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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주석성경 시편 104편.105편.106편

작성자gideon|작성시간07.04.08|조회수486 목록 댓글 0

 

 시편 제 104편

=====104:1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 존귀와 위엄의 상징인 어복(御服)을 입은 왕의 모습

을 연상케 하는 표현으로 왕되신 하나님을 암시한다(93:1).


=====104:2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 본 시편은 온 우주에 생명력과 기쁨을 쏟아

붓고 계시는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을 찬양하는 시편으로 알려져 있는데 기자는 하나님

의 창조적 능력을 찬양케 하기 위하여 먼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기사의 내용을

자기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빛을 입으시며'에 해당하는 '오테 오르'

(* )의 문자적인 뜻은 '빛으로 두르고 있는'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창

조 사역의 첫쨋날에 빛을 있게 하신 사실을 연상 시킨다. 일단 빛이 있은 후에 하나

님은 그의 창조 사역을 계속적으로 진행하셨는데 이 사실을 기자는 '하나님이 빛으로

두르시고 계시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에 의해

생겨난 그 빛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속 유지, 보존시키심을 반영한다. 이 사실에 대한 근거는 '입으시

며'의 히브리어 '오테'(* )가 분사형으로서 계속되는 동작을 나타낸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빛되신 하나님은 신약 시대에서도 변함없이 빛이시다(요 1:4-9; 요

일 1:5). 한편 '옷을 입음같이'는 '카살마'(* )로서 문자적인 뜻은 '옷

처럼'인데 빛을 옷에 비유한 본 대목에 대해 칼빈(Calvin)은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

다. '기자는 빛과 옷의 비교를 통하여 하나님은 비가시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광이 가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 본질적 속성에 있어

서 하나님은 접근이 불가한 빛 가운데 계시는 분임이 사실이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분

은 마치 의복을 입고 그 모습을 드러내듯이 그 영광을 온 세계에 비추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낸 하나님의 위엄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시는 아름다운 우주 만

물에로 우리의 눈을 돌려야 하며 위험스러운 호기심을 가지고 그분의 본성의 신비를

파고 들려고 해서는 안된다'.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 문자적인 뜻은 '당신의 휘장같이 하늘을 펼치십니다'이

다. 사 40:22에도 동일한 묘사가 나오는데 이것은 창 1:6-8에 나오는 창조 사역 둘쨋

날 행사의 약술(略述)이다. 하늘이란 아래, 위의 물을 구분하며 널리 퍼져 있는 공간

인 궁창을 뜻한다(욥기 서론, '히브리인들의 우주관' 참조). 여기서의 '휘장같이'를

해석하는 견해는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광스러운 처소로서

의 하늘을 강조하는 견해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쉽게 하늘을 만드신 것을 강

조하는 견해이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어거스틴(Augustine)과 같은 초대 교

회 교부들을 비롯한 보수주의 학자들은 대체로 후자를 따르고 있다.


=====104:3

물에 - 창 1:7에 따르자면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가리킨다.

누각(* , 알리오타이우) - 문자적인 뜻은 '그 위층의 방들'이다.

몇 개의 층들로 되어 있는 건물을 연상시키는 이 표현은 커다란 집의 위층에 있는 방,

혹은 지붕이 평평한 집의 지붕 위에 있는 방을 암시할 때 자주 사용된다(왕상 17:19;

왕하 1:2; 4:10). 본절에서는 마치 여호와의 궁전이 궁창 위에 있는 물들 위에 기초

를 두고 세워진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말이다.

들보를 얹으시며 - 이 같은 비유적 표현을 감상하며 주의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을 비롯한 그의 피조 세계는 그의 솜씨를 나타내며 그 영광을 간

접적으로 계시할 뿐이라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찾아낼 수 없

다.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분과 교제하는 가장 확실한 일은 오직 오랜 역사를

통해 계시된 그의 말씀을 묵상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본 시편을 감상하며 지속적으로

염두에 둘 것이 바로 이 점이다(Calvin). 천지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게 뭔가를 첨가하셨다는 식으로 상상해서는 안된다. 치장하듯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

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셨을 뿐이다.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 하나님은 마치 구름을 타

고 다니시는 분으로 묘사되기도 하며(사 19;1; 단 7:13; 마 24:30) '날개 달린 말'과

같이 바람을 타고 다니는 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Gunkel). 그러나 여기서 저자가 강

조하는 핵심은 모든 자연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존재하며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148:7-14).


=====104:4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 본절에 대한

대표적인 해석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1)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들을 바람이나 불과

같은 형태를 띠도록 만드셨다는 것, 곧 하나님께서 바람이나 불과 같은 강함, 민첩함,

오묘함 등으로 그의 사자들을 옷입히듯 하셨음을 밝히는 구절이라는 견해이다(LXX,

Briggs). (2) 하나님의 사자들(천사들)은 온갖 형태의 바람과 천둥, 불 따위의 조정

을 떠맡은 비밀스러운 중재자들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구절이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

를 따를 경우 우리 주위에서 느끼고 볼 수 있는 온갖 형태의 자연력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천사들의 사역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바람과 물,

티끌과 불 등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본절은 이 모든 경이로운 조화가 천사들의 활약

때문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흔히 우연이라고 말하는 기후, 계절 따위

를, 바람을 움직이고 불을 일으키는 사역을 그의 사역자들(천사들)에게 맡기신 하나님

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야만 한다. 삼라 만상(森羅萬象)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결과들을 볼 때마다 그 사역자들을 통해 그 같은 현상과 결과들을 낳게 하신 자비롭고

거룩하신 분 하나님을 상기 해야만 할 것이다'(Newman). (3) 하나님이 바람, 구름,

천둥, 번개 등과 같은 자연 현상들을 마치 천사들을 부리시듯이 마음대로 통제하신다

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보는 견해이다(VanGemeren). 이 같은 세 견해 중에서 본 문맥

이 피조 세계에 드러난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 지혜와 영광을 보여주는 데 치중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3)의 견해가 가장 무난한 것 같다.


=====104:5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 여기서 '땅의 기초를 두사'

(* , 야사드 에레츠 알 메코네하)의 문자적인 뜻은

'그가 그 기초들 위에 땅을 세우셨다'이다. 마치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이 존

재함을 연상시키는 본 표현 때문에 어떤 학자는 아예 '그가 지구 그 자체를 세우셨다'

로 번역하기도 한다(Mendelssohn).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본 구절의 원문적 의미와

유사한 뜻을 암시하고 있는데(욥 38:4-6; 잠 8:29) 본문의 핵심은 지구를 떠받치는 기

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온 땅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한편, '영

원히 요동치 않게'라는 표현은 지동설을 반대하던 학자 산체스(Sanchez)가 지동설을

주장하던 갈릴레오와 논쟁을 벌일때 강력하게 의존하였던 표현이라고 한다(Perowne).

성경은 오히려 지동설을 지지하는 듯한 구절을 갖고 있는데 그 구절은 욥 26:7이다 :

'땅을 공간에 다시며'. 이것은 땅이 공중에서 내려온 어떤 줄에 매달려 있다는 뜻이

아니라 땅이 공중에 떠 있다는 의미이다.


=====104:6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 여기서 기자는 빛이 창조되기 이전

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듯한데 그 대상은 원시적 혼돈이다(창 1:2). 이방적 개념의

혼돈이란 땅과 물이 서로 뒤섞인 혼잡의 덩어리이다. 그러나 기자는 땅은 이미 형성

되었고 그 형성된 모양을 물이 완전히 덮고 있는 상태를 혼돈으로 보고있다.


=====104:7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며 주의 우뢰 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 - 외관상 본절의

문장 구조는 불완전한데 그것은 주어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이 원문

상 바로 앞절 후반절과 연결되어 있음을 고려할 때 앞절의 주어를 본절의 주어로 삼는

것은 문제가 없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주어는 물이다(70인역, 제롬역). 물이 하나

님의 견책을 받고 우뢰 소리 같은 그분의 명령을 듣는다는 식의 표현은 무생물의 반

(半)의인화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기자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여 물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정한 위치로 내려가고 그에 따라 수면 아래 있던 땅이 그 자태를 드러낸

창조 기사의 일부를 생생하고 박진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104:8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 갔나이다(* ,

야알루 하림 예르두 베카오트) - 6절 하반절, 7절에서 계속적으로 주어로 인정되고 있

는 '물'을 넣어 번역하면 '물들은 산들 위로 올라가며 골짜기들 속으로 가라앉기도 했

다'이다. 이 번역은 대부분의 영역본들이 취하고 있는 것으로(they flowed over the

mountains, they went down into the valleys, NIV) 문법적으로 수용할 만하며 땅을

덮고 있어서 혼돈 상태를 지속시켰던 물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제 위치로 향하고 있

음을 묘사하던 선행절의 이미지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면에서 긍정적 번역으로 여겨

진다. 뿐만 아니라 이 번역은 6-9절의 주제와 연결성을 띠고 있다. 더욱이 이 번역

은 107:26의 유사 문장 구조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다.


=====104:9

물의 경계를 정하여 - 태고적 혼돈 상태의 물이 '정해진 지역에 함께 모아져서'(창

1:9) 땅과 바다가 분명하게 분리되었다는 말이다(욥 26:10; 38:10, 11; 잠 8:29; 렘

5:22). 따라서 이것은 절대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홍수 발생 중지에 대한 포고령이 아

니다. 즉, 오고 가는 모든 세대에 홍수가 전혀 발생하지 않게끔 했다는 것을 의미하

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본 구절은 창조 때 처음으로 설정되었고 그후 노아 언약(창

9:9-16)을 통하여 확증된 일반적인 의미의 땅과 바다 사이의 경계를 암시할 뿐이다.


=====104:10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 , 함솰레하 마아야님 바네할림) - 문자적

인 뜻은 '샘물을 격류가 흐르는 수로를 따라 보내시는 분'이다. '골짜기'에 해당하

는 '나할림'(* )은 격류가 흐르는 골짜기를 가리키는 말인데 흔히 알고

있는 사막의 와디(wadi)를 연상하면 된다. 이스라엘 민족의 통념에 있어서 샘물의 근

원은 천지 창조 전의 혼돈과 같은 심연(深淵)이었다고 한다(Anderson). 마치 이러한

통념을 바꾸어 놓기라도 하는 듯이 기자는 그 샘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신 사실을 강

조하고 있다.


=====104:11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여기에만 나타나는 구절인데 '들나

귀들'로 번역된 '페라임'(* )은 '야생 나귀'(the asses, KJV; the wild

donkeys, NIV)를 뜻하나 동의적 평행을 고려할 때 상반절의 주어에 해당하는 모든 들

짐승을 대표하는 말로 보면 되겠다. 사람의 접근을 피하는 것이 그 특징인 들짐승에

게도 그 필요를 공급하는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은 끊이지 않는다.


=====104:12

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서 깃들이며 - '공중의 새들'은 창 1:30; 2:19에서 자주 언

급된 '공중의 모든 새', '공중의 각종 새'를 연상케 한다. 한편, '그 가'란 10절에서

'골짜기'로 번역된 '나할림'(* ), 곧 잎사귀들이 풍성한 나무들로 가득

찬 물이 흐르는 냇가 및 골짜기 양 옆의 '둑 위'를 가리킨다. 지켜주는 파수꾼도 없

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사람도 없는 날짐승까지도 하나님은 먹이시고 입히셔서

그것들로 하여금 기쁜 노래까지 부르게 하신다.


=====104:13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 3절에서 '누각'(* , 알리오

타)은 궁창 위의 물 위에 세워진 것처럼 묘사된 하나님의 처소를 가리키나, 여기서는

차라리 '구름들'로 봄이 더 무난하겠다. 시인은 마치 하나님이 구름으로부터 혹은 구

름 위로부터 물을 내리시고 계시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산'이 언급

되고 있는 이유는 그곳 위에 구름이 있고 산들에서부터 강줄기가 발전되기 때문이다.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

이요"(신 11:11, 애굽은 이와는 달리 나일강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말하자면 팔레스

틴은 주로 하늘로부터 그리고 땅 속에서 먹을 물을 공급받았다(창자 49:25).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

미프리 마아세카 티스바 하아레츠) - 문자적인 뜻은 '땅이 당신의 일의 열매로 만족해

하다'(the earth is satisfied with the fruit of the works, KJF)이다. 문자적으로

보면 여기서 '당신의 일의 열매'란 땅의 소산으로 여겨진다. 그럴 경우 본문은 하나

님이 비를 내려주신 결과 온 땅에 풍성한 결실이 거두어짐을 묘사하는 내용으로 이해

된다(Kirkpatrick). 또 한 가지 가능한 해석은 동의적 평행구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경우 '당신의 일의 열매'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된다. 이렇게 해석해도 본절

이후 후속절에서 비로 인한 땅의 소산에 관한 묘사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별 무리

가 없을 것이다(Briggs, Davies).


=====104:14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 레호치 레헴

민 하아레츠) - 문자적인 뜻은 '그가 땅으로부터 떡을 가져오시고'이다. 여기서 '떡'

이란 후속절에 나오는 토지의 주요 3대 산물을 총칭하는 바 사람들의 양식을 뜻한다.

이같이 인간의 수고로 얻어지는것 같은 양식은 사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물인 것이

다.


=====104:15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 - '기름'(* , 솨멘)은 식용(민 11:8), 약

(막 6:13), 향료(전 10:1), 등유(출 25:6), 화장품(룻 3:3)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

었는데, 여기서 특히 얼굴을 윤택케 한다고 표현한 것은 기름을 사용한 후의 그 기쁨

의 광휘(光輝)가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기자의 시각은 귀한 비로 인한

땅의 만족으로부터 땅의 소산으로 인한 인간의 만족으로 바뀌고 있다.


=====104:16

여호와의 나무 - 이것을 '강한 나무' 혹은 '태고 원시림의 나무'로 보는 학자도 있

으나(Kissane) 인간의 보살핌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는 야생 수목으로 보는 것이 적절

하겠다. 즉, 인간의 경작 및 관리하에 있는 포도나무나 올리브나무 따위와는 대비를

이루는 산야(山野)에서 자생하는 나무들로 본다는 말이다. 이것이 적절한 견해인 근

거는 하반절이 그 나무를 산야에서 자생하는 백향목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70인역(LXX)은 '평지의 나무'로 번역하고 있다.


=====104:17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 여기서 '학'(* , 하시다)은 '경건한

(애정있는) 새'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문맥상 보통 새보다 몸통이 큰 새라는 면에

그 강조점이 있다. 반면 12절과 본문의 '새들'이란 나뭇가지 위에서 요란하게 울어대

는 몸집이 작은 새이다(Alexander, Perowne). 그리고 '잣나무'로 번역된 '로쉼'

(* )은 레바논에서 서식하는 노간주나무의 일종이거나 가나안이 원산지인

전나무일것이다(IDB). 요컨대 본 구절은 하나님이 주신 비를 받아 잘 자란 수목 속에

서 그 보금자리를 두고 사는 크고 작은 새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04:18

바위(* , 셀라임 마하세) - 여기서 '슬라임'은 '울퉁불퉁한

바위' 혹은 상징적으로 '요새'를 뜻하며, '마하세'는 '피난처'를 뜻한다. 따라서 본

문의 '바위'는 험한 바위산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나무들이 새들이 깃드는 안식

처이듯이 험준한 바위산은 야생 들짐승들이 안전히 쉴 수 있는 안식처라 할 수 있겠다

(the crags are a refuge for the coneys, NIV).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을 위해 양식

을 공급하실 뿐 아니라 처소도 마련하신다.

너구리(* , 솨파님) - 바위 너구리(coneys, NIV), 오소리(badgers,

RSV)등으로 보고 있으나 정확히 어떤 짐승인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되새김질하는

네발 달린 짐승인 것은 분명하다. 동일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레 11:5; 신 14:7 등

이 그 증거이다.


=====104:19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 기자는 제 4일째의 창조 사역을 언급함에 있어서 밤을

주관하는 달을 먼저 소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히브리인들의 사고에 있어서 밤은 낮

에 선행(先行)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기자의 저녁과 아침의 서술 배열에 있어서도 우

리는 그러한 암시를 엿볼 수 있다 :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창 1:5, 8, 13, 19

등). 뿐만 아니라 본 시편 후반부에서도 먼저 밤의 광경이 서술되고(20, 21절), 후에

낮의 광경이 이어지고 있다(22, 23절). 한편 여기서의 '절기'를 문자 그대로 거룩한

절기, 혹은 대축제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인데 그 근거는 외경인 시락서(the wisdom

of Jesus the Son of Sirach) 43:7에 두고 있다 : '달로부터 절기들의 신호를 찾노

라.' 그러나 이곳 외에 동일한 암시를 주는 곳은 없다. 따라서 '절기'란 표현을 문자

그대로의 절기 대축제일로 못박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75:2에서는 동일 용어가

'정한 기약'(특정한 때) 정도로만 번역되어 있다.

해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 - 석양에 대한 본 언급은 후속절에서 이어질 밤의 광경

에 대한 묘사의 자연스러운 배경이 되고 있다(욥 38:12; 렘 8:7).


=====104:20

기어 나오나이다 - 이에 해당하는 '라마스'(* )는 파충류나 어류의 움직임

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창 1:21과 69:34의 동사형 그리고 25절의 명

사형 '움직이는 것'(개역 성경에는 '생물'로 번역됨) 등도 바다 속의 피조물을 암시하

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창 1:24, 25의 명사형은 땅위의 '기는 것'을 뜻

한다. 본문에서는 숲속의 짐승들에게 적용되고 있는데 이는 먹이를 찾거나 쫓기 위하

여 짐승들이 살금살금 움직이는 모습이나 창 7:21의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에서와

같이 기타 여러 종류의 동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다.


=====104:21

젊은 사자 - 이를 모든 들짐승의 대표로 해석하는 견해(Anderson)와 독자의 시선을

끌 만치 잘 알려진 짐승으로 해석하는 견해(Barnes)가 있는데 그 어떤 견해를 취해도

큰 무리는 없다. 다만 핵심은 숲속의 들짐승들도 그 생명 보존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

리를 기다린다는 데에 있다 하겠다.


=====104:22

물러가서 그 굴혈(窟穴)에 눕고 - 여기서 '물러가서'는 '예아세푼'

(* )으로서 직역하면 '그들 스스로 함께 모여'이다. 우리는 이러한 행

동을 단순히 본능으로만 돌리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읽게 해주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밤새 먹이를 찾아 이골짜기 저 골짜기를 헤매던 짐승들이 인솔자를 앞세

우기나 한 듯 한 무리를 지어 안식처인 동굴 따위로 가서 가지런히 눕는 모습에서 우

리는 저급한 동물의 본능이 아니라 자상한 하나님의 섭리, 간섭을 진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104:23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 도다 -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기 위하여

밤새 먹이를 찾아 헤매는 들짐승들의 모습을 뒤로하고, 이제 빛이 있는 하루 온종일

짐승들과는 대조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장면이 연결되고 있다. 땅 위의 피조물들은 밤

과 낮 할 것없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섭리하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피조

물들은 단순히 하나님께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지만 인간은 하나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의탁할 뿐 아니라 노동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겨야만 한다.


=====104:24

여호와의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 모든 피조물의 왕관 격인 인간에

대한 언급을 하고 나서 창조 사역 제 6일째 후의 안식을 염두에 둔 듯하다. 기자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의 다양성과 오묘함의 놀라운 경지를 토로하면서 지금까지 계속

해온 천지 창조에 대한 묘사를 잠시 쉬고 있다. 즉, 기자는 본절을 기점으로 하여 지

금까지 계속해온 하나님의 섭리 사역에 대한 기술로부터 그 모든 사물의 창조주이신

그분에 대한 찬양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고 있다.

부요(* , 킨야네카) - 문자적인 뜻은 '당신의 소유물'이다. 이것은

'피조물'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된다(your creatures, NIV).


=====104:25

대소 생물이 무수(無數)하니이다 - 여기서 '무수하다'는 것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을 뜻한다(innumerable, KJV; beyond number, NIV). 기자는 하나님의 피조

세계 중에는 그가 감히 말할 수 없는, 곧 알 수 없는 세계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고

백하고 있다. 특히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바다는 땅에 비해 매우 신비로운 미지의 세

계로 인식되었다(Anderson). 깊고 낮은 해연(海淵)들, 고래뿐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산호들이 이곳 저곳에 숨어있는 바닷속, 인간은 그 깊은 심연의 세계를 상

상할 수 있을 뿐이다.


=====104:26

악어(* , 리웨야탄) - 우가릿 문학에서는 바알의 원수로 알려진 동물

이며, 70인역(LXX) 및 벌게이트역(Vulgate)등은 '용'으로 번역하고 있고, 몇몇 영역본

들은 리워야단(the leviathan, KJV, NIV, RSV) 또는 고래(the whale)로 번역하였다.

그 성격을 분명히 알 수 없으나 몸집이 거대한 '미지의 괴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동물도 분명히 하나님의 통제하에 있다(74:14).


=====104:27

바라나이다(* , 사바르) - 아랍에서 더 자주 사용되는 본 용어는 일용할

양식을 갈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145:15의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와 그 의미가 동일하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도 양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104:28

취하며(* , 일르코툰) - 직역하면 '모으며'이다. 이 용어는 원래

돌멩이, 꽃, 이삭, 포도, 나무 따위를 '땅바닥으로부터 집어든다'를 뜻하는데, 여기서

는 짐승이 먹을 양식을 얻게 됨을 가리킨다. 만나의 수확에 대한 암시로 보는 학자도

있는데(Hengstenberg) 그 근거가 전혀 없다.


=====104: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 문자적으로는 주시하던 방향으로부터 시선을 전환시킨다는

뜻이나, 문맥상의 의미는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적 돌봄이 중단됨을 가리킨다.

본 구절은 성경 이곳 저곳에서 하나님의 분노 혹은 불쾌함을 나타낼 때 사용되고 있다

(22:24; 102:2; 신 31:17, 18; 사 64:7 등).

저희가 떨고 - 원문상 동일한 표현을 30:7에서 볼 수 있다 : "주의 얼굴을 가리우

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이외에 욥 23:15을 참조하라).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 '호흡'의 그

문자적인 뜻은 '영' 혹은 '생명의 호흡'(창 2:7)이다. '영'은 하나님께로 왔으니 결

국 그분께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전

12:7). 육체 또한 생명의 호흡으로 말미암는 생기가 없을때 맨 처음 왔던 곳인 티끌

로 돌아가기 마련이다(146:4; 창 3:19). 한편, '호흡을 취하신즉'은 '토세프 루함'

(* )인데 이와 유사한 구절이 노아 홍수 기사에 나온다는 사실에 근

거하여(창 6:17; 7:22) 본절과 노아 홍수 사건과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으나

문맥상 타당성이 없다.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 본 구절은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기사를

적고있는 창 2:7에만 국한된 지엽적인 언급이 아니라 전체 창조에 있어서 위대한 생기

부여자로서의 성령을 묘사하고 잇는 창 1:2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것이 좋다. 즉, 오

고 가는 모든 세대의 생명체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의 생명주입의 보편적 사역

에 대한 언급으로 보아야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앞의 문맥은 생명체의 소멸

을, 그리고 후 문맥은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주관

자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생명체를 땅 위에 두시어 정한 기한까지 기식하며 살게 하시

고 그 생명을 거두시고 또 다른 생명을 땅 위에 두시고 다시 거두시는 식으로 계속해

서 새로운 생명들로 지면에 존속케 하신다. 세대에서 세대에로의 새로운 전환을 거듭

함으로 땅은 새로움과 신선함을 계속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104:31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 '영광'은 여호와의 현현(顯現)의 묘사로 흔

히 사용된다(출 16:7, 10; 24:16, 17; 40:34, 35). 말하자면 그의 임재의 현시를 나

타낼 때 사용되는 것이다. 특히 본 문맥에서 저자는 창조사역 때 드러났던 하나님 임

재의 영광이 영원할 것을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 임재의 영광의 영원성을 바라보는

피조물에게 요구되는 바는 순종이다. 결국 기자는 피조물의 복종, 순종을 끌어내기

위하여 임재 영광의 영원성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생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지로다 - 이것은 창조 사역을 마친 후 그 피조된 세

계를 보고 선포하신 말씀인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31)를 연상시킨다.


=====104:32

계속해서 기자는 그의 영광 중의 엄위로우신 하나님께 대해 묘사하고 있다. 그가

한번 쳐다보면 땅은 떨 것이며 그가 한번 손을 대면 산들은 타버릴 것이며 그가 원하

시면 이순간에 그가 만든 피조 세계는(無)로 돌아가버릴 것이다. 이 같은 묘사는 여

호와의 능력, 그의 피조 세계에 대한 절대적 우월성을 암시한다.


=====104:33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 '나의 평생'이란 육(肉)을 입고 있는 동안, 곧

땅 속에 묻히기 전까지를 뜻한다. 본문과 같은 표현은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115:17, 이외에 6:5을 참조하라)라

고 하는 당시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한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래도 그 주어진 시한 동안만이라도 내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기자는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 속에서 그의 기쁨을 발견하시고 역으로 사유가 가능한

피조물, 곧 인간은 그분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본질에 가깝

고 고상한 창조의 조화이다.


=====104:34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 예에라브 알라이

우시히) - 문자적인 뜻은 '나의 묵상이 그에게 달기를(즐겁기를)', 혹은 '그에 관한

나의 묵상이 달기를'로 볼 수 있는데, '여호와 앞에서 내가 즐거워한다'는 의미를 분

명히 견지하고 있는 하반절과의 동의적 평행을 중시할 때 후자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

다. 그렇다면 '그에 관한 나의 묵상이 달기를'이란 하나님의 품성과 사역에 대한 묵

상을 통하여 기쁨을 발견하기 원한다는 말이다. 참 경건한 자의 성품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에 대해 묵상할 시간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는 일단 규칙적인 시간을 정했으면

결코 돌이키지 않는다. 아무리 바쁜 일과 속에서도 그 시간을 생각하며 기뻐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진정한 기쁨, 행복을 발견한다. 그러나 죄인은 그렇지 않다.

묵상의 시간도 없고 그분을 기뻐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그를 고통스럽

게 할 뿐이다(사 30;11).


=====104:35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지로다 - 진정한 의미의

가장 고상한 창조의 조화는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속에서 기쁨을 발견하시고 사유 가능

한 그의 피조물, 인간은 하나님을 통해 기쁨을 발견하는 일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조화는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마치 전파 방해로 인하여 채녈의 주파수를 맞출 수 없

는 것처럼 말이다. 죄가 세계에 무질서 불협화음을 가져온 것이다. 죄는 질서

(cosmos)를 무질서로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 있던 기자는 이제 선지적

소망을 가지고 죄인은 소멸되고 말 것이며 그리고 죄인이 없으므로 이 땅은 정결하게

되고 그 조화가 다시 회복될 것을, 그리하여 결국 하나님께서 한번 더 '보시기에 좋았

다'라고 선포하실 때가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 이러한 종말론적 소망 속에서 기자는 자신의 영혼

이 그리고 자기 주위에 있는 자들이 여호와를 기리며 찬양할 것을 권하면서 본 시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시편 제 105편

=====105:1

여호와께 감사하며 - 78편, 106편과 함께 본 시편은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 있어서

그 민족을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경이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세 편의

시편들은 동일 주제를 지향하지만 그 주제를 지향하는 의도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

다. 먼저 78편은 교훈적이다. 즉, 그 의도는 한 가지 교훈을 가르치는 것인데 가르

쳐 현재를 위한 경고를 삼기 위하여 과거를 회상한다. 106편은 참회적 고백을 의도하

고 있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 과거 역사를 주로 죄악의 역사로 취급하고 있다. 반

면, 본 시편은 감사를 끌어내기 위한 적절한 주제인 바 미래의 순종을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토대로서의 이스라엘 민족 역사의 여명기에 그 민족을 위해 행하신 여호와의

능력의 역사를 진술하고 있다. 본 구절에서는 특히 감사를 끌어내기 위한 의도를 읽

을 수 있다.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 본 표현은 그 다양한 문맥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나타낸

다. 애가(哀歌)의 문맥의 경우는 고통자가 구원을 바라며 여호와의 이름을 외치는 것

이 되겠고(116:4), 찬양시의 경우는 '여호와를 찬양하라'와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외

치며 즐거워하는 것이 되겠다(104:35, Anderson). 아무튼 본절 전체는 사 12:4과 유사

하다.


=====105:2

그를 찬양하며(* , 잠루로) - '자마르'(* )의 본래 의미

는 악기의 현따위를 '만지다', '연주하다'이며 여기서는 '어떤 일정한 리듬을 동반해

서 노래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핵심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그저 노래할

것이 아니라 일정한 음악적 정형을 갖추고서 노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노래를 받

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엄위로운, 인간과는 구별된 신(神)이시

기 때문에 찬양에도 최선의 노력과 정성을 다 바침이 마땅하다.


=====105:3

그 성호를 자랑하라(* , 히트할루 베쉠 코드쇼) -

문자적인 뜻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라'이다. 요점은 우리의 찬양에 있어서 주

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이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요점을 좀더 세분화하면 다

음과 같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뻐 찬양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우

리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하여 그분이 택하신 이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의 이름이란 곧 여호와 자신이요(Anderson). 당신의 거룩하신 성품에 다름아니다

(Davies). (2) 찬양과 기뻐함의 주제는 그의 마음이 거룩하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

님은 거룩하다는 것이다. 빛이 빛을 좋아하듯이 거룩함을 지향하는 자만이 그 사실을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땅 위에 하나님만큼 완전히 거룩한 자는 없다. 그러므

로 날마다 거룩해지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기뻐해야 한다.


=====105:4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 디르슈 예화 웨

우조) -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와 그의 힘을 구하라'이다. 그런데 여호와를 구한다는

것은 그의 전능한 힘을 구한다는 의미이다.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때 70인역(LXX) 및 벌게이트역(Vulgate)의 의역, '여

호와를 구하라 그리하면 강해지리라'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본 시편 전체 줄거리

는 이스라엘 초기 역사 속에 나타났던 강한 능력의 하나님을 부각시키고 있다. 즉,

문맥은 강한 능력의 하나님을 초점으로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중시할 때 본

구절은 '강하신 여호와...'로 의역함이 더 타당하겠다.


=====105:5,6

아브라함의 후손 - 대상 16:12, 13에는 '이스라엘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본문은

언약의 시조라는 면에 강조점이 있고, 역대상의 경우는 언약의 후손들이라는 면이 강

조되어 있다. 시편에서는 47:9외에 본 시편 9, 42절에서만 '아브라함'이란 호칭을 볼

수 있다.

택하신 야곱의 자손(* , 베네 야아코브 베히라) -

정확하게 직역을 하면 '택하신 야곱의 자손들(아들들)'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본 구

절이 의미하는 바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인 이스라엘 백성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

엘 백성은 아브라함의 씨들로서 하나님의 택자(擇者)들이며, 언약과 약속들의 상속자

들인 야곱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역사를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그 조부(祖父)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듯이 말이다(8절).

그 입의 판단 - 여호와께서 주신 율법이 아니라 바로와 그 백성 위에 내린 징벌을

암시하는 것 같다(14절; 출 6:6; 7:4; 12:12). 하나님은 애굽의 장자들을 치신 사건

을 비롯한 열 가지 재앙과 홍해까지 이스라엘을 추격했던 바로의 군병들을 물 속에 수

장시키심으로써, 모세를 통해 실행된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해방을 무시한 애굽을

징벌하셨다. 본문 앞에 언급된 '기사'와 '이적'은 이와 동일한 의미가 있는 것이 분

명하며, 동일한 의미가 반복된 것은 하나님의 애굽 징벌 종류의 다양성 및 강조를 나

타내기 위함인 것 같다.


=====105:7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 여기서 '우리 하나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엘로헤누(* )로서 하나님의 언약적 품성을 암시하는 말이다. 본절로

부터 본 시편의 끝절까지 계속되는 찬양의 핵심은,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확

신과 함께 시작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언약의 수여자로 언급하신 사실은 출

20:2에도 나타난다. "나는 너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 '판다'의 히브리어 '쉐페트'(* )는 일반적

으로 '재판', '판결'등을 뜻하지만 본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의 영향력' 정도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심에 따

라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상 나라들이 그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105:8

천 대에 명하신 말씀 -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

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

행하시며"(신 7:9)라는 말씀을 연상시키는 본 구절의 '천 대'는 한계가 없는 기한 곧

'영원'을 뜻한다. '명하신'은 '치와'(* )로서 동일한 단어가 민 27:19에도

나오는데 그곳에는 '세우다'로 되어있다. 이러한 용례는 10절의 '세우신'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결국 이 용어는 이스라엘이 받아 지켜서 그것을 든든히 유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하겠다.

기억하셨으니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자카르'(* )로서 본 문맥에서

는 그 세우신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신 하나님에게 적용되고 있다. 즉, '자카르'는 한

번 맺은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신 하나님을 묘사하는 용어이다(74:2; 79:8). 한편, 본

용어는 하나님이 신실하신 것처럼 언약의 대상인 이스라엘도 언약에 대하여 신실할 것

을 명령하는 대목에서도 사용된다. "너희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할지어다"(대상 16:15)


=====105:9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 , 아쉐르 카라트 에트

아브라함) - 직역하면 '그가 아브라함을 향하여 잘랐던 그것'이다. 문자적으로 '언

약'이라는 말이 원문에 없으나 본 구절 자체에 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카라

트'(* )는 고대에 언약 체결 당시 언약 쌍방이 그 사이로 지나갔던 두 부분으

로 '자른' 짐승을 연상시키는 표현인 것이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 국가에서는 일

정의 계약을 체결할 때 짐승을 잡아 두 부분으로 나누고 그 쌍방이 그 자른 고기 사이

로 지나갔다. 그 행위 속에는 만일 체결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잘라진 양편

의 고깃덩이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결심이 담겨져 있었다(렘 34:18-22). 하나님

이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으실 때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짐승을 잡게 하셨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브라함은 암소, 암염소, 수양, 산

비둘기, 집비둘기를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마주 대하여 놓았는데 새는 쪼개지 않았

다(창 15:9,10). 그러나 일반의 경우와 달리 아브라함은 그 쪼갠 고기 사이를 통과하

지 않았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그 사이를 통과하신 것이다. 성경은 타는 횃불이 그

사이를 지나갔다고 하였는데 이 횃불은 다름아닌 하나님 자신이시다(창 15:17). 하나

님은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그리고 택한 후손에게 계속 전승될 약속은 자신

의 생명을 바꾸어서라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를 그 의식을 통하여 보여 주셨던 것이

다. 물론 본 의식(儀式)을 통하여 우리는 먼 훗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성취하실 그리스도, 곧 하나님 그분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생

명을 걸어가면서까지 하신 약속, 그 약속을 본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삭에게 하신 맹세 -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카라트'(* )로 표현 했

던 반면, 이삭에게 주신 약속은 '쉐부아트'(* )로 표기하고 있는데 후자

는 전자에 주었던 약속에 대한 확증이라는 측면에 그 강조점이 두어져 있다(창 22:16;

26:3). 대(代)를 이어 전해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은 약속한 땅, 가나안의 수

여가 그 핵심이다.


=====105:10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 여기서 '율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호크'(* )인

데 주로 복수형인 '후킴'(* )이 자주 쓰인다(119:5등). 율법의 외형적 성

격을 암시할 때 사용되는 본 용어는 주로 한번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문자화된 형태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다(18:22; 147:19). 여기서는 야곱에게 주신 약속은 아브라함,

이삭 등에게 이미 주었었기 때문에 이제는 글로 써서 종이에 간직한 바 된 듯한 분명

하고도 명확한 약속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에게 하신 - 얍복 강 씨름 사건 이후 야곱은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게

되는데(창 32:24-32) 이 사건은 한 개인의 단순한 개명(改名)을 뜻하지 않고 한 국가

의 탄생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야곱이 한 국가의 시조가 된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105:11

너희 기업의 지경 - 여기서 '지경'은 '헤벧'(* )로서 그 문자적인 뜻이

'줄', '로우프', '길이를 측정하는 자'등이다. 본절에서는 어떤 대상, 곧 이스라엘

12지파에게 주기 위한 그 크기가 분명히 정해진 일정의 토지를 암시하기 위하여 사용

되고 있다.


=====105:12

매우 영성(零星)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 '매우 영성하며'는 '키므아트'

(* )인데 '한 웅큼밖에 되지 않는 숫자'로 풀어 번역하는 학자도 있다. 아

무튼 숫자가 매우 적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관계로 당시 이스라엘은 이곳 저곳

으로 쫓겨다니는 나그네가 될 수 밖에 없었다.


=====105:13

족속...민족 - 전자는 '고이'(* ), 후자는 '암'(* )인데 전자는 주

로 동일한 기원을 갖고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일련의 공동체를 뜻하고 후자는 한 정

부 아래 있는 공동체를 뜻한다.


=====105:14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 여기서 '열왕'이란 애굽의 바로(창 12:17), 그랄의

왕 아비멜렉(창 20:2) 등을 가리킨다.


=====105:15

나의 기름 부은 자(* , 마쉬아흐) - 문자적인 뜻은 '기름 부음 받은 자'

혹은 '특별히 구별하여 거룩케 한 자'이다. 기자는 특정인에게 기름을 실제적으로 부

은 적이 없었던 족장 시대가 아닌 자신의 시대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실 다윗

시대와 같은 왕국 시대에서나 왕, 제사장 혹은 선지자들에게 기름을 부었었다(왕상

19:16). 그러나 기자는 하나님께서 족장,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같은 이를 선지자로

부르셨던 사실을 기억하고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참선지자, 특별히 구별한 자로 묘사하

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창 20:7).

나의 선지자(* , 네비아) - '나의 선지자들'이란 뜻이다. 족장들중에

실제로 '선지자'로 칭함 받은 자는 아브라함뿐이다(창 20:7). 그러나 여기서는 이삭

과 야곱 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영감받은 자들이요

하나님과 긴밀하게 교제했던 자들이라른 점에서 선지자로 지칭되고 있는 듯하다

(Alexander). 한편, '선지자'에 해당하는 '나비'(* )는 아카드어 '나부'

('부르다', '지명하다'란 뜻) 혹은 아랍어 '나바아'('선포하다', '언급하다'는 뜻)와

도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Anderson).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선지자'란 '(하나님

의) 대변자' 혹은'(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자'라는 의미도 내포하게 된다. 한

편, 늦은 시기에 있어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령하는 자일 뿐 아니라 그것을

남에게 전하는 자이다. 그러나 이른 시기에 있어서,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경우 그같

은 공적(公的) 기능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물론 노아 같은 사람은 '의의 선생'으로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그의 가족(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을)을 가르

쳤던 것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창 18:19에 의하면 선지자란 하나님께서 말, 환상, 꿈

혹은 내적 음성을 수단으로 대화하였던 상대였다(민 12:6-8).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

절을 읽을 때 족장들을 선지자들로 묘사한 본 구절이 의미하는 바에 근접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는냐"(창 18:17). 뿐만

아니라 소돔에 관하여 아브라함에게 준 맹세에서도 동일한 근접을 찾아볼 수 있다(창

18:22-33). 이 두 구절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아브라함에게 붙여진 '선지자'라는 호

칭은 '(하나님의 뜻의) 중개자'라는 의미이다. 한편 '하나님의 친구'란 호칭도 유사

한 의미를 지닌다(대하 20:7; 사 41:8; 약 2:23).


=====105:16

그가 또 기근을 불러 - 여기서의 '불러'의 원형은 '카라'(* )인데 문자적

인 뜻은 '소환하다', '청하다'이며 그 화자(話者)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본

절로부터 38절까지에는 그 약속의 성취 한 단계 한 단계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암시하는,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서술되고 있다.


=====105: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팔렸도다 - 요셉이 종으로 팔린 기사를 아비의 편

애에 의한 형제간의 갈등의 결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단서가

되는 구절이다. 그 기사는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출발이라는

점에 해석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105:18

그 발이 착고(着錮)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 본 기사를 싣고 있는

창 39:20-23보다 더 혹독하게 요셉의 투옥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요셉이 전

옥(典獄)에게 신임을 얻기 전 투옥 초기 때의 모습이거나 전체 투옥 시절에 대한 강한

시적인 묘사로 추측되어진다.


=====105:19

여호와의 말씀(* , 데바로) - '그의 말'이란 뜻이다. 그리고 '그의 말'

이란 (1) 요셉으로 자유의 몸이 되게 하였던 꿈의 해석, 곧 투옥 중이던 바로의 신하

들의 꿈을 해석한 것(창 40:5-15 : 41:12)을 뜻하거나, (2) 요셉의 꿈을 통해 예언되

었고 훗날 요셉의 영화(榮華)를 통하여 성취되었던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창 37:5-11)

을 뜻한다고 볼 수 있는데 문맥을 중시할때 전자가 옳다 하겠다. 그 자신이 꿈들을

해석하기 전까지 요셉은 감옥에서 고통받고 있었다는 것, 이것이 본 구절의 강조점이

다.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 임라트 예화

체라파트후) - 70인역(LXX)이 '주의말씀'으로 번역하고 있는 '임라트 예화'

(* )는 상반절의 '그의 말'과는 다른 의미이다. 즉, 이것은 하나

님의 꿈 해석이 아니라 요셉의 꿈들을 통하여 그에게 전달되었던 그의 미래에 관한 하

나님의 약속(창 37:5-11)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다. '약속'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하나님의 말씀 '임라트'(* )는 살아있는 실제적 능력으로

알려져 있다(119:50). 이 사실은 약속과 그 성취 사이 기간인 요셉의 고통과 투옥의

날들 동안 하나님께서 그의 신앙을 시험하심을 통하여 진리임이 입증되었다.


=====105:20

열방의 통치자(* , 모쉘 얌밈) - 직역하면 '민족들의 통치자'이

다. 이것은 요셉을 옥에서 자유케 하였던 애굽 왕 바로는 애굽의 왕(창 41:14, 39,

40, 44)이었을 뿐 아니라 타민족까지 지배하였음을 암시한다. 당시 바로는 조공을 바

치는 많은 나라들의 왕이었다.


=====105:21

그 집의 주관자 - 요셉은 애굽의 국가 제반 사무를 책임진 국무총리가 되었다(창

41:41). 이 같은 관직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도 존재했었다(왕상 16:9; 18:3; 왕하

18:18, 37). 이 신분에 있던 자를 흔히 '집의 주관자' 혹은 '궁전의 주인'등으로 불

렀다고 한다.


=====105:22

임의(* , 나프쇼오) - 문자적인 뜻은 '그의 영혼'으로 여기서는 요셉의

정신 작용에 의하여 외부로 표출되는 그의 말, 명령등을 가리킨다(창 41:40).

제어하며(* , 레소르) - 문자적인 뜻은 '묶으며'이다. 영역본들은 '묶

다'(bind, KJV), '훈육(징계)하다'(discipline, NIV), '투옥하다'(imprison, LB), '교

훈(지시)하다'(instruct, RSV)등과 같이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이런 번역들을 종

합해 볼 때 여기서는 '통제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무난하겠다. 이 통제 능력은

권위의 증거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순종을 강요하고 상과 벌을 결정하는 권위가 본

용어 속에 함축되어 있다(Phillips). 요셉의 통제력은 창 41:40, 44에 잘 드러나 있

다.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 요셉이 바로의 신하들에게 정치론 따위를 강

의 하였다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바로가 요셉의 7년 흉년 대책을 듣고 감동하였던

기사에 대한 시적인 묘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

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

다"(창 41:38, 39).


=====105:23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 성경은 애굽 땅을 흔히 함 땅으로 부르고 있는데(78:51;

106:22등) 그 이유는 애굽의 시조가 함이기 때문이다(창 10:6). 영원한 거처가 아닌

임시적으로 살 거처로 가기 위하여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 땅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105:24

본절부터 38절까지는 출애굽기 처음 열두 장들에 나타난 역사, 특히 재앙들이 내려

진 역사의 요약이다(출 1:7; 신 26:5과 비교하라). 여기서 다섯 번째나 여섯 번째 재

앙은 함께 생략되어 있고 흑암의 재앙이 처음에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기자는 엄

밀한 순서에 따라서 기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인 섭리를 강조하기 위한 목

적만을 충실히 전달하고자 시적인 자유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105:25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 원문대로 직역하면 '하나님은 그

의 백성들을 미워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마음을 바꾸셨다'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을 미워하도록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애굽인들의 마음을 바꾸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을 향한 애굽인의 증오 문제에 있어서 그 원인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이 사실을 놓고 학

자들은 고민한다. 그리고 어떤 학자들은 그 증오의 원인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저희들의 마음이 변하게 되었다'로 번역하고 '하나님'이라는 주어

는 생략해 버리기도 한다(갈대아역, 아랍역). 또 다른 학자들은 이 구절을 단지 이스

라엘 백성의 수의 증가로 야기된 그 대적들의 증오심의 발동을 하나님이 괴로워하셨다

는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이해하기도 한다(Grotius). 그러나 출애굽 기사중의 하나님

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는 식의 본 구절과 동일한 의미의 구절들이 계속해서

나온다는 사실이 난제로 대두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곳곳에서 하나님은 증오나 죄

의 원인자인듯이 묘사되고 있다(사 6:9, 10; 막 4:12; 요 12:39, 40; 롬 11:8). 하나

님은 죄가 없으시다. 그리고 죄를 미워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그분이

죄의 원인자이신 듯 묘사하는 곳이 있다. 이 난제를 해결하는, 조직 신학적 용어가

바로 '허용적 간과'이다.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그의 구원 역사 속에서

죄의 작동을 허용하시는 분이시라는 것, 이것이 본 난제의 해결 방법인 것이다. 그러

나 본 구절의 강조점은 출애굽 기사 속에 나타나는 크고 작은 모든 요소들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보고 생겨난 애

굽인의 증오를 간과하심으로써 그분 중심적인 출애굽 사건의 기초를 마련하셨다.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 레히트나켈) - 문자적인 뜻은 '세밀하

게 의논하였다'이다. 문맥적으로 이스라엘의 증가를 보고 염려한 애굽인의 의논임을

생각할 때 '세밀하게 음모를 꾸몄다'로 번역해도 무리가 없겠다. 이것은 출 1:10에

기록된 애굽인의 음모를 연상케 한다. "오라 우리가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자"(원문

직역). 애굽인이 꾸민 이스라엘의 증가에 대한 대처 방안은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를

죽이는 것이었다(출 1:15, 16).


=====105:26

모세...아론 - 시편에서 이 '모세'라는 호칭이 나오는 곳은 77:20; 103:7; 106:16,

23, 32 그리고 90편 표제 등이다. 모세는 여호와의 '종'이라 불리웠고(출 14:31) 아

론은 '택하신 자'로 불리고 있다. 여기서 '종'과 '택하신 자'는 5, 6절에서 볼 수 있

듯이 거의 같은 의미를 전달한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구원을 위한

도구 역활을 담당했다(VanGemeren).


=====105:27

저희가 그 백성 중에 여호와의 표징을 보이고

(* , 사무 밤 디브레 오토타) - 이의 문자적인

뜻은 '그들이 그들 중에 그의 표적의 말들을 놓았다'이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이 하

나님의 대언자, 곧 선지자임을 엿보게 하는 표현이다. 사실 모세와 아론은 자신들의

말을 전하고 이적을 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을 전하고 그분의 이적을 대

행했을 뿐이다. 한편, 여기서 두 번째로 나오는 '그들'이란 이스라엘 백성과 바로 및

그 신하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대언자인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뿐

아니라 바로의 궁(宮)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적을 행하였다(출 4:28, 30;

7:9, 10).


=====105:28

흑암을 보내사 어둡게 하시니 - 아홉번째 재앙(출 10:21-29)이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알기 어렵다. 어떤 학자는 흑암은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인데 그런

의미에서 처음 재앙부터 마지막 재앙 때까지 애굽은 흑암에 뒤덮여 있었다는 것을 본

구절이 암시한다고 해석한다(Hengstenberg). 한편, 출애굽 재앙 기사와 본 시편 재앙

기사의 배열 순서의 차이는 십계명 기사와 주님이 인용한 십계명 기사의 배열 순서의

차이를 연상케 한다(마 19:18, 19; 막 10:19; 눅 18:20).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본

시편 기자는 기사 내용의 순서보다는 그 전체 내용의 전달에만 관심을 두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말씀을 어기지 아니하였도다 - 개역 성경이 생략한 주어 부분 '마루'

(* )를 넣어 재번역하면 이렇다. '그들은 그의 말씀들을 대항하여 반역하지

않았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을 가리킨다(They

followed his instruction and..., LB). 70인역(LXX), 시리아역, 아랍역, 에디오피아

역 등은 '않았다'로 번역된 부정사를 생략하여 '그들은 그의 말씀들을 대항하여 반역

하였다'로 번역하고 있는데(they rebelled against his words, RSV). 이 경우라면

'그들'은 애굽인들이 되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맛소라 원본(M.T.)과 배치되는 견해이

다. 따라서 취할 수 없다. 본절이 모세와 아론의 순종을 언급하는 이유는 모세의 사

역 초기 곧 하나님이 그를 처음 부르셨을 때 그리고 그의 사역 후기 바위에서 물을 내

었을 때 각각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던 사실과 대비를 시키기 위함인것 같다.(출 4:10,

11; 민 20:24; 27:14 등).


=====105:29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사 - 첫번째 재앙을 말한다(출 7:14-25).


=====105:30

개구리가 번성하여 - 두 번째 재앙을 가리킨다(출 8:1-15).

왕의 궁실(* , 베하드레 말케이헴) - 직역하면 '그들 통

치자들의 방들에'이다.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 이 표현은 애굽 바로 왕의 신하들, 고

관들의 처소를 가리킨다. 왕의 처소뿐 아니라 그 신하들의 처소에도 개구리가 들끓었

다.


=====105:31

파리 떼가 오며 - 출 8:20-24에 나오는 네 번째 재앙을 가리킨다.

이가 생겼도다 - 출 8:16-19에 나오는 세 번째 재앙을 가리키는데 '이'란 '키님'

(* )으로 오늘날의 '모기'를 가리킨다(Keil & Delitzsch). 본절에서도 출

애굽기에서와 달리 셋째 재앙과 넷째 재앙이 그 순서가 바뀐 채 언급되고 있다.


=====105:32

우박...화염(火焰) - 이는 일곱 번째 재앙을 가리킨다(출 9:22-26). 여기서 '화

염'은 원어로 '에쉬 레하보트'(* )로서 '불타는 불'인데 이것은 천

둥이 칠 때 동반되는 뇌성을 가리킨다(출 9:23).


=====105:33

포도나무...무화과나무 - 하늘에서 우박과 벼락이 내릴 때 애굽의 대표적 나무였던

이 두 나무를 비롯한 모든 수목은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105:34

황충...메뚜기 - 히브리어로 각각 '아르베'(* ), '옐레크'(* )

이다. 여덟번째 재앙을 언급하고 있는 출 10:1-20에는 전자인 '아르베'만 나오지만

여기서는 '옐레크'까지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메뚜기의 일종인데 날개가 달렸다는

특징이 있다(나 3:16). 뿐만 아니라 여덟 번째 재앙을 언급하고 있는 또 다른 평행구

인 78:46에서는 또 다른 용어 '하실'(* )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용어로 메뚜기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실제 여덟 번째 재앙 때 나타났던

메뚜기는 한 종류가 아니라 여러 종류, 최소한 세 종류는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

다.


=====105:35

모든 채소를 먹으며 그 밭의 열매를 먹었도다 - 여러 종류의 메뚜기들은 우박으로

망가져 버리지 않은 채 남아있던 식물들을 갉아먹어 버림으로 황폐화의 정도를 더욱

심하게 만들었다.


=====105:36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재앙은 생략되고 재앙 기사는 마지막 재앙으로 끝나고 있

다. 본절에 사용된 용어들은 78:51과 거의 유사하다.


=====105:37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 이것은 출 12:35과 관계 있는 표현이다. 출 12:35

번역에 있어서 주요 영역본인 KJV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은금을 비롯하여 의복까지를

애굽으로부터 '빌린'(borrowed)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번역은 옳은 번역

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개념에 있어서 빌린다는 것은 다시 갚는것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애굽에서 나온 이후 이스라엘은 그 가지고 나온 것을 다시 갚은 적이 없

는데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애굽에게 사기를 친것이 되기 때문이다. KJV가 '빌린'으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솨알'(* )인데 사실 본 용어가 '빌리다'라는 의미로 사용

되는 경우가 성경에 있기는 하다(출 22:14; 왕하 4:3 등). 그러나 여기서는 '구하

다', '요구하다'등의 의미로 번역됨이 더 무난하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구하다'

로 번역하고 있는 NIV, RSV 혹은 개역 성경 등은 바람직하다. 이스라엘은 빌리지 않

고 당당히 달라고 요구하여 당시에 귀히 쓰는 은, 금 등을 받아 애굽을 나왔다. 그것

은 이스라엘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이것이 본 구절의 핵심이다.

은금은 고대에도 주요 귀중 금속이었다. 이 둘은 장식용으로, 보물로 그리고 상거

래의 저당물로 사용되곤 하였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은은 금보다 귀하였다. 그래서

여기서도 은이 금보다 앞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 원기, 활력을 묘사하는 사 5:27을 연상시키는 표현이

다. 여기서 '약한 자'란 '코쉘'(* )로서, 그 문자적인 뜻은 '다리를 저는

자'이지만 '보행에 불편을 심하게 느끼는 자'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결국 본문은

여호와의 완벽하신 인도하에 출애굽이 성공리에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구절이라 하겠

다(신 8:4).


=====105:38

그들의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 애굽은 많은 재앙들로 큰 고통을 받았으

며 그 땅도 거의 황폐화되었다. 따라서 이제 더 심한 재앙이 내린다면 그들은 더 이

상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스라엘이 떠난다고 하자 크게

기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요구한 귀중한 물건 은, 금까지도

기꺼이 주어가며 이스라엘이 떠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아니라 그들 뒤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었다.


=====105:39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 여기서 '구름'은 출 14:19의 경우와 같은 대적들로

부터의 보호가 목적이 아니라 태양 광선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머리를 보호함이 그

목적이다(Barnes). 물론 78:14; 출 13:21의 경우, 구름은 이스라엘의 안내자로도 나

타나고 있다.

불로 밝히셨으며 - 밤에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기 위함이다(출 13:21). 구름 기

둥과 불 기둥의 메타포(metaphor)는 활화산의 관측으로부터 따온 것이라고 말하는 학

자도 있으나 인정할 수 없다. 구름 기둥, 불 기둥은 실제적이지 않은 현상 묘사의 소

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가운데 실제적으로 존재했던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

이다.


=====105:40

개역 성경에는 분명히 나오지 않았지만 원문에는 '메추라기로' 앞에 하나님을 지칭

하는 '그가'가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기자는 선행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하는

소리를 생략한 채 여호와께서 주도적으로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리셨던 사실을 강조적

으로 적고 있다.

하늘 양식은 만나를 가리키는데 78:25의 경우는 이것을 '권세 있는 자(천사)의 떡'

으로 부르고 있다.


=====105:41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생존케 하시기

위하여 베푼 이적은 다양하지만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이적이 있다면 그것은 가데

스(민 20:2-13)와 르비딤(출 17:1-7)에서 행하신, 반석에서 물을 나게 하신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은 단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물을 먹이신 사건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

다. 이 사건의 의미를 좀더 알아보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 속에서 이 주제가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소고(小考)해 볼 필요가 있다. 반석-물이라는 주제는 특히 시편과 이사

야서에서 발전되어 나타난다. 78:15, 16, 20과 본절 및 42절에 근거해 보면 이 두 시

편 기자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이루어 오신 구원 역사를 서술하여 그분의 은혜로우심과

신실하심과 광대하심을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구원 역사적 관점에서 두 기자는 공통

적으로 민 20:2-13과 출 17:1-7의 주제를 발전시켜서 '하나님께서 반석을 통해 강같이

흘러 넘치는 풍부한 물을 내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살리시며 그들을 만족케 하셨음'

을 말하고 있다. 특히 본 시편 기자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은 아브라함에게

이르신 언약에 근거하고 있음을 덧붙이고 있다(42절). 한편, 사 43:14-21의 문맥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루실 크신 구원의 일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

일을 가리켜 '새 일'(사 43:19)이라고 말씀하시며 이 일에 비교가 되는 '옛적 일'(이

전 일)로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신다. 이 같은 '새 일', 즉 새로운 구원 사역을 묘사

하면서 하나님은 바로 본절에 나타난 '반석과 물' 주제를 크게 확대시켜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

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

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 43:19, 20). 이 말씀 안에 '반석'이란 단어는 그대로 나타나진 않지

만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루신 구원 사역인 출애굽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가운데

'사막에 강을 내고 광야에 물들을 내시겠다'는 표현은 본절의 주제와 격리 시킬 수 없

는 것이다. 또 하나 살펴볼 문맥은 사 48:17-22이다. 이 문맥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게 될 평강'과 '바위에서 나온 물'을 간접적으로 연관시키면서 야곱의 구원을 선

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이사야서의 두 문맥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바는

둘 다 과거의 출애굽 사건보다 월등히 탁월한 구원 사역, 즉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하나님께서는 내다보시며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가져올 무한한 축복을 '반석과 물'

이라는 주제를 발전시켜 나타내고 계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고전 10:4의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

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는 말씀의 의미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으

리라 생각된다. 요컨대 본절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이스라엘이 광

야에서 물을 먹은 사건을 묘사한다고 볼 수 있으나 더 멀리는 진정한 음료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구절이다.


=====105:42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따라 행하셨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약속이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말한다. 출애

굽 사건 역시 그 약속 성취의 일부이다(출 2:24; 신 7:8). 39절에서부터 본절까지에

서는 애굽으로부터의 출발과 약속된 땅으로의 입성(入城) 사이의 기간을 요약하는 광

야에서의 주요한 세 가지 기적들을 다룬 후, 그 기적들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첨가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성경

의 시인들과 선지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주제인 홍해 도하(渡河) 기적 사건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05:43

그 백성으로 즐거이...노래하며 - 42절 주석에서 39-42절에서는 광야 시대의 가장

유명한 기적 중의 하나인 홍해 기적 사건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바로와 그의 군

대가 홍해에 수장된 후에 부른 승리의 노래(출 14:26-15:21)를 암시하는 구절이 바로

본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아니면 본 구절은 주의 재림 후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한

장면을 예언하는 내용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

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

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사 35:10). 후자를 취할 경우 본 시편이 저변에

깔고 있는 시대와 본절이 암시하는 시대는 큰 간격이 있게 된다. 이 점을 고려할 때

후자보다는 전자가 적절한 해석으로 보여진다.


=====105:44

열방의 땅 - 본 시편 전체의 문맥을 중시할 때 이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가리킨

다고 볼 수 있다(78:55; 신 6:10).

민족들의 수고한 것 - 이것은 가나안 민족이 수고하여 일구어 놓은 경작지뿐 아니

라 그들이 세운 도시들, 그들이 소유하였던 귀중품까지도 말한다.


=====105:45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 42-45절의 결론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과 맺은 언약을 따라 광야에서 보호, 인도하신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허락

하셨던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이유 속에

는 이스라엘을 거룩한 나라로 만들어 세상을 대표하는 제사장 국가가 되게 하여 결국

은 온 세상을 당신의 나라로 삼으려는 더 깊은 하나님의 의중이 담겨 있다.
 

 

 시편 제 105편

=====105:1

여호와께 감사하며 - 78편, 106편과 함께 본 시편은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 있어서

그 민족을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경이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세 편의

시편들은 동일 주제를 지향하지만 그 주제를 지향하는 의도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

다. 먼저 78편은 교훈적이다. 즉, 그 의도는 한 가지 교훈을 가르치는 것인데 가르

쳐 현재를 위한 경고를 삼기 위하여 과거를 회상한다. 106편은 참회적 고백을 의도하

고 있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 과거 역사를 주로 죄악의 역사로 취급하고 있다. 반

면, 본 시편은 감사를 끌어내기 위한 적절한 주제인 바 미래의 순종을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토대로서의 이스라엘 민족 역사의 여명기에 그 민족을 위해 행하신 여호와의

능력의 역사를 진술하고 있다. 본 구절에서는 특히 감사를 끌어내기 위한 의도를 읽

을 수 있다.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 본 표현은 그 다양한 문맥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나타낸

다. 애가(哀歌)의 문맥의 경우는 고통자가 구원을 바라며 여호와의 이름을 외치는 것

이 되겠고(116:4), 찬양시의 경우는 '여호와를 찬양하라'와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외

치며 즐거워하는 것이 되겠다(104:35, Anderson). 아무튼 본절 전체는 사 12:4과 유사

하다.


=====105:2

그를 찬양하며(* , 잠루로) - '자마르'(* )의 본래 의미

는 악기의 현따위를 '만지다', '연주하다'이며 여기서는 '어떤 일정한 리듬을 동반해

서 노래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핵심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그저 노래할

것이 아니라 일정한 음악적 정형을 갖추고서 노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노래를 받

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엄위로운, 인간과는 구별된 신(神)이시

기 때문에 찬양에도 최선의 노력과 정성을 다 바침이 마땅하다.


=====105:3

그 성호를 자랑하라(* , 히트할루 베쉠 코드쇼) -

문자적인 뜻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라'이다. 요점은 우리의 찬양에 있어서 주

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이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요점을 좀더 세분화하면 다

음과 같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뻐 찬양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우

리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하여 그분이 택하신 이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의 이름이란 곧 여호와 자신이요(Anderson). 당신의 거룩하신 성품에 다름아니다

(Davies). (2) 찬양과 기뻐함의 주제는 그의 마음이 거룩하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

님은 거룩하다는 것이다. 빛이 빛을 좋아하듯이 거룩함을 지향하는 자만이 그 사실을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땅 위에 하나님만큼 완전히 거룩한 자는 없다. 그러므

로 날마다 거룩해지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기뻐해야 한다.


=====105:4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 디르슈 예화 웨

우조) -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와 그의 힘을 구하라'이다. 그런데 여호와를 구한다는

것은 그의 전능한 힘을 구한다는 의미이다.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때 70인역(LXX) 및 벌게이트역(Vulgate)의 의역, '여

호와를 구하라 그리하면 강해지리라'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본 시편 전체 줄거리

는 이스라엘 초기 역사 속에 나타났던 강한 능력의 하나님을 부각시키고 있다. 즉,

문맥은 강한 능력의 하나님을 초점으로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중시할 때 본

구절은 '강하신 여호와...'로 의역함이 더 타당하겠다.


=====105:5,6

아브라함의 후손 - 대상 16:12, 13에는 '이스라엘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본문은

언약의 시조라는 면에 강조점이 있고, 역대상의 경우는 언약의 후손들이라는 면이 강

조되어 있다. 시편에서는 47:9외에 본 시편 9, 42절에서만 '아브라함'이란 호칭을 볼

수 있다.

택하신 야곱의 자손(* , 베네 야아코브 베히라) -

정확하게 직역을 하면 '택하신 야곱의 자손들(아들들)'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본 구

절이 의미하는 바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인 이스라엘 백성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

엘 백성은 아브라함의 씨들로서 하나님의 택자(擇者)들이며, 언약과 약속들의 상속자

들인 야곱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역사를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그 조부(祖父)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듯이 말이다(8절).

그 입의 판단 - 여호와께서 주신 율법이 아니라 바로와 그 백성 위에 내린 징벌을

암시하는 것 같다(14절; 출 6:6; 7:4; 12:12). 하나님은 애굽의 장자들을 치신 사건

을 비롯한 열 가지 재앙과 홍해까지 이스라엘을 추격했던 바로의 군병들을 물 속에 수

장시키심으로써, 모세를 통해 실행된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해방을 무시한 애굽을

징벌하셨다. 본문 앞에 언급된 '기사'와 '이적'은 이와 동일한 의미가 있는 것이 분

명하며, 동일한 의미가 반복된 것은 하나님의 애굽 징벌 종류의 다양성 및 강조를 나

타내기 위함인 것 같다.


=====105:7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 여기서 '우리 하나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엘로헤누(* )로서 하나님의 언약적 품성을 암시하는 말이다. 본절로

부터 본 시편의 끝절까지 계속되는 찬양의 핵심은,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확

신과 함께 시작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언약의 수여자로 언급하신 사실은 출

20:2에도 나타난다. "나는 너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 '판다'의 히브리어 '쉐페트'(* )는 일반적

으로 '재판', '판결'등을 뜻하지만 본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의 영향력' 정도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심에 따

라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상 나라들이 그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105:8

천 대에 명하신 말씀 -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

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

행하시며"(신 7:9)라는 말씀을 연상시키는 본 구절의 '천 대'는 한계가 없는 기한 곧

'영원'을 뜻한다. '명하신'은 '치와'(* )로서 동일한 단어가 민 27:19에도

나오는데 그곳에는 '세우다'로 되어있다. 이러한 용례는 10절의 '세우신'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결국 이 용어는 이스라엘이 받아 지켜서 그것을 든든히 유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하겠다.

기억하셨으니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자카르'(* )로서 본 문맥에서

는 그 세우신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신 하나님에게 적용되고 있다. 즉, '자카르'는 한

번 맺은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신 하나님을 묘사하는 용어이다(74:2; 79:8). 한편, 본

용어는 하나님이 신실하신 것처럼 언약의 대상인 이스라엘도 언약에 대하여 신실할 것

을 명령하는 대목에서도 사용된다. "너희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할지어다"(대상 16:15)


=====105:9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 , 아쉐르 카라트 에트

아브라함) - 직역하면 '그가 아브라함을 향하여 잘랐던 그것'이다. 문자적으로 '언

약'이라는 말이 원문에 없으나 본 구절 자체에 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카라

트'(* )는 고대에 언약 체결 당시 언약 쌍방이 그 사이로 지나갔던 두 부분으

로 '자른' 짐승을 연상시키는 표현인 것이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 국가에서는 일

정의 계약을 체결할 때 짐승을 잡아 두 부분으로 나누고 그 쌍방이 그 자른 고기 사이

로 지나갔다. 그 행위 속에는 만일 체결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잘라진 양편

의 고깃덩이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결심이 담겨져 있었다(렘 34:18-22). 하나님

이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으실 때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짐승을 잡게 하셨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브라함은 암소, 암염소, 수양, 산

비둘기, 집비둘기를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마주 대하여 놓았는데 새는 쪼개지 않았

다(창 15:9,10). 그러나 일반의 경우와 달리 아브라함은 그 쪼갠 고기 사이를 통과하

지 않았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그 사이를 통과하신 것이다. 성경은 타는 횃불이 그

사이를 지나갔다고 하였는데 이 횃불은 다름아닌 하나님 자신이시다(창 15:17). 하나

님은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그리고 택한 후손에게 계속 전승될 약속은 자신

의 생명을 바꾸어서라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를 그 의식을 통하여 보여 주셨던 것이

다. 물론 본 의식(儀式)을 통하여 우리는 먼 훗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성취하실 그리스도, 곧 하나님 그분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생

명을 걸어가면서까지 하신 약속, 그 약속을 본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삭에게 하신 맹세 -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카라트'(* )로 표현 했

던 반면, 이삭에게 주신 약속은 '쉐부아트'(* )로 표기하고 있는데 후자

는 전자에 주었던 약속에 대한 확증이라는 측면에 그 강조점이 두어져 있다(창 22:16;

26:3). 대(代)를 이어 전해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은 약속한 땅, 가나안의 수

여가 그 핵심이다.


=====105:10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 여기서 '율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호크'(* )인

데 주로 복수형인 '후킴'(* )이 자주 쓰인다(119:5등). 율법의 외형적 성

격을 암시할 때 사용되는 본 용어는 주로 한번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문자화된 형태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다(18:22; 147:19). 여기서는 야곱에게 주신 약속은 아브라함,

이삭 등에게 이미 주었었기 때문에 이제는 글로 써서 종이에 간직한 바 된 듯한 분명

하고도 명확한 약속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에게 하신 - 얍복 강 씨름 사건 이후 야곱은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게

되는데(창 32:24-32) 이 사건은 한 개인의 단순한 개명(改名)을 뜻하지 않고 한 국가

의 탄생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야곱이 한 국가의 시조가 된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105:11

너희 기업의 지경 - 여기서 '지경'은 '헤벧'(* )로서 그 문자적인 뜻이

'줄', '로우프', '길이를 측정하는 자'등이다. 본절에서는 어떤 대상, 곧 이스라엘

12지파에게 주기 위한 그 크기가 분명히 정해진 일정의 토지를 암시하기 위하여 사용

되고 있다.


=====105:12

매우 영성(零星)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 '매우 영성하며'는 '키므아트'

(* )인데 '한 웅큼밖에 되지 않는 숫자'로 풀어 번역하는 학자도 있다. 아

무튼 숫자가 매우 적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관계로 당시 이스라엘은 이곳 저곳

으로 쫓겨다니는 나그네가 될 수 밖에 없었다.


=====105:13

족속...민족 - 전자는 '고이'(* ), 후자는 '암'(* )인데 전자는 주

로 동일한 기원을 갖고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일련의 공동체를 뜻하고 후자는 한 정

부 아래 있는 공동체를 뜻한다.


=====105:14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 여기서 '열왕'이란 애굽의 바로(창 12:17), 그랄의

왕 아비멜렉(창 20:2) 등을 가리킨다.


=====105:15

나의 기름 부은 자(* , 마쉬아흐) - 문자적인 뜻은 '기름 부음 받은 자'

혹은 '특별히 구별하여 거룩케 한 자'이다. 기자는 특정인에게 기름을 실제적으로 부

은 적이 없었던 족장 시대가 아닌 자신의 시대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실 다윗

시대와 같은 왕국 시대에서나 왕, 제사장 혹은 선지자들에게 기름을 부었었다(왕상

19:16). 그러나 기자는 하나님께서 족장,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같은 이를 선지자로

부르셨던 사실을 기억하고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참선지자, 특별히 구별한 자로 묘사하

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창 20:7).

나의 선지자(* , 네비아) - '나의 선지자들'이란 뜻이다. 족장들중에

실제로 '선지자'로 칭함 받은 자는 아브라함뿐이다(창 20:7). 그러나 여기서는 이삭

과 야곱 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영감받은 자들이요

하나님과 긴밀하게 교제했던 자들이라른 점에서 선지자로 지칭되고 있는 듯하다

(Alexander). 한편, '선지자'에 해당하는 '나비'(* )는 아카드어 '나부'

('부르다', '지명하다'란 뜻) 혹은 아랍어 '나바아'('선포하다', '언급하다'는 뜻)와

도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Anderson).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선지자'란 '(하나님

의) 대변자' 혹은'(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자'라는 의미도 내포하게 된다. 한

편, 늦은 시기에 있어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령하는 자일 뿐 아니라 그것을

남에게 전하는 자이다. 그러나 이른 시기에 있어서,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경우 그같

은 공적(公的) 기능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물론 노아 같은 사람은 '의의 선생'으로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그의 가족(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을)을 가르

쳤던 것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창 18:19에 의하면 선지자란 하나님께서 말, 환상, 꿈

혹은 내적 음성을 수단으로 대화하였던 상대였다(민 12:6-8).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

절을 읽을 때 족장들을 선지자들로 묘사한 본 구절이 의미하는 바에 근접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는냐"(창 18:17). 뿐만

아니라 소돔에 관하여 아브라함에게 준 맹세에서도 동일한 근접을 찾아볼 수 있다(창

18:22-33). 이 두 구절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아브라함에게 붙여진 '선지자'라는 호

칭은 '(하나님의 뜻의) 중개자'라는 의미이다. 한편 '하나님의 친구'란 호칭도 유사

한 의미를 지닌다(대하 20:7; 사 41:8; 약 2:23).


=====105:16

그가 또 기근을 불러 - 여기서의 '불러'의 원형은 '카라'(* )인데 문자적

인 뜻은 '소환하다', '청하다'이며 그 화자(話者)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본

절로부터 38절까지에는 그 약속의 성취 한 단계 한 단계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암시하는,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서술되고 있다.


=====105: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팔렸도다 - 요셉이 종으로 팔린 기사를 아비의 편

애에 의한 형제간의 갈등의 결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단서가

되는 구절이다. 그 기사는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출발이라는

점에 해석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105:18

그 발이 착고(着錮)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 본 기사를 싣고 있는

창 39:20-23보다 더 혹독하게 요셉의 투옥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요셉이 전

옥(典獄)에게 신임을 얻기 전 투옥 초기 때의 모습이거나 전체 투옥 시절에 대한 강한

시적인 묘사로 추측되어진다.


=====105:19

여호와의 말씀(* , 데바로) - '그의 말'이란 뜻이다. 그리고 '그의 말'

이란 (1) 요셉으로 자유의 몸이 되게 하였던 꿈의 해석, 곧 투옥 중이던 바로의 신하

들의 꿈을 해석한 것(창 40:5-15 : 41:12)을 뜻하거나, (2) 요셉의 꿈을 통해 예언되

었고 훗날 요셉의 영화(榮華)를 통하여 성취되었던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창 37:5-11)

을 뜻한다고 볼 수 있는데 문맥을 중시할때 전자가 옳다 하겠다. 그 자신이 꿈들을

해석하기 전까지 요셉은 감옥에서 고통받고 있었다는 것, 이것이 본 구절의 강조점이

다.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 임라트 예화

체라파트후) - 70인역(LXX)이 '주의말씀'으로 번역하고 있는 '임라트 예화'

(* )는 상반절의 '그의 말'과는 다른 의미이다. 즉, 이것은 하나

님의 꿈 해석이 아니라 요셉의 꿈들을 통하여 그에게 전달되었던 그의 미래에 관한 하

나님의 약속(창 37:5-11)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다. '약속'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하나님의 말씀 '임라트'(* )는 살아있는 실제적 능력으로

알려져 있다(119:50). 이 사실은 약속과 그 성취 사이 기간인 요셉의 고통과 투옥의

날들 동안 하나님께서 그의 신앙을 시험하심을 통하여 진리임이 입증되었다.


=====105:20

열방의 통치자(* , 모쉘 얌밈) - 직역하면 '민족들의 통치자'이

다. 이것은 요셉을 옥에서 자유케 하였던 애굽 왕 바로는 애굽의 왕(창 41:14, 39,

40, 44)이었을 뿐 아니라 타민족까지 지배하였음을 암시한다. 당시 바로는 조공을 바

치는 많은 나라들의 왕이었다.


=====105:21

그 집의 주관자 - 요셉은 애굽의 국가 제반 사무를 책임진 국무총리가 되었다(창

41:41). 이 같은 관직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도 존재했었다(왕상 16:9; 18:3; 왕하

18:18, 37). 이 신분에 있던 자를 흔히 '집의 주관자' 혹은 '궁전의 주인'등으로 불

렀다고 한다.


=====105:22

임의(* , 나프쇼오) - 문자적인 뜻은 '그의 영혼'으로 여기서는 요셉의

정신 작용에 의하여 외부로 표출되는 그의 말, 명령등을 가리킨다(창 41:40).

제어하며(* , 레소르) - 문자적인 뜻은 '묶으며'이다. 영역본들은 '묶

다'(bind, KJV), '훈육(징계)하다'(discipline, NIV), '투옥하다'(imprison, LB), '교

훈(지시)하다'(instruct, RSV)등과 같이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이런 번역들을 종

합해 볼 때 여기서는 '통제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무난하겠다. 이 통제 능력은

권위의 증거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순종을 강요하고 상과 벌을 결정하는 권위가 본

용어 속에 함축되어 있다(Phillips). 요셉의 통제력은 창 41:40, 44에 잘 드러나 있

다.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 요셉이 바로의 신하들에게 정치론 따위를 강

의 하였다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바로가 요셉의 7년 흉년 대책을 듣고 감동하였던

기사에 대한 시적인 묘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

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

다"(창 41:38, 39).


=====105:23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 성경은 애굽 땅을 흔히 함 땅으로 부르고 있는데(78:51;

106:22등) 그 이유는 애굽의 시조가 함이기 때문이다(창 10:6). 영원한 거처가 아닌

임시적으로 살 거처로 가기 위하여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 땅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105:24

본절부터 38절까지는 출애굽기 처음 열두 장들에 나타난 역사, 특히 재앙들이 내려

진 역사의 요약이다(출 1:7; 신 26:5과 비교하라). 여기서 다섯 번째나 여섯 번째 재

앙은 함께 생략되어 있고 흑암의 재앙이 처음에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기자는 엄

밀한 순서에 따라서 기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인 섭리를 강조하기 위한 목

적만을 충실히 전달하고자 시적인 자유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105:25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 원문대로 직역하면 '하나님은 그

의 백성들을 미워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마음을 바꾸셨다'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을 미워하도록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애굽인들의 마음을 바꾸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을 향한 애굽인의 증오 문제에 있어서 그 원인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이 사실을 놓고 학

자들은 고민한다. 그리고 어떤 학자들은 그 증오의 원인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저희들의 마음이 변하게 되었다'로 번역하고 '하나님'이라는 주어

는 생략해 버리기도 한다(갈대아역, 아랍역). 또 다른 학자들은 이 구절을 단지 이스

라엘 백성의 수의 증가로 야기된 그 대적들의 증오심의 발동을 하나님이 괴로워하셨다

는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이해하기도 한다(Grotius). 그러나 출애굽 기사중의 하나님

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는 식의 본 구절과 동일한 의미의 구절들이 계속해서

나온다는 사실이 난제로 대두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곳곳에서 하나님은 증오나 죄

의 원인자인듯이 묘사되고 있다(사 6:9, 10; 막 4:12; 요 12:39, 40; 롬 11:8). 하나

님은 죄가 없으시다. 그리고 죄를 미워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그분이

죄의 원인자이신 듯 묘사하는 곳이 있다. 이 난제를 해결하는, 조직 신학적 용어가

바로 '허용적 간과'이다.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그의 구원 역사 속에서

죄의 작동을 허용하시는 분이시라는 것, 이것이 본 난제의 해결 방법인 것이다. 그러

나 본 구절의 강조점은 출애굽 기사 속에 나타나는 크고 작은 모든 요소들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보고 생겨난 애

굽인의 증오를 간과하심으로써 그분 중심적인 출애굽 사건의 기초를 마련하셨다.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 레히트나켈) - 문자적인 뜻은 '세밀하

게 의논하였다'이다. 문맥적으로 이스라엘의 증가를 보고 염려한 애굽인의 의논임을

생각할 때 '세밀하게 음모를 꾸몄다'로 번역해도 무리가 없겠다. 이것은 출 1:10에

기록된 애굽인의 음모를 연상케 한다. "오라 우리가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자"(원문

직역). 애굽인이 꾸민 이스라엘의 증가에 대한 대처 방안은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를

죽이는 것이었다(출 1:15, 16).


=====105:26

모세...아론 - 시편에서 이 '모세'라는 호칭이 나오는 곳은 77:20; 103:7; 106:16,

23, 32 그리고 90편 표제 등이다. 모세는 여호와의 '종'이라 불리웠고(출 14:31) 아

론은 '택하신 자'로 불리고 있다. 여기서 '종'과 '택하신 자'는 5, 6절에서 볼 수 있

듯이 거의 같은 의미를 전달한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구원을 위한

도구 역활을 담당했다(VanGemeren).


=====105:27

저희가 그 백성 중에 여호와의 표징을 보이고

(* , 사무 밤 디브레 오토타) - 이의 문자적인

뜻은 '그들이 그들 중에 그의 표적의 말들을 놓았다'이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이 하

나님의 대언자, 곧 선지자임을 엿보게 하는 표현이다. 사실 모세와 아론은 자신들의

말을 전하고 이적을 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을 전하고 그분의 이적을 대

행했을 뿐이다. 한편, 여기서 두 번째로 나오는 '그들'이란 이스라엘 백성과 바로 및

그 신하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대언자인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뿐

아니라 바로의 궁(宮)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적을 행하였다(출 4:28, 30;

7:9, 10).


=====105:28

흑암을 보내사 어둡게 하시니 - 아홉번째 재앙(출 10:21-29)이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알기 어렵다. 어떤 학자는 흑암은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인데 그런

의미에서 처음 재앙부터 마지막 재앙 때까지 애굽은 흑암에 뒤덮여 있었다는 것을 본

구절이 암시한다고 해석한다(Hengstenberg). 한편, 출애굽 재앙 기사와 본 시편 재앙

기사의 배열 순서의 차이는 십계명 기사와 주님이 인용한 십계명 기사의 배열 순서의

차이를 연상케 한다(마 19:18, 19; 막 10:19; 눅 18:20).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본

시편 기자는 기사 내용의 순서보다는 그 전체 내용의 전달에만 관심을 두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말씀을 어기지 아니하였도다 - 개역 성경이 생략한 주어 부분 '마루'

(* )를 넣어 재번역하면 이렇다. '그들은 그의 말씀들을 대항하여 반역하지

않았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을 가리킨다(They

followed his instruction and..., LB). 70인역(LXX), 시리아역, 아랍역, 에디오피아

역 등은 '않았다'로 번역된 부정사를 생략하여 '그들은 그의 말씀들을 대항하여 반역

하였다'로 번역하고 있는데(they rebelled against his words, RSV). 이 경우라면

'그들'은 애굽인들이 되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맛소라 원본(M.T.)과 배치되는 견해이

다. 따라서 취할 수 없다. 본절이 모세와 아론의 순종을 언급하는 이유는 모세의 사

역 초기 곧 하나님이 그를 처음 부르셨을 때 그리고 그의 사역 후기 바위에서 물을 내

었을 때 각각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던 사실과 대비를 시키기 위함인것 같다.(출 4:10,

11; 민 20:24; 27:14 등).


=====105:29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사 - 첫번째 재앙을 말한다(출 7:14-25).


=====105:30

개구리가 번성하여 - 두 번째 재앙을 가리킨다(출 8:1-15).

왕의 궁실(* , 베하드레 말케이헴) - 직역하면 '그들 통

치자들의 방들에'이다.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 이 표현은 애굽 바로 왕의 신하들, 고

관들의 처소를 가리킨다. 왕의 처소뿐 아니라 그 신하들의 처소에도 개구리가 들끓었

다.


=====105:31

파리 떼가 오며 - 출 8:20-24에 나오는 네 번째 재앙을 가리킨다.

이가 생겼도다 - 출 8:16-19에 나오는 세 번째 재앙을 가리키는데 '이'란 '키님'

(* )으로 오늘날의 '모기'를 가리킨다(Keil & Delitzsch). 본절에서도 출

애굽기에서와 달리 셋째 재앙과 넷째 재앙이 그 순서가 바뀐 채 언급되고 있다.


=====105:32

우박...화염(火焰) - 이는 일곱 번째 재앙을 가리킨다(출 9:22-26). 여기서 '화

염'은 원어로 '에쉬 레하보트'(* )로서 '불타는 불'인데 이것은 천

둥이 칠 때 동반되는 뇌성을 가리킨다(출 9:23).


=====105:33

포도나무...무화과나무 - 하늘에서 우박과 벼락이 내릴 때 애굽의 대표적 나무였던

이 두 나무를 비롯한 모든 수목은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105:34

황충...메뚜기 - 히브리어로 각각 '아르베'(* ), '옐레크'(* )

이다. 여덟번째 재앙을 언급하고 있는 출 10:1-20에는 전자인 '아르베'만 나오지만

여기서는 '옐레크'까지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메뚜기의 일종인데 날개가 달렸다는

특징이 있다(나 3:16). 뿐만 아니라 여덟 번째 재앙을 언급하고 있는 또 다른 평행구

인 78:46에서는 또 다른 용어 '하실'(* )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용어로 메뚜기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실제 여덟 번째 재앙 때 나타났던

메뚜기는 한 종류가 아니라 여러 종류, 최소한 세 종류는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

다.


=====105:35

모든 채소를 먹으며 그 밭의 열매를 먹었도다 - 여러 종류의 메뚜기들은 우박으로

망가져 버리지 않은 채 남아있던 식물들을 갉아먹어 버림으로 황폐화의 정도를 더욱

심하게 만들었다.


=====105:36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재앙은 생략되고 재앙 기사는 마지막 재앙으로 끝나고 있

다. 본절에 사용된 용어들은 78:51과 거의 유사하다.


=====105:37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 이것은 출 12:35과 관계 있는 표현이다. 출 12:35

번역에 있어서 주요 영역본인 KJV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은금을 비롯하여 의복까지를

애굽으로부터 '빌린'(borrowed)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번역은 옳은 번역

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개념에 있어서 빌린다는 것은 다시 갚는것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애굽에서 나온 이후 이스라엘은 그 가지고 나온 것을 다시 갚은 적이 없

는데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애굽에게 사기를 친것이 되기 때문이다. KJV가 '빌린'으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솨알'(* )인데 사실 본 용어가 '빌리다'라는 의미로 사용

되는 경우가 성경에 있기는 하다(출 22:14; 왕하 4:3 등). 그러나 여기서는 '구하

다', '요구하다'등의 의미로 번역됨이 더 무난하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구하다'

로 번역하고 있는 NIV, RSV 혹은 개역 성경 등은 바람직하다. 이스라엘은 빌리지 않

고 당당히 달라고 요구하여 당시에 귀히 쓰는 은, 금 등을 받아 애굽을 나왔다. 그것

은 이스라엘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이것이 본 구절의 핵심이다.

은금은 고대에도 주요 귀중 금속이었다. 이 둘은 장식용으로, 보물로 그리고 상거

래의 저당물로 사용되곤 하였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은은 금보다 귀하였다. 그래서

여기서도 은이 금보다 앞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 원기, 활력을 묘사하는 사 5:27을 연상시키는 표현이

다. 여기서 '약한 자'란 '코쉘'(* )로서, 그 문자적인 뜻은 '다리를 저는

자'이지만 '보행에 불편을 심하게 느끼는 자'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결국 본문은

여호와의 완벽하신 인도하에 출애굽이 성공리에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구절이라 하겠

다(신 8:4).


=====105:38

그들의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 애굽은 많은 재앙들로 큰 고통을 받았으

며 그 땅도 거의 황폐화되었다. 따라서 이제 더 심한 재앙이 내린다면 그들은 더 이

상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스라엘이 떠난다고 하자 크게

기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요구한 귀중한 물건 은, 금까지도

기꺼이 주어가며 이스라엘이 떠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아니라 그들 뒤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었다.


=====105:39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 여기서 '구름'은 출 14:19의 경우와 같은 대적들로

부터의 보호가 목적이 아니라 태양 광선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머리를 보호함이 그

목적이다(Barnes). 물론 78:14; 출 13:21의 경우, 구름은 이스라엘의 안내자로도 나

타나고 있다.

불로 밝히셨으며 - 밤에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기 위함이다(출 13:21). 구름 기

둥과 불 기둥의 메타포(metaphor)는 활화산의 관측으로부터 따온 것이라고 말하는 학

자도 있으나 인정할 수 없다. 구름 기둥, 불 기둥은 실제적이지 않은 현상 묘사의 소

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가운데 실제적으로 존재했던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

이다.


=====105:40

개역 성경에는 분명히 나오지 않았지만 원문에는 '메추라기로' 앞에 하나님을 지칭

하는 '그가'가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기자는 선행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하는

소리를 생략한 채 여호와께서 주도적으로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리셨던 사실을 강조적

으로 적고 있다.

하늘 양식은 만나를 가리키는데 78:25의 경우는 이것을 '권세 있는 자(천사)의 떡'

으로 부르고 있다.


=====105:41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생존케 하시기

위하여 베푼 이적은 다양하지만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이적이 있다면 그것은 가데

스(민 20:2-13)와 르비딤(출 17:1-7)에서 행하신, 반석에서 물을 나게 하신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은 단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물을 먹이신 사건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

다. 이 사건의 의미를 좀더 알아보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 속에서 이 주제가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소고(小考)해 볼 필요가 있다. 반석-물이라는 주제는 특히 시편과 이사

야서에서 발전되어 나타난다. 78:15, 16, 20과 본절 및 42절에 근거해 보면 이 두 시

편 기자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이루어 오신 구원 역사를 서술하여 그분의 은혜로우심과

신실하심과 광대하심을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구원 역사적 관점에서 두 기자는 공통

적으로 민 20:2-13과 출 17:1-7의 주제를 발전시켜서 '하나님께서 반석을 통해 강같이

흘러 넘치는 풍부한 물을 내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살리시며 그들을 만족케 하셨음'

을 말하고 있다. 특히 본 시편 기자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은 아브라함에게

이르신 언약에 근거하고 있음을 덧붙이고 있다(42절). 한편, 사 43:14-21의 문맥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루실 크신 구원의 일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

일을 가리켜 '새 일'(사 43:19)이라고 말씀하시며 이 일에 비교가 되는 '옛적 일'(이

전 일)로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신다. 이 같은 '새 일', 즉 새로운 구원 사역을 묘사

하면서 하나님은 바로 본절에 나타난 '반석과 물' 주제를 크게 확대시켜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

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

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 43:19, 20). 이 말씀 안에 '반석'이란 단어는 그대로 나타나진 않지

만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루신 구원 사역인 출애굽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가운데

'사막에 강을 내고 광야에 물들을 내시겠다'는 표현은 본절의 주제와 격리 시킬 수 없

는 것이다. 또 하나 살펴볼 문맥은 사 48:17-22이다. 이 문맥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게 될 평강'과 '바위에서 나온 물'을 간접적으로 연관시키면서 야곱의 구원을 선

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이사야서의 두 문맥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바는

둘 다 과거의 출애굽 사건보다 월등히 탁월한 구원 사역, 즉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하나님께서는 내다보시며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가져올 무한한 축복을 '반석과 물'

이라는 주제를 발전시켜 나타내고 계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고전 10:4의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

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는 말씀의 의미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으

리라 생각된다. 요컨대 본절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이스라엘이 광

야에서 물을 먹은 사건을 묘사한다고 볼 수 있으나 더 멀리는 진정한 음료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구절이다.


=====105:42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따라 행하셨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약속이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말한다. 출애

굽 사건 역시 그 약속 성취의 일부이다(출 2:24; 신 7:8). 39절에서부터 본절까지에

서는 애굽으로부터의 출발과 약속된 땅으로의 입성(入城) 사이의 기간을 요약하는 광

야에서의 주요한 세 가지 기적들을 다룬 후, 그 기적들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첨가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성경

의 시인들과 선지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주제인 홍해 도하(渡河) 기적 사건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05:43

그 백성으로 즐거이...노래하며 - 42절 주석에서 39-42절에서는 광야 시대의 가장

유명한 기적 중의 하나인 홍해 기적 사건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바로와 그의 군

대가 홍해에 수장된 후에 부른 승리의 노래(출 14:26-15:21)를 암시하는 구절이 바로

본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아니면 본 구절은 주의 재림 후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한

장면을 예언하는 내용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

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

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사 35:10). 후자를 취할 경우 본 시편이 저변에

깔고 있는 시대와 본절이 암시하는 시대는 큰 간격이 있게 된다. 이 점을 고려할 때

후자보다는 전자가 적절한 해석으로 보여진다.


=====105:44

열방의 땅 - 본 시편 전체의 문맥을 중시할 때 이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가리킨

다고 볼 수 있다(78:55; 신 6:10).

민족들의 수고한 것 - 이것은 가나안 민족이 수고하여 일구어 놓은 경작지뿐 아니

라 그들이 세운 도시들, 그들이 소유하였던 귀중품까지도 말한다.


=====105:45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 42-45절의 결론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과 맺은 언약을 따라 광야에서 보호, 인도하신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허락

하셨던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이유 속에

는 이스라엘을 거룩한 나라로 만들어 세상을 대표하는 제사장 국가가 되게 하여 결국

은 온 세상을 당신의 나라로 삼으려는 더 깊은 하나님의 의중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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