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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월간 국보문학 전국시낭송경연대회 지정시(11번~20번)

작성자국보사랑|작성시간24.01.13|조회수729 목록 댓글 0

11. 도화 아래 잠들다/ 김선우

12. 땅 이야기/ 고두현

13. 마지막 산책/ 나희덕

14. 목숨/ 조정권

15. 바람의 언덕에서/ 신승희

16. 백발의 그리움 하나/ 홍윤숙

17. 봄/ 유안진

18. 새벽비/ 공광규

19. 새해의 맑은 햇살 하나가/ 정호승

20. 아내의 꽃/ 조남대

 

 

 

국보문학 시낭송대회 지정시2(11~20)

 

 

11. 도화 아래 잠들다 / 김선우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 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도화 아래 잠들다 / 김선우/ 창비/ 2003

 

 

 

12. 땅 이야기 / 고두현

 

 

내게도 땅이 있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상주중학교

뒷산

철 따라 고운 꽃 피지도 않고

돈 주고 사자는 사람도 없는

남해 상주 바닷가 언덕

한 평 못 차는 잔디 풀밭 거기

평생 남긴 것 없는 아버지의 유산이

헌옷으로 남아 있다.

저 눕고 싶은 곳 찾아

아무 데나 자리 잡으면

그 땅이 제 땅 되는

우리들 아버지의 아버지 대로 부터

사람들은 기억하기 위해 무덤을

만들고

더욱 잊지 않기 위해 비를 세웠다지만

중학에 들어가자 마자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나는 학교 옥상에서 그 언덕배기 공동묘지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세우질 못했다.

철 들고 부끄럼 알 때 즈음

흙이 모여 돈이 되고

묘 자리도 잘라서 팔면 재산이 된다는 나라

시내버스로 휴일 한나절

쉽게 벌초도 하고 오는 근교 공원묘지

아파트처럼 분양을 받고

중도금 잔금 치러가며 화사하게

 

다듬은

비명들 볼 때마다 죄가 되어

나도 햇살 좋은 곳 어디 한 열두 평쯤

계약을 할까.

그런 날은 더 자주 꿈을 꾸고

잠 속에서 좁은 자리 돌아 누우며

손 부비는 아버지.

고향길 멀다는 것만 핑계가 되는 밤이

깊어 갈수록

풀벌레 소리 적막하고

간간이 등 다독이는 손길 놀라

잠 깨 보면

쓸쓸한 봉분 하나 저녁마다 내곁에 와

말없이 누웠다가

새벽이면 또 다시

천리 남쪽 길 떠나는

아픈 내 땅 한 평.

 

 

*늦게 온 소포/ 고두현/ 민음사/ 2000

 

 

 

 

13. 마지막 산책 / 나희덕

 

 

우리는 매화나무들에게로 다가갔다

이쪽은 거의 피지 않았네,

그녀는 응달의 꽃을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삶을 바라보듯

입 다문 꽃망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땅은 비에 젖어 있었고

우리는 몇 번이나 휘청거리며 병실로 돌아왔다

통증이 그녀를 잠시 놓아줄 때

꽃무늬 침대 시트를 꽃밭이라 여기며

우리는 소풍 온 것처럼 차를 마시고 빵조각을 떼었다

오후에는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며

문장들 속으로 난 숲길을 함께 서성이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죽음,이라는 말 근처에서

마음은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피지 않은 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침묵에 기대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기에

입술도 가만히 그 말의 그림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응달의 꽃은 지금쯤 피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다시 산책을 나가지 못했다

 

시간의 들판에서 길을 잃었는지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길을 잃은 것은 나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파일명 서정시/ 창비시선426/ 창비/ 2018

 

 

 

 

14. 목숨 / 조정권

 

마음의 어디를 동여맨 채 살아가는 이를

사랑한 것이 무섭다고 너는 말했다

두 팔을 아래로 내린 채 눈을 감고

오늘 죽은 이는 내일 더 죽어 있고

모레엔 더욱 죽어 있을 거라고 너는 말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 틈에서 마음껏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

이 세상 여자면 누구나 바라는 아주 평범한 일

아무것도 원하지는 않으나 다만

보호받으며 살아가는

그런 눈부신 일이 차례가 올 리 없다고 너는 말했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오늘 오늘 오늘의 연속

이제까지 이렇게 어렵게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이렇게 어렵게 살아가야 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길이 쉬운 거라고 너는 말했다

버림받고 병들고 잊혀지는 일이 무섭다고 너는 말했다

잊혀져가는 것이라고 했다

꽃과 나무와 길들로부터

세상 모든 이들로부터 잊혀져 가는 것이라고 너는 말했다

잊혀진 일은 내일이면 더 잊혀져 있고

그것은 세상일과 가장 많이 닿아 있는 일이라고 너는 말했다.

 

*얼음들의 거주지/ 조정권/ 미래사/ 1991

 

 

 

 

15. 바람의 언덕에서 / 신승희

 

 

살아가는 것은 다 바람이다

​생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람 속을 걷는 일이다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로, 흔들리는 갈대의 몸짓으로

장대비 같은 폭우 속에서 휘 적이는 날개의 젖은 모습으로

​가끔은 태풍에 쓰러진 잣나무의 굽은 등으로

때로는 해일이 스쳐 간 잔해 위에 아이의 울음으로

비틀대는 바람 속의 숨 가쁜 걸음걸음들

한때, 모국어도 바람에 쓸려갔다 되돌아오지 않았든가

민초에서, 천하의 진시황도 떠난 것은 바람이다

심산유곡 산새로 지저귀는 것도

바위 틈새 해풍을 먹고 사는 것도

한 잎 출렁이는 이파리같이 인연의 물결 따라 밀려왔다 밀려간다

우리 모두 냉정한 바람에 실려 가는 구름, 구름들이다

이래 스치고 저래 스치는 구름, 구름들

이래 스치고 저래 스치는 바람, 바람들

저 하얗게 질색하는 절벽 밑 바위를 봐라

멋지고 잘생긴 수석의 볼을 철썩, 때리고도

그것도 모자라 흰 거품을 물고 사방을 흩트리며

성난 용의 몸부림처럼 꿈틀대며 달려드는 파도

이 세상, 바람으로 생기는 일이다

우리 모두 바람 앞에 돌아가는 언덕에 풍차일 뿐이다

 

 

*바람의 언덕에서/ 신승희/ 문학공감/ 2019

 

 

 

 

16. 새벽비 / 공광규

 

 

새벽 잠결에 빗소리가 오락가락

아파트 베란다 유리창과 스테인리스 난간에 부딪혀

실로폰 소리를 내고 있다

이런 날은 빗방울이 붉은 양철지붕을 두드리고 가던

시골집 생각이 난다

구름에서 내려온 빗방울은

엄나무 잎을 밟아보고는 대나무 잎을 밟고

칡덩쿨을 밟고

양철지붕으로 건너와 마구 두드려대곤 했다

토란잎을 쓰고 토방에서 헛간까지

마당을 건너다니는 놀이를 하다가

옷이 젖는다고 어머니에게 지청구 먹고 골이난

지금은 모두 시집간 동생들이 생각난다

이런 날 아버지는 장화를 신고 돌덤불 위로 가

여름이 쑥쑥 낳아놓은 애호박을 따오고

어머니는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들기름을 두르고

호박전을 부쳤다

가늘게 썬 애호박이 섞인 밀가루 반죽을 부으면

지붕에서 먼저 빗방울들이 호박전 부치는 흉내를 냈다

전을 부치는 빗방울 소리와 들기를 냄새가 좋아 마루에 나오면

빗방울들은

목련나무 잎을 밟고 나팔꽃 넝쿨을 따라 담장을 넘어

옥수수 밭 지나 청태산 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이런 날은 새벽부터 텃밭에 모여 사는

고구마꽃 입술과 방울토마토 볼과 노란 참외 엉덩이와

고춧대와 가지를 파먹다 흙으로 내려간 달팽이와

구기자나무 울타리와 주근깨가 많이 난 밭둑 나리꽃이

맑은 빗방울을 맞고 있었다

 

 

*파주에게/ 공광규 /실천문학사 / 2017

 

 

 

 

17. 백발의 그리움 하나 / 홍윤숙

 

 

어디서 불어오던 바람 소리일까

한 시대 에둘러 돌아와 후득이던

고향의 예감 같던 바람 소리

 

한 시절 바람은 나의 내부에서 일어났다

아니 내 몸 전체가 온통 한 포대의 바람이었다

나는 날마다 들끓는 바람이 되어

세상의 끝을 헤매다녔고

돌아오는 길은 고향 뒷산 밤나무 숲의

밤꽃 향기에 목이 메었다

그 시절 바람은 열이면 열 눈먼 장님이어서

분수처럼 산화하고 자폭했다

 

어디를 가도 꿈꾸던 나라, 도시는 없었다

인생을 나눌 사람 하나 없이

쓸쓸히 눈감고 돌아서는 뒷모습

그 등에 붉은 저녁노을 실의의 그림자

길게 멀어져 가고

젊고 푸르던 바람은 그렇게 이별했다

 

그 바람 언제부턴가

살 속 뼛속으로 파고드는 하늬바람 되어

내 가슴 시리게 후비고

밤새 눈뜨고 먼 하늘 중천에 길도 없이 떠돌고

한 주름 빗방울로 운명해 갔다 남은 생애,

이제 바람 한 점 없는 아득한 변경

어디로 갈까 길을 물어도

대답 없는 내 안의 산골짝에서

가랑잎 한 장 부서지는 소리로

귀를 씻는다

섬으로 쌓인 세월의 부피 키를 넘어 숨이 차고

가야 할 길은 보이지 않아

가슴엔 길로 자란 백발의 그리움 하나

출구 없는 빈집 혼자 지킨다

 

 

*장식론/ 홍윤숙/ 시인생각/ 2013

 

 

 

 

18. 봄 / 유안진

 

 

저 쉬임 없이 구르는 윤회의 수레바퀴 잠시 멈춘 자리 이승에서, 하 그리도 많은 어여쁨에 홀리어 스스로 발길 내려놓은 여자, 그 무슨 간절한 염원 하나 있어, 내 이제 사람으로 태어났음이랴

 

머언 산 바윗등에 어리운 보랏빛, 돌각담을 기어오르는 봄햇살, 춘설을 쓰고 선 마른 갈대대궁, 그 깃에 부는 살 떨리는 휘파람, 얼음 낀 무논에 알을 까는 개구리, 실뱀의 하품 소리, 홀로 찾아든 남녘 제비 한 마리, 선머슴의 지게 우에 꽂혀 앉은 진달래 꽃......

 

처음 나는 이 많은 신비에 넋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자리잡지 못하는 내 그리움의 방황 아지랭이야, 어쩔 셈이냐, 나는 아직 춥고 을씨년스런 움집에서 다순 손길이 기다려지니, 속눈썹을 적시는 가랑비 주렴 너머, 딱 한번 눈 맞춘 볼이 붉은 소년

 

내 너랑 첫눈 맞아, 숨바꼭질 노니는 산골짜기에는 뻐꾹뻐꾹 사랑노래 자지러지고, 잠든 가지마다 깨어나며 빠져드는 어리어리 어지럼증, 산 아래 돌부처도 덩달아 어깨춤 추는, 시방 세상은 첫사랑 앓는 분홍빛 봄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명시 100선/ 편집부편/ 민예원/ 2003년

 

 

 

 

19. 새해의 맑은 햇살 하나가 / 정호승

 

해뜨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새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갑니다

누님같은 소나무가 빙그레 웃는

새해의 아침이 밝아옵니다

맑은 연꽃대에 앉은 햇살 하나가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당신의 창을 두드리고

아무도 닦아주지 않는 당신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사랑하는 일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다시 길을 가게 합니다

어두운 골목

무서운 쓰레기통 옆에 쭈그리고 앉아

이제 더 이상 당신 혼자 떨지 않게 합니다

쓸쓸히 세상을 산책하고 돌아와 신발을 벗고

이제 더 이상 당신 홀로 밥을 먹지 않게 합니다

밝음의 어둠과

깨끗함의 더러움과

배부름의 배고픔과

편안함의 괴로움을 스스로 알게 합니다

때로는 마음의 장독대 위에 함박눈으로 내려

당신을 낮춤으로써 더욱 낮아지게 하고

당신을 낮아지게 함으로써 더욱 고요하게 합니다

당신이 아직 잠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나무와 숲을 구분하지 못하고

바람과 바람소리를 구분하지 못할지라도

새해의 맑은 햇살 하나가

천개의 차가운 강물에 물결지며 속삭입니다

돈을 낙엽처럼 보라고

밥을 적게 먹고 잠을 적게 자라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살아 있다고

 

*중앙일보-신년시/ 2001.1.1

 

 

 

 

20. 아내의 꽃 / 조남대

 

 

아내라는 꽃은

하나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장미와 수국과 국화가 있듯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젊음이 넘쳐나는 신혼 때는

싱싱하고 매혹적인 장미나 동백이 되어

진한 향기와 색채로

나의 눈길과 영혼을 온통 빼앗았다

 

중년의 커리어우먼이 되자

풍성하고 여유로운 모란이나 백합처럼

넓은 마음으로 나를 보듬어

채취에 취해 허둥거리게 했다

 

자식들을 짝지어 보낸 뒤에는

원숙하고 풍성한 수국처럼

풍만하고 여유로운 큰 가슴으로

이 세상의 풍파를 바람막이 해 주었다

 

이제는 다소 곳이 은은한 향기 풍기는

국화 같은 여인이 되어

작아져만 가는 나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 안는다

 

아! 아내의 꽃이 내 옆에 있어

외롭거나 위축되지 않고

작아진 가슴을 활짝 편 채

노을이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을

헐헐 날갯짓하고 있다

 

*주간 한국문학신문 514호/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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