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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없는 믿음은 거짓

작성자이웃사랑|작성시간17.07.06|조회수984 목록 댓글 0

죄에서 떠나지않고 회개없는 믿음은 거짓된 믿음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지만, 죄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은혜"를 놓으셨습니다.
회개하여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회개는 생명얻는 것이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라고 정의 하였으며,
베드로는 회개하여 죄 사함 받고 성령을 받으라고 언급했습니다.
즉, 회개를 통해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하나님, 예수님 또는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리우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신다는 뜻은 예수님이 자신의 영으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역을 다 마치시고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성령 세례를 받으라" (사도행전 1 : 5 )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회개시켜 주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시고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여 성령으로 거듭나도록 이끄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회개를 가리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데살로니가 후서 2 : 13 )
"성령의 새롭게 하심" (디도서 3 : 5 )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회개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는 것이며"(에베소서 2 : 1 )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6 : 15 )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사도행전 3 : 19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로마서 8 : 13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행전 16 : 31 )
즉, 먼저 회개하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회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회개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고, 회개없이는 죄 사함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시 첫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한 것은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되, 회개하지 않으면 정죄를 받아 죄에 이끌려 결국은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
한마디로 이야기 해서 "방향전환" 입니다.
사도들이 말한 회개란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고"(사도행전 8 : 22 )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는 것이고" (사도행전 20 : 21 )
"마음과 행동의 철저한 변화를 일으켜 하나님이 뜻하시는 삶으로 방향 전환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 : 20 )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회개는 낡은 건물을 보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 무너뜨리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입니다.
새옷감을 헌 옷에 깁는 것이 아니라, 새옷감으로 새 옷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즉, 회개한 자는 새로운 사람, 새로운 피조물, 새것으로 다시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 후서 5 : 17 )
이러한 생명얻는 회개는 우리의 힘과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회개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한 초자연적인 현상 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회개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요.
참된 회개는 반드시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회개의 은혜를 부어달라고 부르짖으십시요.
그리하면 사람들 마음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와 시기에 당신에게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탄 마귀가 거짓 회개들을 수없이 만들어 놓고 교활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가르침을 받아왔거나, 또는 그런 말을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청산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믿음을 시인하는 것으로써 구원을 얻는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써 우리는 그저 그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 된다"
위의 말은 참으로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그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에는 사탄 마귀의 무시무시한 속임수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빠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적 증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보겠습니다.
주의를 기울여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즉,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대속제물이 되시어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십자가에서 전부 지불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의 길로 다가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입니다.
여기까지는 분명히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대한 정확한 답변 증거로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요.
"너희가 돌이켜(회개, 회심)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8 : 3 )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누가복음 13 : 3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20)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 : 3)
바로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참된 회개를 하지 아니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십자가의 고난과 그 분이 흘리신 보혈의 피와 공로,
그리고 그 분의 구원 사업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는 헛된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구원하신다면 그것은 그 분의 진리와 모순되는 것입니다.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요한복음 3 : 7 )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마태복음 5 : 8 )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브리서 12 : 14 )
이것은 참된 회개를 하고 성령으로 거듭나 변화되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회개와 믿음은 불가분의 관계로써 둘 중에 하나만 있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회개"와 "믿음"이라는 양 날개를 달고 성령님의 힘입어 결코 쉬지않고 천국문을 향해 날아가야 마침내 천국으로 입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 된다"
"행위는 단지 상급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이들이 즐겨쓰는 문구가 사도 바울이 말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 : 10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 : 13 )
위의 말은 전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모순점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썼던 그 당시는 기독교 박해시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시인하면 곧바로 목베어 순교 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그 믿음은 참된 회개가 수반된 순교의 믿음이었습니다.
오늘날 편안하고 안일하게 가벼운 입술로 믿음을
고백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믿기만 하면 구원 된다"라는 말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인가요 ?
사탄 마귀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떱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 즉 구세주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인님, 즉 주님이 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여 영접할 때 비로서 우리는 구원에 성큼 다가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되신다는 뜻은 "나의 나라"가 포기되고 대신 예수님이 내 삶의 주관자 "나의 왕"이 되시어 나를 전적으로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럴때 비로서 우리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 뜻대로 이루어 지소서라는 기도가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내 자아 내려놓고 온전히 주님께 순종하며 그 분 뜻대로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절대로 이와같이 변화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 : 21 )
즉, 가벼운 입술로 믿음을 고백하면서 "주여 주여"라고 부른다고 다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분 뜻대로 행함을 실천해야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데도, "믿기만 하면 구원 되고, 행위는 단지 상급에 불과하다"라고 함부로 쉽게 말할 수 있을까요 ?
물론, 믿음이 없이 사람의 선한행위나 공로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마음으로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참 그리스도인은 행함있는 믿음을 실천 합니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그 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 분의 뜻에 따라 기꺼이 행함을 실천 합니다.
그리고, 적지않은 상당수 교인들이 교회에서 세례받고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곧 회개한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전에 불신앙인 이었다가 지금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이것이 곧 회개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면서 죄에서 떠나지 않고 (디모데 후서 2 : 19 )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 행위로는 그 분을 부인하는 (디도서 1 : 16 )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참으로 회개한 자들로 인정하고 구원해 주실까요 ?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세례받는 것이 곧 회개와 중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례받은 사람들이 다 구원을 얻는다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례만 받으며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된다는 해괴한 모순에 빠지기 때문 입니다. (고린도 전서 6 : 9,10 )
여러분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에서 돌아서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죄의 용서와 새롭게 되는 은혜를 구하여 마음을 항상 청결케 유지하고, 행악을 버리고 선행을 하여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떠나서 계속 죄의 삶을 지속해 나가면 그 사람의 끝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성경은 회개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해 놓았지만, 회개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회개의 은혜"가 하나님에게 속한 절대적 주권에 해당되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각 사람의 자질과 기질, 삶의 방식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각 사람에게 알맞는 "회개의 은혜"를 선사하시기 때문으로 이해 됩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회개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 "회개의 은혜"를 간구하여 성령을 받아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나 변화되어 마침내 구원에 골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으로 참된 회개를 한 자에게는 다음과 같이 크게 두가지 뚜렷한 현상이 나타 납니다.
하나는 죄를 멀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음이 온전히 예수님께로 확 끌려진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죄라면 진절머리 나고 설령 나쁜생각이 떠오르면 심히 괴롭고 그것이 머리속에서 지워지기를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죄가 단지 미운 정도가 아니라. 혐오스럽고 저주스럽게 느껴집니다.
죄를 짓지않고 사는 것이 그 사람의 큰 소망입니다.
습관적인 죄는 모두 다 끊어 버리고 생을 마감할때까지 목숨을 다해 죄와 싸워 성령의 능력으로
죄와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이기려고 발버둥 칩니다.
날마다 알고 모르게 짓는 죄를 애통해 하며 예수님께 무릎꿇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구합니다.
마음의 문을 예수님께 확 열어놓고 자신의 더러운 본성이 치료되어 고침 받기를 갈급합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모든 것이 다 죄라고 여깁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의 영원한 의사라고 간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예수님께 꼭 달라붙어 있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 없이는 한 순간도 숨을 못쉬고 예수님과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괴로워 못 견딥니다.
전에는 십자가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이제는 십자가 아래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흐르는 그 눈물의 의미를 잘 알 수가 없지만, 예수님만 생각해도 금방 눈물이 핑 돕니다.
이 세상 그 어느것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참된 회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목회자들은 양들에게 "회개의 중요성"과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강한 톤으로 설교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교회는 회개를 버렸고 회개를 버리니 천국도 버렸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자, 복의 하나님이라는 값싼 은혜, 싸구려 복음이 제단을 뒤덮고 있으니, 이를 보고 예수님이 어찌 피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회개, 믿음, 순종, 거듭남, 성화, 거룩함, 행함, 사랑 등" 이러한 설교를 듣고 싶어하며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임하시어
우리 모두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 주소서.
2010.01.16수정됨 |조회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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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소식분당교회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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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란 돌이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돌이키고, 복음을 믿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8.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인생
성경에 ‘돌아오다’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야곱이 형의 눈을 피해 밧단 아람으로 갔다가 나중에 많은 처자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또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신부를 구해 가지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바로 왕의 종노릇을 하다가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이야기,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었던 요셉의 유언에 따라 그가 죽은 뒤에 그의 해골이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등에 ‘돌아오다’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또, 성구 사전을 찾아보면 ‘돌이키다’라는 단어도 ‘돌아오다’는 단어 못지않게 성경에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예수님은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유대인들 앞에서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고 설교했다. 누가 복음 15장에서는 둘째 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하면서 아버지께로 마음을 돌이킨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은 정상적인 삶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도록 지음을 받았는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그냥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정말 원하고 계신다.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범죄 속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킬 수밖에 없으셨지만 아담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 끝까지 기회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 앞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이다.


특히, 로마서 2장에는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우리는 죄 가운데서 태어났고, 죄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얼마나 죄를 적게 짓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돌이켜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계신다. 우리에게 어려움이나 원한이나, 슬픔, 낙심이나 질병 등 고통스러운 일들을 당케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 마음이 아니다. 우리가 고통받는 것을 정말 원치 않으시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기 때문에 ‘행여나 인간들이 그들의 악함을 깨닫고 내게로 돌아올까?’ 하는 마음으로 때로는 고난도 주시고, 아픔도 주시고, 슬픔도 주시는 것이다.


복 받은 사람들은 어떤 어려움이나 환난을 당하기 전에 마음을 돌이켜서 주님 앞으로 돌아서지만, 어떤 사람들은 꼭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아 괴로움을 겪고 실패와 좌절속에 빠진 뒤에야 돌아온다. 더 안타까운 것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돌아올 수 있도록 그렇게 많은 기회를 줘도 여전히 마음을 스스로 강퍅케 해서 돌아오지 아니하고, 자기 고집대로, 자기 주관대로, 자기 주장과 자기 생각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좀더 진실하게, 좀더 잘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려고 하지 말고, 부족하고 연약한 그대로 나오기 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는 분이심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자기 열심과 선행과 잘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다만 자기가 악한 죄인임을 깨닫고 그냥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엘리야의 기도처럼 ‘여호와는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신구약 66권에서 자주 ‘돌아오라’ ‘돌이키라’고 하신 것은, 오늘도 우리가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지, 우리의 형편이 어떻든지, 우리가 좀더 잘해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려고 하지 말고 그냥 돌아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한 것을 다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음으로, 우리 모두가 지금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우리 마음에 단비가 내리고 하늘의 축복이 넘칠 것이다. 그래서 메말랐던 우리 마음이 아름답게 변화될 줄로 확실히 믿는다.
2009.12.12 추천0
주님사랑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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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질문자 님의 글을 삼분의 일만 읽은것에 대한 죄송할 따름이며
너무 길어서 읽다가 지쳐서 도저히 못읽겠습니다 저는 책을 한권이상 독파한적이 없는 조금은 무식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초반 몇줄 읽어보니 질문자님의 취지를 알것같아 몇자 적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서기관 바리세인들 장로들 제사장 들에게 그들은 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은자가 되라고 하셨나요? 그것은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말씀을 받을때 순수한 마음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런자들의 것입니다 소위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로 경청하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자기나름대로 배운것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을 할려고 하는것이 목자요 목사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데 듣지 못하니 이것은 믿음이 없는자 입니다.
뱀이 왜 귀가 없는줄 아십니까? 뱀은 이미 귀가 퇴화 되었습니다 눈역시 보지못합니다 듣지 못하고 보지못하는것은 바로 뱀입니다 성경에서 서기관 바리세인에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나요? 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냥 말씀하신게 아니라 다 이유가 있는것입니다 뱀은 먹이를 삼킬때 한입에 삼킵니다 성도들을 가리지 않고 삼키는 것입니다 자신이 교만에 차 있고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다가 예수를 보지못한자들이 바로 뱀들이요 독사의 새끼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하라 라는것입니다. 선민들을 회개하라 라고 하신것이 아닙니다 선민들은 언제든지 회해할수있지만 그 독사의 새끼들은 듣지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 개 이기 때문에 회개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시대에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하면 죄짐을 덜어 주시기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너무 회개에 치중한 삶은 다시 예수님이전 구약시대로 돌아가기 때문이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우리는 좀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되어서 하나님을 아는데 힘을 쓰며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구속의 사업에 앞장서는 참 그리스도 인이 되어야 겠습니다.
2009.12.12 추천0
프로필 사진item.vm
어린양의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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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질문하나 드리겠읍니다 질문자님께서는 그렇게 살고 계십니까? 그렇게 살지 못하시면 다시는 그런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본인도 그렇게 못 살면서 남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야 말로 바리새인의 누룩이라 생각됩니다만... 본인의 삶부터 잘 살펴 보시길 바랍니다 본인의 삶을 잘 살펴 보았다면 그런 말씀 안하실 텐데 ㅉㅉ...
2009.12.12 추천1
프로필 사진item.vm
하나의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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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할때 회개부터 하겠지요
자신의 죄와 세상의 욕심을 내어놓고 돌이키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 하겠지요
사람이 보는 시각의 돌이 킴과
예수님과 함께하는 돌이킴은 다르다고 봅니다.
우리가 세상 사는 동안에는 세상속에서
먹고 자기 때문 입니다
성결의 마음으로 때묻지 않으려면
세상 밖으로 나아가야 하며
죄에서 떠나지않고 돌이키지 않는 믿음은 거짓되거나 어리다고 봐야겠지요.
2009.12.12 추천0
채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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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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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회개 인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옳은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죄인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을까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거룩함에 조화(調和)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것인가요? 많은 사람은 오순절 날에 허다한 무리가 죄를 깨닫고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하고 질문한 것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의 첫마디는 “회개하라”(행 2:38)는 것이었습니다. 그런지 얼마 후에 그는 말하기를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고 하였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죄를 슬퍼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면 죄를 버리지 않게 될 것이요, 또한 진심으로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우리 생애에 진정한 변화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회개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은 저희의 악행이 저희 자신에게 고통을 미치게 할까 두려워 저희가 범죄한 것을 후회하고 혹은 외모적 변화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상 의미로서는 회개가 아니다. 저들은 죄 그것보다도 그 고통을 슬퍼함이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영구히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슬퍼한 것이 그런 것입니다. 발람은 칼을 빼어들고 자기의 가는 길에 선 천사를 보고 두려워서 자기 생명을 잃을까 염려하여 자기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지도 않았고 목적을 변하지도 않았고 악을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도 자기의 주를 판 후에부르짖기를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4)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정죄에 대한 무서운 생각과 심판에 대한 두려운 공포로 말미암아 그의 범죄한 심령에서 어찌할 수 없이 나온 것입니다. 그에게 임할 결과가 그에게 공포심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흠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팔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배반한 사실에 대하여 충심으로 마음을 찢는 애통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바로가 하나님의 형벌로 재앙을 당할 때에 형벌을 더 받지 않기 위하여 자기 죄를 자복하였으나 그 재앙이 그치자마자 다시 하나님을 거역하였습니다. 이것들은 다 죄의 결과를 두려워한 것 뿐이요 죄 그것을 슬퍼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신의 감화에 순복할 때에는 양심이 각성되어 죄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신성한 율법의 깊은 뜻과 신성성을 얼마만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요 1:9) 심령의 구석구석을 비추어 암흑 가운데 감추인 것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죄에 대한 자각은 마음과 뜻을 붙들게 됩니다. 죄인은 여호와의 의를 깨닫고 자기 자신의 죄악과 불결함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 속을 살피는 자 앞에 나아가기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신성함의 미(美)와 순결의 기쁨을 깨닫고 자기가 정결케 되어 하늘과 교통할 수 있게 되기를 사모하게 됩니다.

다윗이 범죄한 후에 한 기도는 죄에 대하여 참으로 슬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의 회개는 참되고 마음 속 깊은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죄를 변명하려는 노력도 없었고 정하신 형벌을 피하려는 욕망도 그 기도의 동기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범죄가 얼마나 흉악함을 깨달았고 또 자기의 심령이 얼마나 더러워진 것을 깨달아 자기 죄를 미워하였습니다. 그가 기도한 것은 죄사함을 받기 위하여서만 아니라 마음의 순결을 얻기 위하여서였습니다. 그는 성결의 기쁨 -즉 하나님과의 융화와 교통을 회복하는 것-을 갈망하였습니다. 그의 심경에서 나온 말은 이러하였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 2).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시 51:1-14).

이러한 회개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승천하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얻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실패하여 그리스도께서 저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저들은 먼저 회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회개는 저희 죄의 사유를 받게 하는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회개가 죄의 사유보다 먼저 있을 것은 사실이나 이는 구주의 필요성은 마음이 상하고 통회하는 자만이 느끼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죄인이 예수께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그가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인가요? 회개가 죄인과 구주 사이의 한 장애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까?
성경은 죄인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는 그리스도의 초청에 응하려면 먼저 회개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지 아니합니다. 진정한 회개를 하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은덕입니다. 베드로는 다음에 기록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한 그의 말 가운데서 이상의 말의 뜻을 밝히 드러냈습니다. 이스라엘로 회개하게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죄 사유함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이 우리의 양심을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옳은 동기의 근원이 되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 마음 가운데 죄에 대한 증오심을 넣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진리와 순결에 대한 모든 욕망-우리 죄에 대한 모든 감각-은 그리스도의 신이 우리의 마음에서 활동하시는 증거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위하여 죽으신 구주이심을 죄인에게 알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갈바리”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볼 때에 구속의 오묘한 이치가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이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셨나니 죄인이 이 사랑을 주목할 때에 이 사랑이 심정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에 감명을 주고 심령에 통회하는 생각을 일으킵니다.

사람이 혹시 저희가 그리스도께로 이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 전에라도 저희의 죄악적 행실을 부끄러워하여 어떤 악습들을 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진정한 욕망으로 저희 생애를 개선하려고 힘쓰는 일이 있을 때마다 저들을 이끄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능력인 것입니다. 저들이 알지 못하는 한 감화력이 저들의 심령에 작용하여 양심이 각성되고 외부적 생애가 개선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저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쳐다보고 저희 죄 때문에 못 박히신 자를 주목하게 하실 때에 저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 생애의 악함과 저의 심령에 깊이 뿌리 박힌 죄가 저희에게 밝히 드러나게 됩니다. 저희는 그리스도의 의를 얼마만큼 이해하기를 시작하고 부르짖기를 “죄가 무엇이관대 죄를 범한 자를 구속하기에 그처럼 큰 희생이 요구되는가? 우리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이 모든 사랑, 이 모든 고난, 이 모든 굴욕이 요구되었는가?” 할 것입니다.

죄인이 이 사랑을 배척할 수도 있으며 그리스도께로 끌려가기를 거절할 수도 있을 것이나 만일 죄인이 거절만 하지 않으면 그는 예수에게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경륜에 대한 지식은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고난을 당하게 한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동시에 십자가의 밑으로 이끌리게 할 것입니다.천연계의 사물에 작용하시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은 또한 사람의 마음에 속삭이어 사람이 가지지 못한 무엇을 찾고자 하는 말할 수 없는 갈망을 생기게 합니다. 이 세상 사물은 저희의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은 저희로 하여금 평강과 안식을 줄 수 있는 것들 -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결의 기쁨-을 찾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보이는 감화력과 보이지 않는 감화력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아무 만족을 주지 못하는 죄악적 쾌락에서 저들이 당신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무한한 축복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간단없이 일하십니다. 이 세상에 터진 웅덩이에서 마시려고 헛되이 애쓰는 이런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기별은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무엇을 갈망하는 사랑의 십자가 가족님들이여, 이 갈망이야말로 여러분들의 심령에 속삭이는 하나님의 음성인 줄 알기를 바랍니다. 여럴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회개할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며 또한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과 완전한 순결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를 구하십시요. 구세주의 생애 가운데서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한 사랑-이 완전히 실천되었습니다 사욕이 없는 사랑과 자선은 그의 심령의 생명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의 악한 것을 깨닫게 되는 때는 우리가 구주를 쳐다볼 때 즉 구주께로부터 빛이 우리에게 이를 때입니다.

우리는 혹 니고데모와 같이 우리의 생애는 정직하였고 우리의 도덕적 품성은 바르다고 자만하였을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우리는 보통 죄인들과 같이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을 겸비할 필요가 없다고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빛이 우리의 심령을 비출 때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불결한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생애의 모든 행실을 더럽게 한 우리 동기(動機)의 이기적인 것과 하나님께 대하여 가진 적의(敵意)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의가 더러운 옷과 같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더러운 죄에서 깨끗이 씻어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여 그리스도이 형상대로 화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과 그리스도의 순결의 빛은 심령을 꿰뚫어 모든 오점(汚點)을 밝히 드러내고 사람의 품성의 결함과 결점을 폭로합니다. 또 이 빛은 신성치 못한 욕망과 심지의 불신실과 입술의 불순결함을 명백히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함으로 하나님께 불충성한 죄인의 행실이 자신의 눈앞에 드러나게 되고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신의 감찰하시는 감화를 받아 찔림을 받고 통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흠없는 품성을 볼 때에 자기 자신을 몹시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 다니엘이 자기에게 보냄을 받은 하늘 사자를 두른 그 영광을 보았을 때에 그는 그 자신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깨닫고 혼도(昏倒)되었습니다. 그는 그 기이한 광경을 봄으로 받은 바 영향을 말하기를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단 10:8)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감동을 받은 사람은 그의 이기심을 미워하고 그 자애(自愛)의 정신을 가증히 여기고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품성과 일치되는 마음의 순결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율법의 의로는(외부적 행위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빌 3:6)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율법의 신령적 성질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그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외부적 생애에 적용하는 것처럼 율법의 문자대로만 판단한다면 그는 죄에게 멀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성한 율법의 깊은 뜻을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자신을 볼 때에 그는 스스로 겸비하여져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율법의 신령적 성질을 깨달을 때에 죄는 참으로 흉악하게 보이고 그의 자존심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다 동등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평가할 때와 같이 하나님께서 평가하실 때에도 죄의 등급이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아무리 사소하게 보이는 악행이라도 하나님의 안목으로는 작은 죄가 아닙니다. 사람의 판단은 불공평하고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실상 그대로 헤아리십니다. 술부대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그 죄가 그를 천국에서 제외(除外)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동시에 교만과 이기심과 탐욕은 오히려 아무 책망도 받지 않고 지나쳐 버려지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죄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특히 미워하시는 바니 대개 이런 죄가 하나님의 품성의 인자와 반대될 뿐 아니라 타락지 않은 우주의 분위기가 되는 사욕없는 사랑과도 반대되는 연고입니다. 이보다 더 큰 죄에 빠지는 자는 오히려 자기의 수치와 부족을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교만은 아무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만은 마음문을 닫고 그리스도를 영접지 아니하고 그가 가지고 오신 무한한 축복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하고 기도한 가련한 세리는 자신을 심히 큰 죄인으로 보았고 다른 사람들도 역시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필요를 느끼고 그의 죄와 수치의 무거운 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였습니다. 그의 마음 문은 열려서 하나님의 신이 그 은혜로우신 역사를 할 수 있게 되고 그를 죄의 권세에게 벗어나게 하실 수 있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바리새교인의 교만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기도는 그의 마음이 성신의 감화를 막았다는 것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완전함과 비교하여 그 자신이 더러운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도움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으매 아무것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대가 자신의 악함을 깨달으면 스스로 개선하기를 지체하지 말길 바랍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아갈만큼 선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노력으로써 선하게 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까?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우리를 돕는 도움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좀 더 힘있게 권고해 주기를 기다리지도 말 것이고 좀 더 좋은 기회나 좀 더 좋은 기분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그저 그대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든지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자비가 크시므로 그의 은혜를 저버린 자라도 구원하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속지 말십시오. 죄가 심히 악하다는 사실은 다만 십자가에 비추어서만 헤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선하셔서 죄인을 버리시지 않으신다고 사람들이 주장할 때에 저들로 하여금 갈바리를 쳐다보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불순종한 인류의 죄를 걸머지시고 죄인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은 사람을 구원할 별다른 방법이 없는 까닭이요, 또한 이 희생이 없이는 인류는 죄의 더럽히는 권세에서 벗어나서 거룩한 자들로 더불어 교제를 회복하기 불가능-인류가 다시 영적 생애를 할 수 있는자가 되기 불가능한-까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과 고난과 사망은 다 죄의 무서운 흉악성을 증거하는 동시에 사람이 그 마음을 그리스도께 바치지 않고는 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더욱 고상한 생애를 살 소망도 없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라고 하는 자들을 들어서 말하기를 “나도 저들만큼 선하다. 저들은 저희 행실에 있어서 나보다 별로 더 극기하고 단정하고 근신하지 못하다. 저들도 나처럼 오락과 방종을 좋아한다.”는 말로써 저희 자신을 변명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저들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가지고 저희의 할 의무를 등한히 한 것에 대한 핑계를 삼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이 아무 사람의 핑계도 될 수 없나니 대개 주께서는 허물이 많은 인간을 우리의 모본으로 주시지 않으셨음입니다.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의 모본으로 주셨으니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악한 소행을 비평하는 자들은 더욱 착한 생애와 더욱 고상한 모본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저들이 그리스도인의 자격에 대하여 그처럼 고상한 개념을 가졌을 것 같으면 그만큼 저희 죄가 더 크지 아니한가요? 이는 저희가 어떤 것이 옳은 줄을 알면서도 그대로 행치 아니한 연고입니다.

지체하는 일을 삼가하십시요. 여러분들의 죄를 버리고 예수로 말미암아 마음의 순결을 얻는 일을 지체하지 말길 바랍니다. 여러 천만 사람이 이 점에 실패를 하여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었습니다. 나는 사람의 생명이 짧고 덧없음에 대하여 여러 말을 않거니와 하나님의 성신의 애소(哀訴)하는 소리에 순종하기를 지체하고 죄의 생애를 살기로 택하는 일은 두려운 위험-우리가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위험-이니 과연 이러한 지체는 사실상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죄는 아무리 작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을 그냥 범하는 때에는 무한한 손실을 받게 될 것을 각오(覺悟)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것은 그것이 우리를 극복하고 우리를 멸망케 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먹지 말라는 과실을 먹는 그러한 작은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바와 같은 그러한 무서운 결과가 생길 리는 없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일이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거룩한 율법을 범한 것이 또 그것이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고 이 세상에 사망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재난의 방축문(防築門)을 연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 시대를 내려오면서 이 땅에서는 비탄의 부르짖음이 그치지 아니하고 창조함을 받은 만물이 인류의 불순종의 결과로 인하여 함께 탄식하고 괴로움을 받고 있습니다. 하늘 자체도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한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갈바리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를 속하기에 요구되는 놀라운 희생의 기념물로 서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심상한 것으로 여기지 말길 바랍니다.

죄를 범하는 행동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멸시하고 저버리는 것마다, 그 영향은 그대들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마음을 완강하게 하고 의지를 약하게 하고 지각을 마비시켜 그대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신의 간절한 탄원에 응할 생각을 적어지게 할 뿐 아니라 능도 없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저희는 아무 때나 원하는 때에 저희의 악한 길에서 돌아설 수 있다는 생각으로 또는 저희가 지금 하나님의 자비의 초청을 경솔히 여길지라도 일후에 감화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저희의 불안한 양심을 진정시키고 있습니다. 저들은 생각하기를 은혜의 성신을 거스린 이후에라도 또는 저희의 감화를 사단의 편으로 끼친 이후에라도 어떤 최후적 순간에 저희가 걸어오던 방향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은 아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일생동안의 경험과 교육이 이미 그 품성을 완전히 형성하였은즉 그 때에 가서 예수의 형상을 받고자 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비록 품성 가운데 한 가지의 못된 성벽이나 한 가지 악한 욕망이라도 고집스럽게 품고 버리지 않으면 결국에는 복음의 모든 능력을 소멸시켜 버릴 것입니다. 죄악적 방종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정신을 강하게 합니다. 대담하게 불신의 정신을 나타내는 자,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전연 무관심하는 자는 그 자신이 심은 바의 수확을 거둘 뿐입니다. 온 성경을 통하여 죄인은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니”(잠 5:22)라는 솔로몬의 말보다 악을 심상하게 보는 데 대한 더 두려운 경고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시려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의사를 강제하시지는 않으시나니 만일 우리의 의사가 죄를 범하기를 고집함으로써 온전히 악에 쏠리게 되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아니하거나 혹은 우리가 그의 은혜를 받을 의사가 없을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더할 수 있으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고히 배척하므로 자멸하는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히 3:7, 8).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여호와는 기쁨과 슬픔의 착잡(錯雜)한 감정으로 찬 사람의 마음, 더러운 것과 거짓의 거처가 되는 방황하고 제멋대로 나가는 사람의 마음 속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동기와 의사와 목적을 아십니다. 여러분들은 더럽힌 그대로의 심정을 가지고 그에게로 나아가십시요. 시편 기자와 같이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자 앞에 그 마음문을 열어놓고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시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 24)하고 부르짖으시길 바랍니다.

많은 사람은 마음은 깨끗이 씻지 아니하고 지적신앙(知的信仰) 곧 형식적 경건만을 받아들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영혼을 진실되게 취급하십시오. 그대들의 육신적 생명이 위기에 처하여 있는 것처럼 열심히 또는 꾸준히 행하십시오. 이 일은 하나님과 그대들 개인 사이에 영원히 결정하여야 할 문제입니다. 추상적 소망은 결국 그대를 멸망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구하십시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하여 거룩함의 큰 원칙을 그대들에게 밝히 보여 주나니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이 말씀은 죄를 깨닫게 하고 구원의 길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줍니다. 이 말씀을 그대들에게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유의(留意)하시길 바랍니다.

그대들의 죄의 흉악한 것을 볼 때에 또는 그대들이 자신의 진상(眞相)을 볼 때에 실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와 화목시킬 것이 아닙니다. 그 놀라운 사랑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고후 5:19)하셨습니다. 그는 당신의 부드러운 사랑으로써 죄에 빠진 당신의 자녀의 마음을 사려고 하십니다. 세상의 부모라도 저희의 자녀들의 허물과 잘못에 대하여 참기를 하나님께서 당신이 구원하려고 하시는 자들에 대하여 참으시는 것처럼 그렇게 오래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도 죄인에게 그보다 더 인정 있게 애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입술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보다 더 인정 있는 간청이 새어 나온 적이 없습니다. 그의 모든 허락과 경고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표시입니다.
사단이 여러분에게 와서 너는 큰 죄인이라 하거든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구주를 쳐다보고 그의 공로에 대하여 말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것은 곧 그의 빛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대의 죄를 자복하십시오. 그러나 원수에게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딤전 1:15)는 것과 또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그의 비할 데 없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라고 하십시오. 예수께서 시몬에게 두 빚진 자에 대하여 질문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그 주인에게 적은 금액의 빚을 지고 다른 사람은 매우 많은 금액의 빚을 졌는데 주인이 둘 다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시몬에게 묻기를 어느 사람이 그 주인을 더 사랑할 것이냐 하셨습니다. 시몬이 대답하기를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눅 7:43)하였습니다. 과연 우리는 큰 죄인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사유함을 받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의 희생의 공로는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께 드리기에 넉넉하였습니다. 많이 사유함을 받은 자는 그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것이며 그의 크신 사랑과 무한한 희생에 대하여 그의 보좌 곁에 가장 가까이 서서 그를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악한 것을 가장 절실히 깨닫게 되는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충분히 이해하는 그 때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내리운 줄의 길이를 볼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그 무한한 희생을 얼마만큼 깨달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부드러움과 통회로 녹아지는 것입니다.

통회하는 마음과 회개의 마음을 주께서 받아 주시고 은혜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실것입니다.거룩한 성령의 크신 감동이 사랑하는 사랑의 십자가 가족님들과

믿음에 거짓이 있을 수가 있나요?(사실이든 아니든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였냐의 문제는 있을 수있겠지만 인정한다는데, 그리구 사실로 받아들이는게 믿음인데 회계랑 무슨관련이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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