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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歷史 속의 오늘

[역사歷史 속의 오늘][역사歷史 속의 오늘] 8월 13일

작성자늘당신과함께할|작성시간07.08.14|조회수67 목록 댓글 1

 

                                             역사歷史 속의 8월 12일

사건事件  

1898년

미국군, 마닐라 점령

1907년

청, 자정원 설립

1909년

조선고서간행회 조직

1912년

조선삼림미간지 및 산림산물특별처분령 공포 시행

1913년

독립의군부 사건 선고공판 열림

1935년

심훈의 상록수, 소설 현상공모에 당선

1943년

광복군, 버마전선에 사관1대 파견

1948년

한국-대만, 국교수립

1952년

근로기준법 국회 제출

1953년

소련 수소폭탄 실험

1955년

국내 최초로 성전환 수술

1959년

일본 적십자사와 북한적십자사, 인도 캘커타에서 재일교포북송협정 체결

1960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프랑스로부터 독립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

1965년

1개 사단 전투병력 월남파병 동의안 국회통과

1969년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 중국 국경경비대와 소련군 기갑부대 격렬한 무력충돌

1977년

북괴, 리비아탁구팀 코치 김창제씨 납북기도

1977년

영국 런던서 전후최대의 인종폭동

1978년

베이루트 PLO본부 폭파

1979년

중국, 산아제한정책 발표

1986년

전교협(전국교사협의회) 준비위원회 구성

1988년

건설부, 1992년까지 16조 3천억 원 투입, 택지 5천 7백만 평 마련해 주택 2백만 호 건설한다 발표

1989년

배용균 감독의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대상 수상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야스쿠니 신사 참배

탄생誕生

1888년

세계 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에 성공한 베어드 출생

1899년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출생

1926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출생

사망死亡

232년

중국 삼국시대 촉한 시대의 전략가 제갈량(제갈공명) 사망

1910년

나이팅게일 사망

오늘의 성인聖人

성 폰시아노 교황과 성 히폴리토 사제순교자 Saints Pontian and Hippolytus

 

[1553년]

개신교 첫 ‘종교적 살인’

 

 

모든 스페인 사람의 내면에는 돈키호테의 면모가 감춰져 있다고 한다. 끊임없는 모험과 도전정신, 천재적 번뜩임과 기묘한 과대망상, 그러면서 모든 사람에게 맞서 독단적 싸움을 벌이다 어느 순간 경박한 사기꾼으로 전락하고 마는 라만차의 기사….

스페인 출신의 자유주의 신학자 미카엘 세르베투스(1511∼1553)야말로 그런 뜨거운 피와 불안정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천문학 기상학 지리학 법학 수학 해부학 의학 등 그의 관심 분야는 끝이 없었다. 특히 의학과 신학 분야에선 뛰어난 천재성을 드러냈다.

열다섯 살 때부터 종교재판을 피해 유럽 곳곳을 떠돌아다니던 그는 ‘신학의 기사’로서 당대의 모든 성벽과 풍차를 향해 덤벼들었다. 종교적 광신의 시대에 그는 감히 삼위일체와 유아세례를 ‘악마의 교리’라고 부인하며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틀렸다고 선언했다.

도망자 신세가 된 그는 자신의 믿음을 누군가에게 편지로 털어놓고 싶었다. 불행히도 그 상대는 장 칼뱅(1509∼1564)이었다. 가톨릭의 교조주의에 맞서 관용의 정신을 외쳤던 칼뱅. 하지만 그는 ‘제네바 신국(神國)’의 통치자가 된 뒤 불관용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칼뱅은 보관해 오던 세르베투스의 편지를 대리인을 통해 가톨릭 종교재판소에 넘겼다.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가톨릭을 이용해 ‘이단자’를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르베투스는 감옥에서 도망쳤다.

1553년 8월 13일, 세르베투스는 칼뱅이 신정독재를 펴던 제네바에 나타났다. 칼뱅은 생피에르 교회 예배에 참석한 그를 알아보고 즉각 체포 명령을 내렸다. 외국인을 체포하려면 사전에 고소가 있어야 했지만 칼뱅은 뒤늦게 비서를 고소인으로 내세웠다.

단순히 국외추방형 정도로 끝날 것 같았던 사건은 칼뱅이 직접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을 증명하는 증언자로 나서면서 종교재판으로 바뀌었다.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자극해 논쟁을 유도했다. 쉽게 격분하는 세르베투스는 통제력을 잃고 칼뱅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결국 세르베투스에겐 모든 형벌 중 가장 고통스러운, 즉 산 채로 불태워지는 형벌이 선고됐다. 칼뱅에게 보낸 원고뭉치와 함께 쇠사슬로 화형대에 묶인 세르베투스는 “예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절규하며 녹아내렸다.

개신교에서 일어난 최초의 ‘종교적 살인’이었다. 칼뱅은 나중에 자신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화형 대신 참수형 같은 좀 더 완화된 형벌로 바꿔보려 했다고 밝혔지만 의회기록에선 단 한마디의 언급도 찾을 수 없었다.(‘폭력에 대항한 양심’·슈테판 츠바이크)
http://srchdb2.chosun.com/history/에서 가져옴.

 

 

 

[1935년]     심훈 '상록수' 현상공보 당선

 

35년의 짧은 생이었지만 심훈(1901∼1936)은 흐트러짐이 없었고, 작품에는 늘 강한 민족의식이 배어있었다. 재능 가운데 먼저 빛을 발한 쪽은 영화였다. 영화 ‘장한몽’에 이수일 역으로 출연했고,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정통으로 영화를 공부한 뒤에는 원작·각색·감독으로 ‘먼동이 틀 때’를 제작해 큰 성공을 거뒀으나 곧 영화계를 떠났다. 심훈의 타고난 운명은 기자였고 작가였다. 7년간을 조선일보·동아일보·조선중앙일보 기자로 지내며 많은 작품들을 쏟아냈다. 조선일보 기자 시절에는 장편 '동방의 애인' '불사조'를 연재했으나 둘 다 일제의 검열에 걸려 중단하고 말았다.


1932년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판하려 했으나 또 일제의 검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충남 당진으로 낙향해 손수 필경사(筆耕舍)라는 초가집을 짓고 소설 '상록수' 집필에 몰두, 1935년 8월 13일 동아일보 소설 공모에 당선된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명성도 잠시뿐 이듬해 장티푸스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308/200308120196.html을 기본으로 다듬었음.

  

[1956년]

제2대 지방의회 의원선거 실시


제2대 지방의회 의원 선거 유세 장면

제3대 대통령선거가 끝난지 약 석 달 뒤인 1956년 8월 13일 전국 437개 선거구에서 제2대 서울 시의원-전국 도의원선거를 실시했다. 선거 결과 정당별 당선자수는 자유당이 의원총수 437명의 57%인 249명으로 과반수를 넘었으며 민주당은 98명, 무소속 83명, 기타 7명이었다. 시·읍·면장과 시·읍·면의회 의원선거는 도의원선거보다 5일 앞선 8월 8일 실시되어 자유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번 제2대 도의원선거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3선 당선 여세를 악용한 자유당의 방종과 관권 개입으로 부정불법이 전국적으로 판을 쳤다. 곳곳에서 관권의 협박 때문에 야당 후보들의 사퇴가 잇따르자 야당 국회의원들이 이에 항의,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유당은 무더기 대리투표, 표바꿔치기 등의 불법 행위를 곳곳에서 저질렀다. 전북 정읍군 서성면에서는 투표함의 봉인을 뜯어내고 자유당후보표를 무더기로 집어넣는 광경을 투표함 호송경찰관 박재표 순경이 목격하고 8월 27일 동아일보 본사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폭로했으며 민주당 김의택 국회의원도 전남 함평군 선거에서 경찰이 투표함을 개표장으로 호송하는 도중 무더기 표바꿔치기를 했다고 폭로했다.

http://srchdb2.chosun.com/history/를 기본으로 다듬었음.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


1961년 8월 13일, 막 잠에서 깬 서베를린 시민들은 눈앞에 펼쳐진 낯선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밤새 동·서 베를린을 잇는 13개 도로와 80개 통로에 철조망이 쳐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입구마다 탱크와 장갑차가 배치돼 통행을 가로막고 있었다. 철조망 길이는 45km. 곧 150km로 늘어난 철책에는 전류가 흘렀고 콘크리트와 붉은 벽돌로 된 높이 2m, 폭 2m의 장벽은 동족 간의 이동을 금지시켰다.


1949년 동독정권 수립 이래 매년 20만 명, 1961년까지 이미 250만 명이 경계를 넘은 상황에서 동독정부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특히 전문직과 숙련노동자의 탈출이 심각해 자칫하면 고급 두뇌의 공백으로 동독 기술·산업기반이 붕괴될 판이었다.


베를린을 자유도시로 하자는 소련측의 제안을 서방측이 거부하자 1961년 6월 흐루시초프는 “베를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핵무기 사용도 불사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긴장은 고조됐고 이로 인해 서베를린으로의 탈출러시가 가속화됐다. 7월 한 달 동안만 3만 명이 고향을 등졌다.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장벽이 붕괴될 때까지 28년간 동서대립의 상징이었고 독일인을 갈라놓은 ‘벽(壁)’이었다.

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308/200308120196.html을 기본으로 다듬었음.

 

[1980년]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정계은퇴 발표

 

 

1954년, 26세 최연소자로 3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근 30년간 정치 활동을 하던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1980년 8월 13일 총재직 사퇴와 동시에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김 총재는 이날 서울 시내 무교동에 있는 그의 개인 사무실에서 “오늘의 정치상황에 처하여 야당 총재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사임 이유를 밝혔다.

김 총재는 자신의 정계 은퇴와 함께 이민우 부총재를 당 총재 직무 대행으로 지명했다.

[1989년]

배용균 감독,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대상 수상

 

 

신예 배용균 감독이 제작ㆍ연출한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1989년 8월 13일 스위스에서 열린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금표범상을 수상, 한국 영화 70년 사상 처음으로 세계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는 쾌거를 기록했다.

세계 8대 영화제의 하나로 꼽히는 로카르노 국제영화제는 1-2편을 연출한 신인영화감독들만을 대상으로 역량을 평가하는 전통 깊은 세계무대 등용문이었다.

11개국 18편이 본선에 오른 경쟁부문에서 ‘달마가...’는 대상을 비롯, 청년비평가상(2위), 기독교평론가상, 최우수작품상, 국제기자협회상(1위), 바크리상(2위) 등 특별상 4개 부문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야스쿠니 신사 참배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2001년 8월 13일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전격 참배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날 오후 4시43분쯤 태평양전쟁 주모자인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도착, 참배를 마쳤다.

참배와 동시에 고이즈미 총리는 과거 침략을 반성한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으나, 그동안 한국과 중국 등 국제사회가 참배를 강력히 반발하거나 비난해 왔다는 점에서 공허한 변명으로 비춰졌다.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는 1996년 7월, 자기 생일에 참배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당시 총리 이후 5년 만의 일이였다. 한국과 중국 정부는 각각 성명을 발표,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2009년]

북한, 현대아산 근로자 유성진씨 석방

 

 

136일 동안 북한에 억류돼 있던 현대아산 근로자 유성진 씨가 8월 13일 오후 풀려나 남측으로 돌아왔다.


개성공단에서 숙소 관리 업무를 하던 유씨는 3월 30일 오전 개성공단 현지에서 북측 당국자들에 의해 체포됐다. 북측은 “유 씨가 북한 체제를 악의에 차서 헐뜯으면서 공화국의 자주권을 침해하고 해당 법에 저촉되는 엄중한 행위를 감행했다”고 발표했었다. 그 뒤로 북측은 남북 당국 간 접촉에서도 유 씨가 어디서 어떤 상태로 지내고 있는지 밝히지 않았고 우리 측의 접견요구도 거부해왔다.

북측은 자기 측 출입국사업부에서 추방 형식으로 유 씨를 남측에 인계했으며 유 씨는 이날 밤 9시12분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해 간단한 소감만 말하고 서울로 떠났다.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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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이환^^* | 작성시간 10.08.17 1988년에 '16조3천억원'과 '5천7백만평'과 '2백만호'는 각각 '16조 3천억 원'과 '5천 7백만 평'과 2백만 호'로 띄어 써야 하고, [1956년]에서 첫 번째 문단 1번째 줄에 '석달'은 '석 달'로 띄어 써야 하고, [1961년]에서 두 번째 문단 1번째 줄에 '20만명'과 '250만명'은 각각 '20만 명'과 '250만 명'으로 띄어 써야 하고, 세 번째 문단 4번째 줄에 '3만명'은 '3만 명'으로 띄어 써야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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