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을 걷는 저녁
문득
신호등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초록불은 몇 번이나 바뀌고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길을 건넌다
편의점 유리창에 비친 나는
조금 낯설고
조금 오래된 사람
계절은
영수증처럼 주머니에서 구겨졌고
지워진 글씨 사이로
몇 사람의 이름이
아직 남아 있다
커피를 들고 지나가는 학생,
배달 오토바이,
횡단보도에 쌓인 빗물,
모두
제 갈 길을 알고 있는데
나만
한참 동안
저녁 속에 서 있다
버려야 하는 마음과
끝내 데리고 가는 마음 사이에서
사람은
조금씩 자기 얼굴을 닮아 간다
가로등이 켜지고
형산강은
낮의 그림자를 조용히 접는다
나는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과
아직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이
생각보다 큰 힘이라는 것을
늦게 배운다
오늘도
일부러 먼 길을 택한다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오래 남은 것들을
천천히 집까지 데려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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