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歷史 속의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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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事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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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
호놀롤루에서 최초의 교포정치단체인 신민회 발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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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
한일은행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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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
조선, 만국적십자조약에 가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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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
김좌진 등, 정의단을 군 정부로 개편, 9월에 북로군정서로 개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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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
이탈리아-스페인, 마드리드조약 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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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
박경원 여류비행사 최초로 면허증 획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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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
코민테른 제6차 세계대회 모스크바서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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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
스페인, 부재지주 토지수용, 소작인에 분배 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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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
미군, 과달카날 섬에 상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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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
최초의 전기기계식 계산기 ‘마크I’, 하버드 대학서 처음 가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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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
정부기구를 11부4처66국으로 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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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
해리먼 미국대통령 특사 내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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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
미국, 독일의 V2 로케트를 모델로 한 ‘바이킹로케트’로 고도 2만m 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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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
정부, 문화보호법 공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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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
평양방송, 남로당계 박헌영 등 12인 숙청을 발표(7인 사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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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
카스트로, 쿠바 내 미국재산 몰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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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
코트디브아르, 프랑스로부터 독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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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
조자양 중국 수상 필리핀 방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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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
이탈리아 내각 총사퇴로 연정붕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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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
제17회 세계잼버리대회 개막(강원도 고성), 129개국 2만여 명 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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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
잠수함 최무선호 진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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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
케냐-탄자니아 수도에서 미 대사관 겨냥한 폭탄테러 발생 70여 명 사망, 1천여 명 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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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
미국 워싱턴시, 빈발하는 총기사건으로 청소년 야간통행금지 부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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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
콜롬비아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폭탄테러. 17명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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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 경기도 포천 종합사격훈련장 난입해 반미시위하다 연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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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
제1회 서울 로봇 축제(국립서울과학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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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誕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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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
여성 스파이의 대명사로 불리는 무희 마타하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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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
국내 첫 ‘냉동난자수정’ 아기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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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死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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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3년 |
김유신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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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
한국 첫 여류비행사 박경원, 비행 중 추락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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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
인도의 시인 타고르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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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
미국 전설적 소방수 레드 어데어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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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8월 7일 오늘, 마르크스의 제자인 A.베벨, W.리프크네히트 등에 의하여 아이제나흐에서 창립되었다. 마르크스의 이른바 제1인터내셔널의 방침에 따라 활약, 아이제나흐파라고 불렸으며 라살파인 전全독일노동자동맹과 심각한 대립을 계속하였다. 1871년 5월 베벨은 최후의 항전을 계속하고 있던 파리 코뮌의 노동자를 칭송하는 연설을 하였는데, 그 연설을 들은 비스마르크가 장차 강적이 되리라 생각하였다고 한다. 1875년 탄압이 강화되자 라살파의 통합이 촉진되었고, 고타에서 회동한 양파는 독일사회주의노동당을 결성, 후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전신이 되었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48873을 기본으로 다듬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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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
한국 최초 여류 비행사 박경원 추락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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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 여류 비행사인 박경원이 1933년 오늘, 자신의 비행기 ‘청연호’를 타고 고국으로 향하던 중 일본 하코네 산 부근에서 추락해 숨졌다. 당시 32세였다.
그녀가 조종한 비행기는 일본 육군성으로부터 받은 ‘살무손 2A 2’로, 비행기 이름 ‘청연호’는 그녀가 직접 지은 것이었다. 이날 오전 10시35분쯤 박경원은 동경-서울-만주-신경에 이르는 장장 2000㎞ 비행을 위해 하네다 공항을 이륙했다. 하지만 이륙 50분 만에 청연호는 기상악화로 추락했다.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난 박경원은 17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 기예여학교를 졸업한 후, 1924년 다치가와 항공학교에 입학했다. 비행연습 11시간 만에 단독비행을 할 정도로 우수한 실력을 보인 그녀는 1927년 3등 조종사시험에 합격했다. 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06/2009080601131.html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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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실의에 빠져 있는 한국인을 위해 기꺼이 '동방의 등불'(1929년 4월)이라는 시 한 편을 써주었던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1941년 8월 7일, 향년 80세로 숨을 거뒀다.
타고르는 그의 조국 인도처럼 식민 치하에서 신음하는 한국인이 안타까웠는지 ‘동방의 등불’ 이전에도 최남선의 요청을 받아 3·1운동 실패로 좌절해 있는 한국인에게 ‘패자의 노래’로 격려한 바 있다.
브라만 계급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타고르는 열다섯에 시집을 낼 정도로 어려서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였다. 한때는 비밀결사에 가담, 독립투쟁에 뛰어들었지만 40대 중반부터는 간디와 함께 펼치던 정치운동을 중단하고 경건한 종교시인의 길을 걸었다. 그의 대표적인 시집 ‘기탄잘리’(1909년)가 출판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시인 예이츠가 서문을 써 1912년에 출판된 영문판은 이듬해 “인도 사상의 정수를 유럽의 근대정신과 화합시킨 인류사적 업적”이라는 찬사와 함께 아시아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겨주었다.
이 공로로 영국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으나 암리차르 학살 사건(1919년)에 항거하는 의미로 작위를 반납하기도 했다. 노벨상 상금도 농촌재건을 위해 쓰여졌다. 음악적으로도 뛰어나 1000곡 이상의 가곡을 작곡했다. 현재 인도의 국가도 그가 작사·작곡한 것이다.
http://www.chosun.net/w21data/html/news/200308/200308040207.html을 기본으로 다듬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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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원들은 계획대로 오전 5시 50분 기습공격을 시작했다. 주먹을 휘두르고 돌을 던지며 쳐들어갔다.
내무반에서 단잠을 즐기던 10명을 때려눕히고 침대와 유리창을 부순 뒤 주번사령실을 장악했다.
습격당한 부대는 30분 뒤 비상을 걸었다. 연병장에 모인 700여 명이 동료에게 중상을 입힌 해병 장교들에게 달려들었다.
좌익이 일으킨 여순반란사건(1948년)을 제외하면 창군 이래 처음인, 아군 부대끼리의 충돌이었다. 1966년 8월의 얘기다.
진해해병학교 기초반 장교 8명이 7일 오후 7시 20분 부산발 시외버스에서 김해공군비행학교 장교 3명을 만났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해병 장교들이 공군 장교들의 모자를 뺏으면서 시비가 붙었는데 8 대 3이라 공군 장교들이 일방적으로 맞았다.
이 사실을 연락받은 비행학교 장교 30여 명은 트럭으로 시외버스를 쫓아갔다. 경남 창원군 웅동면에서 ‘경남 영 228호’ 차량을 강제로 세운 뒤 해병 장교를 끌어내려 곤봉과 권총으로 후려쳤다.
부진(釜鎭)가도의 난투극으로 동료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오자 해병학교 동료들이 흥분했다. 해병 장교 127명이 이튿날 오전 4시 통근열차 편으로 진영읍에 모였다.
이들은 민간 트럭과 버스로 비행학교 입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포복으로 논밭을 통과해 정문을 기습했다.
해병 장교들은 보초를 서던 공군 헌병의 권총을 빼앗고 조종학생 내무반으로 안내하라고 위협했다.
양측의 난투극은 10분간 계속됐다. 해병 장교들은 수적 열세로 몰리자 “계속 추격하면 비행기를 부숴버린다”면서 돌을 던져 T-28 2대의 날개와 프로펠러를 부쉈다.
해병 장교 1명이 철조망 밖의 평강천에 빠졌다가 구조됐지만 오전 9시경 숨졌다. 또 공군 25명과 해병 14명이 중상을 입었다.
국방부는 패싸움 가담자는 장교 자격이 없다고 모두 파면하려다가 주동급인 공군 5명, 해병 10명을 구속하고 두 학교 교장을 해임했다.
나머지는 훈방했다. 관련된 장교들이 베트남에 보낼 보충요원이고 임관된 지 얼마 안 됐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국방부는 “베트남 전선과 휴전상태를 감안해 앞으로 전군에서 발생하는 범죄는 전시규정을 적용해 가중 처벌키로 했다”고 밝혔다.
두 부대의 모든 장교와 사병은 10일 오후 3시 진해해병학교 교정에 모여 자매결연을 하고 우의를 다짐했다.
당시 기사를 읽다가 부상자 중에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기자가 전화를 걸었더니 “내가 맞다”고 이억수 전 공군참모총장이 얘기했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80807/8613109/1에서 가져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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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제 미그 21전투기를 몰고 귀순한 중공공군시험비행단소속 손천근씨(46). |
1983년 8월 7일, 한가롭던 일요일 오후 3시 19분, 갑자기 "앵~"하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기 지역에 경계경보가 내렸다. 인천ㆍ서울 지역으로 확대된 경계경보는 곧 공습경보로 바뀌었고 17분이 지나 해제됐다.
이날의 소동은 중국 공군의 한 조종사가 중국 다롄 상공에서 미그21기를 개량한 섬(殲)7 전투기로 훈련을 하던 중 편대를 이탈해 마하 2.1의 속도로 우리 영공으로 다가온데 따른 것이었다.
공습경보는 휴전 이후 30년 만에 처음 발령된 것이었고, 미그21기 귀순 역시 처음이었다. 미그 21기가 출현하자 초계중이던 우리 공군기가 즉각 출동, 무사히 유도ㆍ착륙시켜 대공망이 건재함을 과시했다.
중국은 조종사와 기체의 송환을 요구했으나 우리 정부는 조종사의 뜻을 존중, 24일 조종사만 대만으로 보냈다.
http://srchdb2.chosun.com/history/를 기본으로 다듬었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