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제 67편
=====67:1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 본절은 다음 절과 함께 복을 간구하
는 기원문의 형태이다. 시인은 하나님이 만복의 근원이 되심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축복의 근거요, 그 백성들에게 과분하기까지 한 사랑의 표현
이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즐거
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VanGemeren). 한편, '긍휼히 여기사'(* , 예하네
누)는 '하난'(* )의 미완료 시제로서 앞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기원의 성격
을 갖는다. 그리고 '하난'은 원래 '구부리다', '아랫 사람에게 호의로 몸을 굽히다'는
뜻으로서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어야겠다고 진심으로 느끼는 반응
을 나타낸다(Edwin Yamauchi). 이처럼 인간들은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한 존재
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영적,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
다.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치사 - '그 얼굴빛'(* , 파나이우)은 문자적으
로 '그분의 얼굴'이다. 그런데 '얼굴'(* ,파님)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 적용
될 때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한다(창 4:16;27:7). 그리고 얼굴이 빛난다는 것은 일반적
으로 기쁨과 즐거움의 표현이며 상대방에 대한 호의의 표현이자(잠 16:15 참조,
Anderson) 관계 회복의 표현이기도 하다(Eichrodt).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께서 온
전히 함께하사 은택을 베풀어 주시기를 함께 바라는 기도이다.
=====67:2
본절의 내용은, 1절과 갈은 기도가 응답될 때에 성취될 수 있다. 즉, 제사장 민족
인 이스라엘 백성(출 19:6)이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 아래 있을 때에, 이방인들도 그들
을 통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주의 도를 땅위에...알리소서 - 이것은 억지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간구가 아니
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에 충만하고 넘침으로써, 그 결과 그 은혜가 이방
인듸에게까지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를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
의 축복이 이스라엘에 충만하게 됨으로써 이를 목도한 이방 민족들마저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주권을 인정함과 아울러 동일한 구원의 축복에 동참하기를 갈망한다는 의미이
다. 결국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축복을 민족적 이기심이나 배타주의적 편견으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계에 편만하게 되기를 바라는 탁월한 신앙적
통찰을 보여준다(VanGemerern). 한편, '주의 도'(* ,데레크)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다루시는 방식, 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호의 넘치는 섭리(Alexander)혹은
권능이나 통치(Anderson)를 뜻한다.
=====67:3
하나님이여 - 이 표현은 위급한 상황에서 구출받기 원할 때, 혹은 간절한 소원을
아뢸때 사용된다(51:1;60:1). 그런 점에서 본 시편 기자는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서
도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VanGemeren).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 이방 민족들도 이스라엘과 동일하게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면 동일한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는 이방인듸
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구원받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특히 저자는 거의 동일한 문구
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이방인 구원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67:4
앞절에 이어 여기서도 이방인 구원에 대한 비전이 소개된다. 여호와의 왕권을 주제
로 삼은 시편들(93-99편 등)에서는 의와 평강과 즐거움으로 특징지워지는 하나님의 주
권적이고 우주적인 통치가 노래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는 궁극적으로 이방
민족들을 배제하지 않으며 그들 또한 하나님의 계시와 뜻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한다.
물론 이러한 비전은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에 비로소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을 틔해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임하셨
고 예수는 하나님의 길과 뜻이 무엇인지를 세계 만방에 밝혀 드러내셨던 것이다(행
4:12;롬 9:5).
=====67:5
3절과 동일하다. 이러한 반복은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저자의 기도가 지극히 간절
함을 보여준다. 또한, 3절과 본절을 예언으로 볼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예언 성취의
확실성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67:6
땅이 그 소산(所産)을 내었도다 - 과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풍성한 결
실을 맺게 해주사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셨다는 의미로서,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았
다는 고백과 일맥 상통한다. 특히 이는 씨를 뿌림으로써 얻은 결과였으며 지극히 풍성
한 축복이었다. 또한 이것은, 앞으로 더욱 큰 축복이 있을 것을 보여주는 표징이다.
그러면 여기서 본 시편 저자가 바라보고 있는 축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방인 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연적인 큰 소산을 얻게 되는 것이다. 믈론 이방인들은 하나님
과 무관하게 살아간 때에도 일반 은총 가운데 있었다. 그들도 자연의 혜택을 받아결실
을 얻었다(행 14:17). 그러나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될 경우 그분의 특별
한 섭리 가운데 있게되며 만물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올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욜
2:14).
우리 하나님이...복을 주시리로다 - 전반절이 과거 사실에 대한 언급이 라고 하면,
후반절인 본문은 장래에 베푸어 주실 축복에 대한 기대라 할 수 있다. 7절 상반절에서
도 반복되는 본문 내용은 시인의 강한 확신을 저변에 깔고 있다. 시인이 이러한 고백
을 담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에 대한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Kinder). 물론 여기서도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부여되는 배타
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는 결코보고 있지 않다.
=====67:7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방인들이 깨닫고 신앙을 갖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신 통치에 기쁨으로 복종하
는 것을 가리킨다(Calvin). 여기서 '땅의 모든 끝'은 2절의 '만방'과 동의어로 사용되
었으며(2:8;22:27, 28;렘 16:19), 또한 '경외하리로다'는 2절의 '알리소서'와 동일한
의미를 전달한다(VanGeren).
시편 제 68편
=====68:1
본시는 다윗이 전쟁에서의 승리, 혹은 위기 상황으로부터의 구원을 체험한 후 이러
한 역사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이다. 저작 배경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본 시편의 강해를 참조하라.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를 앞세워 진군하기
시작하던 때에 모세가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와 동일하다(민 10:35). 따라서 본 기도도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와 함께 암몬 족속과 싸우기 위하여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 드
려졌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다윗은 그때 이러한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그
들을 대신하여 원수들과 싸워 주시기를 소원하였다. 특히 다윗은 군사적인 행동 혹은
중대한 행동을 취하기에 앞선 마음의 결단(삼하 18:32;렘 49:14)을 촉구하는 표현인
'일어나사'를 사용하여, 원수들을 진멸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적 개입이 속히 있어야
함을 기원한다. 그러나 이 단어를, 소원을 아뢰는 단순한 기도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시편의 대개의 기도 속에는 그 기도들이 이루어질수밖에 없다는 저자들의 강한
확신이 담겨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편, '원수'(* , 오예바이우)는 문자
적으로 '그분의 원수들'이다. 사실 이 원수는 이스라엘 벡성들을 대적하던 암몬족속으
로 추정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곧 하나님의 원수들이라는
사실은 우리 성도들에게 대단한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이 핍박을 받
을 때 마치 당신이 핍박받으시는 것으로 간주하시어(행 9:4) 그들에게 중한 보웅을 내
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68:2
연기가 몰려감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 '연기'는 바람에 의해서 신속히, 그리고
용이하게 이리저리 흩어지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37:20;102:3;호 13:3 참
조). 따라서 본문은 악한 원수들에 대한 징벌을 재촉하는 기도이다.
불 앞에서 밀이 녹음같이 - 상반절과 동일한 뜻을 나타낸다. 여기서 '밀'(*
, 도나그)은 그 어원이 불확실한 단어로서 양초의 원료인 파라핀을 가리키는 듯하
다. 이것은 섭씨 50도가 용해점(溶解點)인 만큼 불에 조금만 가까이 대기만 해도 즉시
녹아내리며 심지어는 웬만큼 뜨거운 물에 집어 넣어도 완전히 녹아 없어진다(97:5;미
1:4 참조). 이처럼 그 원수들은 인간적 안목으로 보면 막강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권
능 앞에서는 지극히 연약하고 하찮은 존재인 것이다.
=====68:3
의인들의 이 같은 반응은 악인들이 멸망당했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니다. 다만
의인들은, (1) 자신들이 악인의 위험에서 구원받았으며, (2)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벌하시고 선한 자들을 구원하심으로써 공의를 밝히 드러내셨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
는 것이다. 사실, 크나큰 환난이나 위경에 직면해 있는 동안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악
인들의 준동(蠢動)을 모른체하신다고 생각하여 낙심에 이를 뻔했을 것이다(73:2, 3).
그러나 드디어 악인들이 징벌당하자 의인들은 그분의 살아계심과 공의로우심을 확인하
면서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52:6;58:10;64:7-10).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 '뛰놀며'(* , 알라츠)는 원래 '기뻐 날뛰다'의 뜻으
로서 대개 승리로 인한 기쁨 혹은 그 기쁨의 외부적 표출 행위를 가리킨다(25:2). 그
리고 '앞에서'(* , 리프네)는 '얼굴을 향하여', '얼굴 쪽으로'의 뜻으로서,
'얼굴로부터'라는 의미인 2절의 '앞에서'(* , 미프네)와는 반대의 뜻이다.
=====68:4
의인들의 이 같은 반응은 악인들이 멸망당했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니다. 다만
의인들은, (1) 자신들이 악인의 위험에서 구원받았으며, (2)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벌하시고 선한 자들을 구원하심으로써 공의를 밝히 드러내셨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
는 것이다. 사실, 크나큰 환난이나 위경에 직면해 있는 동안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악
인들의 준동(蠢動)을 모른체하신다고 생각하여 낙심에 이를 뻔했을 것이다(73:2, 3).
그러나 드디어 악인들이 징벌당하자 의인들은 그분의 살아계심과 공의로우심을 확인하
면서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52:6;58:10;64:7-10).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 '뛰놀며'(* , 알라츠)는 원래 '기뻐 날뛰다'의 뜻으
로서 대개 승리로 인한 기쁨 혹은 그 기쁨의 외부적 표출 행위를 가리킨다(25:2). 그
리고 '앞에서'(* , 리프네)는 '얼굴을 향하여', '얼굴 쪽으로'의 뜻으로서,
'얼굴로부터'라는 의미인 2절의 '앞에서'(* , 미프네)와는 반대의 뜻이다.
=====68:4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 - 여기서 '광야'(* , 아라보트)는 암몬 족속의
용병(傭兵)이었던 아람 사람들이 진을 쳤던 모압의 초원 지대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
다(삼하 10:8, Keil).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께서 마치 마차나 병거를 타고서 당신의
백성들 대신 그 원수들과 싸우기 위하여 백성들보다 앞서 나아가시는 것을 연상시킨다
(Keil). 그러나 '아라보트'를 '하늘'혹은 '구름'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KJV, NIV, RSV). 특히 33절과의 병행 관계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Kidner). 하나
님께서는 하늘 병거를 타시고 당신의 백성에게는 보호와 축복을, 그리고 그 대적들에
게는 징벌과 저주를 내리기 위해 두루 다니시는 분으로 묘사된 적이 종종 있다
(18:10;104:3).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 - '여호와'의 히브리어 '야'(* )에 대해서는 (1) '여호와'
(* )의 축약형, (2) '여호와'의 파생형, (3) '여호와'의 고어형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1)의 견해가 그중 제일 무난한 것 같다. 그렇다면 본절의 '여호와'도 '스스로
계신 자',혹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을 나타낸다(출 3:14). 그러므로 이
는 일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 의해서 조작된 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우월
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분만이 인간의 궁극적 신뢰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
다. 특히 여기에 사용된 축약형 '야'(* )는 이곳 외에 18절과, 하나님의 크신 구원
적 권능에 대해서 언급하는 곳(출 15:2) 및 하나님께서만 신뢰와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함을 언급하는 곳(사 26:4)에 나온다. 한편, 원문상에는 '여호와' 앞에 전치사
'베'(* )가 붙어 있는데, 이는 강조를 위한 불변화사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은
'그의 이름은 여호와 외에 그 어떤것도 아니다'는 의미로도 번역될 수 있겠다
(Anderson).
=====68:5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 하나님은 악행자들을 바람이 연기를 흩
뜨리듯이 진멸시키시지만(2절) 억울하게 압제 당하는 사죄적 약자들은 보호하신다. 우
가릿 문서(예컨대, '케레트의 전설'이나 '아카트의 이야기' 등)에도 과부와 고아를 보
호하는 것은 이상적인 왕에게 부여된 특별한 임무로 나와 있다(Anderson). 성경 역시
고아와 과부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의 대상임을 명시하고 있다(10:14;신 10:18;사
1:17;약 1:27등). 이는 사람의 외모를 따라 부한 자와 높은 자를 더 중시하고 비천한
자들은 멸시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경향과 너무나도 대조된다.
=====68:6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 '고독한 자'(* , 예히딤)에 대
해서는 신부를 맞을 지참금이 없어 결혼하지 못한 자를 가리킨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Albright). 그러나 그보다는 어떤 이유로 인해 자신을 의탁할 가족이나 친족도 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를 가리킨다고 봄이 더 무난하다(Anderson, Mowinckel).
아마 이들 역시 고아나 과부처럼 공동체내에서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수금된 자를 이끌어 내사 형통케 하시느니라 - '수금된자'는 감옥 생활(창 39:20)
및 포로 생활을 하는자(69:33;사 14:17;애 3:34;슥 9:11)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
이다. 어쨌든 본문은 이들이 부자유스러운 상황속에서 고역과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으
나 하나님의 보호로 말미암아 예전의 자유와 번영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음을 의미한
다. 특히 '형통케 하시느니라'(* , 바코솨로트)는 '정당하고 적절하다'
혹은 '번영하다'를 뜻하는 동사 '카쉐르'(* )에서 파생된 명사 '코솨라'(*
)와 '함께'로 번역될 수 있는 전치사 '베'(* )가 합쳐진 단어이다.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 '거역하는 자'(* , 소라림)는
'완고하다' 혹은 '반항적이다'를 뜻하는 동사 '사라르'(* )에서 파생되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제 고집대로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사 65:2;렘 5:23;슥
7:11). 그리고 '메마른땅'(* , 체히하)은 '눈부시다'를 뜻하는동사 '차하흐'
(*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지극히 건조한 지역을 가리
킨다. 이는 결국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다. 그렇다면 본 문구는 하나님께 불순종하
는 완고한 사람은 사막과 같은 불모지(不毛地)에서 죽음을 당한다는 의미이다(민
14:29-35).
=====68:7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인도하신 일을 회고하고
있다.
앞서 나가사 -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언약궤(레 16:2)가 가나안으로 향하던 이
스라엘 백성의 선두에 위치했던 사실(민 10:33)을 상기시킨다. 물론 하나님께서 실제
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서 나아가시면서 그들을 불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고(출
13:21, 22) 또한 원수들을 물리치신 사실도 아울러 연관된다. 요컨대 하나님은 십자가
군병들인 당신의 백성들의 앞에 서서 우리를 대신하여 용감하게 싸우며 나아가시는 일
선 사령관이시므로(수 5:13-15), 성도들은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믿음의
행진을 담대히 계속할수 있다(딤후 4:7).
광야(* , 예쉬몬). 지극히 부적절한 자연적 조건으로 인하여 사람이 전혀
살 수 없는 곳을 가리킨다(신 32:10). 기자는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보고 있던 '광야'의 황량함과 하나님이 인도하신 이후의 축복된 상태를
날카롭게 대조시키려는 의도를 보여준다(Keil).
=====68:8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떨어지며 -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기 위해 시
내 산에 임재하셨을 때에 나타났던 현상을 묘사하고 있다(출 19:16-25). 그런데 '하늘
이...떨어지며'는 어두운 천둥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시내산을 덮은 것을 가리킨다
(신 5:22).
저 시내 산도...진동 하였나이다 - '저 시내산'은 원어상 (1) 개역 성경의 번역처
럼 '저 시내산' (2) '시내산 자체'(even Sinai itself, KJV), (3) '시내산의 그분'
(the One of Sinai, NIV)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중 (3)의 번역은 '저 시내 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하나님'과 동격으로 이해한 것이며 '시내 산의 주님'이라는 의
미로 파악한 것이다(Albright).
이스라엘의 하나님 - '시내 산의 하나님'이 계시 수여와 주로 연관된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관계를 맺으셨던 사실을 상기시키는 이
름이다(VanGemeren).
=====68:9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 이에 대해서는 (1)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에 들어
가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농사를 위한 비를 풍족히 내리셨던 사실을 가리킨다는
해석(Calvin, Keil, 박윤선), (2) 하나님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던 일을
가리킨다는 해석(Rawlinson, C.B. Moll) 등의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러나 첫째, 11
절 내용이 주로 출애굽 직후 광야에서 있었던 일이므로 본절도 광야에서 받은 축복을
가리킨다고 봄이 더 자연스러우며, 둘째, 출애굽기 등은 만나를 '비'로 말하고 있다
(78:23, 24;출 16:4)는 점을 미루어 볼 때, (2)의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향편,
'흡족한'(* , 네다보트)의 어근인 '나다브'(* )는 '자원하다' 혹은 '즐
거이 드리다'(출 35:21 대상 29:9)의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이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근거한 아낌없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스라
엘 백성은 하나님이 아낌없이 내려주신 만나를 먹고 배부르기에 충분하였다(출
16:12).
주의 산업이 곤핍(困乏)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 '주의 산업'(* , 나할라
트카)은 '나누다'나 '차지하다' 혹은 '상속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나할'(* )에
서 파생된 명사로서 여기서는 '주님에 의해서 차지된 백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백성 곧 이살라엘을 가리킨다(신 7:6).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
을 하나님의 '산업'혹은 '기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쉽게 발견
된다(출 34:9;신 4:20;9:26, 29;왕하 21;14). 한편, '곤핍할때에'(* , 닐아)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회로한 상태를 가리키는 동사 '라아'(* )의 수동형으로
서, 주변 여건 혹은 환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극심하게 지쳐있는 상태를
가리킨다(잠 26:15;사 16:12).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먼길을 걸었고 또한
먹지 못하여 극도로 지친 상태에 있었다. 또한 '견고케 하셨고'(*
, 아타 코난타)는 문자적으로 '당신께서 견고케 하셨고'이다. 이처럼 본 문구에는,
동사에 이미 2인칭 단수 주어 어미(語尾)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별도로 2인칭 단수 인
칭대명사 '아타'가 있다. 이것은 '견고케 하신' 행동의 행위 주체자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로 이해하면 된다. 한편, '견고케 하셨고'의 기본형인 '쿤'(*
)은 '준비하다' 혹은 '세우다'의 뜻이지만,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 튼튼히하고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신 일을 가리킨다(Keil, NIV).
=====68:10
주의 회중(會衆)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 '주의 회중'(* , 하야
트카)의 '회중'(* , 하야)은 '살다' 혹은 '강하게 되다' 등의 뜻을 갖는 동사
'하야이'(*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살아있는 것', '사람들' 혹은 '군대'를 뜻한
다(Davidson). 여기서는 삼하 23:11에서 처럼 '군대'보다는, 차라리 보다 일반적인 의
미인 '무리', '집단'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Keil). 한편, '그 가운데'(* , 바)
는 문자적으로 '그녀의 가운데'의 뜻이며, '그녀'가 지칭하는 바에 대해서는 가나안
땅과 광야 중 하나를 뜻한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런데 만일 '주의 산업'(9
절)이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면, 여기의 '그녀'는 틀림없이 '가나안 땅'일 것이다. 하
지만 9절 주석에서 이미 '주의 산업'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고 '가나안 땅'이 아님
을 확인했었다. 따라서 본문의 '그 가운데'는 '광야 가운데'를 뜻하는 것 같다(7절).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곤핍하였던 곳(9절)이다. 그리고 '거하게 하셨나이다'(*
, 야쉬부)는 '쉬다' 혹은 '거주하다' 등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본 문구는
걷기만 하고 먹지 못하여 곤핍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양식을 공급받은
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쉬다'의 뜻을 갖는다고 볼 필요가있다.
바로 이와 같은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비록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만 하면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마 11:28-30).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 '가난한 자'(* , 아니)는
'괴롭히다', '자기를 낮추다' 혹은 '억지로...을 시키다'의 뜻이 있는 동사 '아나'(*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1) '압제당하는 자'(욥 36:6;사 49:13), (2) 개역 성경
의 번역처럼 '가난한 자'(신 24:14, 15), (3) '겸손한 자'(잠 16:19), (4) '피곤한
자'(습 3:12)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곤핍'했었음을 말
하는 9절에 근거해 볼 때, (4)의 뜻이 가장 합당한 듯하다. 한편 '준비하셨나이다'(*
, 타킨)는 9절 후미의 '견고케 하셨고'와 어근이 동일하다. 본시의 기자가 이
같이 동일한 동사를 사용한 까닭은 동일한 내용을 언어 유희(wordplay)적 표현으로써
강조하기 위함이다.
=====68:11
주제서 말씀을 주시니 - 여기서 '말씀'(* , 오메르)은 (1) 하나님께서 이스라
엘에게 주신 필승의 약속(C.B. Moll), (2) 이스라엘로 하여금 승리의 노래를 부르도록
한 하나님의 명령(Calvin), (3) 전황(戰況)을 급변케 한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Keil,
Rawlinson) 등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첫째, 7절에서부터 10절까지가 하나님이 광
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극적으로 은헤를 베푸신 것에 대한 언급이며, 둘째, 다음
문구와 같은 행동(출 15:20)을 실제적으로 촉발시켰던 것(출 15:19)은 곧 하나님의 창
조적 말씀이었다(출 14:26)는 점 등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위의 세 견해 중 (3)의 것
이 보다 합당하다.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가 큰 무리라 - 직접적으로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을 비롯한
많은 여자들이 자신들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 사실과 관계 있다(출 15:20).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에 여인들이 노래하
며 춤추고 뛰놀았던 사실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삼상 18:6, 7). 뿐만 아니라, 바락
과 드보라가 가나안왕을 이겼을 때, 드보라가 하나님을 찬양한 것도 결코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삿 5:1).
=====68:12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 가나안의 여러 왕들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패배한 사실들을 가리킨다(수 8:19-22;10:19, 20;11:8, 9;삿 3:10, 29). 그런데 '여러
군대의 왕들'은 이들을 완전 패퇴시키신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
내기 위한 표현이다. 즉,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 패배당한 왕들의 강성함을 이같이 표
현함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강력히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가나안 왕
들은 철병거(수 11:4) 등의 우수한 병기와 훌륭한 요새(수 11:2)를 갖고 있었기 때문
에, 이스라엘 백성의 자력(自力)만으로는 그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는 그 강력한 왕들을 이기셨고, 이에 따라 당신의 능력을 온전히 드러내셨던 것이
다.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 이것은 (1) 여자들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
미암아 능히 적병을 쫓아내고 전리품을 획득했다는 견해(박윤선), (2) 여자들도 남자
들이 전쟁 중에 획득하여 집으로 가져온 전리품을 나누어 가졌다는 견해(Valvin,
Keil, Kidner, Weiser)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어떠한 경
우에도 여자들이 집단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경우는 없었다는 점에서 볼 때, (1)의
경우는 타당치 못하다. 또한, 가나안 왕인 시스라가 노략물을 취하여 집에 있는 자신
의 어미에게 가져다 주려고 했었다는 사실도(삿 5:30) (2)의 견해를 지지하기에 충분
하다. 결국 본문은 집에 있는 여인들에게까지 분배 기회가 주어질 정도로 전리품이 많
았음을 말해준다.
=====68:13
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 이는 목자들이 유유 자적(悠悠自適)하게 평안히
쉬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삿 5:16).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 벡성들이 주변 세력
들의 위협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서 평안히 정착하는 때를 가리킨다. 그러나 칼빈은
'양 우리'(* , 쉐파타임)를 '항아리'로 해석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지저분한 항아리에 누운 듯한 비참한 환경에 처해 있었던 때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
러나 '쉐파타임'은 '놓다' 혹은 '두다'의 뜻을 갖는 동사 '솨파트'(* )에서 파생
된 단어로서, '항아리'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성경에서는 항상 가축을 가두기 위한 울
타리를 의미한다(창 49:14;삿 5:16).
그 날개를 은으로...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 - 이것은, 날으는 비둘기가 햇빛
을 받아 어떤 때는 은빛을, 또 어떤 때는 금빛을 띠는 모습을 연상시키며(Keil), 이스
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크신 축복에 따라 대단한 번영을 이루게 될 것을 시사한다. 사
실, 이스라엘은 특히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는 중근동에서 가장 번성한 나라가 됐었다.
=====68:14
전능하신 자(* , 솨다이) - 이것은 '공격하다' 혹은 '파괴시키다'를 뜻하는
동사 '솨다드'(*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하나님이 자연 법칙을 초월하여 자신의
약속을 성취시키실만큼의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고 계심을 강조하는 명칭이다(창
17:1;28:3). 반면에 악인들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의 악한 행위대로 보응하시
는 측면을 강조하기도 한다(욥 34:12;사 13:6;욜 1:15).
열왕을 그 중에서 흩으실때에는 - 여기서 '열왕'(* , 멜라킴)은 문자적으
로 '왕들'의 뜻이며,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착을 적극 방해하던 가
나안 족속의 여러 왕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흩으실때에는'(* , 베파레스)의
기본형 '파라스'(* )는 '퍼지다' 혹은 '펼치다'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열왕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는 것을 가리킨다(겔 17:21).
사실 가나안 왕들은 연합 전선을 펴서 이스라옐 백성을 대적했었다(수 10:1-5). 그러
나 하나님이 그들을 이스라엘을 통하여 징벌하심으로, 그들은 모두 패하여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수 10:10, 11).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 문자적으로는 '살몬에 눈이 날렸도다'이다. 여기에 대
한 해석으로는 (1)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에게 대패하여 황급히 도망치는 모습에
대한 묘사라는 견해(Keil, Cheyne), (2) 죄악된 가나안 족속들에 의해서 더렵혀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원수들의 멸망으로 정결하게 된 영적모습에 대한 묘사라는 견해
(Calvin) 등이 있다. 이중에서 (1)의 견해가 보다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런데 (1)의
견해도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그중 하나는 본 문구가, 가나안 족속의 도망치는 모습
이 마치 바람에 눈이 날려서 흩어지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는 해석이다(Cheyne). 또 하
나는 가나안 족속이 도망치면서 남겨 놓은 전리품들과 그들의 썩은 해골이 눈같이 산
을 덮었음을 가리킨다는 해석이다(Keil). 그러나 이 두 해석 중에서, 첫 번째 해석이
바로 앞 문구의 '흩으실'이라는 동사의 뜻과 잘 어울린다는 점에서 더 타당성이 있다.
한편, '살몬'은 '짙은 어두움'의 뜻을 지니며, 실제로 그 이름의 의미처럼 검은색을
띤 산이다.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했고(삿 9:48), 눈으로 덮여있는 때가 많다고 한다.
=====68:15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 본 문구는 동의적(同意的) 대구인 다음 문구와
같은 뜻을 갖는다. 따라서 여기의 '하나님의 산임이여'는 '바산의 산'이 하나님의 임
재 장소임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바산의 산'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창조될 수밖에
없다고 할 만큼 특별히 그 위용(威容)을 자랑하는 높은 산이라는 뜻이다(36:6). 한편,
'바산의 산'은 요단 동편에 있으며 현무암이나 용암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이지역 주
위에는 가파르고 탑과 같이 생긴 여러 봉우리들이 중간 중간에 우뚝 우뚝 서 있다
(Keil). 이와 반대로 요단 서편의 산들은 대개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낮은 산들이다.
=====68:16
너희 높은 산들 - 앞절에 나오는 '바산의 산'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 '시기하여 보느뇨'(*
, 테라츠둔)의 기본형인 '라차드'(* )는 '질투하다', '곁눈으로 보다'의 뜻이
며 원래 야수가 엎드려서 먹이를 기다리는 것 혹은 사냥꾼이나 적이 숨어서 사냥감을
기다리는 것 등을 가리키는 아랍어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본 단어는, '바산의 산'이
낮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처소인 '시온산'을 집어 삼킬듯이 내려다보는 형상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하나님이 거하시려하는 산'은 예루살렘 남동쪽에 위치
한 '시온 산'을 가리키며 특히 여기서는 성도(聖都) 예루살렘(느 11:1)을 뜻한다.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 '바산의 산'이 비록 높아서 외형적으로
는 지극히 훌륭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시온 산을 우습게 내려다봐서는 안
되는 까닭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은총은 자연보다 나으며
교회는 세상보다 더 강함(Keil)이 분명하다. 한편,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서 건축될 성전에 친히 임재하시는것(왕상 8:27)이지
만, 하나님께서 신약 교회에 함께하시는 것(마 18:20;계 1:12, 13)과 또한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에서 구속받은 백성들과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것(계 21:2, 3)을 아울러 암
시한다.
=====68:17
16절처럼 본절도 시온 산이 바산의 산에 의해서 업신여김을 받을 이유가 없음을 보
여준다.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 '하나님의 병거'는 하나님을 옹위하는 천군
천사들을 가리키며(왕하 6:17) 이들이 시온 산에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옹위를 받는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재하심을 뜻한다. 그리고 '천천이요 만만이라'는 말은 수없이 많
음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삼상 18:7).
=====68: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 이것은 (1)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서 펼치게끔 하기
위하여 선택된 신정(神政) 왕 다윗이 시온 곧 예루살렘에서 통치권을 행사하게 된 것
(Calvin), (2) 언약궤가 시온산이라는 높은 곳으로 옮겨짐에 따라(대상 15:25-29) 하
나님께서도 그곳의 성소에 임재하게 되신 것(C.B. Moll, Rawlinson)등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문맥들에서도 높은 곳으로서의 시온 산을 하나님께 대한 경
배의 장소로서 말한다(렘 31:12;겔 17:23;20:40)는 점에서 볼 때, 위의 두 견해 중
(2)의 것이 보다 타당하다. 한편, 우리는 본 문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승리하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지금도 성도들과 함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연결시켜 이해해 볼 수 있다(엡 4:8).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膳物)을...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 일차적으로는, 출애
굽, 광야 여정 및 가나안 정복과정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대적들을 정복시켜
포로로 잡고(삿 5:12 참조) 피정복민들로부터 조공을 받으신 사실을(삼하 8:2) 가리킨
다(VanGemeren). 그리고 보다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세력을 정복하고 성
도들에게 구원의 선물을 베푸신 것을 예표한다(엡 4:8). 한편, 본절 하반절과의 문맥
연결을 고려하여, 이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뿐만 아니라 이방 민족들에게서도 경
외와 예배의 대상이 되시게끔 하신다는 의미로도 해석해 볼 수 있겠다.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 '여호와'는 인간들과 언약을 맺
으시고 그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는 분임을 암시하는 문맥에서 주로 사용되는 하나님의
호칭이다(창 17:1, 2). 그리고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는, 이방 민족, 곧 '패역자'
들 중에도 하나님의 크신 위엄을 목격하고 당신의 백성이 될 자들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이방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되는 것은 큰 축복임이 분명하다. 원래 이방인들
은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이 없었으며 세상에서 소방도 없던 자들이었다(엡 2:1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이 당신과 원수되었을 때 그들을 부르셔서 당신의 백성
으로 삼으신 것이다(롬 5:6-8).
=====68: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 하나님이 세상에서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당신의 백성
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세심하게 돌보아 주심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Anderson).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전혀 환난과 고통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은 백성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들이 그 어려움들을 능히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는 의미이다(빌 4:13). 따라서 신자들은, 순경(順境) 중
에서 뿐만 아니라 역경 중에서도 결코 슬퍼하거나 낙심치 말아야 하는 것이다.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 - '주'(* , 아도나이)에 대해서는 51:15 주
석을 참조하라. 한편,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죽음
에 이르는 환난(20절)에서도 건지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여기의 '하나님'(* , 엘)
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특별히 강조하는 호칭이다(50:1;욥 32:13;40:9).
=====68:20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 여기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구원 역
사(役事)가 결코 피상적이지 않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구원자되심은 '우리' 곧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서 능히 체험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도 19절의 '하
나님'과 동일하게 '엘'이다.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 - '사망에서 피함'은 여기서는 죽음
에 이르게 될 만한 극심한 환난(23:4)에서 구출되는 것을 가리키나 궁극적으로는 육체
적으로 죽었으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살림을 받을 것(요 11:43, 44)
혹은 육체적인 죽음후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부활되는 것(도전 12:22, 23) 등을 가리
키는 의미로 확대시켜서 이해해 볼 수도 있겠다.
=====68:21
히브리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진실로' 혹은 '그러므로'로 번역될 수 있는 접속사
'아크'(* )가 있다.
그 원수의 머리...정수리 - '원수'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 백성을 해하려는 자들
을 가리킨다. 그리고 '머리'와 '정수리'는 여기서 동격(同格)이다. 그런데 '정수리'(*
, 카드코드 세아르)는 문자적으로 '머리털이 있는 정수리'의 뜻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고대 아라비아 무사(武士)들의 경우처럼, 자신들이 무사임을 드러
내 보이기 위하여 정수리 부분의 머리털을 머리의 다른 부분보다 더 길게 남겨놓았던
것을 연상시킨다. 아무튼 이같은 모양으로 한 정수리는, 거만한 힘이나 회개할 줄 모
르는 자만(自慢)을 상징한다(신 32:42).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 - 이것은 '원수'에 대한 보조 설명이며, 회개를 거부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 계속 죄악을 범하는 자를 뜻한다.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 - '쳐서 깨치시리로다'(* , 이므하츠)의 기본
형인 '마하츠'(* )는 야엘이 시스라에게 가했던 것처럼, 강타하여 재기 불능의
치명상을 입히는 것을 가리킨다(삿 5:26). 특히 다른 문맥에서도 이 단어는, 회개치
않고 계속 죄를 범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신
32:39;33:11).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1)이 세상의 악인들을 반드시 멸망시키시며
(73:27), (2)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신(神)인 사단과 그 세력들을 영원한 불못에 넣으
실 것이다(계 20:10).
=====68:22
본절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21절과 연결시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마치 유대 주석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본절을
하나님의 구원 약속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예루살렘 멸망 뒤 배에 실려서
로마로 끌려가던 여자 포로들은, 본 구절을 자신들에 대한 약속의 말씀으로 보고 모두
지중해로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다(Keil). 즉, 그 여자 포로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
을 그 지중해에서 건져내시리라고 오판했던 것이다.
저희를 바산에서...바다 깊은 데서 도로 나오게 하고 - 하나님의 원수들이 아무리
깊이 숨는다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산'은 산세가 험하고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어 사람들의 은신처가 퇴기에 적절했던
'바산의 산지'를 가리킨다. 그리고 '바다'는, 본 시편 저자 다윗의 활동 지역과 인접
해 있었던 사해 바다를 뜻할것이다. 특히 기자는 '바다 깊은 데'라고 표현함으로써.
원수들의 도주 자체가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68:23
본절 초두에는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단어 곧 '그리하여'로 번역될 수 있는
'르마안'(* )이 있어서(NIV) 본절이 22절과 같은 심판 원리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한 묘사임을 말해준다.
너로 저희를 심히 치고 그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 문자적으로는 '너희들이 너
희들의 발을 피 안에 세게 찔러넣게 할 것이다'의 뜻이다(you may piunge your feet
in the blood of your foce, NIV). 이와 같은 표현은 (1) 하나님의 심판 행위를 나타
낼 때 사용되며(사 63:1-3), 또한 (2) 하나님의 공의를 목격한 자가 그 공의가 실현된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모습의 상징적 묘사이다(58:10).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이 이
스라엘 백성을 악인을 멸절시키기 위한 대리적 심판자로 지정하사 원수들을 찌르게 하
심을 나타낸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죄악이 관영된 가나안 족속 등
을 징벌키 위한 도구로 사용하겠다는 뜻을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 바 있었다(창
15:16;수 10:40-43). 한편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이 지나치리만큼 잔인하신 분으로 보
이게 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여기의 원수들은 하나님이 더 이상 긍휼을 베푸셔서
인내하실 수 없을 만큼 죄악으로 관영되어 있는 자들이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을 보호하시기 위해서라도 대적들은 철저히 응징하셔야만했다. 따라서 하나님이 잔인
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대적들이 자신의 죄과에 대한 응분의 벌을 받는 것일 뿐이다.
네 개의 혀로 네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 원수들의 육신이 개의 먹이
가 되게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죽어서조차 무덤에 안장되지 못하고 개의 먹이가 된
다는 것은 악인에 대한 처절한 심판을 강조하는 말이다(왕하 9:35;렘 15:3).
=====68:24
저희가 주의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들을 무찌르신 후 개선의
행진을 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보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의 운
행하시는 모습이 보일 까닭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악인들에 대한
징치(徵治)를 마친후 크게 기뻐하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모든 이가 깨
닫게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저희'는 의인과 악인 모두를
포함한다. 의인들은 '하나님의 행차'를 인하여 크게 기뻐하였을 것이며, 악인들은 심
히 두려워 떨었을 것이다(출 15:14-16).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이라 - 여기서 '성소에'(* ,
바코데쉬)는 '거룩하심 가운데서'로 번역함이 더 나을 것 같다(Albright). 그 까닭은
(1) 하나님의 개선 행차가 이교도들에게까지 목격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 행차가 예루살렘의 '성소'에서 있었다고 국한시키기는 어려우며, (2) 여기의 '바코
데쉬'라는 단어가 하나님이 이방 원수들을 심판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는 문맥에서 '거
룩함에'로 번역되고 있기(77:13;출 15:11)때문이다. 그렇다면 '거룩하심 가운데서'라
는 말은 '악인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신 공의로운 성품의 소유자이심을 밝히 드러내
시면서'라는 정도의 뜻을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나의 왕'은, 하나님 앞에서의 다윗
의 겸손을 보여준다. 즉, 다윗은 비록 자신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만왕의 왕이신 하나
님의 통치 아래 있는 백성 중 하나일 뿐임을 암시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68:25
본절은 승리와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의식(儀式)을 묘사하고
있다.
소고 치는 동녀(童女) - '소고치는'일은 승리의 기쁨이 있을 때 여자들에 의해서
관례적으로 행해졌었다. '동녀'(* , 알마)는 미혼, 기혼을 막론한 젊은 여성
모두를 가리킨다(창 24:43;잠 30:19). 실제로 이스라엘에서는 전쟁에서의 승리 후 미
리암과 같은 기혼 여성들도 소고치는 일에 가담했었다(출 15:20). 문자 그대로의 '동
녀'를 가리키는 히브리 단어는 '베툴라'(* )이다.
가객(* , 솨림) - 노래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악사 - 수금과 비파, 제금 그리고 나팔 등을 연주하는 사람을 뜻한다(대상 13:8).
=====68:26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 - '근원'(* , 마코르)은 '자손', '근원',
'샘'등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 등과 같은 신앙의 조상들
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조상 아브라함처럼 언약
에의 참여자임을 일깨우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대회 중에서...주를 송축할지어다 - 여기서 '대회'(* , 카할)는 하나님의 이
름으로 모인 종교적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주'(*
, 예호와)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심으로써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
아주신 점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민족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 구원을 얻을 수 있었고,
또한 세상에서도 각양(各樣)의 은혜를 받으며 살았다. 그런 점에서 신.구약 시대를 막
론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 '송축하지' 않을 수 없다(엡 1:3, 6).
=====68:27
저희 주관자(主管者) 작은 베냐민 - '저희 주관자'(* , 로뎀)의 기본형인 '라
다'(* )는 '통치하다' 혹은 '지배하다'의 뜻이다. 베냐민 지파가 이렇게 지칭된
것은 모든 지파중에서 가장 인구가 적었지만(삼상 9:21) (1)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을 배출하였으며(삼상 9:1-17), (2) 열 두 지파의 기업 분배 당시에 하나님의 성소가
있던 예루살렘도 그 땅에 있었다(수 18:28)는 점 등 때문일 것이다(Keil). 그러나 저
자 다윗이 자신의 지파도 아니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이 속했던 지파를 첫머리에
놓은것은, 다윗의 겸허하고도 관대한 성품을 잘 보여준다. 사실, 그 당시 이미 왕에
올라 있었던 다윗은 대단히 큰 세력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또한 자신이 속한 지파를 본
절의 초두에 놓을 수도 있었다.
유다의 방백과 그 무리 - '그 무리'(* , 리그마탐)의 어근인 '라감'(*
)은 '죽이기 위해 돌을 던지다' 혹은 '돌 무더기를 쌓다'의 뜻을 지니며 본 단어
와 동족어인 '마르게마'(* )는 '돌 무더기'를 뜻한다(잠 26:8). 따라서 본
단어는 '돌 무더기의 돌처럼 많은 수'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본 문
구는, '많은 수의 유다 방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스불론...납달리 - 유다와 베냐민 이외에 이처럼 유독 두 지파만 언급되고 있는 까
닭은, 두 지파가 애국적인 용감성으로 인하여 드보라에 의해서 크게 찬송을 받았던 때
문일 것이다(Keil, 삿 4:6, 10;5:18). 물론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남쪽 끝에 위
치한 지파인 반면,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는 북쪽끝에 위치한 지파였기 때문에 유
독 다른 지파들을 제치고 여기서 언급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다(VanGemeren).
=====68:28
네 하나님이 네 힘을 명하셨도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상을 지배할
능력과 그들에 대한 승리의 보장을 주셨음을 말한다(Keil).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이
방 민족들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체험했었다.
하나님이여...행하신 것을 견고히 하소서 -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승리케 하는
과정을 통해 당신의 크신 권능과 위엄을 드러내신 바 있다. 이러한 과거 역사에 근거
하여, 그리고 하나님이 스스로 하신 약속과(22, 23절) 구속자로서의 성품에 따라(5,
6;19, 20절),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계속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
이다.
=====68:29
이방의 왕들이 하나님께 경외심을 표하게 된다는 예언이다(76:11;사 18:7;60:3-7
;66:20;학 2:7;슥 2:11-13;6:15;8:21, 22). 이러한 예언은 솔로몬 왕 시절에 스바 여
왕에 의하여서도 성취된 바 있다(대하 9:1-12). 그러나 이는 궁극적으로 모든 민족들
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그들이 하나남께로 나아올것에 대한 예언이다.
주의 전을 위하여(* , 메헤칼레카) - 카일(Keil)은 이것을 문자적으로
'주의 전으로부터'라고 보고 하나님께 대한 경배가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시작되어
결국 온 세계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을 암시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위하여'로
번역된 히브리어 전치사 '몌'(* )를 '...때문에'(on behalf of, because of, KJV,
RSV, NIV)로 보고, 이방 왕들이 예루살렘의 성소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으로 믿고
경배를 드리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무난하겠다.
=====68:30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 '갈밭의 들짐승'은
원래 나일 강변의 갈대 숲에서 서식하는 하마나 악어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애굽 왕
을 상징한다(74:13;사 36:6, 9;겔 29:3, Briggs, Dahood, Kraus). 그리고 '수소의 무
리'는 당시 최강국이었던 애굽보다는 못한 나라들의 여러왕들을 가리킨다. 또한 '송아
지'는 애굽 왕을 포함한 열강의 지배 아래 있던 이방 민족들을 뜻한다.
은 조각을 발 아래 밟으소서 - 여기에 대해서는 (1) 이방 왕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굴복하면서 그 표시로서 '은 조각'을 공물로 바치는 것을 뜻한다는 견해(KJV,
NIV, Alexander, Keil, Rawlinson), (2) '은 조각' 곧 전리품이나 공물을 탐하는 열방
들을 멸하도록 간구하는 내용이라고 보는 견해(RSV), (3) 본 분사 구문이 '갈밭의 들
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수식한다고 보며, 그들이 왕궁의 마룻 바닥에
깔린 '은 조각'을 발로 밟음으로써 자신들의 교만을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는 견해
(NIV, Calvin, C.B. Moll) 등이 있다. 이중 어느 하나를 확정적으로 취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따르지만, 곧바로 뒤따르는 문구와의 연관성을 고려하면 (1)의 견해가 가장
자연스러울 것 같다.
저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 여기서 '흩으셨도다'(* , 비자르)는
'바자르'(* )의 완료 시제이다. 그러나 다음 절이 미래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원의 문장이라는 점에서 개역 성경과는 달리 '흩으소서'로 번역함이 더 낫다(NIV,
Weiser). 이와 같은 기원(祈願)은 1절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 그리고 '전쟁을 즐기는'
이라는 말은, 다윗의 원수들이 명분도 없이 무고하게 다윗에 대항하여 싸움과 소동을
일으켰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Calvin). 악인들은 까닭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치려
하지만, 결국 그들은 그러한 호전성(好戰性)으로 인하여 멸망을 받게 되는것이다.
=====68:31
방백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 '방백들'(* , 하쉬마님)은 '살지다' 혹은
'부유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하슘'(*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두드러진 위치에
있는 지도급 인사들을 가리킨다(Keil), '애굽에서 나오고'는 애굽 왕이 이스라엘에게
항복하기 위해 방백들을 사신(使臣)으로 보내는 것을 뜻한다(사 43:3;45:14).
=====68:32
31절의 결과이다. 다윗 자신의 예언적 소원대로 열방이 하나님께 굴복하면, 그들은
그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찬송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또한 이방 민족들도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로 인하여 기뻐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일은,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 만방으로 확장되어 감에 따라 본격적으로 성취되어 가고
있으며(고전 15:24, 25) 하나님께서 친정(親政)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완전하
게 이루어질 것이다(계 21:3).
=====68:33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 - '옛 적'(* , 케뎀)은 하나님의 초시간적(招
時間的) 위대성을 암시하며, '하늘들의 하늘'은 창조된 태초의 시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하늘들의 하늘'(* , 쉐메 쉐메)은 다만 '하늘의 하늘'로 번역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비록 여기의 '쉐메'가 복수형이기는 하지만 이 복수형은 그 수
(數)의 많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하늘의 광대(廣大)함을 표현하는 장엄
복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문구는, 하늘의 광대 무변함과 장중함, 그리고 지고(至
高)함을 나타내는 히브리 문학의 독특한 수사학적 표현이다(신 10:14;왕상 8:27). 이
와 비슷한 것으로서, '종들의 종', '왕 중의 왕', '거룩함중의 거룩함', '노래 중의
노래' 등이 있다.
주계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 히브리 원문에는 '보라!'로 번역될
수 있는 '헨'(* )이라는 단어가 있다. 본문의 '소리'는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심
을 증거하는 피조 세계의 웅장한 소리, 예컨대 뇌성 등을 가리키는것 같다(29:3, 4,
Anderson).
=====68:34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 이것은, 33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마땅히 그분의 것임을 인정하라는 뜻이다(29:1).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 -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
에 있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보호자가 되신다는 뜻
이다(Keil). 그리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는, 하나님의 통치가 우주적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의 내재적(內在的) 속성뿐만 아니라 초월적 속성을 잘
드러내 준다.
=====68:35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 문자적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성소
들에서 두렵습니다'의 뜻이다. 본절은 하나님이 이렇듯 엄위하신 분이시면서(47:2
;65:5;출 15:11;신 10:17:계 15:3, 4). 또한 당신의 백성 가운데 함께하시는 분이심을
시사한다(VanGemeren). 여기서 '성소'를 복수로 말하고 있는 까닭에 대해서는, (1) 여
기의 '성소'가 하나님의 임재 장소인 하늘과 땅(34절)을 모두 가리키기 때문, (2) '성
소'가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Calvin), 혹은 (3) '성소'가 거룩의 요소나 특징
들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Keil)등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장엄 복
수로 이해하여 다만 성소의 거룩성을 보다 강조하며, 그리하여 그곳이 하나님의 위엄
이 충만한 곳임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복수형으로 표현되었다고 봄이 무난하겠다
(Anderson).
시편 제 69편
=====69:1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 자신이 곤궁에 처해 있음을 알리며, 그 곤궁에서 벗
어나고자 하는 간절함을 호소하기 위해 사용되는 상투적 표현이다
(54:1;55:1;56:1;59:1;61:1).
믈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 이는 물이 자신을 덮고 자신의 목구멍 으
로 들어가서 숨을 쉬지 못하게 된 것 만큼의 곤궁한 상황에 도달했음을(for the
waters have come up to my neck, NIV, RSV)보여주는 상용적 표현이다
(18:4;42:7;88:7, 17;욥 22:11;27:20;욘 2:5). 물론 여기서 '물'은 2절의 '수렁'이나
'큰물'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영역이나 그 영향력을 뜻하는 표현이다(Anderson).
=====69:2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 - 빠져들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더욱 깊이 빠
져 들게 되는 늪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심각한 환난이나 죽음의 위협에 대한 상징적 표
현이다. 따라서 이는 저자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가중시켜오는 두려운 상
황을 가리킨다.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 사람이 본의 아니게 물에 빠져 거기
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우적 거리면서 죽어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큰물(*
, 쉬볼레트)은 '넘치다'는 뜻의 동사 '솨발'(* )에서 나온 단어로서,정
적(靜的)으로 가만히 있는 물이 아니라 동적(動的)으로 거세게 덮쳐오는 물을 가리킨
다. 그리고 '넘치나이다'(* , 쉐타파트니)의 기본형인 '솨타프'(*
)는 '질주하다', '창궐하다', '휘말아 삼켜버리다'의 뜻으로서, 홍수가 모든것을 휩
쓸어가 버리듯 환난니 급속도로 몰려오는 까서을 가리킨다(Hamilton, Victor P.).
=====69:5
여기서 다윗은 40:122에서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급변
하여 자신의 죄를 자백한다. 이는, 원수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허물많은 인생에 블과함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 원문대로 하면 '하나님이여 당신께서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로 번역된다. 그런데 '아시오니'(* , 야다타)라는 동사는
그 자체가 '당신께서 아신다'의 뜻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별도의 2인칭
주어 '아타'(* )를 첨가함으로써 하나님이 자신의 '우매함을'아시되 분명히 아
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같은 강조는, 다윗이 자신의 '우매함'의 죄를 확실히 인
식한 결과일 것이다. 한편, '우매함'(* , 이웰레트)은 불분명한 판단력에 따
른 '도덕적 결함'(Goldberg)혹은 '죄의 욕구'(Keil)를 뜻한다. 이와 같은 '우매함'은
성경 도처에서 죄로 인정되고 있다(롬 1:21,22;갈 3:1). 그리고 '아시오니'의 기본형
'야다'(* )는 부부가 동침을 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상대에 대해서 잘 파악하
듯이 체험적으로 분명하게 아는 것을 가리킨다(겔 15:7).
내 죄가 주의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 하나님께서 저자의 '우매함'을 알고계시되
너무나 분명히 알고 계시므로, 자연스럽게 저자의 '죄' 곧 '우매함'은 숨겨질 까닭이
전혀 없는 것이다. 다윗의 이러한 깨달음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
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하는 그의 또 다른 시편(139:1-4)과 너
무나 잘 부합된다.
=====69:6
만군의 주 여호와 - 우주 만물의 주(主) 이시며,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며 또한 크
신 능력으로써 대적들을 파하는 왕(王)이신 하나님을 암시하는 이 칭호는(VangEmeren)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특별한 보호의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시사한
다(7:5).
주를 바라는 자로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케 마옵소서 - '주를 바라는 자'는, 다른
많은 백성들이 다윗의 대적을 좇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계속 다윗을 추종하
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곤경에 처해 있었던 다윗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손을 뻗
치 시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주를 바라는 자'로 불리울 수 있
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이 구원의 손길을 뻗치지 않으
실 경우, 그들은 불의한 자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게 되며 또한 그 자신들은 낙심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69:7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사오니 - 다윗이 원수들로부터 받았던 고난이 그의
개인적 실수나 잘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다윗은 다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곧 정도(正道)대로 행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탄식어린 고백은 그가 평소
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얼마나 열심이었던가를 잘 드러내어 준다
(44:22;렘 15:15 참조).
수치가 내 얼굴에 덮었나이다 - 44:15와 83:16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여
기서 '수치'(* , 켈림마)는 '공적인 굴욕으로 인하여 입게 되는 마음의 상처'
혹은 '패배와 속박으로 인한 정신적상처'를 가리킨다삼상 20:34;사 50:6).
=====69:8
다윗이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서 심지어 가족들로부터도
소외되는 처지에까지 이르렀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께서 혈육의 어머니와 형제
들에 의해서까지 오해를 받았던 것과 같다(마 13:57, 58;눅 2:48;요 7:1-10). 예수께
서는 바로 이와 같은 오해로 인하여 실로 엄청난 고독을 경험하셔야만 했다(마 8:20).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되고 - 여기서 '객이 되고'(* , 무자르)의 기본형
인 '주르'( )는 원래 '고개를 돌리다'의 뜻이며(KB) 여기서는 수동형이므로 '고
개 돌림을 당한' 혹은 '혐오의 대상이 된' 등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다윗
은 그 형제들, 특히 장형(長兄) 엘리압으로부터 많은 미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삼상 16:6-13;17:28).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 특히 그중에서도 가족에 대한 의존성이
유달리 강했던 고대 사회에서 가족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것은 충격적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Anderson).
=====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는 삼키고 - 여기서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은 협의적
으로는 (1)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안치한 일(삼하 6:12-19) (2) 언약궤를 훌륭하고 영
구적인 장소에 안치하려는 염원(132:2-5;삼하 7:2) (3) 성전 건축을 위해서 성심 성의
껏 그 재료를 수집한 일(대상 28:11-18;29:2-5) (4)성전 건축과 관련해서까지 솔로몬
에게 유언을 남긴 일(대상 28:9, 10, 20)등을 뜻한다(Rawlinson). 그러나 광의적으로
는 하나님의 백성, 곧 언약 공동체를 성결하게 지키려는 일까지도 포함된다(Calvin).
여기서 '열성'(* , 킨아트)은 '짙거나 붉은 빛으로 되다'라는 뜻이 있는 아
랍어 동사에서 유래한 '카나'(* )에서 파생됐으며,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뜨거
운 열정을 가리킨다(Keil). 따라서 '하나님의 집'을 위하는 그 뜨거운 열정이 하나의
불꽃이 되어 다윗의 뼈 속에서 타오르는듯 끊임없이 거세게 일었음을 시사한다(렘
20:9;23:9, Keil).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 문자적으로는 '당신을 훼방하는 자들의
훼방이 나에게 떨어졌나이다'의 뜻이다. 이는 다윗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에 몰두
함 우로써 불의한 자들로부터 당한 불이익을 가리킨다. 다윗이 이러한 불이익을 예상
치 못한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다윗은 다만, 주님의 일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자신의 마땅한 도리임을 알고 그 결과에 개의치 않은 채 그 길을 행하였을 뿐이
다. 이것은 예수께서 물욕(物慾)에 사로잡힌 자들에 의해서 더럽혀진 성전을 청결히
하는 일이 당위적(當爲的)이므로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게 될 것을 뻔히
예상하면서도 그 일을 담대히 수행하신 바와 동일하다(요 2:13-16). 그래서 사도 요한
은,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그 일에 관한 제자들의 깨달음을 "제자들이 성경 말
씀에 주의 전(殿)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말하면서,
예수님의 그 열심과 다윗의 열심을 동일시하였다(요 2:17).
=====69:10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 다윗은 불의한 핍박자들에게 무
자비한 무력 공격을 감행하거나 혹은 무절제한 욕설과 비난을 가하지 않았다. 다윗의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은 매우 잘 단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단하기 그지없는 강철
이라도 부드럽게 할 수 있었다(Calvin). 다윗은 다만, 하나님의 집이 당하는 불행에
대하여 애통하며 금식하여 기도 했을뿐이다(Keil). 다윗의 금식에 대해서는 35:13과
109:24 그리고 삼하 12:16, 22을 참조하라. 한편,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 나프쉬)는 원문상으로 다만 '나의 영혼'의 뜻이다. 따라서 개역 성경은 문맥에 비
추어 의역한 것이다. 원문대로 하자면 여기의 '나의 영혼'을 본 문구의 주어로 볼 필
요가 있다. 그럴 경우, 본문은 '나의 영혼이 곡하고 금식하였더니'로 번역될 수 있다
(NIV). 이처럼 '나의 영혼'이라는 허다하다(62:1;63:5, 8).
=====69:11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 10절의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
계하였더니'와 같은 뜻이다. 왜냐하면, '굵은 베'는 금식할 때에 혼히 착용했던 옷이
기 때문이다(왕상 21:27;느 9:1;단 9:3).
=====69:12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 '성문'은 재판관에 의해서 재판이 행하여지던 곳
이며(창 19:1;룻 4:1) 또한 상인들과의 상거래가 이루어지던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한담(閑談)이나 잡담을 늘어놓는 곳이었다. 그러나 여기의 '
성문에 앉은 자'는 비록 복수(複數)이기는 하지만, 한가하게 앉아있는 일반 서민들을
가리키지 않는 것 같다. 본 문구 중 '앉은 자'(* , 요시베)의 기본형인 '야솨
브'(* )가 공직(公職) 수행과 관련한 좌정(座定)을 가라킬 때 사용된다는 점에
서(왕상 2:12;왕하 13:13), 백성들의 송사를 담당하는 재판관이나 거기에 버금가는 왼
로(元老)들을 뜻할 것이다. 한편, '나틀 말하며'(* , 야 시후)의 기본형인
'시아흐'(* )는 '되풀이하며 험담하다'의 뜻도 내포한다(Gray G. Cohen). 결국
이는 상류 계급의 인사들이 공무(公務) 중 에도 다윗을 험담했음을 가리킨다. 추측컨
대, 이같은 상류층의 다윗에 대한 험담은, 백성들의 마음을 다윗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압살롬이 불의한 재판을 했던 사실(삼하 15:2- 6)과 일맥 상통할 것이다.
취한 무리가 나를 가져 노래하나이다 - 문자적으로는 '폭음을 한 자들의 노래가 있
나이다'라는 뜻이다. 본문은 심지어 술주정뱅이들의 입에까지 다윗을 조롱하는 말이
오르내리는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불경건한 조롱의 노래는 하나님을 경외하
며 하나님께 거룩한 찬송을 드렸던 다윗 자신의 내면 세계와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Briggs).
=====69:13
여호와여 열납(悅納)하시는 때에...주제 기도하오니 - '여호와'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호칭이다. 저자는 이 같은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당신의
백성을 지키시겠다는 언약이 신속히 이해되기를 하나님께 암시적으로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열남하시는 때'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이때를 현재적으로
보는 해석(Matthew Henry)이며 또 다른 것은, 이를 미래적으로 보는 해석(Calvin)이
다. 그러나 본문에서 다윗은 현재 닥친 위기 상황 중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위의 두해석 중 첫째 것이 보다 타당성이 있다. 사실,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환난의 때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때'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원수들로 말미암아 고통을 심하게 당하고 있을수록 그 백성에 대하여
더욱 간절한 동정심을 지니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들에게는 고통이 극심하여
하나님의 신실성을 의심하기 쉬운 때가 바로 '열납하시는 때'요 그래서 '기도해야만
하는 때'이다.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 얼핏 생각하기에 본문은 환난을 당
하고 있는 지금 당장이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때'임을 말하고 있는 앞 문구와 모순되
는 듯하다. 왜냐하면 본 문구는 기도 즉시 그 기도가 '응답'되리라는 시사를 주고 있
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신자들의 기도를 '열납하시는 때'와 구쳬
적으로 응답하시는 때가 동일하다고 봐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기도
를 '열납하심'으로써 신자들의 곤고한 형편을 파악하신 다음에는, 당신의 선하신 뜻
(롬 12:2)에 따라 적절한 때에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인자와...진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대표적 동기들이다(57
:3). 그중 '인자'(* , 헤세드)는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들을 향하여 품고 계시는
결코 변할수 없는 사랑을 뜻한다(51:1). 그리고 '진리'(* , 에메트)는 당신의
원수들을 징벌하게끔 만드는 공의로운 기준이라는 뜻으로 자주 사용되었다(57:3). 그
러나 이 문맥에서는 좀 다른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 앞에 '구원'
이라는 한정적 단어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진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
을 반드시 구원하시는 공의적 성실성을 가리킨다고 봐야 할 것이다(54:5;91:4).
=====69:14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짖 말게 하시고 - '수렁'은 2절에서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극한 환난을 가리킨다. 이처럼 기자는 '수
렁'이나 '물'(15절)과 갈은 이미지를 거듭 사용함으로써 자신에게 닥친 위협의 정도가
매우 심각한 점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 - 원문에는 복수로 되어 있다. 사실, 다윗을 대적하는 자들은 도
처에 깔려 있었다(4절).
깊은 물 - 이에 대해서는 2절 주석을 참조하라.
=====69:15
엄몰(淹沒)하거나 - 히브리어상으로 2절의 '넘치나이다'와 동일한 동사이다.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 여기서 '깊음'은 본절 앞 부분의 '큰 물'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깊음이 나를 삼키지'는 본절 앞부분의 '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
나'와 거의 동일한 뜻이다. 이처럼 저자는 유사 어구의 반복 사용을 통하여, 당면한
상황의 다급성과 기도의 간절성을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다.
웅덩이로...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 '웅덩이'(* , 베에르)는 파서 만
든 우물(창 21:25, 7), 구덩이(창 14:10) 혹은 무덤이나 스올(55:23 참조) 등을 의미
한다. 여기서는 마치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식욕을 지닌 괴물처럼 은유적으로 표현되
어 있다(Anderson).
=====69:16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 '여호와'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강
조하는 명칭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가리키는 '인자'(* )와 대
단히 잘 어울린다. 시인은 이러한 적절한 표현을 통해서, 당신의 보호하시겠다는 하나
님의 언약이 신속히 이행되기를 촉구하고 있다. 특히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은 절대로 변할 수 없음을 말하며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당하고
있는 백성들을 필연적으로 구원하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긍휼(* ,레헴) - '깊이 사랑하다'는 뜻의 '라함'(* )에서 파생된 것으
로 자연적인 유대(紐帶)에 뿌리를 둔 깊은 사랑을 뜻하며 특히 윗 사람의 아랫 사람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동정심을 가리키는 데 주
로 사용된다(왕상 8:50;렘 42:12).
=====69:17
주의 엎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 '얼굴을 숨기는 것' 혹은 '외면(外面)
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나 미움을 행위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실 뿐더러 곤고한 형편에서 빨리 구출해내달라
고 호소하고 있다.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 '내게 응답하소서'가 이미 앞에서 두 번씩이나 반복되었다(13, 16절). 저자는 이러한 반복을 통하여, 또한 '속히'라는 단어를 덧불임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곤궁한 형편에 처해 있었는지를 알리며 거기로부터의 구원을 강력히 탄원하고 있다.
=====69:18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 '가까이 하사'라는 표현은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용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열남하고 계시다고 느낄 만큼(13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 여기서 다윗은 다만 자신의 기도 응답이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그 응답을 촉구할 목적으로 이 표현을 쓴 것이다. 한편, '구속하시며'(* , 게알라)의 기본형인 '가알'(* )은 속전(贖錢)을 대신 지불하여 억압의 상태에서 구원해 내는 것을 가리킨다(출 6:6;사 52:3;렘 31:11). 이러한 표현은 본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구속 사역을 예표적으로 보여줌을 암시한다.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 '내 원수를 인하여'는 '원수들의 음모나 흉계 혹은 비난(13:4) 때문에'로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Rawlinson). 시인은 만일 경건한 성도가 대적들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조차 경멸당할 우려가 있음을 걱정하고 있다(Anderson). 한편, '속량하소서'(* , 페데니)의 기본형 '파다'(* )는 앞 문구의 '가알'과 것의 동일한 뜻의 동사이다.
=====69:19
나의 훼방 - '훼방'(* , 헤르파)은 '비난하다' 혹은 '조룽하다'를 뜻하는 동사 '하라프'(*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상대를 얕잡아 보고 도전적인 언사로서 비웃는 것을 가리킨다(삼상 17:10).
수치(* , 보쉐트) - '창피를 주다' 혹은 '부끄러워하다'의 뜻인 동사 '보쉬'(*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외부의 모욕적 언행에 따라 극도로 창피한 마음을 느껴는 것을 가리킨다.
능욕(* , 켈림마) - '상처를 입히다'라는 뜻인 동사 '칼람'(*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마음의 상처를 입을 만큼 치욕을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삼상 20:34). 내 대적(對適)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 하나님께서 '대적'들이 본 시편 기자에게 행하는 횡포에 대해서 철저히 알고 게시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즉, 하나님은 '대적'의 모든 횡포를 친히 보고 계시므로, 다윗의 고통도 알고 계시는 것이다.
=====69:20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 여기서 '훼방'은 대적들이 다윗의 과거 행적을 문제삼아 과장적으로 그에게 인신 공격을 가한 것을 말하는 듯하다. 한편, '상하여'(* , 솨브라)의 기본형 '솨바르'(* )는 '산산이 부서지다' 혹은 '산산 조각을 내다'의 뜻이다(출 34:1;신 9:17;10:2;사 21:9). 따라서 본문은 원수들의 '훼방'으로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음을 나타낸다.
근심이 충만하니(* , 아누솨) -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동사이다. 기본형 '누쉬'(* )는 '아프다'의 뜻이며, 이 기본형과 직접 관련있는 어떤 단어도 여기의 '아누사'를 제외하고는 성경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이 단어는 본 문맥에서, 마음의 고통으로 인하여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완전히 쇠잔하게 된 상태를 가리킬 것이다.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 '긍휼히 여길'(* , 라누드)의 기본형 '누드'(* )는 '불쌍히 여기다'의 뜻으로서, 다른 사람의 딱한 형편을 동정하여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가키킨다(Keil). 한편. '바라나'(* , 아카웨)의 기본형 '카와'(* )는, '간절한 기대감으로 고대하다'의 뜻으로서. 끈기있게 참으면서 자신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을 가리킨다(창 49:18;사 40:31). 따라서 이는 다윗이 오랫동안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고 동정해줄 친구를 찾아 기다렸으나, 발견치 못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과연 다윗에게는 실제로 그러한 친구가 없었을까 ?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다윗의 휘하에는 적지 않은 충성스런 막료(幕僚)들
이 있었다(삼상 22:2;삼하 23:8-39).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아주 절친했던 자들로부터까지 모욕당한(8절)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줄 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일 듯하다. 한편, 본문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한 수난과 고독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Alexander). 예수는 고난당하실 즈음에, 당신을 궁휼히 여길 아무도 없으셨다.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던 것이다(마 26:56).
=====69:21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을 주며 - 이러한 다윗 예언적 묘사는, 예수 그리도의 수난에 의해 그대로 성취되었다(마 27:34). 즉, 무리들은 기진 맥진하신 예수께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한 것이다. '쓸개'(* ,로쉬)는 '독'(毒)을 가리키기도 하지만(호 10:4), 셈어에서는 '독'과 '쓴 것'을동일한 개념으로 본다는 점에서, 여기서는 '쓴 것' 곧 '쓸개'를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Keil). 70인역도 '쓸개'(* , 콜렘)로 번역하였다.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 이 문구도 예수님에 의해서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즉, 예수꼐서 십자가에 달려 목이 마르실 때(요 19:28, 29, 무리들은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게'한 후 그것을 갈대에 꿰어 예수님의 입에 대어 마시게 하였다(마 27:48). 이 '초'(* , 호메츠)는 중근동에서 노예나 죄수들에게 주었던 시큼한 술로서, 최소의 양(量)으로써 그둘의 갈중을 해소키 위해 사용되곤 하였다(James Anderson). 따라서 이처럼 '초'를 마시게 한다는 것은, 예수를 마치 죄수나 노예로 취급한 것과 결코 다를 바 없었다.
=====69:22
여기서부터 28절까지는, 다윗의 독특한 시적 표현으로써 악인들을 징벌해 달라고 간구한 내용이다.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 '저희 앞에 밥상'은 악인들의 부요함을 상징한다(겔 23:41;눅 16:19). 따라서 본문은 악인들이 그들이 누리는 부요로 인하여 도리어 절망하게 해달하는 간구이다. 추측컨대, 이 악인들은 자신들의 부요를 자랑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멸시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지도 않고 부요하게 지냄에 따라, 하나님은 인생의 일에 관여치 않으신다고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그들은 의인에 대한 훼방을 그치지 않았을 것이나, 그러한 계석적인 훼방은 결국 그들 자신들에게 임할 진노를 쌓는 꼴이었다(롬 12:20).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 이것도 앞 문구와 동일한 의미이다. 즉, 악인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평안'으로 인하여 스스로 교만해졌으니(살전 5:3). 그 결과 하
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기에 이르도록 해달라는 뜻이다.
=====69:23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 롬 11:10에 인용된 문구이다. 악인들은 그
들의 눈을 악행을 일삼을 대상을 찾는 데 사용 하였다. 이에 따라, 저자는 그들을 소
경으로 만들어 그들이 더 이상 악행을 하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 문구를,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한 자들에게 각종 질병의 저주가(신 28:27,28)
임하게 해달라는 간구로(Anderson), 혹은 그들의 판단력을 상실케 하여 더 이상 흉계를 꾸미지 못하게(사 6:9, 10) 해달라는 간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Rawlinson).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 '허리'는 힘이나 능력을 상징한다. 악인들은 그 '힘'을 의인을 핍박하는 데 사용했다. 이에 따라, 저자는 그들이 더이상 그 '힘'을 악용하여 의인들을 못살게 굴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69:24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 79:6;겔 21:31;22:31;습 3:8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이는 하나님의 철저한 보응이 악인들에게 임하기를 간구하는 말이다.한편. 본문은 언약에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저주를 연상시킨다(신 28:15, 45).
=====69:25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 고대 중근동에서는, 자신의 집을 파괴당한 사람을 가장 불행한 사람 중의 하나로 여겼다고 한다(Keil). 따라서 본문은 악인들이 의인들을 박해하여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그 악인들도 마땅히 보응을 받아 그렇게 되도록(마 23:38)해 달라는 간구이다. 여기서 '거처'(* , 티라)는, '둘러싸다'를 뜻하는 동사 '투르'(* )에서 파생되었으며, 둥그런 모양의 촌락을 이루는 유목민의 천막(창 25:16)을 가리킨다(Keil). 그 천막에 의해서 둘러싸여진 공간에는 가축들이 방목(放牧)되었다(민 31:9, 10).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 이는 앞 문구와 거의 동일한 뜻이지만, 앞 문구보다 그 의미가 훨씬 강하다. 즉, 여기서는 악인들의 죄에 따른 영향이나 결과가 그 후손들에게까지 미치게 해달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주는,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러 삼, 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라는 말씀을 연상시킨다.
=====69:26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여 - '주의 치신 자'는, 다윗이 자신에게 닥친 시련
이 하나님의 허용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미 다윗은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 앞에서도 떳떳하다는 뜻을 표한 바있다(5, 7절) '주의 치신 자
'는 인류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대신 형벌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다(요 1:29). 아무튼 다윗 시대의 악인들이나, 예수 그리스도 시대의 악인들 모두, 하
나님의 징벌을 당해 고통을 당하는 자를 동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애매히 '핍박'함으로
써 그 고통을 가중시켰다.
=====69:27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 '더 정하사'(* , 테나)의 기본형 '타나'(*
)는 단순히 '주다'의 뜻이다. 본 문구는 악인들을 타락한 심령 그대로 방치하여
(롬 1:24, 28)). 그들도 하여금 계속적으로 죄악을 범하면서 살게끔 내어버려 두시라
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그들로 하며금 선을 행치 못하게 하거나 또
는 그들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조장 하시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할 경우, 스스로의 타락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속 죄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사 26:10).
주의 의(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서서 - 악인들이 계속적으로 악행 가운데 있음으
로 말미암아 결국 구원을 경험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뜻이다(Anderson).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塗抹)하사 - '생명책'이란 의인의 이름이 기록된 천상의
명부를 가리킨다(출 32:32;사 4:3;단 12:1;계 3:5;13:8). 이 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구원과 온갖 축복들을 누리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영원히 멸망당하고 만다. 고대 이
스라엘 백성듸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 백성 중
악인들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바되고, 이에 따라 그들
은 구원받은 자의 반열에 끼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69:29
여기서 다윗은 악인과는 대조적인 자신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 '가난하고'(* , 아니)는 '괴롭히다' 혹은 '압제하다'를 뜻하는 동사 '아나'(*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약한', '고생하는', '겸손한' 등의 뜻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결핍 상패를 강조하는 '에브욤'(* )과는 좀 다르다. 즉, '아니'라는 단어에는 자신의 무능과 그로 인한 비통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Leonard J. Coppes). 한편, '슬프오니'(* , 코에브)는 '아프다' 혹은 '슬프다'를 뜻하는 동사 '카아브'(* )에서 파생되었으며, 육신적 혹은 정신적 고통을 막룐하고 그로 인하여 느끼게 되는 비통함을 가리킨다(욥 33:19;셀 28:24). 이처럼 다윗은 현저히 낮아져 있는 상태라는 점에서, 스스로 자고(自高)하여 의인들을 모해하려는 악인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22절).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 높아지고자하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낮아지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는 주님의 교훈(마 23:12)에 비춰 볼 때 이러한 기도는 지극히 합당하다. 어쨌든 이는 원수들의 훼방에서 벗어나게 하심으로써, 더 이상 그들에 의해 짓밟히는 비천한 지경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간구이다.
=====69:30
여기서부터 마지막절까지에서는 하나님이 의인을 구원하시리라는 확신과 그에 따른 찬양이 나오고 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 다윗은 비록 여전히 악인들의 핍박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믿음의 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리라는 선취적(先取的)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히 11:1).
=====69:31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서 전혀 흠이 없는 '소'임을 말해준다(레 11:3, 4).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 하나님께서는 값비싼 제물을 드리는 의식적(儀式的) 제사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의 제사를 더 좋아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의식적 제사를 무가치하게 본 것은 결코 아니였다. 다만 그는 만일 감사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아니한 의식적 제사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차라리 의식이 없되 감사하는 마음의 제사를 더 기뻐하신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듯하다. 다윗이 환난을 당하고 있으면서 하나님께 행한 서원에서 자주 번제 혹은 감사제를 말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54:6;56:12;68:29). 추측컨대 다윗은 환난에서 구출함을 받았을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의 제사뿐만 아니라 의식적 제사도 함께 드렸을 것이다.
=====69:32
온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 '온유한 자'(* , 아나윔)는 29절의 '가난하고'와 동족(同族)의 단어로서 복수이다. 이는 다윗과 같이 자신의 무능력을 알며 그럼으로써 애통하는 마음을 소유한 자들을 가리킨다. 한편,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는 '온유한 자'들이 다윗이 구원받은 일로 말미암아 다윗과 함께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난 그 일로 인하여 기뻐한 것이다(64:10).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 - 더 이상 의기소침하지 말고 세상에 대하여 담대한 마음을 가지라는 권면이다. 앞 문구는 다윗이 악한 자들의 훼방에서 구출됨을 보고 의인들이 기뻐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반면, 본 문구는 의인들이 그 예인을 실제로 성취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예언된 바를 선하게 실현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이다.
=====69:33
히브리 원문에는 초두에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 )가 있어서, 본절이 32절의 이유임을 말해준다.
여호와는 궁핍한 자를 들으시며 - '궁핍한 자'(* , 에비오님)는 일반적으로 경제적으로 곤란을 당하는 사회적 약자를 가리킨다(29절). 여기서는 32절의 '온유한 자'와 동일하게 '의인'(28절)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32절의 '온유한 자'가 심령의 상태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여기의 '궁핍한 자'는 삶의 현장에서 당하는 빈곤을 강조한다. 아마도 이 의인들의 이러한 경제적 빈곤은 (1) 권세를 잡은 악인들에 의한 수탈이나 (2) 불의한 방법에 의한 돈 벌기를 기피하였기 때문에 발생하였을 것이다. 한편, '들으시며'는, (1) 하나님이 의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며 (2) 더 나아가 그 기도에 응답하며 구원할 채비를 하고 계심을 암시한다.
자기를 인하여 수금(囚禁)된 자 -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마 5:10)로 표현될 수 있다.
=====69:34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의인들이 그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것을 나타내는 시적인 표현이다. 즉, 의인들은 구원받은 벅찬 감격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며, 다윗은 그 감격을 나누고 싶어서 심지어는 지각이 없는 자연계도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대열에 참여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자연 만물은 결코 찬양의 대열에 끼일 수 없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능력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암시적으로 찬양을 드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8편;148:3 등 참조). 결국 본문은 위대하신 하나님께 드이는 찬양은 우주적인 성격을 띠고도 남음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사 44:23;55:12). 만일 이처럼 지각 없는 자연 만물도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대열에 끼어야 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인간(창 1:26, 27), 특별히 구원받은 백성 들은 더 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결코 게을러서는 안 될 것이다.
=====69:35
이 예언은 1차적으로는 다윗 당시의 예루살렘 구축 혹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벧론 포로생활에서부터 해방되어 약속의 땅으로 귀환함으로써 성취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호적 섭리에 따라 구원받게 됨으로써 성취되어가고 있으며 또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 여기의 '시온'은 구약적 관점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고 신약적 관점에서는 영적 이스라엘(롬 9:6, 30)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항상 보호하셨고 또한 지금도 보호하고 계신다.
=====69:36
그 종들의 후손이...이를 상속하고 - 약속의 땅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영원히 소유될 수 있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팔레스틴을 소유하였으며, 신약 시대에는 그 땅의 실체인 하나님 나라를 영적 이스라엘이 소유하고 있다. 더구나 영적 이스라엘은, 세상 끝날에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을 자신의 영원한 기업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벧후 3:13).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거하리로다 - 이는 어떤 자가 기업을 누릴 수 있게 될지를 말한다. 즉,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 곧 (1) 하나님을 증거하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며(마 10:32) (2) 하나님안을 구원자로 의지하는(잠 16:20) 자가 그 기업을 소유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