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는 길을 묻지 않는다
바람에 씻긴 호수는
오늘도
아무 말 없이
하루를 펼쳐 놓는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쁜 길을 따라
먼지처럼 지나가고
물 위에는
구름 하나가
천천히 방향을 잊는다
가끔은
길이 아닌 곳으로
걸어가고 싶다
지도에도 없는
물가의 풀숲이나
이름 없는 돌멩이 곁으로
세상은
쉼 없이 나를 밀어내지만
호수는
한 번도 서두른 적이 없다
바람이 오면
주름을 만들고
새가 내려앉으면
잠시 하늘을 빌려줄 뿐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다
나도
몇 번이나 금이 간 마음을
말없이 물속에 담가 본다
시간은
잔물결처럼 퍼져
상처의 모서리를
조금씩 둥글게 만든다
사랑도
행복도
채우는 일이 아니라
잠시 머물 자리를
비워 두는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느리게 걷고
조금 오래 하늘을 바라본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바람 하나
새 한 마리
물결 하나가
내 곁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날이 있다
호수는
세상의 모든 길 끝에서
길을 잃은 마음들이
잠시 쉬어 가는
가장 조용한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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