将永世绿意盎然。

등소저의 마지막 애인 이었던 스테판 파올로와  홍콩에서 만났지만 그가 파리로 돌아 간 뒤에는 종적이 사라져 버렸다.

등소저 뿐만이 아니었고 그녀의 주위의 몇몇 개성이 많은 사람들의 종적 조차도 거짓처럼 바뀌었다.

각 단원의 제목은 등소저가 불렀던 노래속에서 골라 낸 것이며, 등장인물의 면면도 "인생의 계절" 속에서 다 표현하고 있었다.

 

집필하는 도중에 국회 도서관关西(칸사이) 分馆이 내가 중국어 자료를 찾는 것을 도와 주었던 大村纱惠子,와 해외 항공편에 대한 기록을 조사하는 것을 열심히 도와주었던
武田纯子의도움도 있었다.

언제나 성급하게 馆野雅子에게 중국어 자료 번역을 부탁하였고 인터뷰한 자료를 번역하였던 胡家雯과 郭丽兰과도 10년이나 왕래를 하였다.

일본 NTV 텔레비전 방송국 프로그램의 “THE SUNDAY”에서 일찍이 홍콩 타이완 치앙마이에 가서 인터뷰할 때 相川弘隆、行方久司、屋良朝建등의 도움을 받았다.

편집하는 동안 文艺春秋의 第二出版局 局长 松井清人,次长 吉永龙太、교열 담당자 坂本文의 뜨거운 도움이 있었다. 만일 이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책을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좀 큰 소리로 현재의 나의 심정을 전달하고자 생각하였다. 감사합니다!

나는 5월 8일에 대만에 가서 등소저 서세 10주년의 기념 활동에 참여하여, 묘 앞에 이책을 바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차례로 두 부모님 邓枢과 赵素桂의 묘 앞에도 갈 예정입니다. 金宝山의 울창한  숲은 등소저의 안식처를 둘러 싸고 있으며, 틀림없이 이 경관은 영원토록 푸른 이 뜻을 넘치게 하리라.


二00 五年二月二十二日
有田芳生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류상욱 | 작성시간 11.04.24 [第四章]은 소개된 곳을 찾기가 힘들군요, 3장의 어느 부분에 포함되어 있는지
    어느 블로거가 올린 문장이 3장의 끝 부분과는 다른 내용이긴 합니다만 궁금하네요.. ;;
  • 작성자류상욱 | 작성시간 12.02.26 메일로 주신 번역이 제4장인 듯한데 지난 번에 작성한 鄧麗君 我的家在山的那一邊 (제5장 冬季里的向日葵)의
    앞 부분이 아닌지요..?
    我的家在山的那一边》(中文版)有田芳生著(续八: http://blog.sina.com.cn/s/blog_456dd27f0100j014.html
  • 답댓글 작성자류상욱 | 작성시간 12.02.26 글 편집은 했는데 내용의 흐름을 맞춰 보느라 늦어지네요, 사진도 역시 그렇고요.. ;;
  • 작성자류상욱 | 작성시간 12.02.26 我的家在山的那一边》(中文版)有田芳生著(续四 : http://blog.sina.com.cn/s/blog_456dd27f0100j00d.html
  • 작성자한강태공 | 작성시간 13.06.06 감사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