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바로 알기 시리즈 93탄 >
너도나도 원효대사, ‘화쟁의 영웅’을 향한 천년의 숭배
옥창열
원효대사는 한국불교의 다양한 종파를 화쟁일심의 논리로 통섭한 위대한 사상가로,
전국의 120여 곳 사찰과 암자가 그를 창건주로 모시고 있다.
화쟁일심(和諍一心), 대립을 넘어선 원효의 위대한 통섭 사상
신라 고승 원효대사는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위대한 사상가로 손꼽힌다. 당대 불교계는 세계의 존재 여부나 부처의 성품을 두고 각 종파가 극단적으로 대립하며 사상적 갈등을 빚고 있었다. 원효는 이러한 교리 논쟁을 두고 마치 눈먼 사람들이 코끼리의 특정 부위만 만지며 서로 자기가 맞다고 우기는 것과 같다며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는 각 종파의 주장이 전체 진리의 일부분으로서 나름의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로 조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고뇌에서 정립된 원효 사상의 핵심이 바로 ‘화쟁일심(和諍一心)’이다. 모든 현상과 대립을 초월한 순수한 본래의 마음인 ‘일심(一心)’을 깨달으면, 세상의 온갖 다툼과 분열을 ‘화쟁(和諍)’으로 녹여낼 수 있다는 철학이다. 원효는 이 화쟁일심을 바탕으로 어느 한쪽 교리에 치우치지 않는 원융회통의 길을 열었으며, 백성들에게 바가지를 두드리며 불교를 전파하는 민중 불교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의 깊은 식견과 사상 체계는 한국 불교가 융합적 특성을 지니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전국 명산에 가득한 ‘원효 창건’ 설화의 규모와 실체
원효대사가 이처럼 위대한 사상가이자 민중의 영웅으로 추앙받다 보니, 오늘날 대한민국 전역에는 원효대사가 직접 세웠거나 고쳐 지었다고 전해지는 사찰이 넘쳐난다. 불교학계의 조사에 따르면 휴전선 이남의 명산과 요지에 자리한 약 110여 곳에서 120여 곳의 사찰과 암자가 원효대사와의 인연을 주장하고 있다. 경주 분황사나 고선사지 같은 신라 중심지뿐만 아니라 경기도의 자재암과 흥국사, 전라도의 다보사, 경상도의 보리암과 내원사 등 방방곡곡에 그의 이름이 걸려 있다.
심지어 원효대사가 생전에 발걸음을 한 적이 없는 금강산이나 평안도, 함경도 등 한반도 이북 지역의 사찰 중에서도 그를 창건주로 기록한 곳이 존재한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당대 신라의 인구와 교통 사정, 그리고 69세라는 스님의 생애 주기를 고려할 때 이 많은 절을 직접 짓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문헌과 유물 등 객관적인 역사적 사료로 입증되는 실제 창건 사찰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나머지 대다수의 기록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정설이다.
너도나도 ‘원효’를 창건주로 기록하게 된 역사적 배경
그렇다면 왜 전국의 수많은 사찰이 약속이나 한 듯 원효대사를 창건주로 모시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조선 시대의 억불숭유 정책을 거치며 황폐해진 사찰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종의 ‘권위 부여’ 경향 때문이다. 쇠락한 사찰의 격을 높이고 신도들을 모으기 위해,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고승인 원효대사의 명성을 빌려 “우리 절은 원효대사께서 세우신 천년고찰”이라고 내세우는 전통이 정착된 것이다.
또한 원효가 왕실 중심의 귀족 불교를 탈피하여 전국을 누비며 민중과 호흡했던 점도 주효하였다. 그가 하룻밤 머물며 수행했거나 작은 초막을 지었던 자리에 후대 사람들이 절을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창건 설화로 발전한 경우가 많다. 아울러 해안가 요충지에 자리한 사찰들의 경우, 삼국통일의 주역이자 호국 불교의 상징인 원효의 정신을 기려 군사적 요충지에 사찰을 세우고 그를 창건주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결국 전국의 ‘원효 창건’ 기록은 역사적 팩트라기보다, 우리 민족이 원효라는 위대한 사상가를 얼마나 깊이 신뢰하고 사랑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든든한 문화적 증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