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제
135편
=====135:1
113:1과 거의 동일한 구절이다.
=====135:2
전정에(*
, 베하츠트) - 직역하면 '뜰에' 이다. 여기서 '뜰에'라는 표현만으로 본 시편의 수신인이 제사장들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포함된다는 증거로삼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시편의 전체 분위기와 19,20절 내용 등으로부터 그 같은 증거를
추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요컨대 본 시편의 수신인은 일차적으로 시편을 노래하며 여러가지 악기들을 연주하였던 레위인들과 트럼펫을
불고 의식적(儀式的) 기도문과 축복을 반복했던 제사장들이지만, 경건한 이스라엘 회중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하겠다(Alexander).
=====135:3
여호와...여호와 - 여기서 '여호와'란 호칭이
반복되고 있는데 본절을 포함한 1-6
절에서 계속되고 있는 여호와의 호칭의 반복은 광야 시대 때 제사장들이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축복할 경우 여호와의 이름을 반복하였던 사실을 상기시킨다.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인 이스라엘 예배 공동체는
제사장이 세 차례에 걸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
면 동일하게 그이름을 세 차례 반복하여 화답하곤 하였는데, 이같은
예식은 바로 민
6:22-27에 그 근거를 두었다고 한다(Perowne).
그 이름이
아름다우니(*
, 키나임) - 직역하면 '(이것이) 사랑스럽기
때문이다'이다 . 평행법을 따르면 '이것'이란 여호와의 이름 혹은 여호와 자신을
가리
킬수 있겠는데 이 경우 본 구절의 번역은 '하나님의 이름(혹은 하나님)은 아름답기 때
문이다'가 되겠다. 그러나 본문의 유사
구절인 147:1에 의하면 '이것'이란 '찬양함'이
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본
시편은 대부분 그 자료를 다른 시편(134, 136, 147편 등)에서 빌리고 있다는 학자들의
견해를
중시할 때 '이것'을 '찬양함'으로 보고 본절 처음부터 '아름다우니'까지를 재
번역하면 이렇다: '찬양하라 여호와는 선하시기
때문이다. 시편으로 그의 이름을 찬양
하라 찬양은 사랑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135:4
야곱 - 시편에서 본 용어는 '이스라엘'의 동의어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 1-3절의 찬양의 이유들 중 첫 번째로 하나
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사실을 들고 있다. 이스라엘의 가치는 그 민족의 숫자나 부강
함 등 외적인 상태에서 발견할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들을 택하셨
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Driver, Greenberg).
=====135:5
내가
알거니와(*
, 아니 야다티) - 여기서 대명사 '아니'(*
)는 강조사로서 본문이 저자의 강한 개인적 확신을 담은
구절임을 밝혀 주는
구실을 한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탁월성과 지고성(至高性)에 대해 세상이
도무지
째닫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나'만은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체험에 의거하여 확신있게
말하 수 있다는
것이다(Alexander).
=====135:6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 - 자연계의 모든 힘과
현상들을 지배하시는 하나님
의 절대 우월성은 본 시편 15-18절에 언급된 것과 같은 이방신들의 무익성에 관한 언
급과
첨예하게 대조를 이루며, 이러한 대조적인 묘사는 115:3 이하에서도 발견된다.
천지와...다 행하셨도다 - 여기서
'천지'는 문자 그대로 땅과 하늘 등의 온 우주를
가리키는데 그 우주 구석구석, 특히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속까지라도
하나님의 계
획과 손길이 미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본문은 강조하고 있다(Barnes). 결
론적으로 본절은
자신이 만든 피조 세계의 주인이 되셔서 그 속의 모든 현상, 힘까지
도 주관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우월성을 찬양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135:7
안개를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 6절에서 여호와의
통치가 우주 만물에까지 미친다
는 사실을 노래하였다면, 본절에서는 그의 권능의 산물로서의 몇몇 자연 현상들이
언
급되고 있다. '땅 끝'은 '케체
하아레츠'(*
)로서 기체 따위가 그 위
에 모여드는 것처럼 보이는 지평선, 수평선 혹은 바다를 가리킨다. 그리고
'안개'에
해당하는
'네사임'(* )을
70인역(LXX), 벌게이트역(Vulgate), 영역본 NIV,
RSV 등은 '구름'으로 보고 있고, KJV의 경우는
'수증기'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여
기서 중요한 사실은 '네사임'의 정체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일상적인
자
연 질서 속에서 그가 원하시는 무엇을(그것이 안개이든 수증기이든 구름이든 간에) 일
으키시는 능력과 지혜가 있으신 분이라는
사실이다(욥 26:8; 38:25-38).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 이것은 자연 현상의 근원을 깨닫게
해준다. 즉, 인
간은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는 것에 대해 그 이유나 근원을 알지 못한 채 자연계의 한
현상으로만 알고 있는데
바로그 현상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10:13; 51:16).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 - 하나님께서 마치 바람을 저장소에 넣어두고 때
에 따라서 그것을 사용하시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 표현의 핵심도 하나님께
서 자연계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에 두어져 있다(욥 38:22).
=====135:8
저가 애굽의 처음 난 자를...치셨도다 - 이것은 애굽
위에 내렸던 최종적인 그리고
가장 큰 재앙이었다. 뿐만 아니라 애굽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자녀들을 기꺼이 가도록
허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그래서 이스라엘로 자유를 확보하게 해주었던 중요한
심판이었다. 애굽 위에 내렸던 모든 재앙들를 열거하는
대신 이러한 심판이 이곳에서
선택된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하나님을
찬
양해야 할 이유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그들의 대적을 심판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135:9
징조와 기사 - '징조'에 해당하는
'오토트'(* )는 신적(神的) 능력의 증표
혹은
증거들을, '기사'에 해당하는
'모프팀'(* )은 경감을
불러 일으키는
놀라운 일을 각각 의미한다. 물론 이것들은 출애굽기에 기록된 바 애굽 위에 내린 재
앙을
암시한다(105:27-36).
바로(* , 파르오) - 이는 '커다란 집'을 뜻하는
애굽어 '프르'로부터 유래
하였다. 따라서 이 용어는 왕궁을 가리키는 용어들 중의 하나였는데 후대에 가서 이
용어는 왕의 칭호가 되었다고 한다(IDB, HDB).
=====135:10
많은
나라(* , 고임) - '고임'의 단수형은
'이방'(* )이다. 어떤 학자
는 '고이'가 이스라엘 혹은 유다를 가리킬 때는 반드시 범죄한
이스라엘(혹은 유다)를
뜻한다고 주장한다(신 32:28; 삿 20:20; 사 1:4; 10:6, Oesterley). 그러나 그것이
절
대적인 법칙은 아니라는 사실이 출 19:6을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너희가 네게 대하
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여기서 '거룩한 백성'의 '백성'은 '고
이'인데 분명 여기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언약에 신실한 이스라엘을
지칭하고
(수 3:17; 4:1). 한편, '고임'은 대부분의 경우 11절에 언급되고 있는 것과 같은 이방
인 국가들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135:11
시흔(민 21:21; 신 2:30-32)과 옥(민
21:33; 신 3;1-6)은 후일 이스라엘 12지파가
정착했던 지역에 속한 원주민들 중 최초로 이스라엘에게 패퇴하였던
원주민들의 왕들
인데, 그이유 때문에 그때 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가 이스라엘에게 빼았겼던 요단 강
동편 지역은
하나님 백성들의 전승 속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Aharoni). 여기에는 이스라엘이 정복하였던 모든 나라의 왕들의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열방들과 그 왕들을 복속시킨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찬양의 기초가 되고
있다(Anderson).
=====135:12
기업(* , 나할라) - 일반적으로 일종의 분깃(몫)으로
지파, 혹은 개인에게
배분되었던 땅, 곧 상속되는 재산 혹은 가족의 소유물을 뜻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흔
히 여호와의
기업으로 묘사되고 있다(28:9). 본절에서는 '기업'이란 말이 반복되고 있
는데 이것은 일종의 시적인 표현으로서 가나안 땅이 이전까지는
이방 족속들의 거주지
였다가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차지가 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한 것임을 강
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135:13
주의
이름(* , 쉼카) - '쉼카'는 우선 '구원의 사역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의미한다(20:1). 이런 의미에서 '쉼카'는 '계시 속에 드러난 그의 활동성(운동
력)을
대변하는 상징'과 같다(Eichrodt). '쉼카'는 흔히 여호와의 인격을 반영하는 것
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Johnson), 때때로
여호와 당신을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이기도
하다(68:4). 그러나 본문의 '쉼카'는 무엇보다도 문맥 속에서 그
의미가 규정되어야
한다. 본 문맥이 이방 국가들에 대한 여호와의 위대한 승리들을 다루고 있음을 고려할
때 '쉼카'는
'여호와의 명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반절의 '기념'의 히브
리어는
'자케르'(* )로 '선포된 내용의 실행으로 인한 평판'을 뜻하는데
그렇다
면 상.하반절에 나타나는 '쉼카'와 제케르'는 평행적 용어로 보아도
무난하다(출
3;15).
=====135:14
여호와께서...여기시리로다 - 원문에는 본 구절
앞에 '이유'를 의미하는 접속사
'키'(* )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 즉 명성이 영원할 것에 대한 근거
를 암시한다. 그분의 명성이 영원할 이유는 과거에 그랬듯이 미래에도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의 의미를 규정하는 일은 쉽제 않지만
신 32:36이 힌트가
되고 있다. 신 32:36은 광야를 통과하고 아모리와 바산의 왕들을
진멸하고 결국 약속의 땅 접경 지대에 다달았을
때 모세가 부른 찬양의 일부이다. 하
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지켜 보호하신 사실에 감격하여 지은 찬양에
나오는 가사가 바로 그 구절이라면 본절을 문자 그대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그의 백
성을 긍휼히 여기사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로 해석하는 일은 가능하겠다. 더군다나 여
기서 '판단하다'는 히브리어는
'단'(* )인데 그 뜻 중에 '옹호하다',
'구원하
다'등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해석이 견강 부회적(牽强附會的)인 해석이 아니라는
확증이 되어 준다.
=====135:15
사람의 수공물이라 - 시편 기자는 분명히 여기
우상들을 이방 나라의 신들과 동일
시 하고 있고 그 신상들을 신(神)으로 섬기는 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이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잇다. 이와같이 일차적으로 시편 기자는 조잡한 형상의 우상을
비난하고 있으며,
특히 유일신론적 관점에서 우상 숭배의 무익성을 아울러 분명히 밝
히고 있다(Mowinckel).
=====135:16
입이 있어도...눈이 있어도 - 우상은 대체로 인간의
그것과 모양새가 동일한 입,
눈 그리고 코, 손, 발 등을 가지고 있으나 그 기능은 전혀 살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상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을 만든 인간에게도 비교할
것이 못 된다. 이러한 우상의 특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결국 그 우상과 능력과 위엄의
여호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증학 위함이다.
=====135:17
아무...없나니 - 여기서 '아무'의 히브리어는
'예쉬'(* )로서 고유한 어떤 의
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용어가
사용되면 이 용어가 꾸미는 말은 그 의미
의 강도가 세어지게 된다. '예쉬'가 꾸미는 말은 '없나니'인데 그렇다면
'전혀...없나
니'로 해석하면 '예쉬;의 효과가 드러난 것이 되겠다(삼상 21:9).
=====135:18
그것을 만든 자와...같으리로다 - 그 외적인 모습뿐
아니라 내적인 상태에 있어서
도 우상과 그 예배자는 동일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상 숭배자의 우상
숭배
행위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얼마나 큰 신성 모독 죄를 짓는 것인가를 알 필요가 있다.
우상 숭배자는 인간이나 짐승의 모습을
띤 조각을 만든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사
실은 그가 그 조각을 만들 때 나름대로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하며 그
작업을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자기 자신이나 짐승, 즉 하나의 피조
물로
전락시켜 버리는 행위이다. 우상 숭배자가 우상을 제작하는 행위가 가증스러운
이유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 행위는
엄천난 신성 모독적 행위인 것이다. 이 같은
행위를 하는 숭배자야 말로 그 내적 상태가 우매하기 짝이 없는
우상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3).
=====135:19
어론의
족속(*
, 베트 아하론) - 직역하면 '아론의 집'으로 종교
지도자를 배출하던 아론의 가문을 가리킨다. 아론의 가문에 속한
자손들은 다양한 성
소 봉사를 위하여 성별된 자들이었다(115:10-12). 그들이 성별된 것은 성소 봉사라는
목적을 위해서지만 더 중요한 목적은 여호와를 찬양하고 그를 송축하는 일이다.
=====135:20
레위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 115:9;
118:2에 19절과 본절과 같은 유사한 명령
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나오지 않았던 한 부류가 바로 레위 족속이다. 여기
'레위 족
속'은 '베트
할레위'(*
)인데 이것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임무를 맡던
레위 가문을 강조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바벧론 포로 이후에는
제사장들(혹은 아
론 가문)이 성전의 모든 중요한 임무들을 주도적으로 담당했다고 한다(Rowley). 19절
과
본절은 성전의 지도자들, 지도자들의 명령을 받는 관리들을 포함한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드릴 것을 명하고 있다. 그럴만한 이
유는 인간이 만든 우상과는 달리 하나님은 실제 살아계셔서 그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
시고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8-12절).
=====135:21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 바루크 예화
미치온) - 직역하면 '시온으로부터 여호와를 송축하라'이
다. 이것은 '시온에서 여호와께 찬양하라'는 뜻이다(Perowne).
128:5; 134:3은 여호와
께서 시온에서 축복하신다고 선포하였던 반면, 본절은 시온에서 그의 백성들이 여호와
를 찬양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시온이 여호와께 예배 드렸던 곳으로
그 백성들이 그를 만나는 장소였고, 그분뿐 아니라 그
백성들이 함께 거하는 장소가
그곳이었기 때문이다(사 10:24). 이제 그 백성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
찬양 소리는 전세계를 향하 펴져 나갈 것이다.
시편 제
136편
=====136:1
여호와께
감사하라(*
, 호두 라이화) - 이 구절은 시편의 제5권
에서 뿐 아니라 역대기에서도 자주 사용되고 있는 송영의
한 형태이다(106:1;대상
16:34).
그는
선하시며(* , 키 토브) -
직역하면 '선하시기 때문이다'이다. 여기
서 '토브'(* )는 '도덕적, 영적 혹은 실제적 삶의
기준에 일치하는 행위를 하는
존재'를 암시한다(Hempel). 여기서 시편 기자는 먼저 하나님이
찬양받으시고 우리가
그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란 그가 우선 우리의 도덕적, 영
적,
실제적(삶의 영역을 의미함) 표준이 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 구절은 의식
용어로 자주 사용되기도
한다(106:1;107:1;118:1).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키 레올람 하스도) - 여
기서 '하스도'(* )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맺은 언약에 대해 신실하신 하나님의
자비의 속성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또한
'레올람'(* )은 '영원히'
란 뜻을
지닌다. 그리고 '키'(* )는 '이유'를 뜻하는 강조 접속사이다. 그렇다면 본
문은 상반절에 선포된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명령의 근거로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여
호와께 감사해야 할 이유는 그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영원히 성실히 이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한편 '키 레올람 하스도'는 본 시편을 구성하고 있는
스물 여섯절 각각의 후렴구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 같은 외형적 특성 때문에 본 시편
은 '위대한 할렐'(great Hallel)로 불리운다(학자에 따라서는
120-136편 혹은 135,
136편 혹은 본 시편만을 'great Hallel'로 인정한다). '위대한
할렐'외에 '할렐 시편'
도 있는데(113-118편), 전통적으로 이와 같은 시편들은 유월절을 포함한 중요한 연중
절기마다 사용되었다(Anderson). 그 절기 때 본 시편 각각의 상반절과 같은 내용의 주
제가 낭송되면 그때마다 후렴구와도 같이
'키 레올람 하스도'가 제창되었다. 주제 선
창은 레위인들이 하였고 후렴구 제창은 성가대원 혹은 회중 전체가
하였다.
=====136:2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
, 엘로헤 하엘로힘) - 직역하면
'신들 중의 하나님'이다. 이 구절은 신 10:17을 회상케 한다:"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본 표현은 다신론적(多神論的) 배경 속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만 하나
(Kraus), 현 문맥 속에서는
'진정한 신, 참신이신 하나님'을 뜻하는 바 비교가 안 될
만큼의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무난하겠다(Henton
Davies).
=====136:3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
, 아도네이 하아도님) - 직역하면
'주들 중의 주'이다. 여기서 '주들'이란 땅 위의 모든 권력자들을 뜻한다.
예를 들면
왕들, 군주들, 통치자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바로 그 권력자들보다 월등하신 분이 하
나님이시라는
것이 본문의 강조하는 바이다. 이것은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한 칭
호이기도 하며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기 위하여 땅 위에
오신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칭호이기도 하다(계 19:16).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이 '주'를 '온 땅의 주'로 부르고
있다(97:5).
=====136:4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 여기서의 '기사'는
'니플라오트'(* )로서 구
약
성경 전체에서 45번, 그중 시편에서만 27번 등장하는 용어인데 대부분의 경우 하나
님의 창조사역, 그분의 심판 및
구속(26:7;71:17;75:1;78:4, 11)을 가리키는 말로 사
용된다. 본 문맥에서는 특히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는데
이 구절은 하나님만이 창조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계속되고 있는 주제인 바 피조 세계의 그 어떤 존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월등하
신
하나님의 또 다른 증거가 된다(Anderson).
=====136:5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 - 이는
잠 3:19 하반절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렘
10:12).
지혜(*
, 테부나)는 특별히 창조 사역 가운데 드러난 신적(神的) 속성 중
의 하나이다(104:24;욥
9:10).
하늘(* , 솨마임)은 '땅의 덮개'
혹은 '창공'(150:1)이라 불리우는 영역을
뜻한다. 고대인들에게 있어 이 '창공'(궁창)은 금속을 부어 만든
틀과 같은 구조를 가
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네가 능히 그와 함께 하여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
을 펼 수
있느냐"(욥 37:18). 여기서 거울은 흔히 윤기나는 청동으로 만들었다(출
38:8). 또한
신 28:23에서 하늘은 '놋'에 비유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솨마임'
은 하나님과 천상적 존재들의 거처를 암시하는
말이다(123:1). 한편 '솨마임'은 하나
님의 이적적인 사역을 찬양하는 인격적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19:1;89:5).
=====136:6
땅을 물 위에 펴신 이 - 여기서 '펴신'은
'로카'(* )로서 '두들기다' 혹은 '두
들겨 펴다'를 뜻하는데 본절에서 땅은 마치 얇은 금속
물체를 물 위에 펼친 무엇과 같
이 회화적으로 묘사되었다(사 42:5;44:24).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따르면 땅은
동시에 산의 기초가 되기도 하는 기둥들에 의하여 지탱되면서 거대한 대양의 물에 의
존하고 있다고 한다(창
7:11;49:25;출 20:4;신 33:13;삼상 2:8;욥 26:10;잠 8:29;욘
2:6).
=====136:7
큰
빛들(*
, 오림 게돌림) - 구약 성경에서는 이곳에만 나오
는 용어인데 이것은 막연한 광선이 아니라 발광체, 즉 빛을
내는 물체를 뜻한다(창
1:14-16). 여기서는 해, 달, 별 등과 같은 존재를 가리킨다.
반즈(Barnes)는 다음과
같이 빛들에 대한 감흥을 적고 있다:'눈으로 볼 수 있는 우주 안의 모든 아름다움, 모
든
생명체인 식물계와 동물계에 드러난 미(美)와 활기, 거기에 진정한 생명력과 행복
이 넘쳐나 보인다. 이러한 것들은 암흑이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
들이다. 행복의 상징, 기쁨의 근원, 제공자, 미의 계시자, 그것이 바로
빛이다. 이러
한 빛의 특성을 생각하는 자로서 그 빛의 창조자를 찬양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
=====136:8
해(* ,
쉐메쉬) - 고대인들은 '쉐메쉬'를 매우 중요한 신(神)으로 간주하였는
데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에는 이 사실에 관한 상당히 많은
근거들이 있다(Kraus). 메소
포타미아에서 태양신 솨마쉬는 공평과 정의의 지탱자로 간주되었는데 예를 들어서 잘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을 포함하고 있는 비문을 새긴 석기둥 위에는 솨마쉬가 함무라비
에게 법을 준 자로 묘사되어 있다(ANET). 반면 구약에서
'쉐메쉬'는 하나님의 작품이
며 따라서 모든 경배는 창조주 하나님께만 돌려야 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하나님이 해
를 위하여
장막을 펴신다는 식으로 표현한 곳이 있는데 이것은 비유법의 일종으로 해
가 움직이는 길을 가리키는 표현이라
하겠다(19:4).
=====136:9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 여기서 '별들'에
해당하는 '코카빔'(*
)은 흔히 운율를 맞추려는 주석가들의 노력 때문에 삭제된다. 창 1:16에도
'별들'
은 생략되고 달만이 밤을 주관하는 발광체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맛소라 본문을 존
중하는 입장에서, 반즈(Barnes)의
다음과 같은 주해처럼 본문은 별들을 포함함 밤의
주관자, 달의 영향력을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됨이 마땅하다:'그
움직임에 있어서
조화와 질서를 드러내는, 밤을 덜 혐오스럽게 덜 공포스러운 것으로 바꾸는, 밤에 의
해 숨겨진 수많은
하늘의 실체들을 드러내 주는, 뿐만 아니라 밤바다를 향해하는 항해
자들의 길을 밝혀주는 달과 별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하게
한다.
=====136:10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 여기서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 레마케 미추라임 비브코리헴)는 직역하면 '그
들의 장자 안에서 애굽을 치신 이에게'이다. 단어의 배열 구성을 보면 '애굽'에
해당
하는 '미츠라임'(* )이 '장자들'을 뜻하는
'베코리헴'(*
) 보다
앞에 나와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치신 것은 일차적으로는 '장자들'이지만 본질적으로
는 애굽 국가 그 자체였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이 애굽을 치신 것은 그의 백성을 향한
자비의 발로였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애굽을 치신 행위는 속박으로
부터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뜻한다. 애굽을 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종살이의 속박
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 하나님의 사역을 출애굽이 인류 구원의
모형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Barnes).
=====136:11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 이스라엘이
애굽 땅으로부터, 더 구체적
으로는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된 것을
가리킨다(출18:1;20:2;신1:27;4:20;5:15).
=====136:12
강한 손 - 이 표현은 신명기에서 자주 볼 수
있으며(신 4:34;5:15;7:19;11:2;26:8),
문자적으로는 대적하는 모든 세력을 휘어잡거나 진압할 수 있는 손을
뜻한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억눌린 백성들을 구원하고 대적들에 대한 심판을 효과적으로
수행하
기 위한 항거할 수 없는 힘을 가리킨다.
펴신 팔로 - 적을 치기 위하여 팔을 뻗듯이 강력한 힘을
사용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출 6:6;신 4:34;5:15;7:19;26:8;렘 32:21).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능력을 사용하신 일이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인 까닭에 대해 어떤 학자는 그 구원의
지속성을 으뜸으로
내세운다. 사실 이 사건 이래로 세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중단된 적은 없었다. 이제 그 구원 사역은
주님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Barnes).
=====136:13
홍해를
가르신(* , 고제르 얌 수프) - 여기서 '얌 수프'(*
)의 문자적인 뜻은 '갈대의 바다'인데 진보적인 학자들은 '갈대'에 초점을 맞추어
'얌 수프'가 바다가 아니라고 강변(强辯)한다. 그들은
아카바만이나 수에즈만에는 갈
대가 없으며 따라서 '얌 수프'는 수에즈만 북방의 습기가 많은 지역 혹은 익명의 내륙
지방을
가리킨다고 전제한 수 따라서 모세가 가른 것은 바닷물이 아니라 습기가 많은
지역에 서식하는 갈대들이었다고 주장함으로써 홍해 기적
사건을 부인한다. 그들은 계
속해서 본문과 같은 표현은 혼돈으로 가득한 신화적 배경에 근거를 둔 비유법의 일종
일 뿐이라고
덧붙인다(93:3, Deissler). 이 같은 진보주의 학자들에게 논리적 서술로
홍해 사건을 납득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기적, 기사를 믿지 않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해 사건을 증명함과
관
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그리고 그들에게 제시할 만한 문법적 근거가 있는데 그것
은 바로
'고제르'(* )의 문자적인 의미이다. '고제르'의 문자적인 의미는 '두 부
분으로
나누다'이다. 그런데 이 '나눔'은 결코 쪼갤 수 없는 한 물체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을 뜻한다. 이 의미를 중시할
때 우리는 모세가 나눈 것, 그래서 그와 그 백
성이 그 두 부분 사이로 건너간 것은 '갈대들'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나눌
수 없는 바닷물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본절에서는 바닷물을 나눈 주체
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그분은 능히
홍해 바다를 가르실 수 있었다(출 14;21, 22).
=====136:14
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 여기서 우리가 감사해야
할 내용은, 양쪽으로 갈라져 벽처럼 서 있는 파도가 되돌아와서 덮치지 않도록 막으신
사실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하나님의 주밀(周密)하신 자비이다(출 14:19).
=====136:15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 여기서
'엎드러뜨리신'은 '니에르'(*
)로서 문자적인 뜻은 '흔들어버리다'이다. 이
단어는 그 잎사귀들을 떨구기 위하
여 나무를 안고 흔들 때 적용될 수 있는 용어이다(사 33:9). 동일한 용어가 출
14;27
에서 사용되고 있다:"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스려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흔들어 바닷속으로
넣으시니"(개역 성경에는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136:16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 이스라엘의 광야
시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도하심
에 관한 주제는 구약 성경에 자주 반복되고 있다(신 8:15;렘 2:6). '인도하여'란 구체
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위한 모든 물건들을 공급하신 일, 모든 대적들로부터 그들을 보
호하신 일 그리고 주시기로 약속한 땅에 그들을 안착케 하신 일
등을 가리킨다.
=====136:17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 본절에서부터
22절까지에는 135:10-12과 거의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차이가 나는 것은 이곳 각
절들은 후
렴구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절에서 22절까지의 핵
심은 강한 열방의 왕들을
죽이고 그들 소유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넘겨주신 것은 하
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의 증거라는 것이다.
=====136:18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 본 구절은
17절과 평행구를 이루고 있는
데, 말을 바꾸면 17절과 본절에는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반복은
강
조를 위함인데 강조할 만한 그 내용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수 12장에 기록되어 있다.
=====136:19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 레시혼 멜레크 하에모
리) - 원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본절은 서두에 전치사 '레'가 목적어 앞에
놓여 있
다. 목적어 앞에 전치사가 놓였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인데 그 이유는 본 시편
이 시작된 후 지금까지는
목적어가 아닌 하나님의 품성 혹은 그분의 사역을 나타내는
동사와 관련하여 전치사 '레'가 놓였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절에서는 '여호와께'
앞에, 4절에서는 '큰 기사를 행하시는 이에게' 앞에, 5절에서는 '하늘은 지으신
이에
게' 앞에, 그리고 6,7, 10, 13, 16절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레'가 놓였었다. 이제
시편
기자는 본절에서부터 감사해야 할 주체인 하나님 혹은 그분의 사역이 아닌 감사
의 객체 곧 하나님의 사역의 대상인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부각시킴으로 좀더 폭넓게
감사의 이유를 깨닫게 하고 있다.
=====136:20
바산왕 옥을 죽이신 - 바산 왕 옥은 강대국의 왕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거론되기까지 하는 이유는, 그는 모세 영도하에 광야 여정의 막바지에 이른
이스라엘 군대에게 패배한 최초의 왕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패퇴시킨 후
이스라엘은 이들이 차지하고 있던
트랜스요르단(Trans-Jordan)을 얻게 되었는데 이스
라엘 전승은 가나안 진입 직전의 이스라엘에 패퇴한 최초의 이방
왕이라는 사실 때문
에 바산 왕 옥의 이름을 기록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들의 소유 트랜스요르단을 빼
앗은 사실을 중요한
기사로 기록하고 있다(참조, 민 21:33;신 3:1-6).
=====136:21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 이것은 아모리, 바산과
같은 이방 민족이 차지하고
있었던 땅이 이스라엘의 유산으로 돌아갔던 사실을 가리킨다(수 12장). 한
나라 백성
이 차지했던 땅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이 없어지거나 그 주권을 빼
앗아야만 한다. 원래 그
땅에는 악한 이방 족속들이 살았으나 여호와 신앙을 고수하는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함으로써 그 땅도 거룩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문맥에
입각해
서 세밀하게 영적으로 주해하고 있는 학자의 글을 보자:'본절은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
내되 그가 악한 자들을 제거하셨다는 사실
뿐 아니라 그들의 소유지를 더 선하게 사용
할 자들에게 넘겨주셨다는 사실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이제 시혼, 옥의
소유물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옮겨졌으며 피흘림, 야욕, 범죄, 오염 그리고 우상숭배의 터전으
로 사용되었던 그 땅은 예배와
의의실천 도장으로 바뀌어졌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
악한 자들을 제거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탐욕과 부정직으로 축적한
사악한 자의 부
(富)가 그것을 선하게 사용할 자녀들의 손으로 옮겨지게 하신다'(Barnes). 물론 이
주
석의 내용을 목전의 현실 속에서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아직도 탐욕과
부정직의 사람들이 부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우리는 영적 차원에
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곳인
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이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영역은 확장되어가고 있다. 이제
이 하나님의 나라는 주의 재림 때
100%의 완전한 확장을 볼 것이다. 그때 땅에는, 악
은 없고 선만 가득하게 된다. 현재적으로도 그 나라의 모습을
일부 맛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앞에 나온 한 주석가의 주석 내용을 부분적으로 성취하실
것이다.
=====136:22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 21절의
평행구이다. 여기서 '종 이스라엘'은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다양해지는데 본 문맥에서는 '그 차지한 땅을 자손에게 물려줄
상속자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사야서에서는 주로 이방 나라에 하나님의 하
나님되심, 즉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전파하는 자로서의 종 이스라엘을 뜻한다(사
42:1-7;43:8-12;48:17-22).
=====136:23
우리를 비천한 데서
기념하신(* , 쉐브쉬플레누 자
카르라누)
- 문자적인 뜻인 '낮은 토지에 있는 우리를 기억하신'이다. 이에 대해 혹자
는 하나님께서 사사 시대와 같이 그 수도 적고 분명한 민족성도
형성되지 않아 국가적
개념으로 볼 때 아주 유약한 상태에 있었던 시대에도 이스라엘을 지키신 것을 가리키
는 것이라고
한다(Barnes).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낮은 토지에 있는'이란 예루살렘
멸망과 바벨론 포로 시대 때에 이스라엘이
받았던 고통을 특별히 상기시키는 구절이라
고 말하기도 한다(Kirkpatrick, Deissler). 어쨌든 본문은 이스라엘이
고통스럽고 유
약한 상태에 있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던 것을 뜻한다고 보면 되겠다.
=====136:24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 건지신 - 여기서 '대적에게서
건지신'(*
, 이페르케누 미차레누)은 직역하면 '대적들로부터 자유케 하신'이다. 직역을
고려한 학자들은 본 구절이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해방, 귀환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Deissler 등).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방으로부터 자유케 된 경우는
바벨론 포로로부터
의 해방 사건뿐만은 아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을 하나님의 많은 구원 사
역에 대한 일반적인 암시로
본다.
=====136:25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 '모든
육체'(* , 칼
바사르)란 살아있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여기서 저자가 의도한 대상은 이스라엘 사람뿐 아니라
온
인류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38:3 주석 참조).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뿐 아니라
악인에게도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한
물질들을 내려 주신다. 이것을 일반 은총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도 땅 위에서 생명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다(마 5:45).
=====136:26
하늘의
하나님(*
, 엘 하솨마임) - 본 구절은 시편 중 이곳에서만
등장한다. 후대에 기록된 성경들은 본 용어를 약간 변형시켜
자주 사용하고 있다(스
1:2;5:12;6:9;느 1:4;2:4;욘 1:9). 본 시편에서는 저자는 주로 하나님의
땅 위의 사역
을 다루었다. 그러나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이 하늘에 계셔서 그곳에서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었다.
시편 제
137편
=====137:1
바벧론의 여러
강변(*
, 나하로트 바벧) - 문자적인 뜻은 '바벧론
의 강들'이다. 바벧론에는 강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강이 바로 유프라테스
강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다마스커스와 같이 유프라테스 강으로부터 끌어온 많은 수로(水路)들
이 있었고 그 수로를 통해 각 도시로
물이 공급되었는데 이 여러 수로들을 암시하기
위하여 '강들'이라는 복수형이 사용된 것 같다. 한편, 여기서
'바벧'은 '신의 문'이라
는 뜻의 바벧론어 '바빌리아'에서 따온 것이다(IDB).
거기
앉아서(*
, 솽 야솽누) - 여기서 동사 '야솨브'(* )는 어
는 곳에 '잠시 앉다'는 뜻도
있지만 한곳에 '정착하다', '거주하다'의 뜻도 있다. 후
자의 뜻을 중시하여 본 구절이 함께 슬픔을 나누고 기도하기 위하여
포로지의 한 지역
에 많은 이스라엘 포로들이 모여 정착했던 사실을 암시한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는데
(Ewald,
Kraus), 큰 무리가 없는 견해인 것 같다(애 2:10, 18;3:49). 그러나 바벧론
포로지에 어떤 회당이
조성되었음을 의미한다(Rowley)고까지 보기는 힘들 것 같다.
=====137:2
버드나무에...수금을 걸었나니 - 여기서 '버드나무'는
'아라빔'(*
)으
로서 그 잎사귀가 하얗고 은빛이 나기 때문에 '오시에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가지
가 가늘고 길어 잘 흔들리는
나무를 가리킨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고대 바벧론의
인근 국가에선 주로 야자(종려) 나무가 서식했을 뿐 버드나무가
서식하지는 않았으므
로, '버드나무'가 포함된 본 구절은 사실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깊은 슬픔을 암시하는
은유적 묘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Anderson).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대부분의 보수적
인 학자들은 본문이 실제 사실에 대한 묘사라고 주장한다. 특히
반즈(Barnes)는 고대
때 바벧론으로부터 운송되어 온 것을 증명하는, '바벧론 산'이라는 라벧이 붙은
거대
한 한 그루의 버드나무를 런던의 한 공원에서 목격한 사실을 제시하면서 위의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시편에는 비유적 표현이 많다. 그러나 본 시편에 언급된 바벧론도 아
닌 그 인근 국가에 문제가 되는 버드나무가 없다고 해서
성경이 묘사한 내용을 실제적
사실이 아닌 비유적 표현으로 단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한편, '수금'은 성전
에서 하나님께
찬양할 때 동반되는 악기인데 포로 백성들은 피곤을 잊고 포로 생활의
슬픈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것을 사용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수금을 '버드나무
에 걸었다'는 것은 연주하기를 중단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연주를 중단한 이유는 다음
절에
나온다.
=====137:3
노래를 청하며 - 여기서 '노래'는 '디브레
쉬르'(*
)로서 문자적인 뜻
은 '노래의 말들'이다. 이것은 바벧론 사람들이 단순히 음악 듣기를 요청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익숙하게 사용했던 찬양의 말들을 듣기
를 원했던 것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바벧론 사람들은 조롱조로 '불멸의
예루살렘과 소
위 전능한 하나님을 노래 해 보라'고 청했던 것이다. 그 같은 심정을 읽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포로들은 노래하기를 중단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
들의 깊은 비애와 애국심을 엿볼 수
있다.
황폐케 한
자(* , 톨라리누) - 구약
성경에서 단 한 번만 사용된 이 용
어의 뜻은 두 가지인데, 그 하나는 '큰소리를 지르는 자' 혹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큰소리를 지르게 하는 자'이며 다른 하나는 '고문하는 사람' 혹은 '남을 괴롭게 하는
사람'이다.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은 '다른 사람을 유인하는 자'로 번역
하고 있다. 종합하면 여기서 '톨라리누'는 '남에게 고통을 주는
자'가 되겠다. 개역
성경은 70인역과 발게이트역의 번역, '다른 사람을 유인하는 자'를 문맥에 맞추어
'이
스라엘을 포로로 끌고간 자'로 해석한 후 좀더 강한 용어 '황폐'를 넣어 '우리를 황폐
케 한 자'로 번역한 것
같다.
=====137:4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
여기서 '이방'은 '아드마트
네카르'(*
)로서 문자적인 뜻은 '낯선 땅'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에게 있어 이방의 낯선 땅이란 근본적으로 불결한 땅(암 7;17),
심지어 그곳의 음식까
지도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호 9:3). 바로 그같이 불결한 땅에서 더구나 불결한
민족들 앞에서 거룩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성과 성전이 폐허가 됐는데 어찌
즐거운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 반
문은 느헤미야의 경우를 연상시킨다:"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그 때에 내가 크게 두
려워하여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
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느
2:2, 3).
=====137: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 문맥을 고려할 때
본 구절의 의미는, 주권을 빼
앗기고 다른 나라의 통치를 받는 포로 생활의 상황 속에서 기쁘게 노래하는 일은 예루
살렘을
잊어버린 행위요, 그 민족의 포로 상태에 대하여 무심하거나 관심이 없다는 사
실의 반증이라는 것이다.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 티쉬카흐 예미니) - 문
자적인 뜻은 '나의 오른손이 잊게 될 것이다'이다. 문자적인 뜻만으로는 이해가 쉽지
않다. 따라서 문맥 속에서 그 의미를 규정해야 하는데 문맥은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암담한 포로 상태에 처하여
바벧론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노래를 하거나 연주를 하는
것은 마치 매국적인 행위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문맥에 유의해 볼
때 본문은 오
른손을 사용하여 어떤 악기를 연주해 본다고 해도 아름다운 연주가 나올 수 없다는 의
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개역 성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역본들
은 '오른손' 뒤에 '재주'라는 목적어를 삽입하고 있는데 문맥을 고려하고 원문을
손상
치 않는 범위 내에서의 이 같은 삽입은 간과할 만하다. 이 경우 '재주'란 악기를 다룰
때 요구되는 재능, 기술을 의미한다
하겠다.
=====137:6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 임-로 아 알레 에트 에루솰람 알
로쉬 심하티) - 직역하면 '만일 내가 나의 기쁨의 머리에 예루살렘을
놓지 않는다면'
이다. 여기서 '머리'는 신체의 으뜸이 되는 기관인데 '기쁨의 머리'란 기쁨 중의 으뜸
이 되는 기쁨, 즉
가장 큰 기쁨을 말한다. 예루살렘을 가장 큰 기쁨에 놓는다는 것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조건들 중에서 예루살렘을 통하여
얻는 기쁨을 가장 큰 기
쁨으로 여기겠다는 의도를 나타낸다. 저자는 이 의도를 부정적 조건문을 통해 강조하
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조국을 사랑하는 저자의 신앙에 입각한 애국심을
느낄 수
있다.
내 혀가 내 입천장애 붙을지로다 - 혀를 사용하지 못하는 관계로 말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겔 3:26). 부연하면 자신의 고향을 기억하는 일을 중단하게 만드
는 무익한 목적에 혀를 사용할 경우, 그의
혀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것이라는 강도가
높은 결의적 고백이다.
=====137:7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 제코르 예화 립네 에돔 에트
욤 예루솰람) - 직역하면 '여호와여 예루살렘의 날에 에돔 자녀들을
기억하소서'이다.
여기서 예루살렘의 날을 과거의 날로 볼 것이냐 혹은 미래의 날로 볼 것이냐에 대한
의견들이
있는데 이 문제의 해결은 '예루살렘의 날'을 꾸미고 있는 수식절의 시제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수식절은
'하옴림 아루 아루 아드 하이소드 바'(*
)로서 그 의미는 "'멸망시켜라, 멸망
시켜라, 그 기초까지 멸망시켜라'라고 하였던 자들"인데 여기서 '하였던'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본 수식절의 시제는 '과거'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날'이란 과거의
날, 곧 포로
시대를 기준으로 했을 때 과거의 날인 예루살렘 멸망의 날임이 분명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 형제의 후손들이었던(창 25:25;말
1:2-4) 에돔과 이스라엘(혹은
유다)은 상호 적대감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는데 그 적대감은 에돔 족속이 방어력을
상
실한 예루살렘 성을 마음껏 노략했을 뿐 아니라 도망자까지 무자비하게 학살했던(사
63:1-4;애 4:21,
22;겔 25:12;35:5;옵 1:11-14) 예루살렘 멸망의 때에 절정에 달했었
다. 이후 에돔은 신약에서 이두메아로
알려진, 그리고 해롯 대왕의 고향이었던 유다
남부 지방을 차지하였다. 바로 이 같은 불행의 날을 여호와께서 기억해
주실 것을 저
자는 호소하고 있는데 이 호소에서 우리는 원수에 대한 저자의 적대감, 복수를 핵심으
로 찾을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기대 혹은 그 고향
에 대한 향수(鄕愁), 애국심의 발로 등을 그 핵심으로 찾아야 할
것이다.
=====137:8
여자 같은 멸망한
바벧론아(*
, 바트 바벧 하쉬두다) -
문자적인 뜻은 '멸망하게 될 바벧의 딸', 말하자면 '멸망하게 될 것으로 운명지워진
바벧의 딸'(O daughter of Babylon, who art to be destroyed, KJV)이다. 이것은 페르
시아
왕 고레스를 통한 바벧론의 멸망을 암시한다. 사 47:1-9에는 바벧론의 전복을 통
해 드러날 하나님의 되갚으심의 원리가 잘 나타나 있다.
한편 바벧론은 여성에 비유되
곤 하는데, 특히 바벧론 국가 자체는 '어머니'에, 바벧론 국민들은 '딸'에
비유된다
(45:12).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 아쉬레 쉐이솰렘 라크 에트 게물레크 쉐
가말트 라누) - 직역하면 '네가 우리에게 복수한 그대로 복수하는 자에게
복이 있을
지어다'이다. 동해 보복법(同害報復法, lex talionis)을
연상시키는 구절이다(출
21:23-25;레 24:17-21;신 19:21). 문자 그대로 보면 여기서 기자는
복수심에 불타는
한이 맺힌 사람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시해야 할 것은 그 '복수'의 주체를
누구로 보고
있느냐는 사실이다. 기자는 복수의 주체를 자신으로 보고 있지 않다. 생
략되어 있지만 '...자에게 복이 있을지어다'라는
표현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그 주체
는 시인 외의 그 누구이며 궁극적으로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본절에서 저자는
하나님
께서 그들의 대적에게 복수하시고 자신들을 본국으로 귀한케 하실 것을 소망하고 있
다.
=====137:9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 여기서 '어린
것들'은 '올라이크'(* )
로서
'젖먹이들'이다. 젖먹이들을 돌을 향해 내던지는 것과 같은 야만스러운 잔혹성은
특히 전쟁시에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이 같은 행위는 이방
나라의 역사뿐 아니라 성경
역사 속에서도 발견된다(왕하 8:12;사 13:16;호 10:14;13:16;나 3:10).
본절 내용은
잔혹한 보복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앞절의 핵심을 고려할 때 본절의 핵심은 하나님
편에서의 철저한 공의
집행 심판이 되어야 한다. 사랑 그 자체이시지만 아울러 철저하
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철저히 심판하실 것이다.
비록
그들은 잠시나마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그들의 잔혹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
할 수 없는 것이다(암 1,
2장). 비록 그들은 잠시나마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자
들이었지만 말이다.
시편 제
138편
=====138:1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 오드카 베칼 리비) - 직
역하면 '내가 나의 모든 마음으로 당신에게 감사하며'이다. 직역에도 나타나듯이 원문
에는
감사 대상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으며 4절에 가서야 '여호와'라는 호칭이 나온다.
그런데 70인역(LXX)이 처음으로 '당신에게' 대신
'큐리에'(* , 주님)란 호칭
을
삽입하였으며, 이후 벌게이트역(Vulagate) 그리고 몇몇 영역본들이(NIV, RSV, LB)
이것을 따랐고, 개역 성경도
이 추세를 좇아 '주께'라는 호칭을 삽입한 것 같다. 그러
나 본 호칭의 부재(不在)는 도리어 강조적 의미를 지닌다. '나의 모든
마음'이란 직역
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비록 그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저자의 찬양의 대상이신
그분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계심이 분명하다.
신들 앞에서 - '신들'의 정체(正體)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1) 루터(Luther),
칼빈(Calvin) 등이 따르고 있는 70인역의 해석으로 '천사들'로 보는 견해이다.
천사들
이 하나님이 찬양하는 일에 불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약 성경 그 어느 곳에서
도 천사들을 인간 찬양의 증인들
혹은 인생들과 함께 찬양하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
는 곳은 없다. (2) 갈대아역, 시리아역, 그리고 유대 랍비들뿐만 아니라
최근 해석가
들이 내놓는 견해로 '왕들' 혹은 '재판관들'로 보는 견해인데 이들은 근거 구절로 82
편을
제시한다. 그러나 '신들'을 '왕들' 혹은 '재판관들'로 보려면 몇 개의 논리 고리
가 더 필요하다. (3) 에발트(Ewald) 등이
내놓는 견해로 '신들'을 '법궤' 혹은 '지성
소'로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법궤' 혹은 '지성소'는 하나님 당신의 임재를
상징하므
로, 이 견해를 받아들일 경우 본절 하반절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나이다'
라는 번역이 되므로 너무
어색하다 하겠다. (4) 거짓된 이방 신들, 곧 이방 제사의 대
상물로 보는 견해인데 이 경우 저자는 예배의 대상을 혼동하고 있는 이방
예배자들 앞
에서 참예배의 대상, 유일한 하나님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샘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나머지 견해들보다 훨씬
타당한 견해로 보여 지는데 이는 원문의 문자적인 뜻
에서 벗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맥에도 거슬리지 않는다. 또한 성경 다른
곳의 충
분한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95:3;96:4, 5;115:3-8).
=====138:2
주의 성전을 향하여 -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임으로 시편 저자가 지성소로
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으로 추측할 필요는 없다(왕상 8:48;단 6:10) 왜냐하면
여기서의 '향하여'는 '엘'(* )로서 '...앞에서'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저
자는 성전 뜰에
부복하고 성전 주 건물을 향한 상태일 수 있다는 말이다.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
- 이것은 하나님을 기다
리고 그의 말씀을 신뢰하는 영혼들에게 그가 주신 약속은 너무 귀하고강한 소망의 근
거가 되어
하나님의선하심 그리고 진실하심을 압도할 정도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 같
다. 어떤 학자들은 본문을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존함의 우열을
비교하는 잘못된 구절
로 본다(Hupfeld). 그들은 하나님의 존함이 그의 말씀보다 열등할 수 없다고
주장한
다. 이같은 주장은 극단적인 문자적 해석의 소치라 보여진다. 본 구절은 하나님의 존
함과 말씀의 우열을 가리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구절일 뿐이다.
=====138:3
내가 간구하는 날에 - 이 날은 고통의 전환점이었던
어떤 날을 가리키는데 이 날을
문자 그대로의 '특정한 날'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다. 고통당하는 개인(혹은 공동체)
이 진실한
마음으로 도움을 구할 때 하나님은 응답하신다(17:6;사 40:29).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
, 타르히베
니 베나프쉬 오즈) - 문자적인 뜻은 '나의 영혼에 힘을 주어 강하게 하셨다'이다. 말
하자면 힘을 주어
용기있고 담대한 자로 만드셨다는 뜻이다. 즉, 어떤 위험을 만나도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자로 만드셨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같은 고백을 하고
있는 상황은 대적으로 인한 위험에 직면하고 있던 때라고 짐작된다.
=====138:4
땅의 열왕이 주께 감사할 것은 - 여기에서 '땅의
열왕'은 히브리어로 '칼 말르케
아
레츠'(*
)로서 문자적인 뜻은 '모든 땅의 왕들'이다. 각 나라를
통치하는 왕, 그들 모두를 가리키니 결국 이 표현은 온 세상이
여호와께 감사할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68:32;96:1, 3, 7;97:1;98:4;100:1). 한편, 이 예언은
솔로몬 왕
시대에 시바 여왕을 비롯한 많은 열왕들이 그 앞에 나아와 그를 칭송하고 하나님을 높
인 것에서 부분적으로 실현
되었으며(대하 9:1-8, 22-28),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후에는 세계적인 복음 전파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실현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하겠다.
=====138:5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 야쉬루 베다르케
예화) - 문자적인 뜻은 '그들이 여호와의 길들을 노래할 것이다'이다. 앞절과
연결시
켜 생각해 볼 때 온 세상은 '하나님의 입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그의 능력의 행사
를 기쁨으로 노래하고 축하하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103:7에 의하면 '하
나님의 도'는 '하나님의 행사(역사)'와 평행구를
이룬다.
=====138:6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도 -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이지만, 당신의
피조물의 가장 미천한 것을 돌아보며,
도우시는 자비로운 분이시다(113:4-8;사
57:15;66:2).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 -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그 다양한 해
석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1) 139:2의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
시오며'(깊이 이해하시오며)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은 비록 교만한 자가 하나님의 통
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그를 주목하고 계신다는 것
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2) 하나님은 그들을 멀리에 놓고 관계하신다는
의미, 곧
그와의 친밀한 교제를 인정치 아니하신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낮은 자'(겸손한 자)를 보시는 것처럼 그들을 '보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3) 일정의
거리를 둔 관계로서만 그들을 아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4) 마치 낮은 자들에
대해서 그렇게 하시듯이 멀리서 교만한 자를 보고 계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 경우 '높이'와 '멀리서도'는 평행구로 간주되어 진다.
=====138:7
환난 중에 - 여기서 저자는 그가 생각하고 있는 환난의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
로 열거하고 있지 않은데 이것을 포로 시대 초기의 역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학자
가 있으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본 시편의 표제어는 이 시편의 저
자가 다윗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을 통하여 기자
다윗이 밝히고 있는
바는 비록 그가 역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시고 용기와 활력을 주
신다는
확신이다.
주의 손을 펴사 - 이것은 돕거나 징벌하기 위한 여호와의간섭을 묘사하는 상징적
표현이다(144:7). 여기서 '손'은 '야드'(* )로서 오른손, 왼손을 구별하지 않는 일
반적인
의미의 손을 의미하는데 어떤 학자는 뒤이어 나오는 '오른손'과 균형을 잡는
뜻에서 본 '손'을 '왼손'으로 본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을 '왼손'으로 묘사
하고 있는 부분이 거의 없는 점을 고려할 때, 여기서의 '손'을 특별히 오른손
혹은 왼
손으로 보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138:8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 -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시작하신 사역은 필히
완성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기자의 소신이 엿보인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시작하신
구
원을 결코 중단하지 않으시며 반드시 이루신다:"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
, 마아세 야데카) - 문자적인 의미는
'당신의 손의 일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수행하시는 모든 행위의
과정, 혹은 당신의
백성을 언급하는 말이다(사 60:21;64:8).
버리지
마옵소서(* , 알 테레프) -
직역하면 '잊지마소서', 혹은 '느슨
치 마소서'이다. 이것은 앞서 확신있게 표현했었던 기도로 다시 관심을
옮기게 하는
표현이다. 기자는 본 시편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잊거나 자신의
기도에 대하여 느슨한 마음을 갖지 않으시기를 결론적으로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제
139편
=====139:1
감찰하시고(* , 하카르타니) -
직역하면 '당신은 나를 찾으셨다'인데 여
기서 '찾으셨다'는 말은 원래 물줄기나 금속을 찾기 위하여 땅을 파거나 뚫는 것을 가
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욥 28:3).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땅을 파헤치고 드러내듯
이 자세하고 정확하게 인생의 마음을
살펴보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셨나이다 - 앞의 감찰의 결과로서, 자세한 조사의 결과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모
든 것을 아신다는 말이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고 저자는 그의 논리
를 펴나가기 시작하는데 그는 이와 같은
인식을 확장하기도 하고 적용하기도 한다.
=====139:2
주께서(*
, 아타) - 직역하면 '당신은'인데 주로 강조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대
명사임을 고려하여 '당신만이'라고 번역하면 문맥을 더욱 효과적으로
살아나게 할 것
이다.
앉고 일어섬 - 인간 삶의 모든 행위를 의미하는 이 표현은 127:2;신 6:7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나의 생각을(* ,
레레이) - 이 용어는 구약 성경에서 이곳과 17절에서만 등
장한다. 특히
'레레이'(* )는 전치사 '레'(* )와
'생각'이란 뜻의 '레아'(*
), 그리고 1인칭 소유격 '요드'(* )가 연결되어진 용어로서
전치사 '레'(* )의 의미를
살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적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
생각하고 있는 것, 즉 우리가 의도하고 계획하고 있는 바를 넉넉히 알고 계신다.
=====139: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 여기서 '길과
눕는 것'이란 인간 전체 삶을 회
화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또한 '감찰하신다'에 해당하는
'자라'(* )의 문자적인
뜻은 '흩어 버리다' 혹은 타락한 벼를 바람에
쏘이듯이 '알곡을 고르기 위하여 쭉정이
를 바람에 쏘이다(골라내다)'(룻 3:2;사 30:24;렘 4:11) 등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껍데기들, 무가치한 것들을 흩어버리고 실제적인 것, 본질적인 것만을 붙들고 보신다
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우리의 삶의 껍질이 아무리 치장되고 복잡하더라도 하
나님께서는 우리의 속, 우리 삶의 본질적인 부분,
즉 우리의 진심을 바라보고 평가하
신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다 하겠다.
=====139: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 키 에인 밀라 빌르쇼니 헨
예화 야다아타 쿨라) - 직역하면 '한마디의 말도 아직 내 혀에 없을 때에 조차, 오 !
여호와여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Before a word is on my tongue you
know it
completely, O Lord, NIV)이다. 이는 하나님의 전지성(omniscience)을
이론적이기보다
는 실제적 측면에서 묘사한 표현으로서, 언급된 말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생각까지도
꿰뚫어 보신다는
뜻이다.
=====139:5
전후(前後)를 두르시며 - 여기서 '두르시며'에
해당하는 '추르'(* )의 일반적
인 뜻은 '밀다', '압축하다', '누르다'이다.
이 용어는 대체적으로 성(城)의 포위, 혹
은 일정 군대의 포위 혹은 포위당한 결과 피할 길이 없이 막혀버린
진퇴양난(進退兩
難)의 상황,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게 되어 버린 상황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본
시편 저자는 이
용어을 사용하여 앞뒤, 좌우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편
재성(comnipresence)을 말하고
있다.
안수하셨나이다 - 하나님의 축복(창 48:14, 17), 보호하심(출 33:22)을
뜻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인간의 행동, 사역 전체가 하나님의 뜻 아래 있을 뿐이라는 뜻도 내포되
어 있다(욥 13:21;33:7).
아무리 인간이 자유롭게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단지 하나
님의 크고 빈틈없는 계획 아래 있는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진정
한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가능하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起動)하며
있느니라"(행
17:28).
=====139: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 여기서 '지
식'이란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저자는 그 지식은 자신에게
너무도 놀라운 것이라고 탄성을 지르고 있는데 이와 비슷한 종류의 정서는 17, 18절;
롬 11:33에서도 엿볼 수
있다.
=====139:7
신 - 본절에서
'신'(* , 루아흐)은 '(주의) 앞' (주의 면전)과 평행을 이루고
있으며 권능
가운데 임재해 계신 여호와 당신을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이기도 하다.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 이 표현은
요나를 연상시킨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욘 1:3). 그러나 여기서 저자는
하
나님으로부터 피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발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기쁨으로 증거하기 위하여 이 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139:8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 '아마르나
편지'(Amarna Letters)에 보면 편지 발송
자가 하늘로 올라가든지 땅 아래로 내려가든지 자기의 목숨은
바로(Pharaoh)의 손에
달려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대목이 있는데, 어떤 학자들은 이 사실 때문에 위의
편지
의 저자와 본 시편 기자는 단지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의 권능이 무한하다는 점을 강조
하기 위하여 잘 알려진 비유적 화술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평가한다
(Anderson). 그러나 본문을 굳이 아마르나
서신과 연결시켜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
다. 분명한 것은, 본 구절을 통하여 저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88:6)
혹은 언약
적 사랑이(6:5;30:9) 미치지 않는 곳으로 묘사되는 음부의 세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의
시야로부터 숨겨질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하는 점이다. 이러한 사상은
욥 26:6-9;잠 15:11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39:9
새벽 날개를
치며(*
, 에사 칸페 솨하르) - 문자적인 의미
는 '내가 아침 날개들을 갖는다면'(If I take the wings of the moring,
KJV)이다. 여
기서 '아침 날개'는 해가 동편에서 솟아오를 때 날개처럼 비쭉비쭉 하늘을 찌를듯 뻗
치는 빛 줄기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에 관해 말
할 때 바로 이 빛 줄기를 사용하여 표현하곤 했다고 한다. 즉,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른 것을 해가 뜰 때 순식간에 하늘을 향해 뻗치는 빛 줄기로 보았던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개념을 빌어서 세상에서 가장 빠른 빛줄기를 타고 신속하게 멀리 간다
고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곳에도 지키고
계실 정도로 편재(偏在)해 계신다는 사실을 강
조하고 있다.
바다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 시편
기자가 살던 팔레스틴 세계에 있어서 '바다'란
말할 것도 없이 지금의 지중해를 가리키며 이 지중해의끝이란 지구
끝을 의미하였다.
이 지구 끝에 가되 가장 빠른 아침 빛 줄기를 타고 순식간에 가서 그곳에 있다고 할지
라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신다는 것이다.
=====139: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 원래
'하나님의 손이 인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 돌보심을 뜻한다(23:3;27:11;73:24). 또한 문맥상
하나님의 편재성에
관한 또 다른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다.
=====139: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
'덮고'에 해당하는 '슈프'(* )의
본래 의미는 '입을 크게 벌리다', '물어 뜯다'이며,
상징적으로 '압도하다', '깨뜨리
다', '덮다' 등의 뜻으로 쓰인다. 이 용어는 창 3:15에서는 '상하게 하다'로
번역되었
고, 욥 9:17에서는 '꺾다'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흑암'은
역경이나 위험
(138:7)을 암시하는 비유적 표현이다(Alexander).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는 어디로
가
든지(10절) 또 어떠한 역경에 처하든지(11, 12절)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에 두
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139: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 감 호
쉐크 로 야흐쉬이크 미메카) - 직역하면 '심지어 흑암까지도 그에게 있어서는 흑암이
될 수 없다'이다.
인생에게 닥치는 어떠한 어려운 상황도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과
지키고 감찰하시는 눈길을 막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흑암이 우리를 어둡게 만들
어도 하나님께는 그렇게 못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영적인 의미로 볼 때 낙담, 이
별,
고통, 손실 따위가 우리에게는 어둡게 보여도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크고 깊은 섭리의 측면에서 보면 그
어떠한 문제도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할 뿐이다(롬
8:28).
=====139:13
장부(*
, 킬르요타이) - 문자적인 듯은 '신장'(콩팥)인데 성경에서는 인간
의 '내면'을 가리킬 때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성경은 인간의 지각,
감정 부분을 의미
할 때는 본 용어를 사용하지만 인간의 해부학적 뼈대 부분, 즉 골격을 의미할
때는
'뼈들'이라는 용어를 따로 사용하고 있다. 본 문맥에서 '킬르요타이'는 감각 혹은 감
정의 좌소를
의미한다(7:9;19:27;렘 11:20).
지으시며(* , 카니타) -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적 창조
사역(활동)을 뜻할
때 사용되는 용어가 두 개 있는데, 그 하나는 창세기 1장에서 등장하는
'바라'(* )
이고 또 다른 하나는 '카나'(*
)이다. 그리고 전자보다는 후자가 적게 사용되고
있다. '카나'(* )는
'소유하다', '세우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그 파생어
가 땅 위에 세워진 '막대기', '갈대', 따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 문맥에서는
'세우다', '소유하다'의 의미가 아니라 '창조하다'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카나'
가 '창조하다'의
의미로 사용된 연관 구절 혹은 평해구로는 창 14:19;신 32:6 등이 있
다. 하나님께서 저자의 감정의 처소 곧 열망, 열정, 애정
등의 처소를 지으셨다는 것
은, 인간의 눈(다른 인간)으로부터는 가리워진 그 마음의 깊은 곳까지라도 그곳을
지
으신 그분께서는 면밀히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 테수케니) - 문자적인 뜻은
'보호하다', '짜다'
(조립하다) 등이다. 전자는 밀폐된 공간에 넣듯이 보호한다는 의미를 말할 때 사용되
며
후자는 여러 가지 물질, 재료를 사용하여 한 가지 물건을 지을 때, 특히 실 따위로
어떤 천을 짜는 것을 의미할 때 사용된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가 문맥에 적합하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기자를 만드셨다는 것, 특히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의 모
습, 골격 따위를 형상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감정들
을 이해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이 같은 의미를 볼 때 본절은 두 개의 동의적
대구로 구성되어 있다 하겠다.
=====139: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 여기서 '감사하옴'은
'오드카'(* )로서 이것은 어떤
놀랍고 위대한 일에 대한 경탄이 아니라
그일을 통해 드러난 지혜, 거룩, 선하심을 공
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뜻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나를...신묘
막측하심이라(*
, 노라 오트 니플레티)- 여
기서
'노라오트'(* )는 두려움 혹은
경외심을 낳기에 적합한 '경외로운 것
들'을 의미한다. 또한
'니플레이티'(* )는
'구별되다'(출 8:23) 혹은 '분리
되다'를 뜻한다. 이 같은 문자적인 의미들을 정리하면 본 구절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나는
경이로운 것에 의하여 구별되었다.' 말하자면 기자 자신은 하나님이 피조한 다
른 모든 피조물들과 비교해 볼 때 그 피조 상태가
너무 기이하고 놀라운 것이어서 다
른 피조물과는 구별된, 각별한 경외감을 표해야 할 정도라는 것이다(l
am fearfully
...made, KJV, NIV). 한편 영역본 RSV의 경우는 70인역(LXX),
시리아역(Syriac) 그리
고 제롬역(Jerome)을 좇아 '당신은 놀랍고...인 분입니다'(thou art
fearful..., RSV)
로 번역하고 있다.
=====139:15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 여기서 '은밀한 데'는
비밀스러운 곳, 인간의 눈으로
부터 숨겨진 곳인 '자궁 속'을 뜻한다.
땅의 깊은
곳에서 - 여기서 강조점이 두어져야 할 단어는 '땅'이 아니라 '깊은 곳'
이다. '깊은 곳'은 '어둡고, 모호한 곳'의 상징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관측 능력으로
는 그 정확한 형태나 상태를 알수가 없는 곳을 일컫는 말이다. 문맥적으로 볼
때 이
구절은 '은밀한 데'와 평행을 이룬다고 할 수 있으며 동일한 개념이 반복되었으니 이
것은 강한 강조의
의미를 나타낸다.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 라캄) - 문자적인 뜻은
'수놓아진'이지만 좀더 분명
한 의미는 '색으로 치장하다', '얼룩덜룩하게 하다'이다. 이것은 여러 색깔의 실들로
천을
짜거나 직조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신체를 조직하는 힘줄,
신경들, 혈관들, 근육 등이 인간의
두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직조 기술을 통하여 하나
의 형태를 이루는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139:16
내 형질(形質)이 이루기
전에(* , 골렘) - 영역본들 중 KJV는 '내 형질이 불완
전할 때'(yet being
unperfect)로, NIV는 '채 형성되지 않은 나의 몸'(my unformed
body)으로
번역하고 있다. '골렘'(* )은 이곳에서만 나오는 용어로 정확한 의미를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왕하 2:8에서 '돌돌 말린 망토'를 가리킬 때 그 동사형이 사용되
고 있어서 의미 추론을 가능케한다. 이러한 용례와 본 문맥에서
'골렘'을 통해 어떤
존재를 말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종합할 때 여기서 '골렘'은 아직 미완성 상태로 그
모양을 동그랗게 유지한 채 어머니 뱃속에서 출산을 기다리고 있는 '태아'(보통 임신
8주까지의 아이)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하겠다. 인간의 눈으로는 그 어떤 형태나 모습
을 식별하기 어려운 상태인 태아의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형태나 모습을
아
셨다고 말함으로써 시편 기자는 인간 생명의 시작 때부터 피조물인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을 다시
한번 찬양하고 있다.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 알 시프
레카 쿨람 이카테부 야밈 유차루웰로 에하드 바헴) - 직역하면 '명령은 되었지만 아직
오지 않은 날들 모두가
당신의 책에 기록되었다'이다. 여기서 '책'이란 원래 건축가가
그의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 작업의 방향과 계획 따위를
그려놓은 책을 말하지만,
'그의 책' 곧 하나님의 책이라고 한 사실과 문맥을 고려할 때 한
생명이 시작되어서
기라갈 모든 과정을 기록한 책이라고 보면 되겠다. 또한 '날들'이란 한사람, 곧 '시편
기자의 전
인생 기간'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기자의 모든 형질, 형태가 아직 발달되기
도 전 아직 태아 상태에 있었을 때 따라서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에 관한 모든
것이 결정되지도 않았던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셔서 그의 형질과 형태에 관한
것
의 수명, 그의 인생에 관한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뜻이다.
=====139:17
주의 생각 - 여기서 '생각'이란 한 생명체가
태어나서 놀라운 방법에 의하여 그 형
질이 조성되고 그 형태가 이루어지고 신비하게 영양을 공급받아 태아로 자라나 보호받
고 더
성숙하여 완전한 아이로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을 말한다.
보배로우신지요(* , 야크루) - 문자적인 뜻은 '무겁다'이다. 말하자면
'이해
하기 힘들다'는 뜻인데 이 단어는 '측량치 못할 것이며'란 의미를 지닌 헬라어
'아녀
세류네타'(*
)와 동의어이다.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 여기서 '수'란 생각들의 숫자, 즉 한 생명체가 완전
한
형질로 자라기까지 동원되는 하나님의 경륜 내용의 다양성을 뜻한다. 이처럼 성도
개개인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생각은 너무도
보배롭고 다양해서, 성도는 하나님의 그
인자하신 섭리와 계획들을 다 인식할 수 없다. 단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크신
은총에 대해 감사, 찬양하는 것뿐이다(40;5;사 55:8, 9).
=====139:18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
잠에서 깰 때마다 그렇게 자주 하나
님의 임재를 다시 깨닫게 되며 하나님의 생각들에 다시 압도당하게 되고 또 그분의
지
혜와 선하심으로 인한 새로운 경이와 찬양을 새롭게 묵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학
자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걸을
때나 잠잘 때, 낮이나 밤이나 나는 하나님
을 생각하며 그 생각의 끊임없는 깊이와 다함이 없는 충만함을 동일하게
느끼게 되노
라.
=====139:19
하나님이여 주께서 정녕히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에 관한 묵
상으로부터 의로운 복수가 악인 위에 임하기를 바라는 소원으로 그 내용이 급전되고
있는 부분이다. 얼핏 보기에 이 부분은 우리에게 낯설게 여겨지는데, 그 까닭은 그 내
용이 신약의 정신, 곧 원수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이타적 사상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있어 도움
이 되는 것은 63편인데 그곳에도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그곳에서 저자 다윗의 감정은
좀더 직접적이고
개인적으로 묘사되었다. 당시 다윗은 그의 생명을 위협하던 대적들에
게 포위당하여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때 반역에 의하여 왕좌로부터
쫓겨난 그는
분노를 표출하면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은 승리를 예상하였었다. 물론 그때에도
다윗은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는 대적들에 대한 증오심 자체보다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
현되기를 바라는 열망이 앞섰었다. 그러나 본 구절의 경우 악인의
전복을 위한 그의
기도는 그와 같은 개인적 위험으로부터 야기된 것이 아니라 악(惡) 자체에 대한
증오
감 때문에 터져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문맥상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깊은 마음과 그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를 익히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바로 그 사실, 하나님이 그 어떤 인간의
마음도 꿰뚫어 보신다는 사실
을 계속해서 생각하다가 갑자기 그는 악한 자에게로 생각이 옮겨갔고 그 악한
자의마
음까지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확신을 전제로 한 간증적 기도, 하나님께서 악인의 악
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토대로 할 때 본문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약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되는 구절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지성(全
知性)에 대한 확신에서 우러나온, 악의 멸절의 소원을 밝히는 내용이라 하겠다.
=====139:20
저희가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 여기서 악인이
멸절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제
시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악하게 말한다는 것이다. 악하게 말
한다는 것은
하반절에 그 의미가 나와 있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칭하는 것, 곧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을
뜻한다(Barnes).
=====139:21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 할로 메사네이카 예화 에스나) -
여기 본절의 '할로'(* )는 외형상
으로는 부정 의문사이나 강한 긍정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번역
하면 '내가 진실로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합니다'가 되겠다. 어떤 영역본은 '얼마나
내가 ...를 미워하는지 !'로 번역하고 있다(NEB). 한편 혹자는 여기 '미워하다'에서
어떤 교제의 단절
개념을 유추하여 본 구절을 저자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과의 교
제 단절, 그들과는 분리된 자신을 강조하는 구절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본문은 저
자 자신과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은 대적 관계임을 밝히는 내용이 된다. 이 같은 해
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저자의 대적들은 또한 하나님의 대적들로서 그
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26:5;119:113).
한하지 아니하나이까 - 여기서 '한한다'는 것은 '비통해 한다'는 듯인데
이 '비통
해 함'은 앞의 '미워함'과 무관한, 별도로 이해해야 할 용어가 아니다. '미워함' 뒤에
'비통함'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미워함'과 '비통함'은 동시에 수반되는 정서라는 것
이다. 주님도 이 같은 정서를 표출하신 바 있다: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
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막 3:5).
=====139:22
내가 저희를 심히
미워하니(*
, 타클리트 시느아
시네아팀) - 직역하면 '완벽하게 내가 저희를 미워하니'이다. 악인의 행위 그 어느 것
도 전혀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악에 대해서는 눈꼽만한 관심도 보이지 않으며 또한 그
들의 악행에 대한 변명은 한마디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저희는 나의 원수니이다 - '내가 그들을 나의 원수들로 간주하나이다'로 번역될 수
있다(I
count them mine enemies, KJV). 이것은 어떤 기준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이 나
의 원수라는 뜻이다. 즉
시편 기자의 증오심은 시편 기자의 독선적인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기준에 비추어 본 결과
로 나온 상대적 정서의 표출이라는 말이다(Anderson).
=====139: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 하크레니 엘) - 직역하면 '오 하나님이
여 나를 면밀히 살펴보십시오'이다. 여기서 면밀히 살핀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이 어떤 사물을 샅샅이 조사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바로 그러한 판단 앞에 과감히
자신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저자가
조금은 교만한 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갖게 만
든다. 그러나 그의 간구는 자신의 무지나 교만한 마음의 증거가 아니라 솔직한
마음일
뿐이다. 좀더 명확한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본 구절 앞 문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기자는
자신과 악인의 전적 분리를 선포한 바 있다. 그런데 그 분리가 단지 외
적인 분리가 아니라 내적인 분리, 즉 전능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도 인정해 줄만한
분리, 그것을 시편 기자는 바라고 있는 것이다.
=====139:24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
여기서 '악한 행위'는 '데레크
오체브'
(*
)인데 이런 형태의 구절이 성경의 다른 곳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
의미 규정은 쉽지 않다. 일차적으로
'오체브'(* )는 '형상', '우상'(사 48:5)을
의미하지만,
'고통'(대상 4:9;사 14:3)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내용들을 근거로 어
떤 학자는 '데레크 오체브'를 '우상 숭배'로
번역하며(Gesenius), 또 다른 학자는 '고
통의 길'로 번역하기도 한다.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은 '범죄의
길'로 번
역하고 있고, 시리아역은 '거짓된 길'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역본들의 번역을 종합
할 때 본 기도의 내용을 통하여
나타난 기자의 심정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잘 살펴보
셔서 자신에게 우상 숭배에 참여한 흔적이 있는지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분노케 한
적이 있는지 보시라는 것이다.
영원한 길로 - 혹자는 렘 6:16에서처럼 이를 '옛적
길'(in the ancient way)로 번
역하기도 한다(NEB, RSV 난하주) - 그러나 대부분의 번역은 개역
성경처럼 번역하고
있다(in the way everlasting, KJV, NIV, RSV). 이 '영원한 길'은
창졸간에 멸망하고
마는 악인의 길(1:6)과 대조된다(잠 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