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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주석 시편 91,92,93장

작성자gideon|작성시간07.04.22|조회수410 목록 댓글 0

 

 

 시편 제 91편

=====91:1

지존자(* , 엘레온) - 직역하면 '가장 높은'이며,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

이 숭고하고 탁월하신 분인 하나님을 지칭한다. 하나님은 그의 대적이 아무리 악한 음

모를 실행에 옮기고 그 성취를 위해 날뛴다고 할지라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초월해

계시는 분이시다.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 - '은밀한 곳'(* , 세테르)의 문자적인 뜻은 '비밀 장

소'로서 누구에게 함부로 공개되지 않는 곳인 성전의 지성소를 암시하는 말인데 여기

서는 그 '어떤 영향력에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가 있는 곳'이라는 의

미로 해석해야 문맥상 어울리는 것 같다. 하나님과 밀접하게 교통하는 자, 곧 하나님

의 임재 속에 살아가는 자는 세상의 어떤 위협이나 난관에 비착해도 동요하지 않을 것

이다. 한편, '거하는'에 해당하는 '야솨브'(* )를 '왕좌에 앉다'는 뜻으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Dahood) 문맥상 피난처 되시는(14 : 6 ; 46 : 1 ; 렘 17 : 17 ; 욜 3 :

16) 여호와의 품에 '거한다'는 의미가 더 낫다.

전능하신 자 - '여호와'라는 호칭이 그의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는, 언약

에 신실하신 은혜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본 호칭은 그의 능력 앞에 아무도 설

수 없는 권능의 하나님을 강조한다(출 3 : 7-15 강해, '하나님의 이름' 참조).

그늘 -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날개로 덮는 어미 새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말이다(4

절 ; 17 : 8 ; 36 : 7 ; 57 : 1 ; 63 : 7). 어느 학자의 주장처럼 굳이 이곳이 사후

(死後)의 영원한 안식처를 뜻한다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과 연결되

어 있는 동사 '거하리로다'(* , 이틀로난)는 함축적으로 '영원히 머무르다'는

뜻도 지니지만 대체로 '밤을 새우다', '숙박하다'는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Perowne). 따라서 이 말은 낮의 무더위나 밤의 혹한 은 대적들의 공격으로부터 피해

쉼을 얻을 수 있는 현실적 피난처 혹은 안식처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본절 상,

하반절에는 하나님께 대한 서로 다른 호칭, 그리고 그 의미가 동일하지 않은 처소의

개념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본절을 서로 다른 신(神)의 존재 및 그에 따른 서

로 다른 상황을 묘사하는 구절로 보는 것은 전혀 터무니 없는 일이다. 도리어 다양한

능력을 갖고 계신 유일한 참신 하나님과 동행하고 함께 거하는 자에 대한 묘사를 보여

주는 구절로 보아야 한다. 특히 여기서 기자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자의 완전한 안전을 강조하기 위하여 히브리 문학, 특히 히브리 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대구법을 사용하였다.


=====91:2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 - 여기서 '나의'는 종속 개념을 담고 있는 말로서 하나님이

피예배자에게 복속되는 신들 중의 하나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이방 종교의 피예배자들

은 흔히 신이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곧 자신들에게 종속되어 있는 존재로 착각하고

있다) 거꾸로 피예배자가 그분께 전적으로 복속된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하나님은

성도들뿐 아니라 온 우주의 주인이기도 하시다.


=====91:3

이는 저가(* , 키 후) - 이것은 대명사 앞에 접속사가 놓인 형태인데 이와

같이 접속사 뒤에 오는 대명사인 경우 강조사가 된다(148 : 5). 여기서는 구원이 하나

님께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Surely he..., KJV, NIV).

사냥군의 올무 - 이는 자연재해가 아닌 인간이 계획한 음모, 위협 따위를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다(124 : 7 ; 141 : 9 ; 잠 6 : 5 ; 호 9 : 8).

극한 염병(* , 데베르 후오트) - 직역하면 '치명적인 염병'인데 70인역

(LXX), 심마커스역(Symmachus Versions), 시리아역(Syriac Versions) 등은 본 용어를

'파괴적인 말'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번역은 '염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데베르'

를 '말'을 뜻하는 '다바르'로 읽는 데서 비롯된다. 시편 기자가 주로 중상, 모략, 음

모. 거짓 고소 등으로 곤욕을 치르었던 사실을 고려할 때 이같은 번역은 무리가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91:4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 본 묘사는 분명한 비유인데 저자가 여호와를 날개가 달린

분 로 상상했으리라고 보는 것은 무모한 해석이다(Oesterley). 성경이 하나님을 그 어

린 새끼를 보호하는 독수리에 비유한 곳은 있다(신 32 : 11). 천사의 날개 역시 보

호의 상징이었다(Kraus). 그러나 본절의 회화적 묘사는 익히 알려져 있는, 새끼들을

돌보는 어미 새의 모습에 근거를 두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사 31 : 5 ; 마 23 :

34).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 '극의 진실함'(* , 아미토)은 하나

님의 언약적 약속에 대한 그분 자신의 신실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손 방패'

(* , 소헤라)는 구약 성경에 1회만 등장하는 용어이며 '담으로 둘러삼'을 뜻하는

시리아어 '사하르타'에서 유래한 말로서 탈굼역(Targum) 등에 의하여 '둥근 방패'로

번역되고 있다. 하나님이 언약 백성인 우리 성도를 일생동안 방패로 지키듯이 보호하

시는 것은 일차적으로 당신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에 연유한다.


=====91:5

밤에 놀램(* , 파하드 라옐라) - '밤에 의한 폭력(공포)'이 그 문자적인

뜻이다. 기드온의 공격과 같은(삿 7장) 갑자기 이뤄지는 야간 기습 공격을 연상시키기

도 하며, 어두운 밤길을 가며 흔히 갖게 되는 사단의 존재의 의식으로 인한 공포 따위

를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을 특정한 위험이나 재난에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공포나 위협의 요인은 캄캄한 밤중에 닥칠수록 더 강화된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Alexander). 한편, 여호와의 주권과 권능이 미치지 않는 곳이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주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121 : 6).

낮에 흐르는 살(* , 메헤츠 야우프 요맘) - 직역하면 '낮에 날으는

화살'인데 문자 그대로 대적들의 화살 공격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낮에 비치

는 태양의 광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무난할 것 같다(Anderson). 이것은 한낮에 발생

하는 일사병 같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 사막 지대에서는 강한 햇빛 때문에 일사병 외

에도 각종 질병이 발생한다고 한다.


=====91:6

흑암중에 행하는 염병 - 여기서 '흑암중에'는 '캄캄한 가운데'라는 뜻보다 '갑자기

'라는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염병'은 문자 그대로

보면 고대 근동에서 흔히 발생하였던 온역이나 전염병 따위가 되겠다. 그러나 근접 문

맥인 8절에서 악인이 보응을 받는다는 개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대적'혹은 그 대

적의 '살의를 품은 독설'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백주(白晝)에 황폐케 하는 파멸 - 대낮에 초래되는 파멸, 곧 가시적이고 공개적으

로 발생하는 파멸을 가리킨다. 또한 파멸(* , 케테브)은 '휩쓸어 버리는 것', '잘

라 버리는 것'등을 뜻하며(사 28 : 2), 폭풍, 전쟁, 온역 혹은 기근 따위와 같이 일정

한 대상을 완전히 휩쓸어버려 멸망시키는 세력을 가리킨다. 요컨대 본절은 언제 어떤

형태로 재앙 및 대적이 밀어닥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는자는 결코 두려

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으로 강변하고 있다.


=====91:7

천인(千人)이 네 곁에서, 만인(萬人)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가까이 못하리로

다 - 이 표현은 출애굽 기사의 몇몇 구절들의 반복으로 보이기도 하고(출 12 :23 ; 14

: 30), 전쟁 용어들로부터 그 용어들을 빌려온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삼상 18 : 7),

본 비유 배경이 전쟁터인 것 같지는 않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닥쳐오는 재앙이나

불행의 크기에 상관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자가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잠 12

: 21).


=====91:8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 말하자면 악인이 보응받는 것, 징벌받는 것을 목

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사악한 기쁨에 들떠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공의를 명백히 나타내실 것을 강조하듯 말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이 악인의 보응에대한 언급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

다. 말하자면 인생 역사 동안 모든 악인이 반드시 현실적 징벌을 받지는 않으나 징벌

을 받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악인에 대한 징벌은 하나님의 공

의가 엄존(儼存)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방편이 된다. 또한 하나님의 공의와 신실하심

이 입증되는 것을 목격하면, 성도는 더 큰 믿음과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게 된다. 이제

모든 악인이 반드시 징벌을 받을 때가 오는데 그때는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하

여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이다(마 24 : 44).


=====91:9,10

본 두 절에서도 시인은 여호와의 보호 아래 있는 자의 안전함에 대해 거듭 확언하

고 있다. 물론 신실한 성도에게도 '화'(禍)나 '재앙'의 위협이(10절) 없는 것은 아니

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의 허락이 없는 한 그 어떤 위협 요소들도 성

도를 상하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롬 8 : 28, Kidner).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 마치 아버지의 집을 자신의 집으로 삼듯이 하나님과

함께 살기를, 동행하기를 선택하였다는 뜻이다.

장막 - 유목의 생활 환경을 묘사할 때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표현 중의 하나이다(말

2 : 12). 이는 목초지를 찾아 돌아다니는 자들의 거처일 뿐 아니라 유목민의 제반가산

(possessions)을 뜻하기도 하는 용어이다.

 

=====91:11

사자들(* , 믈라킴). '보내다'의 뜻을 가진 '라카흐'(* )에서 유래했으

며 동사형은 구약 성경에는 나오지 않으나 히브리어 동족어인 아라비아어, 우가릿어

등의 문서에는 나온다(Eichrodt). 구약 성경에서 이 말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임

무를 맡은 사람(수 7 : 22) 혹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출 23 : 20)이나 대언자(학

1 : 13) 등을 뜻할 때 사용된다. 본 시편에서는 신실한 자들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천

사들을 가리킨다(마 4 : 11 ; 눅 22 : 43).


=====91:12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 각별한 돌보심을 뜻하는 비유적 표현이며 이와 유

사한 표현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독수리 날개로 너를 업어 내게로 인도

하였음을...'(출 19 : 4) ;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사 63 : 9).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 번영과 안전을 암시하는 표현이다(37 : 31 ; 잠 2 :

23, Alexander). 한편, 본절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에 의

해 인용된 말이다(마 4 : 5, 6).


=====91:13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 '사자'와 '독사'는 모든 실제적인 그리고 잠재적인

대적들 및 위험들의 상징이다. 따라서 '사자'와 '독사'를 밟는다는 것은 대적 및 위험

들을 물리치고 제거한다는 것을 뜻한다. 아울러 이 표현을 마치 사자의 분노를 잠재우

듯이 그래서 순한 양처럼 만들듯이 혹은 독사의 해독성 치아를 뽑아버리듯이 위험 가

운데서도 안전함을 뜻하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다(Barnes). 여기서 '사자'에 해당하

는 '솨할'(* )은 성경상으로 산문에서는 볼 수 없고 운문에서만 나타나는 용어이다

(욥 4 : 10 ; 10 : 16 ; 28 : 8 ; 잠 26 : 13 ; 호 5 : 14 ; 13 : 7).

젊은 사자(* , 케피르) - 특히 용감하거나 사납고 폭력적인 존재를 언급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한다(17 : 12 ; 삼하 17 : 10).

뱀(* , 타닌) - 출 7 : 9, 10, 12에서는 '뱀'으로, 창 1 : 21에서는 '큰 물고

기'로, 74 : 13 ; 148 : 7 ; 사 27 : 1 ; 51 : 9 ; 렘 51 : 34에서는 '용'으로, 애 4

: 3에서는 '들개'로 각각 번역되고 있는데 '뱀'으로 번역 가능한 점을 고려할 때 본

구절과 상반절은 평행구를 이루고있다 하겠다.


=====91:14

저가 나를 사랑한즉 - '사랑한즉'에 해당하는 '하솨크'(* )는 신명기에 자주

나오는 용어로서 한 사람의 또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창 34 : 8 ; 신 21 : 11), 이스

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신 7 : 7 ; 10 : 15) 혹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여기서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헌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

나님께 대한 사랑(헌신)'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진실하신 성품을 체험하고 깨닫는것 곧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하반절) 비롯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9 : 10) 이 두 표현은 공히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순종에 기초한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91:15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하나님과 밀접

한 관계를 맺은 결과의 하나로 하나님은 그의 성도가 올린 기도에 응답하사 그의 필요

를 채우실 뿐 아니라 환난 중에서도 그와 동행하신다는 것이다. '영화롭게 한다'는 것

은 하나님께서 그와의 친밀한 관계를 지속시키신다는 것, 곧 그를 자신의 친구처럼 대

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높으신 하나님과 친구가 되었으니 이보다 더 영화로운 축복

이 어디 있겠는가(Barnes)?


=====91:16

장수(長壽)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원이었던 장수는

일반적으로 신적(神的) 은총의 외형적 표시로 간주되었을뿐 아니라(21 : 4 ; 신 30 :

20 ; 잠 3 : 2)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순종의 결과로 간주되었다(출 20 : 12 ; 23 :

26).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 여기서 '구원'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자가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는다고 말할 때의 그 '구원'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맥이 하나님을 알고 구

원받았을 뿐 아니라 그 약속에 순종하여 땅위에서의 축복인 장수를 약속받은 자에 관

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구원'이란 현실을 살아가면서 당하게 될 무수한

 

 

 시편 제 92편

======92:1-3

찬양하며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메르'(* )는 '악기(특히 현악기)를 '연

주하다' 혹은 '(그러한 악기를 동반하여) 노래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원문상으로는

'십현금, 비파, 수금' 등이 1-3절의 끝에 위치해 있으나 개역 성경에서 여기에 삽입한

까닭은 바로 이 용어의 성격을 고려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아침에...밤마다 - 이스라엘의 구전법(oral law)인 미쉬나(Mishna)에 의하면 본 시

편은 안석일 아침에 부르도록 정해져 있는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본 시는 안식일을

위한 시편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날 아침 이 시편을 부르면서 이스라엘 예배 공동체는

먼저 어린양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께 드리는 존제(尊祭)로서 포도주를 부었다(민 28

장). 반면, 저녁 제사 때에는 출 15 : 1-18과 민 21 : 17-20 중의 하나를 노래했다.

그리고 안식일을 제외한 나머지 6일 동안 성전에서 불렀던 노래로서는 첫쨋날 24편,

둘쨋날 48편, 셋쨋날 82편, 넷쨋날 94편, 다섯쨋날 81편, 여섯쨋날 93편 등이었다고

한다.

좋으니이다(* ,토브) - 본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으므로 문

맥에 따라 그 의미를 규정해야 할것이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 때 피조 세계가 그의 의

도와 목적에 부합됨을 보고 이를 '좋게'(* , 토브) 여기셨다(창 1 : 4, 10,

12). 본 문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지존자이신 그분의 계획과 일치한다는 사실

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으로 이해된다( 33 : 1). 한편, 시편 기자의 정서적 측

면으로 보면, 찬양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확신에 따른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진정

한 기쁨의 표현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Perowne). 본절에 나오는 악기들에 관해서는

서론 '시편과 음악'을 참조하라.


=====92:4

여호와여...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 원문에 보면 본 구절 서두에 '이유'를 뜻하는

접속사 '키'(* )가 있다. 따라서 본절은 1-3절에 언급된 바, 여호와께 대한 찬양의

근거를 제공하는 부분(14, 15절)의 서론격에 헤당하는 샘이다.

주의 손의 행사 - 혹자는 본 시편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기념하는 안식일을 위한

시편인 사실을 강조하여 이를 창조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국한시킨다. 그러

나 본 구절의 용례를 볼 때(28 : 5 ;사 5 : 12) 그리고 본절 하반절이 다루고 있는 내

용을 볼 때, 기자는 본 구절을 통하여 자신을 포함한 민족 전체의 구원 혹은 그 구원

을 가져온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7-11절)를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92:5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 이 표현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 및 우주 통

치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위대성, 인간의 이해를 넘는 그 계획의 방대함, 그리고 지혜

의 깊이 등을 인식함과 아울러, 그 사실에 대한 인간의 망각을 탄식하는 심정이 함께

곁들어져 있다. '인간은 얼마나 빨리 그분의 사역을 잊는가! 얼마나 빨리 그분의 깊이

를 헤아려 보는 일을 중단하는가! 얼마나 빨리 그분의 위대성을 헤아려 보기를 포기하

는가'(Barnes) ! 본 구절과 유사한 표현으로는 106 : 2 ; 112 : 2 등이 있다.

주의 생각 -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계획들 그리고 그 방법들을 뜻한다.

과거에 기자는 하나님의 섭리와 공의를 의심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제 그는 하나님의 계획들을 인간의 지혜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신실

하시며 전적으로 의지할 만한 분이라는사실을 깨닫고 있다(Anderson). 한편 주의 행사

의 위대하심과 그 생각의 깊고 오묘함에 대해서는 다윗(40 : 5), 이사야(사 55 : 9),

바울(롬 11 : 23 )등도 찬탄한 바 있다.


=====92:6

우준한 자는 알지 못하며 - '우준한 자'의 히브리어는 '이쉬 바아르'(* )

이며, '바아르' 그 자체만은 49 : 10 ; 73 : 22 ; 잠 12 : 1 ; 30 : 2 등에 나오지만

'이쉬 바아르'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온다. '바아르'가 집합적 개념으

로 쓰이고 '잔인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바아르'에서 유래한다는 사실 때문에, 영역본

KJV는 '이쉬 바아르'를 맹수처럼 '사나운 사람들'(brutish man)로 번역하고 있다. 그

러나 지금 시인은 기질적으로 사나운 사람에 관해서 혹은 어느 학자의 주장처럼 단순

히 아이큐가 낮은 사람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호와 경외에 뿌리

를 두는 참다운 지혜를 고의적으로 배척하는 사람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잠 1 :

 

 

7). 여호와 경외가 없어 참다운 지혜가 없는 자란, 이 세상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

의에 의해 통치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자행자지(自行自止)하는 자를 뜻한다.

무지한 자(* , 케실) - 본 용어의 의미는 동일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다른

시편의 문맥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

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4 : 1).


=====92:7

악인은 풀같이 생장하고 - '풀'(* ,에세브)의 문자적인 뜻은 '푸른 풀'이지만

창조시의 푸른 식물 곧 모든 수목들 그리고 각종 꽃들을 포함하는 용어이다.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우기(雨期) 때 한차례 비가 내리고 나면 온 들이 푸른 나무들과 각종 꽃들

로 아름다운 정원올 이루게 되는데, 본 기자는 바로 그 장면을 염두에두고서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악인도 일시적으로는 비내린 뒤의 들의 상황과 같이 번성하여 평안할

수 있다. 그러나 의인과의 차이점은 그 시점에서 그들은 '하나님은 없다'(10 : 4)라고

말할 뿐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나는 결코 요동하지 않는다'(10 : 6)라고 교만을 부린

다는 사실이다.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 이미 기자가 상반절에서 악인의 땅위에서

의 번영 가능성을 언급했기 때문에 이 표현을 악인이 땅위에서 다시 망하리라는 사실

에 강조점이 숨어있는 표현으로 보면 진의(眞意)를 파악하는 데 무리가 따른다. 여기

에는 종말론적 성격이 숨어있는 것이 분명하다. 즉, 악인이 땅 위에서 번영하여 행복

을 누리나 그 행복이 이생을 마친후에도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악인도 이 땅 위에서 번영할 수 있다. 그 번영의 정도는 의인이 시험에 빠질

정도로 대단하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번영은 이 땅 위에서 뿐이요 결국 그

들의 영혼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 형벌을 받는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의인과 달리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73편).


=====92:8

지존하시니이다 - 여기서의 '지존'(* , 마롬)을 직역하면 '높은 곳에'인데,

하나님에 관한 묘사를 함에 있어서 이처럼 부사를 사용하기는 이곳이 처음이다. 70인

역(LXX)은 '마롬'의 일상적인 용례와 같이 '높은 곳에'가 아닌 '높은 분'으로 번역하

여 '높은 곳에 계시나이다'가 아니라 '높은 분이십니다'로 번역하였다. 본절은 비록

짧지만 시편에 담긴 모든 교리가 의존하는 위대한 중심 진리를 말하고 있다. '영원히

계시는 초월자 하나님', 이 사실이야말로 우리 성도들의 믿음의 대들보가 된다

(Calvin).


=====92:9

여호와여 주의 원수 곧 주의 원수가 패망하리니...다 흩어지리이다 - 직역하면 '보

십시오, 여호와여 당신의 대적들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대적들이 소멸할 것이

기 때문입니다. 모든 악행자들이 흩어져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이다. 이 같은 표현

은 우가릿 본문(Ugaritic texts)의 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보소서 당신의 대적들을,

오 바알신이여 보소서 당신의 대적들을 당신이 쪼개버릴 것입니다. 보소서 당신은 당

신의 대적들을 멸망시킬 것입니다'(Dott). 시편 기자가 이 같은 가나안 예식서에 대해

익숙해 있었다고 추측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그 예식서의 내용을 빌어왔다고 결론

지어서는 안 된다. 기자의 관심은 이방 신 바알의 능력이 결코 아니라 오로지 진정한

능력자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악행자들이 멸망당하고 말 사실일 뿐이다.


=====92:10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 성경에서 '들소의 뿔'이란 가공할 만한 힘을

상징한다(22 : 21 ; 욥 39 : 9). 따라서 하나님이 시인의 뿔을 높이셨다는 것은 엄청

난 용기와 활력, 힘을 공급하셨음을 뜻한다. 대비가 되는 바로 앞절에 악인의 멸망 사

실이 언급되고 있으므로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공급받음으로 말미암은 시인의 번영, 명

예 회복 등으로 보면 무난하겠다.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 - 여기서 '신선한 기름'(* , 쉐멘 라아난)

의 문자적인 뜻은 '푸른 기름'인데 이것은 최고 품질의 기름을 뜻한다. 원래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대제사장이나 왕으로 선택한 사실을 대중 앞에서

공개하는 의식 중의 중요한 순서이다(출 29 : 7 ; 삼상 10 : 1 ; Eaton). 그러나 문맥

상 여기서는 시인이 기쁨으로 충만했던 사실에 대한 암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동방에

서 축제일을 맞이하여 값비싼 양질의 기름을 서로 머리에 붓는 것은 잘 알려진 관습이

다(23 : 5).


=====92:11

내 원수의 보응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 '원수'에 해당하는 '슈르'(* )는 구

약성경에 1회만 등장하는 단어이다. 그 유사한 분사형으로 민 35 : 32 ; 렘 17 : 13 ;

미 2 : 8 등에 나타나는 '피한 자', '(여호와를) 떠나는 자', '(전쟁을 피하여 평안

히) 지나가는 자들' 등의 의미를 고려할 때, 상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숨어서 기다리

는 자'로 번역하면 되겠다. '눈으로 보며'는 대적의 멸망을 분명히 목격한다는 것인데

숨어있던 대적이 누구라도 볼 수 있게 공개적으로 멸망당한다는 사실은 묘한 대비를

이루며 본절의 의미를 강조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본절은 대적의 징벌당하는 장면

을 득의 양양하게 비웃으며 감상한다는 데 그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공의

가 아주 명백하게 집행되는 것을 바라본다는 데에 그 초점이 있다.


=====92:12

종려나무...백향목 - 저자는 악인의 멸망과 대비를 이루는 의인의 승리를 말하기

위하뗘 이 두 나무의 이름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두 나무의 특성과 같은 측복은 당시

뿐 아니라 기자와 동일한 믿음에 참여하는 모든 시대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는 혜택이

다. 이 두 나무는 푸르름, 무성한 생산력, 다함이 없는 왕성한 힘 및 영원성 등과 같

은 이미지들을 담고 있다. 어느 학자는 이 두 나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여

름의 열기 속에서 뿐만 아니라 겨울의 냉기속에서도 종려나무는 연중 내내 그 푸르름

을 유지한다. 그리고 백향목은 연수로 그 나이를 세지 않는다. 백향목은 세기

(century)로 그 나이를 센다'(Tholuck). 기자는 늘 푸르고 늘 과실을 맺는 종려나무를

의인에 비유한 반면, 곧 시들고 말 풀을 악인에 비유한 바 있다(7절). 이외에 구약 성

경에서 종려나무를 다른 무엇에 비유한 구절은 단 두 군데뿐인데 아 7 : 7은 '키가 훤

칠한 신부에', 대조적으로 렘 10 : 5은 '꼿꼿하게 서있는 우상'에 각각 비유하고 있

다.


=====92:13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 52 : 8에도 유

사한 표현이 등장하는 바, 의인이 여호와의 집에 심기운 그리고 궁전 경내에서 무성하

게 자라는 나무에 비유되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집에서 받

은 축복을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의 물질적인 축복과도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였었다

(욥 42 : 12). 한편, 본절의 묘사가 실제로 성전 뜰 안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의 모

습으로부터 따온 것인지를 규명하기란 어렵다. 어떤 학자는 본절의 묘사와 애굽 의식

중 신상 앞에 나무가 심겨져 있었던 사실을 연관시키려 한다(Kraus). 그러나 시편 기

자는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같은 묘사를 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92:14

늙어도 결실하며 - 이스라엘 백성 역시 장수하는 것과 행복하게 사는 것을 소망하

였는데, 그 최고의 모범은 죽을 때 그 나이가 120세였으나 그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

이 쇠하지 않은 모세였다(신 34 : 7). 그와 유사하게 여겨진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나

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은 다윗이었다(대상 29 : 28). 저자는 여기서 경

건한 자는 늙어서까지도 원기와 생산력이 있는 삶을 살 것을 암시하고 있는 바, 아마

도 그의 마음속에는 모세와 다윗이라는 표본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다 익으면 개당

평균 무게가 100kg, 최대로는 200kg까지 나가는 종려나무 열매를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고다(Perowne).


=====92:15

여호와의 정직하심 - '정직하심'에해당하는 '야솨르'(* )는 다른 사람을 상대

함에 있어서 공평한 자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기본적인 뜻은 '평평하다',

'곧다'이며 기자는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통치가 공평하고 의로울 것을 밝힘으로써 본

시편을 끝맺고 있다. 범죄하는 악인의 융성은 잠시뿐이나(7, 9, 11절) 의인의 기쁨과

번영은 영원할 것인데, 그 까닭은 바로 하나님이 공평하고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기자가 하나님을 횬들리지 않는 바위와 같은 존재로 삼고 그분을 신뢰하는 이유가 바

로 여기에 있다. 이 진리를 강조하기 위하여 시인은 '하나님에게는 불의가 없다'는 부

정의 부정을 사용하여 본 시편을 맺는다. (119 : 3).

 

 

 


곤경들로부터의 구원 혹은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종국적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

에까지 인도되는 영원한 것을 뜻한다고 하겠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그는 땅 위에

서 하나님과 친구로서 영화롭게 살아갈 뿐 아니라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는 축복 상태로까지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이다.

 

 

 시편 제 93편

=====93:1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 예화 말라크) -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왕이 되

신다'로도 번역되는데 이것은 왕의 대관식 장면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다(삼하 15 : 10

; 왕상 1 : 11 ; 왕하 9 : 13). 말하자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시지만 이제 그의 왕국이 가시적으로 확립되고 그의 능력과 위엄이 충분히 현시

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인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

의 궁극적 도래에 관해서는 요한계시록에서도 묘사되고 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계 11 : 15).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 고대 왕들은 흔히 그들의 찬란한 복장으로 때로는 고

급 향수 냄새로(45 : 8) 범인(凡人)들과 구별됨을 나타내었는데 본구절은 하나님께서

그 탁월한 '권위'로 범인들과 구별되심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권위'는 문맥상 온

땅과 만유의 왕으로서 그 권좌에 오르시는 하나님의 권위로 보면 되겠다. 본절 중반절

은 하나님이 권위를 입으셨다는 사실, 곧 그가 왕이시라는 사실을 반복하되 특히 전쟁

에서 승리하시는 왕이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능력'이란 표현을 끌어오고 있다. '능력

을 입으시며'라는 표현은 종종 전쟁과 관련된 개념을 암시한다(18 : 39 ; 삼하22 :

40).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 - 세계 창조와 그 섭리적 통치뿐 아니라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을 향한 공의의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하는 표현(96 :

10)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93:2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 '예로부터'에 해당하는 '메아즈'(* )의

문자적인 뜻은 '오래 전부터'이며 하반절의 '영원부터'(* , 마올람)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용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기자가 이말을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

님의 존재성과 대비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문맥상 이 말 역시 영원성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본 구절은, 온 우주를 다

스리는 하나님의 통치권은 인간이 알수 없었던 곧 창조 사역이 시작되던 바로 그 옛

날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93:3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 여기서 '큰물', '물결'

등은 그 문자적인 뜻이 '물줄기', '강들'이나 시적인 평행법에서는 '바다'를 뜻하기도

한다(24 : 2 ; 렘 46 : 7, 8 ; 욘 2 : 3). 그리고 강이나 바다의 파도 혹은 그 소리는

적대 세력의 대항을 암시한다(Prowne). 그런데 기자는 그와 같은 세력의 행동을 묘사

함에 있어서 계속해서 두 번은 과거시제를 사용하고 마지막은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사실은 개역 성경을 보아도 드러난다('높였고'...'높였고'...'높이나이다

'). 문맥의 흐름은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악한 세력은 그 통치권에 대항하는 악한 세력을 암시한다. 바로 이 악한 세력이 하나

님의 통치권에 대항하되 과거에는 물론 현재에도 계속 그 악한 도모를 일삼고 있음을

암시하기 위하여 기자는 이와 같은 시제변화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93:4

많은 물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 - 3절에서 주석했듯이 전자는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

항하는 대적의 세력을 암시하고, 후자는 '미쉬베레 얌 아디림'(* )으

로 그 문자적인 뜻이 강력한 바다의 파괴자들이며 이스라엘의 행보를 가로막았던 홍해

를 암시한다(합 3 : 10). 홍해와 같은 자연 세력을 포함한 모든 대적보다 위대하신 하

나님께서는 능히 그들의 대적 행위를 물리치며 그들을 정복하실 수있다(65 : 7 ; 욥

38 : 11).


=====93:5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

(* , 에도테카 네엠누 메오드 레베

이트카 나아와 코데쉬 예화 르오레크 야밈) - 직역하면 '당신의 약속(증거)들은 매우

신실합니다. 오 여호와여 당신의 집도 마땅히 거룩합니다. 영원히'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문맥은 급박히 변하고 있다. 인간의 세력을 포함한 자연계의 통치를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위엄이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자애로운 은혜와 예시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사실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 즉, 세계를 통치할 뿐 아니라 당

신의 왕국을 설립하고 능력과 권세로 그 왕국을 영원히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동시

에 확실하고 신실한 말씀을 통하여 그 백성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다스리고다고 약속하

시고 또 직접 그들 가운데 임재하셔서 그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이처럼 약간은

장황한 내용을 간략한 두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기 때문에 본절의 내용 파악은 쉽지 않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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