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歷史 속의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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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事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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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년 |
칠레 자치정부 수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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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
조선 보빙사 방미. 아더 미국 대통령 면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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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초등교육기관인 관립 교동소학교(교동초등학교 전신) 개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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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
경인선 철도 한국 최초로 개통(인천~노량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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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
청, 과거제 폐지. 신교육제 채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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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
만주사변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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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
소련, 국제연맹 가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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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
중국 항일구국동맹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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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
미국 중앙정보국(CIA) 발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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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
영국, 노동력통제령 공포(12.12 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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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
일본 전학련(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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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
서울시, 특별시로 승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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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
소련, 유엔안보이사회서 일본가입 거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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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
한국-일본 항로 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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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
대한영화제작인협회 창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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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
북한, 중공군 40만명 철수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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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
고 딘 디엠 월남대통령 방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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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
영국, 프랑스지역 금수(禁輸) 철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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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
흐루시초프, 유엔총회서 군비전면폐지 목표로 하는 군축안 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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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
17차 유엔총회 개막. 104국 대표 참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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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
소련, 북극에서 대기권 핵실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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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
동서독 유엔 동시가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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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
한국-인도네시아, 국교수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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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
정부, 소득별 정률(定率)공제 및 법인세율 낮추기 위한 세제개혁안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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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
프랑스 하원, 사형제도 폐지안 의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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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
제4차 남북경제회담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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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
경의선 복원공사 기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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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 및 도로 연결 위한 착공식, 남북 동시 거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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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誕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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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
넵투늄(초우라늄원소) 발견한 미국 핵물리학자 맥밀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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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
아프리카 가나의 초대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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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
여성운동가 이태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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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死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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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
표트르 스톨리핀 피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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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
공산주의 운동가 이현상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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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
서베이루트내 팔레스타인 난민 1천8백여명 대량학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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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
현대시조 선구자 노산 이은상 별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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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실험실 폭발사고. 대학원생 세명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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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
‘스타 이혼 전담 변호사’ 미국 마빈 미첼슨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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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
한국 최초의 철도노선인 경인선 개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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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
일본의 대륙 침략 … 만주 사변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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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오늘 밤 10시 20분쯤, 중국 랴오닝성 펑톈(현 선양)역 부근에 있는 류탸오거우에서 남만주 철도의 일부가 폭파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선로와 침목의 일부가 망가졌을 뿐 큰 사고는 아니었다.
일본 관동군은 이 사건을 중국 항일 단체가 저지른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사실은 일본 관동군 장교들이 일부러 꾸민 것이었다. 이튿날 관동군은 이 사건을 빌미로 중국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조선에 있던 일본군도 국경을 넘어 만주를 공격해 들어갔다. 만주사변의 시작이었다.
일본군은 속전속결로 펑텐, 창춘에 이어 5일 만에 지린성 대부분을 점령했다. 11월에는 동북 3성(헤이룽장성, 지린성, 랴오닝성) 전 지역을 빼앗았고 이듬해 3월에는 일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 나라 만주국을 세워 만주를 장악했다. 중국은 국제연맹에 제소했고 연맹은 일본군의 철수를 권했지만 일본은 이를 거부했다. 2년 뒤, 일본은 국제연맹마저 탈퇴하고 만주국을 발판으로 본격적인 동북아 점령에 나섰다.
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9/17/2008091701029.html에서 가져옴. |
| [1957년] |
가짜 이강석 구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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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에 선 '가짜 이강석'의 범인 강성병씨. |
"나 이강석인데..." 1957년 8월30일 밤8시쯤, 한 청년이 자신이 이강석이라며 대뜸 경주 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국회의장 이기붕의 장남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였던 이강석의 갑작스런 출현에 화들짝 놀란 서장은 청년이 있다는 다방으로 달려갔다. "귀하신 몸이 어찌 홀로 오셨나이까" 황송해하는 서장의 인사에 청년은 “아버지의 밀명으로 풍수해 상황을 시찰하고 공무원의 비리를 내사하러 왔다”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자유당 정권이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고 있을 때, 이강석은 거리의 무법자였고 또 하나의 작은 권력이었다. 때문에 이 청년 앞에 ‘꿈같은 3일’이 펼쳐졌다. 경주는 물론 영천ㆍ안동ㆍ봉화 등지를 돌며 경찰서장과 군수로부터 향응과 칙사대접을 받았고 46만환이나 되는 거액도 챙겼다.
9월1일 밤, 청년은 경북 도지사의 아들이 이강석과 고교 동기동창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도지사 관저에 여장을 풀었다. 결국 이강석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용돈이 궁해서 꾸민 연극인데 그렇게 굽실거리고 쩔쩔맬 줄 몰랐다"고 둘러댔지만 9월18일 구속돼 징역 10개월을 살아야 했다. 진짜 이강석이 자살한 3년뒤, 가짜도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죽음까지도 진짜를 따라하는 기이한 인연을 맺었다.
http://srchdb2.chosun.com/history/를 기본으로 다듬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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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계속 이어지던 총소리는 먼동이 트고서야 멈췄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토머스 프리드먼 레바논 특파원이 도착했을 때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외곽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은 이미 죽음의 땅으로 변해 있었다.
샤브라와 샤틸라의 난민촌 곳곳에는 수십에서 수백 구의 시신이 뒤엉킨 채 널브러져 있었다. 2000여 명의 희생자 중에는 어린아이와 부녀자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프리드먼 특파원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지옥의 모습을 서둘러 뉴욕 본사로 보냈다. 프리드먼 특파원의 기사는 다음 날 뉴욕타임스 신문 4면에 걸쳐 상세히 보도됐다.
1982년 9월 18일 세상에 알려진 이 사건은 캄보디아 학살극 이후 최대의 학살극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학살극은 이스라엘의 비호를 받은 레바논 ‘팔랑헤당’ 민병대원들이 저질렀다. 민병대원들은 4일 전 폭탄공격으로 바시르 제마옐 대통령이 사망하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복수의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스라엘군도 친이스라엘계인 제마옐 대통령이 암살되자 즉각 레바논에 진입해 샤브라와 샤틸라 지역을 봉쇄했다.
16일 밤 이스라엘군은 무장한 팔랑헤당 민병대원 200여 명을 난민촌으로 들여보냈다.
난민들에게 닥치는 대로 총기를 난사한 팔랑헤당 민병대원들의 광란의 학살극은 18일 새벽에야 끝이 났다.
난민촌 외곽을 탱크로 경계하며 난민들의 도주를 막았던 이스라엘군은 학살극이 끝나자 민병대원들과 함께 서둘러 현장에서 철수했다.
세계의 비난이 즉각 이스라엘에 쏟아졌다. 이스라엘 내에서도 30만 명이 메나헴 베긴 총리와 아리엘 샤론 국방장관의 사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당황한 이스라엘은 대법원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4개월여 뒤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샤론 국방장관이 자신의 책무를 망각하였다고 생각한다. 팔랑헤 민병대를 난민촌으로 들어가게 만든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고 본다’며 배후론을 부인했다.
이후 2001년 학살극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이스라엘 총리에 오른 샤론을 벨기에 법정에 고발하자 학살극 당시 민병대를 이끌었던 엘리 호베이카는 법정에서 샤론의 죄상을 증언하겠다고 밝혔다.
학살극 이후 친시리아계로 돌아선 호베이카는 외교장관과 두 차례 국회 의원을 지냈으나 증언을 앞둔 2001년 1월 24일 의문의 폭탄 테러로 암살됐다.
레바논 관리들은 즉각 이스라엘을 배후로 지목했지만 샤론 총리는 “우리의 관점에서 우리는 이 사람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이런 것을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결국 학살극의 배후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에서 가져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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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
노태우 대통령 민자당 탈당 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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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대통령은 10월초 민자당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청와대측이 이를 발표한 순간 노 대통령의 민자당 탈당은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이로써 한국정치사상 처음 무당적의 대통령이 출현했다. 노 대통령이 민자당의 명예총재직을 사퇴하고 당적까지 버리기로 한 결정에는 정당정치의 본질과 책임정치를 회피한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었으나 선거관리의 최고책임을 맡은 대통령으로서 「철저한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 그 같은 결단을 내렸다고 청와대측은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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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
강릉 무장간첩 잠수함 침투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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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1996년 9월18일 새벽 1시35분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대포동마을 해안에 정체불명의 선박이 몸체 절반을 드러낸 채 좌초된 것을 택시기사 이진규씨가 발견, 신고함으로써 시작됐다.
이 잠수함은 3백50t ‘상어급’으로 총 26명이 타고 있었으며, 이미 사흘 전 침투해 정찰 중이던 정찰조원을 데려가기 위해 해안 가까이 접근했다가 좌초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26명은 좌초직후 무장한 채 육지로 상륙해 흩어졌고 공비의 북상을 차단하려는 군과의 교전이 48일간이나 이어졌다.
군·경은 첫날 인근지역 수색과정에서 이광수(당시 31세) 상위를 생포했다. 그러나 오후에는 강릉시 강동면 산성우리 청학산 중턱에서 11명이 사살된 채 발견돼 충격을 주었다.
소탕작전에 나선 군은 19일 강동면 언별리 단경골 등지에서 7명,22일 칠성산에서 2명,28일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서 부함장을,30일 왕산면 목계리에서 기관장을,11월5일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정찰조원 2명을 각각 사살하는 등 모두 24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 1명은 끝내 발견하지 못해 행방불명처리한 채 사건을 종결했다. 우리 측도 군인 11명, 민간인 4명이 희생되고 다수의 부상자가 생기는 인적피해를 낳았다.
북한은 사건발생 후 훈련도중의 기관고장으로 인한 사고라고 주장했으나 96년 12월30일 외교부 성명으로 “막심한 인명피해를 초래한 잠수함사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공식 사과함으로써 1백 여일 만에 일단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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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 철도 복원은 분단 반세기 만에 남북으로 동강난 한반도를 다시 잇는다는 점에서 역사적 상징성이 매우 컸다. 경의선 철도 및 도로 복원이 지니는 가장 큰 의미는 남북을 갈라 놓았던 비무장지대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는 길이 생긴다는 데 있었다. 남쪽에서 문산역~장단역간 12km 구간을 이어가고, 북쪽에서 봉동역~장단역간 12km를 이어와서 합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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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
제5차 남북장관급회담 합의사항 공동보도문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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