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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第五部分: 问君能有 几多愁:崎 岖情路 问君能有 几多愁:崎 岖情路(4)

작성자진캉시앤|작성시간11.03.03|조회수180 목록 댓글 0

第五部分:问君能有几多愁:崎岖情路问君能有几多愁:崎岖情路(4)

  邓丽君的父亲邓枢也出面帮女儿挡住媒体的纠缠。他说,以前邓丽君在高雄演唱时,正好秦祥林也在附近拍片,两人见过一次面,连话都没说过。所谓的两人的罗马假期,邓枢坚称,完全是巧遇,没有事先约好,仅由当地一位秦太太邀请,大家在一起吃过两次饭,如此而已。   在家休息了几天,9月9日,邓丽君安排到台中为新专辑出外景。一听到台中,让人不得不直觉联想到秦祥林也正好在台中的成功岭上拍片。“哦?还真巧,但是他忙他的,我忙我的。”面对记者的关切邓丽君还是一贯不承认的态度,笑笑地带过这个话题。   邓的好友张玉玲也曾“审问”过邓丽君究竟是怎么回事?邓仍告诉好友:“大概只有秦祥林心里明白,我的心里明白,哪有那回事嘛!”既然当事人这么坚决地否认,张玉玲信了她的话,还热心地趁着邓回台期间,帮她安排“相亲”,只不过男方一见面也是问她:“不是已经有了秦祥林吗?”“我真想好好地交个男朋友!”在台中忙碌地工作之余,邓丽君云淡风轻地说出她的心愿,似乎在暗示着她和他的情缘已走到尽头。    处,不要经常吵架,当事人有那种feeling,第三者不应干涉,也没有必要批评。”  拥衾而卧,回首一笑的照片,分不清是浓是淡。  这张照片华丽、奢靡且富贵,倒是很配她从前在大陆的封号:“靡靡之音”。    邓丽君与香港另一艺人的合影,无论装扮和相貌上,邓丽君都很有大姐的风范。而她穿的这套服装,和参加“欢乐满东华”穿的那套服装非常近似。  出席香港“爱心满华东”时与成龙的合影。邓丽君打着檀木扇子,很幸福的样子。   邓丽君与成龙的感情秘密是邓丽君爱情生涯中最引人入胜的一个段落,两个中国娱乐界最顶峰的人物之间的交往和情感的发展及结果也是众说纷纭。  邓丽君去世几年后,成龙曾推出自传,揭露了他和邓丽君交往的经过,在书中,成龙把他们之间感情最终无果的原因归结为自己当时太重视事业,以及他太在意与一群一起玩的兄弟。2002年曾有报道说,是年元月,也是邓丽君49岁冥诞的日子,成龙将通过现代录音技术,与邓丽君的声音合唱了一首《我只在乎你》,以示对她的纪念。而成龙也很感慨地表示,当初可以一起唱的时候没有唱,走了之后才唱,令人很是遗憾。  成龙在1998年的英文版自传中,暴料了他与邓丽君这段无疾而终的感情。  1979年,邓丽君因在日本发生了“假护照风波”而避居在美国洛杉矶,准备结束舞台生活,并重读课本以补当年少时休学的遗憾。而恰在此时,成龙也在美国主演电影《杀手壕》,当得知邓丽君也在美国的时候,成龙向台湾的邓父要了她的电话号码,于是,两个身处异乡的艺人了有了联系。成龙的到来,使正值灰心时期的邓丽君很感慰籍,他们的感情很快得到了升温。  就在邓丽君以为找到自己的真命天子之时,林凤娇出现了。  成龙与邓丽君分手,据说是因为两人观念的不同,并被盛名所累。对于邓丽君来说,可能很难忍受成龙的大男人主义,以及对她的忽视,所以有种说法是,邓丽君在他们分手前对成龙说:“你应该嫁给你那班兄弟。”  成龙是武林高手,而在唱歌方面也有成绩,这其中据说就有邓丽君的功劳,传说他们在美国的时候,邓丽君即将唱歌的基本功传授以成龙。也算是两人一段情的见证了。

 

第六部分:原来姹紫嫣红开遍:独上西楼原来姹紫嫣红开遍:独上西楼(1)-(图)

제6부분: 원래 아름답게 퍼지기 시작하였다; 홀로 서녘 누각을 오르니 원래 아름답게 퍼지기 시작하였다

 

  1983年底的《15周年纪念演唱会》开到了1984年,这场演唱会还破例在大陆得以广播。1984年1月,邓丽君在台北体育馆举办了两场《十亿个掌声》演唱会,演唱会星光熠熠,成为她一次标志性的演出。许多年以后,人们仍然将“十亿个掌声“与邓丽君这个名字联系在一起,而她也是唯一一个担当得起这个荣誉的歌手。1月底,邓丽君又巡回演唱于新加坡及吉隆坡。 

 

1983 년말에 《15周年纪念演唱会:15주년 기념 콘서트》가 1984년에 열렸는데 이번 콘서트는 관례를 깨고 또한  대륙에서 방송을 할 수 있게 하였다.1984년 1월 등려군은 대북 체육관에서  2차례의《十亿个掌声》를 열었는데 콘서트의 영광스런 빛은 그녀에게 반짝이는 첫 상징이 되는

공연이 되었다. 수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여전히 “十亿个掌声“(십억명의 박수소리)을 등려군과 함께 이 이름을 연상하고 있는데 그녀도

이런 영예스러움을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가수이다. 일월말 등려군은 또 순회공연을 싱가포르와 쿠알라룸푸르에서 가졌다.

 

 

 邓丽君随后又将事业重心转回至日本,并于当年2月推出单曲《偿还》,这首曲子在日本大受欢迎,4月进入日本流行榜前十名,随后一路走高,8月则跃升至第一名,刷新了日本乐坛的纪录。这首曲子还获得“日本有线放送大赏日本唱片大赏”、“日本演歌最受欢迎赏”,以及台湾十大金嗓子奖。而《偿还》这张专辑在1984年的日本销量达到了150万张。  由于《15周年纪念演唱会》在大陆的广播,邓丽君在大陆的影响力渐渐由在地下的口口相传成为了桌面上的话题,有关于邓丽君的种种禁忌也逐渐放开。

등려군은 이어서 또한 사업 본거지를 일본으로 이전하였으며 아울러 그해 2월달에 싱글《偿还》을 내놓았는데,이 노래는 일본에서 대상을

수상하였고 4월에는 일본 유행가 순위 10위에 들었으며 이어서 쭉 순위가 올라 가서, 8월에는 1위로 뛰어 올라, 일본 음악계의 기록을 새롭게 하였다. 이노래는 또한 일본 유선방송대상 일본 음반 대상, 일본 엔카 최우수상을 ,그리고 대만 10대 嗓子奖(가창상)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偿还》이 전집은 1984년 일본 판매량이 150만장에 이르렀다. 《15周年纪念演唱会》가 대륙에서 방송이 되었기에 등려군은 대륙에 영향력은 점점  남몰래 이야기하는 것에서 사교자리의 화제로 되기 시작하였으며, 등려군에 대한 여러가지의 금기도 점차 풀리기 시작하였다.

 

 

 

 

1985年1月,正在新加坡过生日的邓丽君接到了一个从北京打来的电话,这让她感到非常惊讶,电话是由《北京青年报》的一位记者打来的,这位记者曾在《中国青年报》上发表了一篇采访邓丽君姑妈的文章,听闻此事之后,两人的对话变得越来越亲切,生于台湾长于台湾的邓丽君虽然没有亲身到过大陆,但毕竟在父母亲的回忆中“耳濡目染”了许多大陆的风情和故事,对于祖国大陆的概况并不陌生,如今真切地听闻到几千里之遥的北京传来的亲切问候和致意,心中的激动自不待言:  虽然我们没有见过面,但是听到您的声音和语气,我感到我们之间并不陌生,像是多年的好友,我很惊讶,但又非常高兴能在我生日的时候接到您从北京打来的电话…… 

1985년 1월  싱가포르에서 생일을 보내던 등려군은 마침 북경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는데,이것이 그녀를 매우 의아스럽게 하였는데 전화는

《北京青年报》의 신문기자가 걸어 온것이었다. 이 기자는 일찍이 《北京青年报》에 한편의 등려군 고모에 관한 기사를 실었었다.

이일을 듣고 나서 두사람의 대화는 점점 친절하게 되었으며 대만에서 태어나 대만에서 자란 등려군은 비록 대륙으로 직접 갔던 적은 없으나

결국은 부모님의 기억속에 귀와 눈에 배어 있는 수많은 대륙의 풍경과 이야기는 조국 대륙에 대한 개략적인 상황이 결코 낯설지는 않았다.

지금 생생하게 수천리 떨어진 북경에서 들려오는 친절한 인사와 감사의 말을 들으니 마음속에 격동은 두말 할 나위가 없었다.

: 비록 우리들이 얼굴을 본적이 없으나 그러나 당신의 음성과 말씨를 들으나 나는 우리의 사이가 결코 낯설지 않게 느껴지어서, 마치

오래된 좋은 친구 같습니다. 나는 매우 의아스럽지만 그러나 또한 내 생일날에 당신이 북경에서 전화를 걸어 온것을 받으니 매우 기쁩니다..............

 

 

 

 

 

 1985年2月,邓丽君在日本发行的单曲《爱人》连续14周位居日本广播“点唱流行榜”的榜首,并夺下了年度“日本有线放送大赏”及“全日本有线大赏”双料冠军,唱片全年售出150万张。同年12月,邓丽君在日本nhk大会堂举办大型个人演唱会《one and only》,这是一次单场演唱会,黄牛票被炒至三万日元。  邓丽君到了演艺事业的全盛期,1986年,美国的《时代》认为,邓丽君的歌声遍布华人世界,她所擅长的抒情歌曲,优美非常,遂将其列为“世界七大女歌星”,这也是华人歌星的最高称誉。  已获得了无以复加的荣誉,邓丽君的商业演出渐渐偃旗息鼓,而更多地出现在慈善演出之中。譬如1987年纽约 “国际公益金”义演、1988年的金门音乐晚会、1990年的“无线电视”直播之慈善节目、1991年香港“爱心献华东”赈灾筹款演出、1992年巴黎广场纪念活动、1994年的“永远的黄埔”义演。 

 

1985년 2월 등려군은 일본에서 출시한 싱글《爱人》이 연속 14주 일본 라디오에서 신청곡 유행가 순위에서 1등을 차지 하였으며 아울러 일본유선방송대상과 전일본 유선대상 등 2관왕을 차지 하였다.음반은 일년 동안 150만장이 팔렸다. 같은 해 12월 등려군은 일본NHK대회당이 대형

개인 콘서트《one and only》를 개최하였는데,이것이 첫 1회공연 콘서트이었고 암표가 3만으로 팔렸다. 등려군은 연예사업의 전성기인

1986년에 미국의《时代》는 등려군의 노랫소리는 중화인 세계에 널리 퍼지고 있다고 여기었으며, 그녀의 뛰어난 서정적 노래는 매우 우아하여서 마침내 세계 7대 여성 가수의 반열에 들었으며, 이것은 또 중화인 가수중에서 최고라고 칭송되었다.이미 더할 나위 없는 영예를 얻었으며

등려군의 상업적 공연은 점점 줄이고 좀 더 자선 공연에 많이 출연하였다. 예를 들면 1987년 뉴욕의 국제공익금 자선공연, 1988년 금문음악야간공연,1990년 텔레비전이 생중계한 자선프로그램,1991년 홍콩의 이재민을 위한 모금 공연이었던 "중국동부지역에게 바치는 사랑하는 마음"(“爱心献华东”),1992년 파리 광장 기념 활동,1994년의 영원한 황포 자선공연들이 있었다.

 

 

 进入20世纪90年代,邓丽君的歌唱事业实际上处于半退休的状态,她迁居巴黎,在那里结识了保罗,开始了最后一场爱情。也许是沧桑历遍,邓丽君虽努力维系着这场感情,年近40岁却从未想过要和他结婚。从18岁时的林振发到“成龙的朋友”,再到大富豪郭孔丞,邓丽君的情路崎岖。  保罗陪伴邓丽君度过了最后的日子,1995年,邓丽君同男友去往泰国清迈度假疗养。当年5月,她的气喘病复发,抢救不及,在泰国的黄昏中去世,正应了红颜多薄命的老话。  她的遗体被运回台湾,安葬于台北金宝山墓园之“筠园”,葬礼极尽哀荣。纵观邓丽君的一生,“娃娃歌后”、“歌迷小姐”、“世界七大女歌星之一”,以及童年贫寒、半途休学、“假护照风波”、客死他乡诸多种种,在她身上纠结了太多的神话和传奇,她光彩夺目而又耐人寻味,她繁华灿烂却也孤独凄凉,她有开朗的微笑,也有难解的秘密。

 

 

20세기 90년대에 들어 서면서 등려군의 음악사업은 실제로 반은퇴 상태이었으며 그녀는 파리로 이주를 하였으며 이곳에서 保罗를 만나게 되었으며,마지막으로 한 차례의 사랑을 시작하였다.아마도 파란만장하였기에 등려군은 비록 이런 감정을 유지하려고 노력은 하였지만 나이가 거의

40살이 되었지만 그와 결혼을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18살때의 林振发 부터 成龍의 친구까지 다시 대부호인 郭孔丞에 이르기까지 등려군의

애정의 길은 기구하였다.保罗는 등려군을 동반하고 보냈던 마지막의 날짜는 1995년 으로 등려군은 남자친구와 같이 태국의 치앙마이로 가서

휴가와 요양을 하였다. 그해 5월 그녀의 천식병이 다시 생겼으나 응급치료를 받지 못하고,정말로 미인은 운명이 기구하다는 옛말 대로,

태국에서 저녁무렵에 세상을 떠났다.그녀의 시신은 대만으로 운구가 되어서, 대북의 금보산 묘원의 “筠园”에 안장이 되어서,장례는 극진하게

사후의 영예를 누렸다. 등려군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娃娃歌后”、“歌迷小姐”、“世界七大女歌星之一” 그리고 어린 시절의 빈한함, 중도의 학업포기, "가짜 여권풍파" 타향에서의 객사와 허다한 여러가지가 그녀의 신상에 얽혀진 수많은 신화와 전설이 그녀의 광채가 눈을 빼앗았으며 또한 맛을 음미하게 하였으며 그녀의 화려하고 찬란함은 오히려 고독하고 처량하였다.그녀는 즐거운 미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비밀도 있었다.

 

 

 

  p188-189  在夺下“全日本放送大赏”后,邓丽君和作词者荒木丰久及作曲者三木刚举行庆功宴。时间是1984年12月13日,由于有多首歌曲由三木刚掌刀,两人在工作上往来亲密,导致部分媒体发挥想像力,制造了邓与三木刚有恋情的新闻。但这段情感显然是媒体的一厢情愿,邓家人对此不屑一顾。  “君临”日本。  进入20世纪80年代后期,邓丽君去往日本演出的时候越来越少,功名看淡,她已不像刚出道时那么在意鲜花和掌声了。  步入中年的邓丽君,歌迷对于她,已由喜爱而变成了尊敬。  p190-193  在香港巴士站等车时偶照。  资深音乐人何启弘在一篇《我怎能离开邓丽君》的文章中,回忆了当时香港人喜欢邓丽君的背景。  ......  我和‖成‖人‖世界之间的联系,借着唱歌的邓丽君,在寻找一种逻辑,慢慢的快要接上线。   《千言万语》的柔情,我好像开始有了感受。

 

 p188-189  “全日本放送大赏”을 차지한 뒤에 등려군과 작사가荒木丰久와 작곡가三木刚는 축하연을 열었다.

때는 1984년 12월 13일로 여러 노래를 三木刚가 만드는데 두사람은 업무상 밀접하게 연락을 하였다. 초청된 일부분의 매체는 상상력을 발휘하여서, 등려군과 三木刚이 연정을 갖고 있다는 소식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명백히 매체의 일방적인 주장이었다.

등려군 집안 사람은 이런 것에 대하여 거들떠 볼 가치도 없다고 했다. “君临”日本(등려군이 일본에 임하다).

20세기 80년대 후기에 들어가니 등려군은 일본으로 가서 공연하는 것이 점점 줄어 들었으며 공명도 의미없어 보였고 그녀는 막 데뷰하였을 때

처럼 신선한 꽃과 박수소리에 뜻을 이미 두지는 않게 되었다.

중년에 접어 들은 등려군에 대해 팬들은 이미 좋아하는 것이 존경으로 바뀌었다.

 p190-193  홍콩의 택시승강장에서 차를 기다리는 것을 우연히 찍었다.오랜 경력의 음악인何启弘이 《我怎能离开邓丽君:어떻게 등려군을 떠날 수 있나》이라는 글에서 당시의 홍콩사람이 등려군의 배경을 좋아하는 것을 추억하였다.

나와 성인세계 간의 관계는, 일종의 근거를 찾는데  ,노래하는 등려군을 빌려서 천천히 머지않아  이어갔다.

 

《千言万语》의 서정을 나는 느끼기 시작하는 듯 하였다.

 

 

  《爱的寂寞》的哀怨,我似乎也听得懂百分之六十了。   而《把爱埋藏在心窝》的委曲求全,也让我提早看到了女人该有的样子。   国中的时候,因为妈妈参加中光嘉义台的某个抽奖活动,赢来了收音机,盯着一大堆的课本和参考书,不甘不愿地逼着自己要完成父母对我的唯一期望。   但是,歌词就是比《出师表》还容易背得滚瓜烂熟,《综艺一百》的流行歌曲排行榜,就是比《化学》课本里的元素表更诱惑我。而总是趁着下课后到上补习班之前的空档,跑到隔着一条巷子的唱片行,去看那些我买不起的唱片。那个戴眼镜的老板,原来是妈妈教会的教友,我们叫他“眼镜仔”。他从不干涉我每天都到店里报到,也不指责我永远只看不买,纵容我在店里大摇大摆地翻阅那些我每一张都想占为己有的唱片。于是,哪一首歌是在哪一张唱片的a面或b面的第几首,哪一首歌的作词、作曲者是谁,反而还比英文单字还来得容易让我倒背如流。可怕的是,这个部分的记忆延续至今,变成了我在朋友之间被赞叹的特异功能。

 

《爱的寂寞》의 서러움과 원망은 내가 마치 60 %를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리고《把爱埋藏在心窝 : 사랑을 내 마음속에 묻다》의 자신의 뜻을 굽히면서 일을 성사시키려 하는 것이 나로 하여금 좀더 일찎이 여자가 어떤 모습을 하여야 하는 것을 보게 하였다.

대만에 있을 때 어머니가 어떤 嘉义台의 추첨에 참여하여서 라디오를 받게 되었다. 한 무더기의 책과 참고서를 보면서 원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재촉하여서 자신에 대한 부모의 유일한 기대를 다 이루려고 하였다.

그러나 가사가 《出师表》에 비하여 쉽게 줄줄 잘 외울 수 있었다.,《综艺一百》의 유행가 순위표가 바로《化学》교과서의 원소표 보다는

더 나를 유혹하였다. 그래서 언제나 수업이 끝난 뒤 보습학원으로 가기전의 빈 시간을 이용하여서 한 골목 떨어진 음반 가게로 달려가 내가 살수는 없는 음반들을 보러 갔다. 안경을 쓴 주인아저씨는 원래 어머니가 다니는 교회의 교우이었다. 우리들은 그를“眼镜仔”( 안경아저씨)라고 불렀다.그는 내가 날마다 가게에 오는 것을 간섭 한적이 없었고 또한 내가 언제나 사지는 않고 그저 보기만 한다고 책망하지 않았다.

내가 가게안에서 이리저리 돌아 다니며 이것들이 훑어 보도록 내버려두었으며 나는 한장 한장 모두 다 음반을 내것으로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어느 노래가 어느 음반 a 면 또는 b면에 9번째인지 어느 노래의 작사 작곡가가 누구인지, 반대로 영어 단어 보다는 오히려 나로 하여금 더 쉽게 술술 외울 수 있게 하였다.

무서운 것은 이 부분의 기억이 지금도 이어져서는  친구지간에 내가 칭찬 받는 특별한 재주가 되었다.

 

 

 

 

 

 


第六部分:原来姹紫嫣红开遍:独上西楼原来姹紫嫣红开遍:独上西楼(2)

 

  循着广播节目播放的歌曲线索,我到“眼镜仔”的唱片行里去找唱歌的人的样子。  《海韵》的悠扬,我找到了留着一头长发、抿着浅浅笑意的封面;   《风从哪里来》的奔放,我找到了享受唱歌自在、透露着率性神情的封套;   《娜奴娃情歌》的豪迈,我搜索到了一个自然、清新的女生。  在唱片行里,我勾勒出一个到了未来,注定要让我为她倾心的标准类型。她,叫做邓丽君。   嘉义农专,兰潭校区的阳光,晒得五专生的男性激素蠢蠢欲动的。   那个森林科的女孩,和我在吉他社里相识。死党们说,这就叫做初恋。   我和她的事情,给了水利科和森林科两个科系的同学,在校园里谈论的话题。谁追谁,谁爱谁的小道消息,在学校里传得特别快。

 

라디오 프로그램 순서에 따라 방송한 노래를  찾아서나는 안경집 아저씨의 음반 가게로 가서 노래한 사람의 모습을 찾아 보았다.

《海韵》의 부드러움에서 나는  긴머리를 날리며 잔잔히 미소지으며 입을 움추리는 봉투 겉면을 찾았고;《风从哪里来》의 자유분방함에서

나는 노래를 자유자재로 하고

 

  记得,当我早晨骑着脚踏车,从山脚下往教室骑去,住校的她抱着课本披着及肩的长发,走在我正前方时。那时,心里突然哼起了《一见钟情》。   青涩的感情,跟着胡茬和喉结,慢条斯理地长了出来。不经意,但非常隆重。   偷来邓丽君的《我要对你说》,当做发芽爱情的主题曲,以为,这首歌就是为我和她特别量身订作的歌曲。我在心里默默地唱着,骄傲地跟自己显示,我这接近长大‖成‖人‖的雄性性征。忘却了那个在班上爱唱歌、和我关系似有似无的班队,选了《美酒加咖啡》在送旧晚会上唱着时,当我尴尬地和她四目相接的刹那间,她那眼里无以名之的情绪,被我置之不理地搁在班上那一群在我背后的窃窃私语中。  

 

 

 

 毕业。一切结束。   炎热的6月天,我没有心情理会,还需要重修半年体育,才能够拿到毕业证书。初次碰触感情的惶恐,让我的学生生涯草草地结束。没去大礼堂听校长的教训和录音带播出的骊歌。   我躲在家里。正声电台李佳和翁浩然主持的《沙漠之歌》节目,在阴阴的星期天午后三点,播了《你可知道我爱谁》。   我又在邓丽君的歌里,找到了粉饰小男生用情不专的借口。   开始写歌。   开始到唱片公司上班。开始肆无忌惮地用掉赚来的钱。

 

 

在台湾、东京、大阪、小樽、函馆、新加坡、l·a·、旧金山、上海、北京,疯狂地回头把小时候买不起的黑胶唱片买回来。花了三十多万,弄了一个唱片柜,把我小时候的梦供养起来。   退伍。在宝丽金唱片上班。香港总公司pass了一张邓丽君的《难忘的》精选辑到台湾来,我是执行企划。老板说,照香港寄来的样片做,加个侧条就好了。没有太多的宣传费,只能做一个15秒的电台广告,上一星期一天三档的《美的世界》。   心里,好想跟老板说:“我可不可以挂名?”不是出风头,只因为这是邓丽君的专辑。当时还是个小企划的我,还是没敢提出这个要求,只是有一股浓浓的落寞。心里靠一个奢望在支撑着,只要我不离开宝丽金,总有一天会做得到邓丽君的新专辑的。  

 

 

 

 那时的邓丽君,早已旅居国外多年,鲜少有新的作品和媒体上的曝光。在唱片公司的立场来说,她已经不是一个卖钱的艺人了,尤其在那个时候,公司里的童安格、城市少女、草蜢正在走红着,大家都忙着讨论草蜢要怎么跟小虎队对打,所以没有人要理这张片子,就这样默默的发行了。   那年的5月8日,邓丽君去世,这张唱片才大卖。   讽刺!   一时间不管正版、b版或盗版,邓丽君的所有专辑,在全台严重地缺货。各大媒体争相报道邓丽君的生平,丰功伟业,当然也包括了八卦、绯闻。在我的音响里,却始终repeat在《我怎能离开你》这首歌上,一直唱,一直唱……  

 

 

 

 过了那一年的下半年,邓丽君的风潮,再一次随着中国人的忘性退了下去。无声无息的,只剩下唱片公司重新出版的那几张了无新意的精选辑,和那些歌坛、影坛的大哥大们,上电视说着他们和邓丽君过去的恋情而已。   当我伫立在旺角信和中心地下室的旧唱片行里,看到邓丽君海外版的专辑上,收录了她翻唱其他歌手的《月亮代表我的心》《恰似你的温柔》《酒醉的探戈》《雪中莲》《风中的早晨》《微风细雨》《爱的箴言》等等歌曲,因为她,把台湾音乐人优秀的创作带出了这个弹丸之地,飞到了全世界。   我在想,我也算是个制作人,那我能为邓丽君做些什么呢?  

 

 

 

 

 搭着东京都地下铁,在神保丁的旧书街,买到了一本日本人在邓丽君逝世一年后,所举办的追悼会的特刊。里面详细的记载了邓丽君出版过的专辑明细,以及单靠着汉字就能明了的介绍。整理之完整、资料之丰富,令人咋舌,我如获至宝。照着里头的记录,我暗自发誓,一定要把她所有的作品收集齐全。从此,我每次到日本,就往旧唱片行里钻。   新宿的tower records,邓丽君那一排洋洋洒洒的cd里,有新一代的涩谷系音乐人为她的歌曲remix,有其他重量级歌手重唱她歌曲的纪念专辑,有她最早期还未大红大紫、难得一见、宇宙唱片时期的歌曲cd,还有日本演唱会、nhk综艺节目dvd,以及柜台上让人索取的邓丽君纪念展览会dm。

 

 

 

 

   我呆立在柜前好久。   心想,为什么这些产品都是印上日文字的?邓丽君明明是中国人的国宝,怎么会变成是日本人在常态性、有规划的纪念她呢?又想起,充斥在台湾唱片行里,那些未经过有心整理、粗制滥造的邓丽君cd,第一次觉得,我在日本人面前抬不起头来!   而我们到底又曾经为邓丽君做过了什么?   我知道,我不应该对这些现象不满。   因为,邓丽君的歌曲,在我们的心中,早就占住了一个最重要的位置,让我们离不开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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