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지나간 자리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생각해 보다가
창문 하나를 연다
저녁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와
책상 위 손수건 한 장을
멀리 밀어 놓는다
살아온 날들은
옷걸이에 걸린
낡은 셔츠처럼
한 계절씩 색이 바랬고
한때는
내 것이라 믿었던 이름들도
비를 맞은 메모처럼
조금씩 번져 간다
멀리 바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해를 품고 있고
파도는
한 번도
자신이 남긴 물결을
되돌아보지 않는다
골목의 가로수는
바람이 부는 쪽으로
잠시 몸을 기울일 뿐
쓰러지는 일보다
다시 일어서는 법을 먼저 안다
거울 속 얼굴에
늘어난 주름 하나가
오늘 하루를
조용히 접어 넣는다
무언가를 붙잡으려 할수록
손은 무거워지고
놓아주는 순간
바람은
비로소 지나간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일은
잃는 것이 아니라
가벼워지는 것이라는 듯
숲이 흔들리고
내 마음도 흔들리지만
흔들리는 것들은
모두 제자리에서
자기만의 하늘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사념 하나를 벗어
의자 위에 걸어 두고
창문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조용히
하루를 흘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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