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물 가 의 여 인
ㅡ 야곱의 우물가에서 있었던 이야기.ㅡ
주제본문 ; 요한복음 4장
본문의 요지는 생수를 논(論)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금수강산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실감이
떨어지는 과목선택인 듯싶어 보입니다.
허나, 중동지방에서는 생수 논이 생명 논이나 다를 바 없는 절대적 실감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일 것입니다.
그쪽지방의 생수가치가 어떠한가를 가늠코자 월남전에 있었던 실화를 소개해봅니다.
작전도중!! 심한 갈증에 시달리던 갓 건너온 신병이 고참병에게, 그의 옆에 찬 물통을 보고“수통의 물을 좀
주십시요”하니, 이에 그 고참병이 자기 손가락을 내밀며 하는 말인즉, “이 손가락을 자르고 피를 빨아 먹어라,
그러나 내 수통의 물은 네게 줄 수 없다” 라고 하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월남처럼 그 쪽 지방도 생수확보가
급선무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위의 사건은 작전 도중의 이야기라서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구약을 보노라면 宗族(종족)간에
우물전쟁의 치열함을 보아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요지는,
월남의 물이나 또는 야곱의 우물물들은 주님의 생수와는 아주 거리가 먼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번기회에 주님의 생수가 무엇인지, 그 진의를 깨달아 아직도 못 버리고 있는 고생스런 야곱의 우물물을
버리고, 심령 깊숙한 곳으로부터 용천하는 주님의 생수를 받아내어 영생을 다함께 누리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올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註釋(주석)삽으로 한 삽 더 퍼내면 生水를 마신 다음 生命을 만져볼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성경을 잘못 해독함으로 본의 아니게 선(의)인을 악인으로, 그리고 때로는 정조가 올곧은
여자에게 있지도 않은 염문을 퍼트려서 수치스런 사람으로 매도하는 예가 종종 있음을 봅니다.
그로인하여 영 생수는 고사하고 주님 존전에 득죄하는 경우가 많다하겠습니다.
그중에 이 우물가의 여인이 바로 그런 예(케이스)일 것입니다.
지금 다루고자 하는 우물가의 여자에 대한 주해들은, 소박설과 음부(부도덕)설과 무자설입니다.
소박 설 :
소박 설은, 우물가의 여인이 남편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불쌍하다는 동정론으로써 이 여인을 가련하게 봐주는
것이 바로 소박설의 주해입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소박설도 신빙성이 없어 보임은 다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그 이유 중 첫째는,
남자들의 입장에서 결혼 또는 재혼할 때 再娶(재취)를 받아드려야 하는 경우에 있어서, 배우자로 지목된 여자가, 다른 남편들로부터 여러 차례 버림(소박)을 받은 여자라면, 그를 받아드리려는 남자들은 그런 이력이 있는
여자를 배우자로 선택치 않는 법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 번 소박맞은 여자는 심한 결점이 있다는 결론이 성립되기에 남자들 입장에서는 이를
꺼려하는 법입니다.
둘째로,
위와는 반대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두세 번 정도만 버림(소박)을 받으면, 다시는 남자들이보기 싫어져서
재혼을 포기하고 마는 법이라고 단정을 지어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하여 이 사건의 주인공인 사마리아여자가 소박을 맞은 여자라고 보기에는 다소 부족함이 있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 소박 설은 음부 설보다 모양새가 나은 편입니다.
그런데 소박설로 이해를 갖는 이들의 숫자가 적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음부설과 무자설은 병행하여 써 내려가겠습니다.
음부 설은 한때 부흥회가 왕성할 즈음 부흥강사(목사)들이 즐겨 쓰던 단골메뉴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런 연고로 하여금 이 음부 설이 신앙 계에 넓고 깊게 퍼져 내려왔던 것입니다.
음부 설의 내용을 간략히 말하자면,
여자가 시집을 가서 살다보니 만족치 못하여 이혼과 재혼을 번복하며 결국은 현재 여섯 번째 남자와 살면서도
이 남자도 만족치 못한 터에, 마침 자기의 마음에 맞는 예수를 만난나머지 아주 흡족함에 못 이겨 물동이를
버렸다는 내용입니다.
부흥강사들은 그처럼 염세적인분위기를 띄우며 하는 말인 즉,
그렇게 화려하게 삶을 산 그 여인도 결국 이세상은 만족한 것이 없음을 볼 때, 재물을 하늘나라에 쌓아 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빙자하여 신자들의 재물을 자신들에게 바치게끔 유도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러한 부흥강사들의 입장을 봐서는 그 여인이 정말로 음부였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들이 그렇게 음부로 보는 이유는,
우물가의 여자가 남편이 여섯이나 있었다는 말에 혹자들은 그만 깊은 생각 없이 지레짐작으로 이 여인을 음부로 치부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실상 어느 누군들 남편이 대여섯씩이나 있었다는 여자를 두고 음부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사건을 두고 음부로 보는 견해는 지극히 정상적인 안목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때론 우리의 안목과 상식을 초월할 때가 종종 있음을 알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이 여자에게 “남편이 없다.”라고 하는 판정의 말씀을 하셨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여자에 대하여 지조와 정조가 올곧은 여자로 잠정적 결론을 받아 드리고 난후 주해를 전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동지방에서는 아직도 사람이 죄를 범하면 그 부위를 절단하고, 절단으로도 罪價가 부족할 시에는 처형도 불사하는 무서운 지방인데 비하여,(1968년도 파월시 들은 소문.) 더더구나 약 2천 년 전에 남편을 대여섯씩이나 갈아 치우는 음란한 부도덕한 여자가 백주에 동내를 활보할 수 있을 것이며, 더더욱 경건한 신앙의 대갓집 야곱의 우물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들을 해소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 부흥강사들의 논조대로 우리 주님이 그 여자의 일곱 번째 배우자로 받아들였다면, 이는 마치 제사상에서 물린 퇴주잔이나 처리하는 사람처럼, 우리 주님을 잡된 음녀의 일곱 번째 정부(남편)로 몰아세우고 마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허나, 경에 기록된 말씀은, 남편이 없는 여자로 간주되어있음을 보아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여인은 지조와 정조가 올곧은 여자라고 보아야 타당한 논리일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여자가 남자를 대여섯씩이나 갈아치우고도 어떻게 생존해 있을까, 아니, 생존 그 이상을 지나 어떻게 신앙의 대갓집 야곱의 우물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一蓮(일련)의 사건들을 지금부터 본문을 조목조목 들어가면서 꼼꼼히 파헤쳐 나가겠습니다.
일차적으로 주님은 왜 사마리아를 통과하셔야 했을까?!....로 시작을 해 나가봅니다.
<1~2절>
+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위의 구절을 읽노라면 실소를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곧 세례자요한과 우리 주 예수께서는 6개월 시차를 둔 외가 쪽의 친척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惡(악)소문이 나돌고 있고,
그 악 소문이 다시 우리주님의 귀가에 와 닿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악소문의요지는 바로, 예수께서 마치 자신의 교세를 불리기 위하여 세례자요한의 전매특허인
물세례를 가로채, 그것도 같은 바닥권내에서 이종지간에 밥그릇 싸움하는 꼴로 바리새인들 사이에 비쳐진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3~4절>
+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쌔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예수께서는 물세례를 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희생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로인하여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하여 바리새인들의 소문은 웃지 못 할 넌 센스이며, 반면 주님이 떠나시는 것은, 이종지간에 신선한
양보의 미덕을 우리에게 본보기로 보여주시는 한 장면도 내포된 듯도 싶습니다.
그러한 미덕은 세례자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3;30>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러한 아름다운 발상의 소리를 인간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이것은 진리를 값없이 무가로 선포하는 것으로부터 기인된다고 봅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의 길 예비사자요, 주님의 친구요, 엘리아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한 하나님의 위대한
使者였기에 흥망성쇠에 연연치 않고 주님께 찬사를 아낌없이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유대를 떠나시는 안타까운 사실은, 바리새인들은 스스로가 복을 털어버리는 짓이요,
반면 복이 이방지역으로 흘러 들어가는 반가운 예표였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주님이 통과 하시려는 사마리아 성읍은 한때 이스라엘 북 왕국의 首都이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목적인 갈릴리는 이방지역입니다.
<5~6상>
+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옛적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의아들 이삭이, 자기의 본토 친척집 우물가에서 배필을 발견하듯이,
주님도 잃어버린 야곱 즉 이스라엘의 후예를 찾되, 이삭처럼 우물가에서 상봉하려는 찰나입니다.
이는 마치 목자가 길 잃은 어린양을 찾아 재회 하듯이 말입니다.
<6~하>
+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주님이 우물가에 도착한 제 육시는, 부흥강사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 시간대로 正午로 환산되며,
(1980.07월부흥회 때 입수한 정보).
그리고 행로에 피곤을 느끼시는 예수는, 신이 육체를 입고 우리가운데를 운행하시며 우리의 곤고함을
체휼하심에 그러할 것입니다.
<7절>
+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육시쯤 되어 물 길러온 여자는, 마치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그 이마에 새겨진 주름의 깊이가,
속내 깊숙이 묻혀있는 愁心(수심)의 깊이와 같아 보였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여자에게 물을 달라하셨으며, 그렇게 여자에게 물을 요청하심은, 상대를 복음 안으로
깊이 끌어들이시려는 반어법이며, 이는 곧 주님 특유의 관심전도 법으로써 우리에게 지혜로운
전도은사를 재산으로 물려주시려는 주님의 배려였다라고 믿어봅니다.
여기서 잠시 본문에 등재된 문제의 여인에 대하여 필자와 견해를 달리하는 분들 때문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알고 있기로는, 이 여자가 정오(육시)땡볕에 물을 길러 나오는 것은,
남편을 대여섯씩이나 갈아치운 창녀와 같은 여자이기 때문에 그 부끄러운 것을 피하기 위하여
동네사람들이 낮잠 자는 시간을 틈타 왔다고 하며, 그 이유는 사마리아지역 특성상 정오는 뜨거워서
낮잠을 자는 시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어디에도 그쪽지방이 정오에 낮잠을 자는 시간이라거나 또한 그와 비슷한 정황이 명시되어있는
것을 이 필자는 아직 발견하지를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 중동지방에는 뜨거운 오후가 되면 근로자들을 휴식내지 낮잠을 재우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일(석유)때문에 경제지수가 높아져서 근래에 불거진 이야기며, 근본원인은 기후가 다른
외국인노동자들 때문에 그러했던 것을,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주해를 견고히 하려니 시차와 환경을 고려치
않은 상태에서 생각 없이 비빔밥 주해를 남발한 것이라고 그렇게 보여 집니다.
이제다시 7절에 연이어,
<8절>
+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 이러라.+
예수께서 제자들이 없는 틈을 이용하심은, 대화에 제 삼자가 끼어들어 흐름을 방해 내지 대화를 끊는 것들과,
그리고 상대에게 산만한 환경을 피하여 온전한 정신집중을 요하심에 그러하다고 여겨집니다.
이는 마치, 구약시대 선지자 엘리아가 과붓집에서 그릇마다 기름을 채울 때에는 문을 닫고 하라하듯이,
주님도 이 여인에게 생수를 건네는 것은 일대일로 비밀리에 하심을 보아야 하며,
또한 이는 복음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방편이리라 사료됩니다.
<9절>
+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 이러라.+
여기서 우리는 이 여자의 진면목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수순 상 기존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먼저 해결하고 난 다음이라야 할 것입니다.
세간에서 알고 있는 대로 이 여자가 부도덕한 음부였더라면,
예수께서 물을 달라 하셨을 때에 아마 이 여자는 물바가지에 버들잎하나를 띄우고 나서, 그리고
입으로 물을 호~오 불고서는 살포시 미소까지 얹어 음(淫)스러이 주님께 물을 건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우리가 표면적으로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하나이까”라고하며
여자로써의 정절과 신앙의 지조를 당차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여자는 야곱의 우물을 독점할 정도로 야곱의 정통 후예의 며느리이며, 신앙심이 두터운 성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잡된 화냥여의 정부노릇이나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심을 이번기회에 자각해야할 것입니다.
우리주님은, 사막에서 생수보다 더 귀한 생명의 성령의 영생수를 죽은 영혼들에게 부어주시려고 선물로
준비해 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10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반어법속에 숨겨진 진의는 지상최대의 선물인 성령이며, 이 성령은 곧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이제 서서히 그 실체를 이 여자에게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
<11절>
+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이 여자는 하늘의 새 영생수를 접해본 바가 없는 터라, 지상의 H2O의 관념을 넘을 수가 없어 상호
엇박자의 대화로 내닫는 상황인 것이었습니다.
이는 靈 肉間(영 육간)의 차이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그림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 여자가 애용하는 야곱의 생수공급은,
번거로운 두레박질과 무거운 물동이를 머리로 이어 나르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육체에 압박을 가하는 구약의 율법을 대변함인 것입니다.
구약의 생수공급은 이렇게 부잡했었습니다. 즉 율법은 은혜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계속 수고하는 반복된
연속의 장면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이제 하늘의 永 生水를 공급받기위해서는 물동이와 물 긷는 수고도 그쳐야할 것입니다.
<12절>
+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주님과 홀로 마주친 이 여자는 주님을 대하기를, 이를 우리나라 말로하자면, 주님이 마치, 초라한
少僧(소승)이 도를 수행하는 여정에 있는 격으로만 알고 대수롭지 않게 야곱에게 견주어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여자의 말의 의도인즉 “당신이 야곱의 능력보다도 더 크고, 진리면 에서도 더 높고 깊습니까?”
그 여자가 주님을 보아 하니, 말씨는 무게가 있고 의젓해 보이나, 그러나 생긴 면상은 마치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어 보이니,
하여 상대의 處地가 아직 처자식도 없어 보이며, 기업은 고사하고 양한마리와 물 한 바가지도 없어 보이기에
그렇게 반문하는 것입니다.
이에
<13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
선지자 야곱의 물은 고개가 빠지도록 물동이로 이어날아다 먹어도 다시 목마르고 먹고 먹어도 계속
목마른 물이기 때문에, 이는 구약의 율법을 예표로 한 장면이었습니다.
이는 곧 소, 양. 비둘기 등등을 계속 바쳐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구약의 진리는 그야말로 몽학 적 방법이므로 반복이 계속 되풀이되고, 물리적인 아주 힘겨운 행위의시대요
또 다른 예로 말하자면 이는 짐승을 길들여 사람처럼 만들기 위한 힘겨운 마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주님 앞에서 야곱도 모세도 솔로몬 등등이 다 물러가야 할 때입니다.
어떤 이의 말처럼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것처럼,
이제는 야곱의 계략과 모세의 율법과 솔로몬의 지혜와 성전 등등은 물러가고,
+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마17:8하반절>
+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8:9하반절>
위의 말씀처럼 이제부터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만이 뵈어야하고, 오직 주님만이 계셔야할 것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내려갑니다.
<14절>
+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갈증(渴症)에는 두 가지로써 외적갈증과 내적갈증이 있으며,
외적갈증은 야곱의 물로도 해결할 수가 있으나, 심적 갈증은 오로지 주님의 생수로 만인 것입니다.
내적갈증에 대한 예를 들자면, 어떤 공직자가 모름지기 부정을 하였습니다.
헌데 이를 눈치를 챈 감사원들이 서류를 파헤치며 수사의 범위를 좁혀 오고 있다면, 당사자의 심적 갈증은
목이 마르는 것이 아니라 피가 마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갈증에는 주님의 생수로만인 것입니다.
마음을 적시는 영적 생수는 완전자동펌프 격으로 이동이 자유롭고 수명은 영구적인 것입니다.
하여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러므로 주님이 하사하시는 물은 永生湧泉水(영생용천수)입니다.
<15절>
+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방법만이 최상급이요 정통으로 자처하고 있으나, 주님의 참 영생수를 접하게 되면,
나의 밑 빠진 독을 발견하게 되고 동시에 지난수고는 만사가 허사임을 깨달게 되는 것입니다.
손에든 율법은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의를 삼키며 주님을 십자가에 두 번 다시 못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껏 철없이 나의 기호품만 아뢰던 것들을 그치고, 이제는 주님이 주시고자하는 것을
바랄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여자와 같이 현 위치에서 180도로 회전하는 모습을 보이며,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라고 할 때입니다.
야곱의 우물과 모세의 제사장 직분이 이제 주 예수께로 옮겨 바뀌는 시점에서 율법도
변역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히7;12>
더불어 씨와 자녀출산방법도 개역(改易)이 되어야 마땅한 법입니다.
<16절>
+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허~허~어~~ 이럴 수가....
아니 예수께서는, 목이 빠져라 물 긷는 아낙네에게 수고로움이 없는 영생수를 약속했고,
하여 이에 약속의 물을 좀 달라는 그 여자에게 남편을 데려오라는 대령의 구령은,
아무리 엇박자의 대화라 해도 상상조차 어려운 대화일 것입니다. 아니!!...
갈증에 왼 남편이 무슨 상관관계란 말일까? ......
허나 엇박자의 문제는 주님과 그 여자가 아니라,
기실 문화와 시대가 다른 오늘날 우리들의 엇박자가 아닌 헛 박자였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상대의 눈높이에서 진리를 하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남편대령 구령은, 그 여자의 생애에 있어서 비비꼬인 과거, 억울한 인생관, 즉 남편을 여섯이나
대하고도 풀리지 않는 인생의 갈증을 주님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기에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 여자에게만 국한된 것만이 아니라 이는 곧 오늘날 우리들의
당면 과제임을 깨달아야할 것입니다.
<17.18절>
+ 17,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주님은 참으로 오랜만에 “옳도다.” “참되도다.” 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유대인들에게 역정과 저주를 서슴없이 쏟아 부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할 것은 즉,
이 여인은 왜 과거에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또 현재도 남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편이 없다고 했으며,
이에 우리 주님은 왜 그녀의 말에 전적으로 절대적인 찬성표를 던져주셨을까!!...
허면 이제 서두에 언급했던 대로 이 여자는 남편이 없다는 결론이요, 하여 역으로 이 여자는 정조가
깨끗하다는 것을 인정해 줘야 마땅치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위의 논리를 알아듣기 쉽도록 상대만 바꿔 이해를 갖자면, 역으로 남자들이 아내를
대여섯 명씩을 번갈아 갈아치우고서는 주님 앞에 나가서 “나는 아내가 없나이다.”라고 말을 한들,
과연 이런 것(말)들이 통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이제 여기서 우리의 헛걸음을 잠시 멈추고 기존 관념을 접은 다음, 말씀을 다시
깊이 사경해 나가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주님이 그 여인에게 정의를 내리신 말씀처럼 그 여인은 남편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난후 이 문제들을 전개해 나가야 올바른 해답을 얻어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여 남편이 없는 여자라는 것은 정조가 깨끗하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레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 필자와 같은 결론으로 긍정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17,18>절 말씀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위의 말씀을 언뜻 보면, 남편들의 존재여부에 있어서 긍정과 부정이 애매모호하여,
이는 마치 남편이[있고도 없고, 없고도 있다]는 말로 밖에는 볼 수가 없어서 이해하기가 아주 힘든
난해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이들이 이곳을 곡해하여 이 여자를 음부로 간주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이 여섯 남자들의 신원이나 행적이 불투명한 것이 바로 문제를 일으킨 소지였을 것입니다.
하여 부흥강사들이 이 남자들을 아무렇게나 자기들의 일방적 생각대로 저들의 정체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들의 신상을 시쳇말로 이르면, 얼 짱, 변강쇠, 부자, 권력자, 학자. 등등.... 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바른 요지는, 주 예수께서 이 여인의 남편들이 여섯이라는 숫자는 인정하나, 이 여섯
남편들로써의 가치는 묵살하시는 의도를 어감에서 읽어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여 일차 [있고도 없고, 없고도 있다]는 말의 뉘앙스는 곧[있으나 마나]하다는 말로 이해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자에게는 남편이 여섯씩이나 있었으면서 이들이 주님에게로부터 있으나 마나한 존재는
과연 무엇을 두고 이르시는 말씀일까?
여기서 남편이 여섯이라는 숫자로 인해 여자를 음부로 간주하자니 십계명에 따라 돌에 맞아죽어야 되므로,
여자의 생존자체가 모순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바른 해답으로 가는 길이 아주 많이 좁혀진 셈이 되었습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경전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그들의 結婚觀(결혼관)이 기록되어있으므로,
남편을 대여섯씩이나 갈아치우고도 율법 앞에서나 동네에서도 활보할 수 있는 제도가 있음을 볼 것입니다.
그로인하여 상기의 난해한 사건들을 모순 없이 매끄럽게 풀 수가 있고,
반면 은혜의 생수를 맛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크게 주의 할 점은, 약 2000년 전 중동지방의 결혼관입니다.
우리나라문화의 눈으로 그들의 결혼관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는 자칫 주님의 말씀을 오해하기가 십상일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거스르지 않는 범주 내에서 이 여자의 과거를 바르게 드러내야 주님 앞에서
득죄를 면하고 반면 차원 높은 복된 진리를 얻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마22; 24~ 27>
“+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 찌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 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위와 같이 모세의 율법에는 자기계대[繼代]를 위하여 형수[兄嫂]와 혼인을 하도록 하는
일명 수혼 제[嫂婚 制]가 있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두개인들이 들고 나온 그 여자의 일곱 남편들은 고자로써 계대를 이루지 못 하므로,
주님 앞에서는 [있으나 마나]한 자들인 것입니다.
즉 그 남편들은 있어도 없는 거와 같고, 반면 없다고 하여도 호적상으로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므로
남편의 머릿수로 計數가 되는 그러한 남편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사를 끼치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라서 하나님존전에는 실로 무가치한 존재들이므로, 이를 再次 이르자면,
이런 자들은[있고도 없고, 없고도 있다]는 말이 되며, 이를 쉽게 이르면 [있으나 마나]한 자들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본문을 다른 각도에서 심도 깊게 재구성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글쓴이는
본문에 등장한 이 우물가의 여자를, 주님의 의중과 일치점을 이뤄 내기위해 아래와 같이 읽어보고 싶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사마리아지방 수가라 하는 동내에 야곱의 우물을 확보 계승해 내려오는
신앙의 대가인 야곱의 종갓집이 있었으며, 이 집은 자식들을 대 여섯 명쯤 둔 아주 유복한 가정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집 장자 맏아들이 장가(결혼)들 나이가 되므로, 이 종갓집에서는 자기네와 걸 맞는 신부 감을,
자기네와 혈통이 가깝고 신앙이 돈독하며 또 처가도 본가와 마찬가지로 유복한 가정에서 간택(簡擇)하여
혼례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그 집 맏아들 장자는, 자기 아내에게 자식을 끼쳐두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다음 동생이 율법을 따라
자기 형수를 취했으나, 그도 맏형과 같이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으며, 그 다음도 또 그 다음도 그렇게
죽고 죽어, 이제는 여섯째 동생을 남편으로 맞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도 역시 자기 형들처럼 아내에게 아이를 안겨주지 못하므로 이 여자는 그렇게 無子한 처지로
야곱의 우물을 길으러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 여자의 시댁은 하나님께 득죄를 하여 고자의 가정이되었는지, 아니면 할례 시 칼을 너무 깊이대어
고자가 되었는지,.... 아무튼 신앙심이 두터운 이 여자는 시집을 온 후로 劬勞(구로)치 못하고 젖을 빨려보지
못했음으로, 한이 맺힌 나날을 한숨으로 보내는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동네사람들로부터 신앙심에 대하여는 존경을, 그리고 남편(형제)들로 인하여 無子하므로
이점에 있어서는 동정을 받고 살아온 슬픈 여자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수가라 하는 온 동네 사람들은 이 여자의 친정집 형제자매들이 시집장가를 가서 애들을 쑥쑥 잘만
나아 잘 기르는 것을 직접 본 사람들로 인하여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야곱의 종갓집으로 시집을 온 이 여자만은 아이를 낳지 못하여 石女(불임여)아닌
石女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것을 칠거지악의 하나로 간주해서 불행하게 여자만 소박을 맞아
친정으로 쫓겨 가는 그런 모순된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나라의 [수혼 제]는 여자도 구제되고 혈통도 보존됨으로써
우리나라 결혼관보다 합리적이었습니다.
아마도 無子한 이 우물가의 여인이 현세에 살고 있었다면, 그 여자는 당장 산부인과에 찾아가서 진단을
받아 자기가 불임인지, 남편들이 고자인지를 단판 지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 그때는 2천연전이라서 그렇게 과학과 의학이 어둡던 그 시대에, 때마침 사마리아지방
야곱의 우물가에 혜성같이 나타난 유대인이, 구로치 못한 여자에게 생수를 준다하며 뜬금없이
남편을 대령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그 여인의 속내 깊이 묻고 사는 가련한 사연이었습니다.
그 여자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라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남편이 없다는 말은 숨김없는 말이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이 여인의 남편들을, 남편으로써의 認許(인허)를 不許(불허) 하시며, 과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속을 시원하게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한 여자가 남편들을 대여섯씩이나 갈아치우고도, 불같은 동네 유지들 앞에서나
또는 자국의 헌법 앞에서나, 그리고 하나님의율법 앞에서나, 주 예수 앞에서 참되고 옳다는
도장을 얻어내기란, 고자의 남편을 둔 야곱의 후예들, 곧 오직 모세의 율법밖에는 천상천하에도
있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해야 진리가 풀어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육적고자는 신약의 영적고자이며 이 고자들은 복음의 자녀를 생산치 못하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여자를 보고 “네 시집의 남편들이 고자일 뿐이지 네가 애를 못 낳는 석녀가 아니다.”라고
하는 정의를, 男便認定 不許라는 식의 우회적 표현으로 각진 판결을 내렸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無子한 가운데서 남편을 여섯 명씩이나 갈아치워야만 하는 기막힌 사연을,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는 이 짤막한 대답 한 자락을 붙들고 자기의 온 과거를 꿰뚫어 버리는
이방남자 유대인에게 그 여자는 매료되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19절>
+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이 말은 즉 이 여자가 유대인 예수를 접하니, 마치 영특한 무당집 족집게 아저씨처럼 내 과거를 잘
드러내기는 했으나, 그러나 아쉽게도 권위가 없다는 것으로 약간의 실망을 나타내는 말인 것이었습니다.
즉 판결권이 없는 것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만 과거나 미래에 대한 예언을 잘 꿰뚫는 선지자중 그 하나로만 치부하려는 심산(心算)이었습니다.
만약, 내 앞에 서있는 이 유대인이 메시아라면, 나에 대하여 판결해 주시기를,
[남편들은 鼓子로써 “패!!”, 반대로 너는 無故함으로“승”] 그렇게 確固不動(확고부동)한 종지부를
찍어주었을 것이나,,, 그러나 이 남자가 용 하기는 그리스도메시야에 못지않으나, 판결 권 즉 심판권이
보이질 않아 이를 다만 선지자급으로 내려 저렴하게 취급하는 것이었습니다.
허나 기실 우리 주님은 에이 풀(A+)에 상응하는 알관주도장을 이미 찍어 확답을 내려주었거늘
이 여자는 주님의 외형에 눈이 가리어 진주를 유리구슬로 간주하는 격이 되고만 것이었습니다.
즉 메시아를 선지자로 절하 평가하는 것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여자는 자기의 율법수준답게 예배에 대하여도 예배의 내용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예배처소에 가치비중을 두어 장소가 궁금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곧 오늘날 육적 신앙의 안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주님의 예배정의는 정해진 시공간에 있지 않다 라고하시며 방법과 질(質)에다 초점을 맞춰주십니다.
이 여자는 위에서 피력 했듯이 영이 맑고 순수하며 심령이 가난한 자이기에
<21~24>
+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찌니라. +
그렇습니다.
주님이 오신이후로는 예배의 정의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또한 365일 주님과의 동행이 아니라
상호내재인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말씀을 수용하려면 진리의 분량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자만이 해독 할 수 있는 말씀임을
우리는 잘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자는 워낙 신앙의 바탕이 깨끗하기 때문에 수준 높은 분량의 진리를 빨리 깨달았을 것입니다.
고난도의 진리도 바로 바로 흡수소화 해내는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만약 우리의 기존 관념대로 이 여자가 남자를 대 여섯씩이나 바꿔가며 남편을 둔 잡된 淫婦이었더라면
그 영은 더럽고 혼미함으로 주님의 고난도의 대화를 소화해 내기란 기대도 어려운 것이며,
또한 주님은 값진 진리의 진주를 짐승과 같은 잡된 음녀 에게 던지실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서
“진주를 짐승과 같은 잡된....”라는 이 문제로, 한 가지 문제점이 불거져 나올 것이 있을 것이며.
이는 즉 <요8;3~11>의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가 대두(擡頭)될 조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과 이곳 사건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예수께서
<요8;3~11>에 거론된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보고 [네가 옳다거나 참되도다.] 라고 하셨다면
우리의 교가 이는 참으로 뒷감당이 어려운 종교로 전락되고 마는 것입니다..
각설하고,....
누구든지 위 본문 <21~24>절의 내용이 쉽게 이해를 할 수 있다. 라고 한다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예배처소는 어디일까? 님의 예배처소가 예루살렘처럼 번화가인 도시한복판에서??
그리고 궁전처럼 화려한 건물을 짓고, 금송아지제사를 드리지는 않을까?
즉 물질 예배를 드리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그렇지 않다하여 베드로가 변화 산에서 했던 말과 같이, 산에다 초막 셋을 설치하려는 것은,
요즘 소위 산기도원을 두고 이르는 말일 것입니다.
이처럼 속세를 떠나 산속으로입니까??
주님은 방대하시며 입체시요 살아 음직이시며, 바람처럼 자유로이 회전하시는 거룩한 영이십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시되 시간은[지금]이며, 장소는[이 자리]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 영의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이것이 영의 예배입니다.
위 세 가지사항, 즉 수시로 기뻐하고, 연속기도, 매번 범사에 감사를 이행함에 있어
시간과 건축물(예배당)이 있어야만 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주님을 마치 부처를 섬기는 佛堂 間처럼 시공간에 가두려 할까!!....
위 본문 <21~24>절을 잘 소화 한자는, 아래 말씀처럼,
<요3;8>
“+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위와 같은 자는 시 공간을 초월한 風流 體(풍류 체)인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25절>
+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가슴 깊이 응어리진 이 말 못할 사연을, 메시야 곧 자기가 기다리는 그리스도가
오시면 나의 이 모든 오명을 밝히 드러내어 판결을 해주시고, 뿐만 아니라,
만민 앞에서 나의 압승을 선포해 주시어 나의 억울한 일생을 보상해 주시겠지.... 라고하며 지금
족집게 같은 유대선지자에게 넋두리 아닌 넋두리를 늘어놓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스치듯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걸음을 멈추어 다시 음미해 볼 대목은, 곧 그 여자가 자기
당대에 메시아라는 그리스도가 오실 줄을 알았다는 것과 자기의 어떠함을 해결해 주실 것을 알고 믿었다는
점이 놀랍도록 신앙심이 높고 깊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6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그러나 이 여자는 자기 앞에 서있는 유대인의 선지자가 메시야로 쉽게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는 형색이 혈혈단신으로써 타인의 六甲이나 짚어주고 밥술내지 냉수 한 그릇 얻어먹고 지나가려는
초라한 과객에 불과한 사람으로 밖에 보이질 않았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었습니다.
<27절>
+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초라하기 그지없고 혈혈단신으로만 알았던 유대인 선지자를,
이때 갑자기 젊고 육체가 건장한 장정들이 나타나
여자와 함께 싸잡아 비~이~~익 둘러 에워싸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형색은 값비싼 고가명품(高價名品)으로 두르지는 않았을망정 태도는 자못 진지했습니다.
꼭 암행어사 일파와 같았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이는 호젓한 곳에서 남녀가, 그리고 이해 못할 상호 이단지간의 대화였으리라고 짐작이
갈 것이었으나, 그러나 누구하나도 감히 입을 여는 자가없어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져 근엄하기까지 하여
초라한 족집게 점쟁이 선지자는 돌연 왕같이, 그리고 그를 둘러싼 무리들은 왕의신하들이 변장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28절>
+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
이제 이 여자에게는 그 행색이 초라한 유대인이 보여준 실력으로나 또 주위에서 받들림의 정황을 보아,
심적 물적 內外양면에 있어서 그가 메시아임이 의심할여지가 없어졌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로 믿어지는 순간에 이 여자의 마음속깊이 억압되었던 누명에서 해방되는 동시에 기쁨이
마치 생수가 바위를 터트리고 용솟음치는 희열을 맛보아 자기도 모르게 물동이를 내 동댕이치고
동네로 단숨에 뛰어 들어 갔던 것이었습니다.
<29절>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
그렇습니다.
우리의 메시야는 내심 깊은 상한심령까지도 치료하시는 광선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기존관념을 마무리하는 차원으로 두 부정적인 방면을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 여자가 기존관념대로 한 남자로 만족을 못 느끼고, 이 남자 저 남자를 끌어들여 남편을 대 여섯씩이나
갈아치우는 잡된 음녀라면, 자기의 과거가 무슨 화려한 경력이나 된다고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라고 하며 외쳐댈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착안점을 두어야 합니다. 하여 실로 자기의 과거를 동네에다 대고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라고 함 껏 나발을 불어도 듣는 상호 모두에게 떳떳하고 부담 없는 메아리였습니다.
그리고 여타의 주석가들은 이 여자가 물 기르는 시간을 두고 하는 말인 즉 다른 이들은 낮잠을 자는
시간이라고 하였는데, 성경에는 왜 그들이 낮잠을 자지 않고 있었을까 하는 점이며,
마지막으로,
여자가 “와 보라” 라고 외칠 때, 동네 사람들은 아마 다음과 같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의 유행가에는,
~~ 앵~두 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 ~~
라고 하는 노래가 있다더니만, 그와 같이 이제는 저 늙은 여자가 우물가에서 外地(외지)남자를 끌어들여
국제결혼을 하려는 속 샘이로구나.”그러면서“저 더러운 화냥...”하며 욕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동네사람들에게 동정과 동시에 신임을 받고 살아왔던
자로써 정조와 신앙의 면에서는 자부심을 안고 살아온 여인이었습니다.
<30절>
+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이 여자는 시집와서 구로치 못하였으나 남편들과 하나님을 원망치 않고, 다만 혼자 타는 가슴과
짓눌린 마음을 묵묵히 신앙으로 삭혀 내려왔던 것이었습니다.
즉 메시아가 오시면 나의 이 말 못할 사연을....
그러므로 오늘날 그 여인이 외치는 소리는 천사들의 나팔소리와도 같은 효력을 낼 수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31.32절>
+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우리주님의 도시락은 바로 이 우물가의 여인이었습니다.
메시야로 오신주님은, 無子하고 심령이 가난한 사마리아 여자를 먹어야하고 그 여자는
우리주님을 먹어, 주님과 나(여자)는 온전한 하나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방법에 있어 이는 오직 상호지간에 먹고 마신다는 표현 외에는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성경의 이치와 표현의 매력이여~~~~~
이 세상에서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 중에는, 서로를 먹고 마신다는 말과, 그 방법
외에는 그 무엇도 이를 능가 할 표현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먹고 마시므로 온전한 주님의
성분으로 전환돼 있어야 합니다.
<33.34절>
+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은 사람농사를 지으시고, 양식을 사람으로 하시며, 반면 부서지기 쉬운 우리는
주님을 양식으로 먹고 마시므로 완전한 생명을 취하고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내안에, 나는 하나님아버지 안에, 이렇게 신과 사람이 하나를 이루시려고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그렇게 창세전에 예비하셨던 것이었습니다.
<35절>
+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추수할 곡식은 무르익어 고개를 숙였으나,
그러나 반대로 추수꾼은 지금당장 고개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추수의 시기가 따로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무화과나무에 가셔서 제 철이 아닌데도 열매를 찾으시나, 이에 열매가 없자 나무를
저주하시는 것을 우리는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연적인 수확기는 넉 달 후가 되겠지만, 우리주님의 천국수확기는 사시사철이 수확기인 것입니다.
오늘이라도 나를 찾으시면 나는 충실한 알곡으로써 완전해야하며, 반면 유능한 추수꾼으로써의 자질도
갖추고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36~38절>
+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존전에 산자로써 이 땅에 살아있는 산 씨를 뿌리는 노력을 하였고
우리는 다만 추수에 참예케 하셨습니다.
<39절>
+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 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그 여자는 세례요한처럼 작게는 사마리아 지방의 길 예비 나팔수로 쓰임 받았습니다.
<40.41>
+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1.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우리도 초기에는 사람으로 인하여 주님 앞으로 인도 되었으나,
지금은 주님으로부터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으므로 족히 보고 만진바 되어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제 글을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위 본문<요4장>의 결론은 [씨]와 [추수]가 관건이었습니다.
우물가의 여자는 밭이요, 그의 남편들은 죽은 씨앗이었습니다.
이는 즉 생명론의 진리메시지였습니다. 이를 현실성 있게 해석을 하면, 여자는 교회요 교회는
성도들을 말함이요, 본 주제 남편들은 말씀봉사자 내지 목회자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그(말씀봉사자 내지 목회자)들만 문제가 있을까??
본문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하는 시사점을 바르게 찾으려면, 먼저 등장인물들을 살펴봐야할 것입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요, 다음은 우물가의 여자며,
마지막으로 그 여자의 여섯 남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 부류중의 한사람인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이 세 부류 중에 누구라고 생각되십니까??
오늘날 교회에 말씀봉사자나 목회자들이 교대로 수없이 들락 이고 있으나, 이들은 예수를 빙자해
자기들의 種(종)즉, 씨를 그 밭에 내리려고 애쓸 뿐, 진정한 주님의 씨앗을 뿌리려 하지를 않으며 이제는
양심에 화인 맞아 아예 씨 내림의 방식마저 모르는 실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현 신앙계의 병폐는, 교회의 리더들에게서 젖을 먹고 자란 교인들이 그들의 품을 떠나 새 가정을 꾸리고,
전도로 복음의 자녀들을 많이 배출해 내야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못한 처지로써
다만 자기교회당으로 끌어들이는 견인차역할밖에 못하는 실정입니다.
이것은 목회하는 말씀선포 자들이 죽은 씨앗이요 삯군이기 때문에 성도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계대를 이루지 못하는 씨 없는 수박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들의 물질과 열심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서자)과 교파의 자녀를 양산해내며
무너질 바벨탑으로 치닫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자녀를 생산해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먼저 주님의 구속사를 믿고 그 후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리고 이를 남에게도 전파하여, 그들이
주의 이름을 받아들여 부르짖게 되면 그 이름을 받아들인 자들은 곧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복음의 자녀에 대한 메시지는 각설하고, 아무쪼록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충만하여
하나님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말 1;11>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행4;12>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 아멘, 주 예수여~~! 당신의 이름이 온 땅에 두루 편만 하 소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