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점 하나
눈은
밤새 세상을 지우고
아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온다.
언덕 끝
사람의 발길보다 먼저
동백 한 송이가
눈 위에 앉아 있다.
누가 놓고 간 것도 아닌데
붉은 점 하나가
하얀 침묵을 오래 붙잡는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참 그 앞에 서 있다.
겨울은
말이 적은 계절이라
나무도
바람도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낡은 운동화 자국,
녹슨 철문,
담장 끝에 남은 햇살 하나가
천천히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
멀리
폐가 굴뚝에서는
연기 대신 까치 한 마리 날아오르고
길가 슈퍼 앞 의자는
빈 채로 오후를 지키고 있다.
삶은
거창한 슬픔보다
문득 코끝에 스치는
군밤 냄새 하나,
누군가 부르던 이름 하나,
눈 위에 떨어진 꽃잎 하나로
오래 남는다.
해가 기울자
동백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눈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조금씩 녹아간다.
나는 돌아서면서
누군가를 잊는 일보다
가끔 떠올리는 일이
사람을 더 오래 살게 한다는 것을
겨울 언덕에서
조용히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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