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2. 감꽃 피는 집/ 김재진
3.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복효근
4. 그 강에 가고 싶다/ 김용택
5. 그 길은 아름답다/ 신경림
6. 그대에게 가고 싶다/ 안도현
7 그랜드 캐년/ 한석산
8. 그리운 우체국/ 류근
9. 꽃피는 시절/ 이성복
10.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 함동선
국보문학 시낭송대회 지정시 1부(1~10)
1.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랜덤하우스/ 2012
2. 감꽃 피는 집 / 김재진
감나무가 있는 집에 살고 싶다
마당에 떨어지는 감꽃 실에 꿰어
눈 맑은 사람에게 걸어주고 싶다
행복이 가끔은 해맑음을 바라보는 그
가볍디 가벼운 순간 속에 있다는 사실을
늦깍이로 배우며
산그늘이 내려와 서늘한 저녁 속을
느낌표 되어 있고 싶다
마당엔 싸리비 흔적, 마음 비우듯 가지런하고
산사같이 고적한 생의 한 순간을
한 모금 샘물로 적셔놓으며
감꽃 목걸이 걸어 누군가를 맞이하고 싶다
더러는 아련하게, 가끔은 해사하게
먼길 가듯 떠오르는 미소 하나
입가에 올리고 싶다
늦가을이면 가지 끝에 까치밥 하나 매달아 놓고
다 내어준 허전함으로 바람에 묻어 울고 있는
키 큰 감나무가 있는 집에 살고 싶다
하늘이 언덕 아래 키를 낮출 때
하얀 버선발 디뎌 찾아올
겨울이 아름다운
그런 집에 살고 싶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김재진/ 꿈꾸는 서재/ 2016
3.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 복효근
새들이 겨울 응달에
제 심장만 한 난로를 지핀다
두 마리 서너 마리 때로는 떼로 몰리다 보니
새의 난로는 사뭇 따숩다
새들이 하는 일이란
너무 깊이 잠들어서 꽃눈 잎눈 만드는 것을 잊거나
두레박질을 게을리하는 나무를
흔들어 깨우는 일,
너무 추워서 옹크리다가
눈꽃 얼음꽃이 제 꽃인 줄 알고
제 꽃의 향기와 색깔을 잊는 일 없도록
나무들의 잠 속에 때맞춰 새소리를 섞어주는 일,
얼어붙은 것들의 이마를 한 번씩
콕콕 부리로 건드려주는 일,
고드름 맺힌 나무들의 손목을 한 번씩 잡아주는 일,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천지의 나뭇가지가 대들보며 서까래다
어디에 상량을 얹고
어디에 문패를 걸겠는가
순례지에서 만난 수녀들이 부르는 서로의 세례명처럼
새들은 서로의 소리가 제 둥지다
소리의 둥지가 따뜻하다
이 아침 감나무에 물까치 떼 왔다 갔을 뿐인데
귀 언저리에 난로 지핀 듯 화안하다
*따뜻한 외면/ 복효근/ 실천문학/ 2013
4. 그 강에 가고 싶다 / 김용택
그 강에 가고 싶다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저 홀로 흐르고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멀리 간다
인자는 나도
애가 타게 무엇을 기다리지 않을 때도 되었다
봄이 되어 꽃이 핀다고
금방 웃을 일도 아니고
가을이 되어 잎이 진다고
산에서 눈길을 쉬이 거둘 일도 아니다
강가에서 그저 물을 볼일이요
가만가만 다가가서 물 깊이 산을 볼 일이다
무엇이 바쁜가
이 만큼 살아서 마주할 산이 거기 늘 앉아 있고
이 만큼 걸어 항상 물이 거기 흐른다
인자는 강가에 가지 않아도
산은 내 머리맡에 와 앉아 쉬었다가 저 혼자 가고
강물도 저 혼자 돌아간다
그 강에 가고 싶다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
그 산에 그 강
그 강에 가고 싶다
*제12회 소월시문학상수상작품집/ 김용택/ 문학사상/ 1998
5. 그 길은 아름답다 / 신경림
산벚꽃이 하얀 길을 보며 내 꿈은 자랐다.
언젠가는 저 길을 걸어 넓은 세상으로 나가
많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가지리라.
착해서 못난 이웃들이 죽도록 미워서.
고샅의 두엄더미 냄새가 꿈에서도 싫어서.
그리고는 뉘우쳤다 바깥으로 나와서는.
갈대가 우거진 고갯길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이제 거꾸로 저 길로 해서 돌아가리라.
도시의 잡담에 눈을 감고서.
잘난 사람들의 고함소리에 귀를 막고서.
그러다가 내 눈에서 지워버리지만.
벚꽃이 하얀 길을, 갈대가 우거진 그 고갯길을.
내 손이 비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내 마음은 더 가난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면서.
거리를 날아다니는 비닐봉지가 되어서
잊어버리지만. 이윽고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어서, 내 고장으로 가는 길이 아니어서
아름답다.
길 따라 가면 새도 꽃도 없는
황량한 땅에 이를 것만 같아서,
길 끝에서 험준한 벼랑이 날 기다릴 것만 같아서,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뿔/ 신경림/ 창비/ 2002
6. 그대에게 가고 싶다 / 안도현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 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뜻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 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한국대표명시선100/파꽃/ 안도현/ 시인생각/ 2016
7. 그랜드 캐년 / 한석산
나는 세상이 아름다운 것을 모르고 살았다
여기 서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처음 느낀다.
역사의 땅 그랜드 캐년 트레킹
나바호 인디언 성지 슬픈 길목
수천 년 삶의 애환이 서린 목숨 줄 같은 길에서
숨은 절경 은둔지 하바스 파이 인디언 마을
야성이 살아 숨 쉬는 원시의 숲
인디언 부족의 말발굽 소리
북소리 바람소리 천둥소리 빗소리
하바수 폭포 소리
우뚝 솟은 사암벽 둥지 튼 독수리 날갯짓이 걸작이다.
세상의 끝을 보는 것 같은 사우스림 절벽
구름과 바람 달과 별 태양의 고향
사라진 새끼를 찾는 어미 들개의 애절한
울음소리
뭇 생명의 영혼이 잠든 악마의 협곡
신이 빚은 장엄한 자연 예술품 장관이다.
그랜드 캐니언 얼마나 많은 피를 마셨나.
석양 녘 붉게 타는 사막 핏빛 물든 사암
흩어진 이야기가 흐르는 콜로라도강
감동 경악 거대한 산맥 그 위대한 풍치 앞에
인간은 난리인데 자연은 여전하다.
인생이 곧 여행인 거 같다
난 그랜드 캐년을 다녀온 후
세상에 볼 것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았다
인생 때론 길을 잃고 헤매지만
돌아보면 그랜드 캐년의 여행은
내 인생 여정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민족의 혼을 깨우다/ 한석산/ 도서출판 국보/ 2024
8. 그리운 우체국 / 류근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은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밝혀 두었으리라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안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상처적 체질/ 류근/ 문학과지성사/ 2010
9. 꽃 피는 시절 /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 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키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내는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 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그 여름의 끝/ 이성복/ 문학과지성사/ 2020
10.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 / 함동선
또랑물에 잠긴 달이 뒤돌아 볼 때마다 더 빨리 쫓아오는 것처럼 얼결에 떠난 고향이 근 삼십년이 되었습니다 잠깐 일 게다 이 살림 두구 어딜 가겠니 네들이나 휑하니 다녀오너라 마구 내몰다시피 등을 떠미시며 하시던 말씀이 노을에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창가에 초저녁 달빛으로 비칩니다 오늘도 해동갑 했으니 또 하루가 가는가 언뜻 언뜻 떨어뜨린 기억의 비늘들이 어릴 적 봉숭아물이 빠져 누렇게 바랜 손가락 사이로 그늘졌다 밝아졌다 그러는 고향 집으로 가게합니다
신작로에는 옛날처럼 달맞이 꽃이 와악 울고 싶도록 피어 있었습니다 길 잃은 고추잠자리가 한 마리 무릎을 접고 앉았다가 이내 별들이 묻어올 만큼 높이 치솟았습니다 그러다가 면사무소 쪽으로 기어가는 길을 따라 자동차가 뿌옇게 먼지를 일으키고 동구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온 마을 개가 짖는 소리에 대문을 두들겼습니다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손 안 닿은 곳 없고 손 닿은 곳마다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없으셨던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
*오늘의 시인초선-함동선 시 99선/ 함동선/ 도서출판 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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